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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12 14:34:533422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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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시말


당면 세계적으로 7천여만의 조선민족이 살고 있는데 그중 5백만은 조선반도 이외의 70여개 나라에 살고 있다. 이 가운데 조선민족인구가 만 명을 초과하는 나라가 9개, 백만 명을 초과하는 나라가 2개 있으며 10만명을 초과하는 나라도 2개 있다. 하지만 오직 중국의 조선족만이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자치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1947년 5월 1일,중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성급 자치주-내몽골자치구가 탄생을 선포, 이어 사천성 갈제장족자치주가 1950년 11월에, 청해성 옥수장족자치주가 1951년 12월에 창립을 선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준비사업도 진행되고있었다.


기재에 따르면 일찍 1935년 2월, 당시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 성원중의 한사람인 오평(후에 주덕해로 개명)이《조선족은 자기 민족자치구를 성립할 권리가 있다》는 명확한 주장을 우선 제기, 1936년 2월, 중공동만특위서기 위증민은 중공주재국제대표단으로부터 동북조선족문제에 관한 일련의 지시를 받고 동북으로 돌아왔는데 이 지시에는《중한민족이 련합하여 일제괴뢰통치를 뒤엎고 간도한인자치구 건립에 관한 주장》이 포함되였다. 1936년 6, 7월사이, 위증민은 남만당 《2차대회》와《하리회의》에 참가, 조선족문제에 관한 공산주재 공산국제대표단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그번 남만당의《2차대회》는 소수민족문제에 관한 전문결의를 채택하였고 《하리회의》는 또 조선족사업을《회복》할 전문결의를 채택하였다. 결의는《혁명승리후 만주 3천만 민족의 인민정부를 건립하고 재만한인(在滿韓人)의 자유해방을 위하여 한인자치구를 건설함으로써 재만한인의 복리를 증진시킨다.》고 규정했다.


조선민족구역자치에 관한 정책과 구상은 광복후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점차적으로 락착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창건이후에는 현실로 되었다.

1946년, 중공길림성위는 연변조선족문제에 관하여 《1928년 이후, 중공동북당조직에서는 동북 특히 연변조선족주민을 동북경내 소수민족부류 속에 넣었고》,《1945년 9월말, 중공중앙 동북국에서는 이미 동북의 조선민족문제에 주의 돌려 화북의 항전에 참가하였던 조선의용군을 제외하고 동북의 조선주민은 일반적으로 중국경내의 소수민족으로 동등하게 본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역사적원인으로 말미암아 조선족대다수가 중국국적을 가지지 못했다.


이런 정황에서 중국공산당은《그들이 동시에 두 가지 국적을 가지는 것을 승인하는 바 현재 중국공민으로서 중국공민의 일체 권리를 향수할 수 있고 중국의 인민해방전쟁에 참가할수 있으며 또한 일단 조선이 외적의 침범을 당했을 때면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조선공민의 신분으로 조선의 반침략전쟁에 참가할 수 있다.》고 했다.


토지개혁, 정권건설과 해방전쟁에서 중국공산당은 조선족의 중국공민의 자격을 완전히 승인하고 이 과정에 거의 모든 연변조선족들이 중국국적에 들게 하였다. 1948년 8월, 중국공산당은 재차《연변조선족인민은 연변을 개발, 건설하는 주력이며 그들에게는 우량한 혁명전통이 있다.》,《우리 당과 정부는 연변조선족인민들의 중국경내 소수민족의 지위를 비준하는데 이 정책은 정확한 것이다. 반드시 조선민족인민들과 끝까지 단결하기 위해 당의 방침을 견결히 관철해야 한다.》고 선포, 중국공산당은 《적극적이고 대담하게 민족간부를 제발시켜 당, 정, 군, 민을 물론하고 계획이 있고 보조가 있게 적극적으로 민족간부를 양성, 제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한 동시에 《연변에서 종합대학을 세우는 것은 필요하다.》고 제기하였다.


1948년 12월 중공연변지위서기 류준수는 상급 해당 지시에 따라 《연변경내에 거주하는 조선족인민을 확정하고 중국경내의 조선족은 중화민주공화국성원의 일부분임을 승인한다. 민주정부는 민주평등의 원칙에 의거하여 조선족인민에게 지권(地權), 인권(人權),재권(財權)을 주며 아울러 인민들의 생명재산안전을 보호한다. 무릇 과거 연변지구에 거주 및 토지개혁 중 이미 당지 민주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호적에 든 사람은 중국공민 (도시를 포함)으로, 호적에 정식으로 들지 않고 조선으로부터 새로 와서 거주한 사람은 조선교민으로 한다.》고 명확히 선포하였다.


당에서는 관내에서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던 조선족간부 및 흑룡강성에 주재했던 조선의용군 제3지대 일부분의 골간들을 연변에 오게 하고 연변에서 군정대학 등 여러 가지 간부양성학교를 꾸리게 하여 많은 조선족간부를 양성, 조선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데 조직적인 기초를 닦아놓았으며 구역자치의 지리적범위도 확정하였다. 1945년 11월, 길림성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를 설립,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5개 현을 관할하게 하고《간도시》를 연길시로 고치고 연길현에 귀속시켰다. 1948년 3월, 길림성인민정부에서는 길동구역을 연변구역으로 고치고 또 원래 길동구역에 속했던 돈화, 교하 2개 현을 성직속현(1958년, 돈화현은 연변에 귀속되였음)으로 변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창립되던 1952년에 연변조선족인구는 연변의 5개 현 총인구의 62%,조선족간부는 6090명으로서 연변간부총수의 74%를 차지하였다.


1952년 중공연변지위와 연변전원공서는 연변지위의 명의로《길림성연변조선족집거구역 자치설치계획》을 내왔고 그해 7월에《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구 각계 인민대표회의 조직조례(초안)》와《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 조직조례(초)》를 작성하였다. 7월 30일,길림성인민정부에서는 성장 속우문, 부성장 서원천의 명의로 동북인민정부에 위의 3개 문건을 회부하였는데 8월 24일, 동북인민정부는 3개 문건과 길림성인민정부의 해당 의견을 비준하였다.


1952년 8월 21일,연변 각족각계대표회의 준비위원회가 성립을 선포, 8월 29일, 연변의 각족 각계 제1기인민대표회의가 연길시에서 성대히 거행, 인민대표대회의 직권을 대리행사하였다. 중앙인민정부정무원 민족사무위원회,동북인민정부,중공길림성위와 성인민정부의 지도일군들이 친히 와서 축하하였다. 회의대표는 모두300명, 그 중 조선족대표 209명으로서 대표총수의 69.7%,한족대표는 79명으로서 대표총수의 26.3% 차지하였고 회족, 만족, 몽골족도 상응한 수의 대표들이 있었다.


회의에서는 연변전원공서전원 주덕해가 연변조선족자치구창립에 관한 동북인민정부의 비준서를 선독, 전체 대표는《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주 각족각계 인민대표회의 조직조례》와《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 조직조례》를 일제히 통과시켰다. 회의에서는 중공연변지위 서기 주덕해가《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의 시정건의에 관하여》라고 제목한 보고를 하였다. 회의는 주덕해를 자치구인민정부 주석으로, 동옥곤(한족), 최채를 부주석으로, 전인영(한족)등 32명을 정부위원으로 선거하였고 정부내에 비서, 문교, 위생 등 10처와 공안, 세무 2개국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인민경제계획위원회, 인민검찰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정부의 14개 처(處), 국, 위원회중 11개, 처, 국, 위원회의 주요책임자들은 모두 조선족간부들로 임명함으로써《자치기관간부민족화》의 요구를 체현하였다. 회의는 또 민족단결의 강화를 위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창립대회가 연길시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는데 자치구인민정부 주석인 주덕해가 연변조선족자치구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때로부터 매년 9월 3일은 연변각족 인민의 성대한 명절(1985년 이후부터 국가의 법적휴가일로 되었음.)로 되었다. 1954년 4월, 중공 길림성위와 성인민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의 규정에 근거,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고쳤다. 그해 12월에 열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인민대표대회 제2차회의에서 자치구를 자치주로 선포하고 주덕해를 주장으로 선거, 1956년 12월에 열린 주2기인대 1차회의에서《연변조선족자치주 각급 인민대표대회와 각급 인민위원회 조직조례》를 채택,이것으로 자치주의 정원체제를 완벽화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창립된지 이미 45년이나 된다. 그동안 주은래, 주덕, 동필무, 하룡, 호요방, 만리, 팽진, 엽검영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선후하여 연변을 시찰, 1983년 8월, 중국의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은 백두산에 올라《장백산에 오르지 않으면 평생 유감이다.》라고 감개무량하게 말하고 필을 들어《연변조선족자치주를 더욱 빨리 더욱 좋게 건설하여야 한다.》는 제자를 쓰셨다. 1991년 1월, 중공중앙 총서기 강택민도 연변을 시찰하고《연변조선족자치주를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건설하여야 한다.》는 제자를 썼고 1995년 7월, 재차 연변에 와서 훈춘개발구를 시찰하고《훈춘을 개발하고 두만강을 개발하여 동북아 여러 나라와의 우호합작관계를 발전시키자!》는 제자를 남겼다. 당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미 그 종합실력이 전국 30개자치주가운데 제일 강한 자치주의 하나로 되어 세인이 중국민족정책을 료해하는 하나의 창구로 되었다.


출전 : 연변팔가자사랑(http://cafe.naver.com/bajiazilove/28)

주덕해(朱德海) 간개

오기섭(吳基涉). 일명 오영일(吳永一)·김도훈(金道訓)·오동원(吳東元).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길림성 부성장, 연변조선족자치구(延邊朝鮮族自治區) 주석(主席) 등을 역임하였다.

1911년 3월 5일 러시아 연해주 동쌍성자(東雙城子) 도별하촌(道別河村)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1920년 3월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지신향(智新鄕) 승지촌(勝地村)으로 이주하였다. 그 해 공립 제14소학교에 입학해 1923년 겨울 졸업했다. 1927년 봄 소학교 교장이자 조선공산당 당원인 김근(金根)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이의 전파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 3월 김근의 가족과 함께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 화검구(花瞼構)로 이주했으며, 40여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4개의 집단농장을 건립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반신민부(反新民府) 시위를 주도하였다. 8월 김광희의 소개로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해 화검구 서기가 되었다. 10월 러시아혁명 기념일에 즈음한 반일봉기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영안현 남호두(南湖頭)로 이동했다.


1931년 5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32넌 1월 동경성(東京城) 우가둔(子家屯) 공청단 특별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3년 3월 자목합자 당지부의 서기가 되어 친일기관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반대투쟁을 조직했으며, 8월 중국공산당 서대림자(西大林子)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5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1사에 입대했으나, 병에 걸려 발리현(勃利縣), 의란현(依蘭縣) 등지에서 요양하였다.


1937년 4월 당의 지시에 따라 모스코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1938년 여름에 졸업하였다. 이후 1939년 9월 연안(延安)으로 가 연안 경비구(팔로군) 제359여단 제8연대 특무중대 지도원, 제8연대 공급처 지도원으로 활동했으며,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 동간대(東干隊)와 중앙해외연구반에서 학습하였다.


1943년 연안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 건립에 참여해 교무위원과 총무처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에는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만주로 진출해 심양(瀋陽)에 도착,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건립하고 정치위원이 되었다.


1947년 동북행정위원회 건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4월 민족사무처장이 되어 『민주일보(民主日報)』를 창간하고, 문공대(文工隊)를 조직하는 등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1949년 3월 중공 연변지구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고 6월 북경에 가서 조선족을 대표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협상하는 전국정치협상회 준비회의에 참석했으며, 9월 전국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50년 4월 5일 길림성 제1차 인민대표회의에 출석, 성인민정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9월에는 연변지구의 방공사업 강화를 위해 조직된 연변방공위원회의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9월 3일에 연변조선족 자치주정부주석이 되었으며, 그 후 중공 연변자치구위원회 제1서기 겸 주장에 선임되었고, 연변대학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길림성 부성장에 임명되었으며, 1956년 12월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기 민족위원회 부주임으로 당선되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에는 박해를 받아 1969년 10월 호북성(胡北省) 53농장으로 전출되었으며, 1972년 7월 3일 호북성에서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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