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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0-29 16:07:164737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운영자


김학철옹과 자유선택


중국말에 《개관론정(蓋棺論定)》이라는 말이 있다. 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죽은 다음에 가서야 옳바른 평가를 내릴수 있다는 뜻이다.




《김학철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경력과 그 와중에서 한번도 흐트러짐이 없이 한평생 정의를 위해 싸우셨고 죽는 그 순간까지 80여성상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사신 분은 세계문화사적인 견지에서 보아도 하나의 기적입니다.







이는 일본의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교수가 금년 10월에 있었던 김학철선생 1주기추모 및 김학철선생문학선집 출간기념모임에서 김학철선생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방관자청(旁觀者淸)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방인인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의 평가는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이다.




김학철선생은 분명히 불세출의 투사이며 인격자이시다. 지난 한세기 남짓한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주체성 있게 살아오신 지성인의 귀감이시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김학철 같은 문학과 인격의 거목의 모시고있었다는 것을 뿌듯하게 느껴야 할것이다.







요즘 나는 대학의 강단에서 실존주의문학의 철학적인 기초인 파르트르의 존재과(存在觀)을 강의할 때마다 김학철선생의 생애를 실례로 들어 학생들에게 설명을 하군 한다.




주지하다싶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철학의 총론점은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것이다. 그렇다. 인간이란 태여날 때는 하나의 백지장 같은 존재이다. 결코 천생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여나는 것은 아니다.







김학철선생도 례외일수 없었다. 소년시절의 김학철선생은 탐스럽게 열린 남의 집 호박을 활로 쏘아서 벌집을 만들어놓는 개구쟁이였고, 《넉가래는 못 받아오고 온통 오리만 받아와서》어머니에게 늘 지청구를 듣는 평범한 소년으로서 그 무슨 신동으로 태여나신 분도 아니다. 그리고 투사의 본질을 지니고 태여나셔서 어려서부터 반일의식을 갖고있은 것은 더욱 아니시였다.







5학년부터는 국사라는 것을 배우는데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니 신무천황(神武天皇)이니 하는 따위를 내리먹였으나 별 거부감 없이 그대로 배웠다. 오히려 재미가 있을 지경이였다.




김학철선생은 자서전 《최후의분대장》에서 자신의 철없던 소년시절을 이렇게 술화하셨다.







우리 인간들은 우연하게 이 세상에 주어졌을뿐이다. 먼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인간의 주관성이 존재하고 그다음에야 인간의 행동이 있게 된다. 한 인간의 본질은 그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자아의 개인의지에 따른 부단한 자유선택에 의해서만 악한 사람이냐 착한 사람이냐, 군자냐 소인이냐, 투사냐 반역자이냐, 용감한 자이냐 비겁한 자아냐를 판단할수 있으며 비로소 자기의 본질을 만들어가지고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며 자기에 대해 정의를 내릴수 있다. 실존주의에서 일컫는 존재란 자아의 존재를 뜻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자아가 인간의 본질을 결정한다는것이다.







비유를 할 것 같으면 인간은 한장의 백지장에다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가는것이다. 어떤 내용의 그림을 그리고 어떤 색채, 선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가 선택할 나름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의 선택에 의하여 다 빈치의 《모나리자》같은 명화가 될수도 있고 화장실의 락서 같은 추잡한 그림으로 될수도 있다.







김학철선생이 자신의 본질을 창조하기 위한 첫번쨰의 자신의 개인의지에 따른 자유선택은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올라와서 있었다.







《지금은 남의 땅/ 뺴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뺴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리상화의 유명한 시와 군자금을 모으러 서울로 들어왔다가 체포당해 징역을 살게 된 서원준사건은 청년 김학철이 직업혁명가의 험난한 길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계기로 되였다고 한다.







《가출을 결행하는 날 <학교 유도부에서 합숙훈련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트렁크에다 유도복과 다른 옷가지따위를 버젓이 챙긴 뒤에 짐짓 례사롭게 휘파람을 불면서 집을 나서는데 머리가 착잡해서 <내가 미친 짓을 하잖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다.







이는 김학철선생이 대한제국림시정부를 찾아서 혈혈단신 상해로 떠나던 그날의 내심의 모순상태를 술회한 부분이다. 이처럼 한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선택하는 자유선택의 과정은 심리적인 모순과 갈등을 동반하게 되는것이다. 만일 그날 김학철선생의 생각이 바뀌여 서울에 눌러앉으셨다면 김학철선생의 인생은 아주 다른 양상으로 되였을지도 모른다.







무사하게 상해에 도착하여 직업혁명가의 길에 들어선 김학철선생은 점차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리념선택을 하셨고, 국민당군대로부터 나중에는 공산당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여 총을 들고 일제와 피어린 투쟁을 진행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김학철선생의 본질이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였다. 인간은 늘 변화, 발전하고있으며 태여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시시각각 크고 작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김학철선생에게 있어서 직업혁명가의 길에 들어선후에 자신의 본질에 대한 선택은 더욱 준엄했다.




1943년, 태항산지역에 있는 산서성 호가장전투에서 김학철성생은 왼쪽 대퇴골이 파편에 깍여나가는 중상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후 일본군에 포로되였다. 이는 아마도 김학철선생의 일생에서 가장 준엄한 도전이고 시련이였다. 그것은 죽음이냐 삶이냐 하는 선택이였던것이다.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나는 들것에 들려서 일본군과 함께 황망히 퇴각을 하는중이였다. 우리편이 쏘는 탄알들이 전후죄우에 누리떼 튀듯하는 가운데 나는 난생처음으로 일말의 공포감도 없이 태연할 수가 있었다.







─제발 한방 맞아만 다오.




─우리 탄알에 맞아죽으면 얼마나 고마우랴. 죽는것이 하나도 두려울게 없다는 경지에 전 생애를 통해 내가 딱 한번 이르렀던 순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본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곤난이나 시련은 별거 아니라고 할수 있다. 김학철선생의 비범한 용감성과 초인간적인 의지는 바로 이러한 피와 불과 죽음의 세례를 받은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석가장의 나가사키형무소에서의 3년이상의 감옥살이도 김학철선생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차례진것이다. 김학철선생은 징역을 살고 다리 하나 일본땅에 묻을지언정 일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으셨다.







3.1절을 맞으면서 한국의 한 단체에서는 7백명이 넘는 친일파들의 명단을 발표하였는데, 그중에는 리광수, 최남선을 필두로 하여 우리가 익숙히 알고있는 많은 거물급의 문화인물들도 섞여있었다. 암흑기에 친일파로 전략한 많은 거물급의 문화인물들은 처음에는 반일적인 의식과 감정을 지니고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선각자들이나 투사들이였다. 그러나 단 한번의 얼빠진 자유선택으로 하여 리광수류들은 영원히 력사의 치욕주에 이름이 아로새겨지고말았지 않았던가. 리광수류들을 두엄무지를 헤집는 닭무리들에 비긴다면 김학철선생은 창공을 날아예는 한마리의 수리개에 비길수 있으리라!!

해방이후 김학철선생에게 있어서 자신의 본질에 대한 자유선택은 더욱 고통스럽고 어려운것이였다. 그것은 자신이 일생을 바쳐서 충성한 리념과 제도가 흔들리고 그리고 수령의 결함으로 이기된것이였기때문이였다. 10년동란시기에 심지어는 곽말약, 파금 같은 중국문단의 거물들도 비굴하게 허리를 굽석거리면서 꼬리를 흔들어댔지만 김학철선생은 10년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자신의 고귀한 머리를 한번도 숙이지 않으셨다. 중국에서 다리뼈, 허리뼈, 목뼈가 가장 단단한 분은 아마도 우리의 김학철선생이실것이다. 척각으로 이 땅에 계셨었지만 가장 올곧게 서계신 분은 아마도 김학철선생이실것이다.







김학철선생께서 10년 옥고를 치르고 사회에 돌아오셨을 때는 65세의 고령이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또 한번의 중대한 자유선택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서 자신이 하고싶은 말씀을 다하시고 저 세상으로 가시겠다는 비장한 결의였다. 선생님은 자신의 이 선택을 비범한 노력으로 충실하게 실천하셨다. 선생님의 거의 대부분 글들은 바로 출옥후의 만년에 불철주야로 창작한 작품들이다.







2001년 여름에 김학철선생은 또 한번의 비장한 자유선택을 하셨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다가 의료사고로 받은 내상이 도지자 김학철선생은 자신의 유언에서처럼 《사회와 가족들에게 부담을 더 주지 않기 위해》결연히 죽음을 선택하시였다. 삶에 연연한 분이라면 병원에 입원해서 고급약을 쓰고 치료를 받으면 아마도 2, 3년은 수명을 얼마든지 연장하실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김학철선생은 단호히 죽음을 선택하셨던것이다. 추도회도 하지 못하게 하셨고 몇몇 생전의 친우들과 문단의 후배들의 전송을 받으시면서 조용히 두만강물을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이 모든 절차까지도 선생께서 일일이 선택하여 결정하신것이다. 이러한 랭철한 리성으로 죽음과 그 방식을 선택한 문인은 이 세상에는 아마도 유일무이할것이다




김학철선생은 여러 차례의 중대한 인생선택에서 단 한번도 부끄럽고 추례한 선택을 한적이 없이 떳떳하고 깨끗한 선택을 하셨다. 단 한번도 불의를 선택하여 불의의 편에 선적이 없이 언제나 정의를 선택하셨고 정의를 위하여 목숨도 불사하시면서 용감히 싸우시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선생은 편안함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기구한 80여성상을 살아오셨다. 그리하여 윤동주님의 서시에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80여성상을 사시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내시였다. 이는 실로 우리 범인들은 엄두조차 낼수 없는 성(聖)의 경지 아닐수 없다.







학술사나 예술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살아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가운데 후세에까지 두고두고 남을만한 독창적인 업적이나 고매한 인격을 남긴 사람들은 지극히 드물다. 그것은 살았을 때 유명했던 사람들은 당대의 사회적통념이나 류행사조 그리고 당대의 가치관에 영합하고 권세에 아부하여 명예를 누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죽고나면 잊혀지기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일수록 죽어서도 이름을 휘날리려고 죽기전에 자기를 명예롭게 만들어놓으려고 애쓴다. 시비를 세운다 문집을 만든다 하면서 부산을 떨지만 이는 죄다 부질없는 짓거리이다. 이렇게 부산을 떤다 해서 아름다운 인간의 본질이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촐랑거리는 인간들과는 달리 김학철선생은 분명히 살아 생전에는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세상을 뜬후 더욱 그 영명(英名)이 빛을 뿌리게 될 분이다. 김학철선생은 비록 생전에 비석이 세워지지 않았고 문집이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품세계와 그의 고매한 인격은 진작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기념비로 우뚝 솟아있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들의 마음속에 불멸의 기치로 남아있을것이다. 그것은 김학철선생이 80여성상 자아의 가장 주체적인 자유선택에 의해 자신의 수준높은 문학의 기념탑과 인격의 산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이 풍진세상을 살아가면서 만일 김학철옹처럼 개인의 주체적인 의지에 좇아 《자유선택》을 하지 못하고 타인의 의지만 따른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쇠사슬에 결박 당한 노예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만 보면서 바람에 따라 돛을 달고, 동풍이 불면 동풍파요, 서풍이 불면 서풍파요, 남풍이 불면 남풍파요, 북풍이 불면 북풍파로 변신하는 눈치군, 바람잡이들이 득실거리는 이 황당한 세상에서 살아가노라니 김학철선생이 더욱 그리워진다.




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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