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122 
· 어제 :  360 
· 최대 :  2,389 
· 전체 :  1,491,657 
 
  2004-10-12 16:07:118086 
장의열전(張儀列傳) 10
양승국
 s격심술로 장의를 진나라에 보내는 소진.jpg  (294.6K)   download : 258
 張儀欺楚.jpg  (195.5K)   download : 92
일반

열전10. 장의(張儀)

장의(葬儀)는 위(魏)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鬼谷) 선생에게서 유세술(游說術)을 배웠다. 소진은 스스로 자기의 재주가 장의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장의가 학업을 마치고 제후들을 찾아 유세를 행하다가 한 번은 초나라의 재상1)과 술을 마시다가 재상이 갖고 있던 벽(璧)을 도둑맞은 일이 발생했다. 재상의 문객 한 사람이 장의에게 혐의를 두고 말했다.

「장의는 가난하고 품행이 바르지 못합니다. 장의가 상국의 벽을 훔쳤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문하들이 같이 장의를 붙잡아 대나무 몽둥이로 수백 대를 때렸다. 그러나 장의가 한사코 부인했기 때문에 결국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장의의 아내가 보고 말했다.

「아! 당신이 책을 읽고 유세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런 곤욕을 당했겠습니까?」

장의가 그의 처를 보고 말했다.

「내 혀가 아직 붙어 있는지 한 번 보시구려!」

장의의 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직 혀는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됐소.」

그때 소진은 이미 조왕에게 유세를 성공해서 합종을 성공시키기는 했으나 만일 진나라가 제후국들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합종이 깨지고 제후들이 배신하게 되는 상황을 걱정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진나라에 보내 힘을 쓸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소진은 아무도 몰래 사람을 장의에게 보내 말하게 했다.

「당신은 옛날 소진과 사이가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소진이 이미 조나라에 들어가 조왕에 의해 중용되어 재상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찌하여 조나라에 가서 그를 통하여 원하는 바를 얻지 않으십니까?」

그의 말대로 장의는 조나라로 가서 소진에게 명첩(名帖)2)을 올리고 접견을 청했다. 소진은 곧 문을 지키는 하인들에게 장의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동시에 며칠 동안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도록 했다. 이윽고 얼마간의 날짜를 보낸 뒤 소진은 장의를 불러 접견했으나 그를 당하에 앉혀 천비와 노복이 먹는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는 장의를 향해 그 잘못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책망했다.

「자네같이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도 어쩌다가 스스로를 이처럼 곤궁에 처하여 수모를 겪게 되었는가? 내가 어찌 자네를 천거하여 부귀하게 만들 수 없겠는가마는, 내가 생각하기에 자네를 거두어 쓸 수 없을 것 같네!」

그런 다음에 소진은 장의에게 작별을 고하여 떠나게 했다. 장의가 소진을 찾은 목적은 옛친구를 찾아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오히려 수모만 받게 되어 마음속으로 치밀어오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섬길만한 제후들은 없었고 오직 진나라만이 조나라를 괴롭힐 수 있다고 여겨 그 즉시 진나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전에 소진은 이미 그의 사인(舍人)에게 당부의 말을 해두고 있었다.

「장의는 천하의 보기 드문 현사(賢士)다. 나는 결코 그를 능가할 수 없다. 오늘 내가 요행히 먼저 등용되었지만, 진나라에 중용되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장의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 아직까지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나는 그가 작은 이익을 탐하여 큰일을 이룰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그를 불러 욕을 보임으로써 그를 격앙케 했다. 그대는 나를 위해 장의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보살펴주기 바란다.」

소진이 즉시 조왕에게 고하여 그에게 황금과 비단을 실은 거마를 내주며 장의의 뒤를 뒤따라가서 함께 숙사에 들어 서서히 접근하도록 시켰다. 사인은 거마와 황금을 내어 장의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게 하여 그 비용으로 쓰게 했으나 그 사실은 고하지 않았다. 장의는 이윽고 사인의 도움으로 진혜왕을 접견할 수 있었다. 진혜왕은 장의를 객경(客卿)으로 삼아 제후들을 정벌하는 방법을 의론했다.

소진이 보낸 사인이 조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작별인사를 하자 장의가 말했다.

「그대의 덕분으로 내가 등용되어 이제 바야흐로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돌아간다고 하십니까?」

사인이 대답했다.

「선생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원래 제가 아니라 소진 상국이십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면 그 결과 합종이 파기되는 상황을 걱정하신 소상국께서는 그런 사태를 막을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진나라의 정권을 잡아 그것을 방지해 주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할 사람은 선생 외는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상국께서는 선생을 격노케 하고 다른 한편 저를 몰래 보내 선생이 필요한 경비를 대주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소진 상국의 계책에 따랐을 뿐입니다. 오늘 선생께서 이미 진나라에 등용되었으니 저는 돌아가 소상국께 보고드려야 합니다.」

장의가 듣고 한탄했다.

「오호라! 내가 소진의 술수에 놀아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 나는 결코 소진의 먼 앞날을 내다보는 밝은 지혜에는 미치지 못하겠구나! 오늘 내가 그의 도움으로 진나라에 등용되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조나라를 공격하겠는가? 그대는 나를 위해 소상국께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소상국이 합종을 주관하고 있는데 어찌 내가 감히 무슨 말인들 할 수 있겠으며, 또한 소상국이 살아 있는데 내가 무슨 일을 능히 할 수 있겠소?’라고 전해 주시오.」

곧이어 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초나라 상국에게 격문을 보내 자기의 뜻을 전했다.

「옛날 내가 그대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벽을 훔치지도 않았음에도 그대는 나에게 태형을 가했소. 그대는 나라를 잘 간수하기 바라오. 나는 그대의 성을 훔치겠소.」

그때 저(苴)3)와 촉(蜀)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서로 싸우다가 각기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도움을 청했다. 진혜왕은 군사를 일으켜 촉을 정벌하고 싶어 했으나 촉으로 가는 길이 너무 좁고 험하여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한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자 혜왕은 한나라를 공격한 후에 촉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다시 한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촉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그 틈을 타서 한나라의 침공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해서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느 방면을 먼저 공격해야 하는지를 놓고 사마착(司馬錯)과 장의가 진혜왕 앞에서 논쟁했다. 사마착이 촉을 먼저 정벌해야한다고 주장하자 장의가 한나라를 먼저 정벌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진혜왕이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자 장의가 말했다.

「먼저 위와 초 두 나라와 친선관계를 수립한 후에 삼천(三川)으로 군사를 보내 십곡(什谷)4)을 막고 이어서 둔류(屯留)5)에서 양장판(羊腸坂)을 길목을 끊습니다. 이어서 위나라로 하여금 남양을 막게 하고 초나라에게는 남정(南鄭)으로 진격 하게 합니다. 그 사이에 진나라는 신성(新城)과 의양(宜陽)7)으로 진격하여 주나라의 교외에 이르러 주왕(周王)의 잘못을 벌하고 계속해서 초와 위 두 나라의 땅을 점령합니다. 스스를 방어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는 주나라는 틀림없이 전국의 보기인 구정(九鼎)을 우리 진나라에 받쳐야할 것입니다. 구정의 권위와 주나라 강역의 지적도 및 호적을 차지하여 천자의 명을 발하여 천하에 호령을 내린다면 누가 감히 그 명을 따르지 않겠습입니까?. 그것이 바로 왕업입니다. 그러나 지금 촉이라는 나라는 멀리 떨어진 서쪽의 변방의 나라에 융적의 풍속에 젖은 야만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고 백성들을 힘들게 하여 명분을 얻기 어렵고 그 땅을 얻더라도 아무런 이익도 생기지 않습니다. 신은 듣기에 명분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거리에서 다툰다고 했습니다. 오늘 삼천(三川) 지방와 주나라 왕실의 땅은 모두 천하의 조정이기도 하며 저잣거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그런 곳에서 다투지 않고 융적의 땅을 다투신다면 왕업을 이루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에 사마착이 반대의 의견을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듣기에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사람은 그 땅을 넓히는데 힘써야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고 싶은 사람은 그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하를 지배할 수 있는 조정은 모두 저자거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그곳에서 다투지 않으시고 융적의 땅을 다투시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왕업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마착이 반대하며 말했다.

「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듣기에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영토를 넓혀야 하고, 그 군대를 강병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그 백성들을 부유하게 해야 하고 천하를 통일하려고 하는 사람은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지면 왕업은 자연히 그 뒤를 따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의 땅은 좁고 백성들은 가난합니다. 그래서 신은 먼저 쉬운 일부터 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무릇 촉이라는 나라는 서쪽의 먼 변방의 융적의 우두머리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군주는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진나라가 공격한다면 그것은 마치 시랑(豺狼)이 순한 양을 쫓는 경우와 같이 아주 용이한 일입니다. 그 결과 촉 땅을 얻게 된다면 나라를 넓히고 그 부를 취하여 능히 백성들을 부유케 하고 군사들을 잘 훈련시킬 수 있어 우리 백성들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한 나라를 점령한다고 해서 우리가 포악하다고 비난을 받지 않고 촉 땅의 이익를 모두 차지한다고 해서 우리보고 탐욕스럽다는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명분과 실익을 다 함께 얻는 일과 같으며 또한 촉나라의 폭정과 혼란을 멈추게 하는 명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나라를 공격하고 천자를 위협하는 일은 악명을 얻게 되고 또한 실익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의롭지 못하다는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즉 천하가 원하고 있지 않은 주나라를 공격하는 행위는 위태로운 일입니다. 신이 그 연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나라는 천하의 종주국이며 한나라는 제나라의 동맹국입니다. 주나라가 구정을 빼앗기고 한나라가 삼천의 땅을 잃게 되는 일을 각자가 스스로 알게 되면 두 나라는 서로 같이 모의하여 제나라와 조나라를 경유하여 위(魏)와 초(楚) 두 나라에 구원을 청할 것입니다. 이에 주나라는 구정을 초나라에 주고 그 땅은 위나라에 바치게 되는 바, 대왕께서는 결코 그러한 일들을 막을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한나라를 공격하는 행위는 위험하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만전을 기하여 촉나라를 정벌하심이 마땅하다고 말씀드립니다.」

진혜왕이 대답했다.

「좋소! 나는 그대의 말을 따르겠소.」

이어서 진나라는 촉나라 정벌군을 일으켜 그해 10월에 촉나라를 취하여 평정하고 촉왕의 지위를 후(侯)로 낮추고 진장(陳莊)을 보내 촉나라의 상국으로 삼았다. 이에 촉나라는 진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이로써 진나라는 더욱 강대하게 되었고 국부가 증대되어 제후들을 얕보게 되었다.

진혜왕 10년 공자 화(華)와 장의(張儀)로 하여금 포양(蒲陽)8)을 포위하도록 하여 항복을 받았다. 장의는 진왕에게 건의하여 위나라에게 포양의 땅을 돌려주고 공자 요(繇)를 인질로 보내자고 했다. 장의가 위나라에 들어가 위왕에게 유세했다.

「진왕이 위나라를 매우 후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위나라는 예를 갖추시어 답례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위왕은 상군(上郡)9)과 소량(少梁)10)을 진나라에 바쳐 진혜왕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위혜왕은 장의를 재상으로 삼고 소량을 하양(夏陽)으로 개명했다.

장의는 진나라 재상이 된지 4년 만에 혜왕(惠王)을 왕으로 세웠다. 11). 다시 1년 후에, 진나라 장수가 되어 위나라를 공격하여 섬(陝)12)을 빼앗고 상군(上郡)에 요새를 쌓았다. 그리고 2년 후에 사자가 되어 제(齊)와 초(楚) 두 나라와 함께 교상(嚙桑)13)에서 회맹을 주재했다. 다시 돌아와서는 재상의 직을 사직하고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위나라로 하여금 먼저 진나라를 섬기게 함으로써 나머지 제후국들이 본받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위왕은 장의의 말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진왕이 노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여 곡옥(曲沃)14)과 평주(平周)15)를 점령하고는 계속해서 은밀하게 장의를 더욱 후대했다. 이에 장의는 진나라로 돌아가 복명할 명분이 없어 더욱 부끄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장의는 어쩌는 수 없이 위나라에 더 머물러야만 했다. 이윽고 4년 만에 위양왕(魏襄王)이 죽고 애왕(哀王)이 새로 섰다. 장의가 다시 애왕에게 진나라를 섬기도록 설득했으나 애왕도 역시 듣지 않았다. 그래서 장의는 몰래 진나라에 연락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위나라는 진나라와 싸워 패했다. 다음 해에 또 제나라가 침범하여 관진(觀津)에서 위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에 진나라가 다시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한나라의 신차(申差)가 이끌던 한군(韓軍)을 대파하고 그 군사 8만의 목을 벰으로 해서 산동 제후국들을 진동시켰다. 이에 장의는 다시 위왕(魏王)에게 유세했다.

「위나라의 땅은 천리에 불과하고, 그 군사는 30만이 채 못 됩니다. 지세는 평탄하고 명산대천으로 막혀 있는 곳이 없는 관계로 제후들이 사방에서 군사를 이끌고 몰려들게 되어있습니다. 한나라의 도성 신정(新鄭)에서 이곳 대량(大梁)까지의 200리 길은 수레로 달리면 힘들이지 않고도 단지 하루 만에 쉽게 이를 수 있습니다. 위나라는 남쪽으로는 초나라, 서쪽으로는 한나라, 북쪽으로는 조나라, 동쪽으로는 제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위나라 군사들은 사방을 지켜야만 하지만 변방의 보루를 지키는 군사들은 10만이 채 안됩니다. 위나라의 땅은 원래부터 전쟁터였습니다. 우리 위나라가 초나라와 수호를 하고 제나라를 제외시킨다면 제나라는 우리의 동쪽 변경을 공격할 것이고, 그렇다고 우리가 제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조나라와 거리를 둔다면 그때는 조나라가 북쪽에서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또한 한나라와 불화하게 되면 한나라는 우리의 서쪽을 칠 것이며,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면 초나라는 남쪽에서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소위 사분오열(四分五裂)의 형세라고 합니다. 그리고 합종을 추진하는 제후들은 장차 사직을 안정시키고 강병을 길러 그 이름을 높이려는데 그 뜻을 두고 있습니다. 이제 합종을 주장하는 자가 천하를 통일하고자 형제가 되자는 약속을 하고 백마를 희생(犧牲)으로 잡아 원수(洹水)16)에서 회맹을 행하고 서로 약속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임에도 금전과 재물을 서로 다툴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과 속임수를 반복한 소진의 말에 의지하려고 하시니 그것이 성공할 수 없음은 명백합니다.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는다면 진나라는 군사를 내어 하외(河外)를 공격한 후에 권(卷)17), 연(衍)18), 산조(酸棗)19)에 의지하여 위(衛)나라를 위협하여 양진(陽晋)를 취하고, 남쪽으로의 진공로가 막히게 되면 조나라는 군사를 보내 위(衛)나라를 구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위(衛)나라도 군대를 북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며 그 결과 합종은 깨질 것입니다. 합종이 깨지게 되면 대왕의 위(魏)나라는 비록 원하지 않더라도 필시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꺾고 위나라를 공격한다면 진나라를 두려하고 있는 한나라는 진나라와 한 편이 되고 그 결과 위나라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망하는 일만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신이 대왕을 위해 걱정하는 바입니다. 대왕을 위해 말씀드린다면 진나라를 섬기는 일보다 좋은 계책은 없습니다. 위나라가 진나라를 섬긴다면 초(楚)와 한(韓) 두 나라는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초와 한 두 나라로 인한 근심이 없어진다면 대왕은 베개를 높이하고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있으며 나라에는 모든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진나라가 약화시키고자 하는 나라는 초나라 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초나라를 약화시킬 수 있는 나라는 위나라 밖에 없습니다. 초나라가 비록 부유하고 대국이이라는 이름을 갖고는 있으나 실은 허명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 군사들의 수효는 많다하나 싸움이 벌어지면 쉽게 패하여 도주하기에만 바빠 굳게 지키지 못합니다. 위나라의 모든 군사들을 거두어 남쪽으로 진공하여 초나라를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승리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땅을 떼어 위나라에 보태주는 초나라는 타격을 받아 국력이 쇠퇴하게 되어 진나라에 복속됩니다. 그 결과 위나라는 화를 다른 나라로 돌리고 자신은 안정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이야말로 위나라로써는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신을 말을 듣지 않으신다면 진나라는 무장을 갖춘 군사들을 동쪽으로 보내 위나라를 정벌할 것이니 그때 가서야 비로소 진나라를 섬기려 한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무릇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큰소리만 쳤지 믿을만한 말은 적습니다. 제후 한 사람에게만 유세에 성공해도 봉후가 되기 때문에 천하의 유세가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팔뚝을 걷어 부치고 부릅뜬 눈에 이를 갈면서 합종의 이익을 설파하며 남의 임금을 혈안이 되어 설득하려고 합니다. 남의 임금된 자는 그 언사가 현명하다고 여겨 끌려 다니게 되니 어찌 그들에게서 현혹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듣기에 깃털도 많이 쌓이면 배를 가라앉힐 수 있고, 비록 가벼운 물건이라도 많이 싣게 되면 수레의 차축은 부러지게 되고,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이며, 여러 사람의 모함은 사람의 뼈도 깎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대왕께서는 계책과 의논을 깊이 하시어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신은 잠시 동안 위나라를 떠나 쉬려고 하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애왕은 마침내 장의의 말을 따라 합종을 배반하고 그를 통하여 진나라와 통호를 했다. 장의가 진나라도 돌아가 다시 재상의 자리에 앉았다. 3년 후에 위나라는 다시 진나라를 배반하고 합종에 참가했다. 그러자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곡옥(曲沃)을 점령했다. 다음 해에 위나라는 다시 진나라로 돌아섰다.

진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제와 초 두 나라가 합종을 행해 공동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려고 했기 때문에 장의가 초나라에 들어가 재상이 되어 연횡(連橫)을 추진하려고 했다. 장의가 초나라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초회왕이 상객들이 묶는 관사를 모두 비우도록 하고 친히 안내하며 말했다.

「이곳은 멀리 떨어진 누추한 나라입니다. 선생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주려고 이와 같이 먼 길을 오셨습니까?」

장의가 초회왕을 향해 말했다.

「대왕께서 성의를 다하여 제 말에 귀를 기우리시겠다면 우선 제나라로 향하는 관문을 닫고 합종의 약속을 깨뜨리라는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신은 그 댓가로 상오의 6백 리에 달하는 땅을 대왕께 바침과 동시에 진나라 공주를 보내 대왕의 첩으로 삼아 빗자루를 들고 대왕의 궁전을 청소하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초(楚)나라는 며느리를 맞아오고 진나라는 딸을 시집보내면 두 나라는 장기적으로 형제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약화시키고 서쪽으로는 우리 진나라와 같은 좋은 나라를 이웃으로 갖게 되는 이익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

초왕이 크게 기뻐하며 장의의 제안을 허락했다. 이에 초나라의 군신들이 모두 경하의 말을 올렸으나 유독 진진(陳軫)20)만이 애도의 말을 올렸다. 초왕이 화가나서 말했다.

「과인은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도 6백리의 땅을 얻었소. 그래서 군신들이 모두 그 일을 축하하고 있는데 그대만은 유독 애도의 뜻을 표하니 그것은 무엇 때문이오?」

「대왕의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신이 보건대 상오(商於)의 땅은 얻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진와 제 두 나라가 힘을 합하게 될 것입니다. 제(齊)와 진(秦)이 힘을 합치게 되면 초나라는 틀림없이 해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무릇 진나라가 초나라를 중히 여기는 이유는 제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나라로 통하는 관문을 닫고 합종의 약속을 깨뜨린다면 그때는 초나라는 고립되고 맙니다. 진나라가 무엇 때문에 고립무원인 초나라와의 연횡을 탐하여 상오(商於)의 땅 600리를 주겠습니까? 장의는 진나라에 돌아가게 되면 분명 대왕과의 약속을 저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북쪽의 제나라와 외교관계를 끊음으로써 서쪽의 진나라로부터 재앙을 불러오는 격이니 제(齊)와 진(秦) 두 나라의 군대는 필연코 초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대왕을 위해 최선의 계책을 말씀드린다면 아무도 몰래 사람을 보내 제나라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겉으로는 외교관계를 단절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장의에게 딸려 진나라에 보내 만일 진나라가 상오의 땅 6백리를 약속대로 할양한다면 그때 가서 실제적으로 제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선생은 입을 닫고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마시오. 선생은 과인이 진나라로부터 땅을 얻게 되는 것이나 구경하기 바라오.」

초왕은 장의에게 초나라 재상의 인장과 많은 재물을 예물로 주어 환대했다. 마침내 초나라는 제나라로 통하는 관문을 닫고 합종을 파기했다. 그리고 장군 한 사람을 시켜 장의를 따라가 상오의 땅을 받아오라고 명했다.

진나라에 당도한 장의는 수레를 탈 때 잡아당겨 올라타는 줄을 일부로 놓쳐 굴러 떨어져 부상을 입은 것 처럼 꾸며 조정에 3개월 동안이나 나가지 않았다. 초왕이 듣고 말했다.

「과인이 제와 절교를 하는 방법이 미흡하다고 해서 그러는가?」

이어서 용사를 시켜 송나라게 가서 사신의 부절을 빌려 북쪽으로 올라가 제왕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제왕이 대노하여 부절을 부러뜨리고 나서 진나라에 대해 자세를 낮추었다. 마침내 진과 제 두 나라가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장의가 조정에 나와 그때까지 장의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던 초나라 사자에게 말했다.

「제게 가지고 있는 봉읍의 땅 6리가 있으니 원컨대 바치겠습니다.」

이에 초나라 사신이 말했다.

「제가 우리 왕으로부터 받은 명은 6백리의 땅이지 6리의 땅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초나라 사자가 귀국하여 고하자 초왕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진진(陳軫)이 말했다.

「신이 입을 열어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초나라의 땅을 떼어 진나라에 뇌물로 바치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나라와 군사를 합쳐 제나라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땅을 진나라에 내주었지만 제나라에서 보상을 받게 되니 왕의 땅을 보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왕은 진진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은 군사를 일으켜 굴개(屈匃)를 장군으로 삼아 진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와 공수동맹을 맺은 진나라가 초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그 군사 8만의 목을 베고 장수 굴개를 살해한 후 단양(丹陽)과 한중(漢中)의 땅을 점령했다. 이에 초나라가 다시 더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를 기습하여 남전(藍田)에서 진나라와 크게 싸웠으나 초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두 개의 성을 할양하고 강화조약을 맺었다.

진나라가 초나라의 검중(黔中) 땅을 욕심내어 무관(武關) 이남 지역의 땅과 바꾸자고 했다. 초왕이 듣고 말했다.

「땅 대신에 장의를 보내주면 검중의 땅을 주겠다.」

초왕의 말에 솔깃한 진왕이 장의를 초나라에 보내고는 싶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했다. 장의가 초나라에 가겠다고 자청하자 진왕이 말했다.

「초왕이 화가 난 이유는 선생이 상오의 땅을 주지 않아 속였기 때문이오. 초왕은 선생에게 보복하려고 하는 것이오.」

「진은 강하고 초는 약합니다. 그리고 신은 초왕의 총신 근상(靳尙)과 친분이 있고 근상은 다시 초왕의 부인 정수(鄭袖)와 가깝습니다. 초왕은 정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줍니다. 더욱이 대왕의 부절을 지닌 사자로 초나라에 가는데 초나라가 어찌 감히 저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설사 신이 죽는다할지라도 진나라가 검중의 땅을 얻는다면 그것은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이윽고 장의가 진나라의 사자가 되어 초나라로 들어가자 초회왕은 장의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살해하려고 했다. 근상이 정수를 찾아가 말했다.

「왕비께서는 앞으로 왕에게 천대를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이오?」

「진나라 왕은 장의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에 필시 그를 감옥에서 꺼내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상용(上庸)21)의 6개 현(縣)을 초나라에 뇌물로 바치면서 다시 궁중에서 노래 잘 부르는 여인들을 선발하여 진나라의 미인을 초왕에게 시집보내는데 같이 보내려고 합니다. 초왕은 땅을 중하게 여기고 진나라를 받들려고 하니 진나라에서 시집온 여인들은 필시 귀하게 되고 부인께서는 멀리 내쳐저 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 말씀드려 장의를 석방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정수는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초왕에게 말했다.

「남의 신하된 자들은 각기 그 주인을 위해 쓰임을 당하는 것인데 오늘 진나라가 땅도 미처 받지 않고 장의를 사자로 보내 온 뜻은 진나라가 우리 초나라를 중하게 여기는 까닭입니다. 왕께서 예를 잃어버리고 장의를 죽인다면 진나라는 필시 크게 노하여 초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 첩은 대왕께 청하건대 우리 모자는 강남으로 옮겨가 살아 진나라에 의해 어육(魚肉)이 되는 일을 피해야 되겠습니다. 」

회왕이 후회하며 장의를 사면하여 석방하고 예전처럼 예를 갖춰 후하게 대했다.

장의가 석방되어 아직 초나라를 떠나기 전에 소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왕에게 유세했다.22)

「진나라는 천하의 반을 차지하고 군사력은 사방의 나라들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토는 험지로 둘러싸여 있고 황화를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으며 사방은 견고한 요새에 의지하여 외적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용기있는 무사들은 100만이 넘고 전차는 1000량, 기병은 만 기(騎)에 곡식은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또한 나라의 법령은 엄명하고, 군사들은 모두가 어려움도 편안하게 여기고 죽음도 피하지 않습니다. 군주는 사리에 밝고 위엄이 있으며 장수는 지혜와 무용을 갖추고 있어 비록 지금은 무장한 군사들을 출동시키지는 않고 있지만 장차 상산(常山)23)의 요해지를 점령하면 천하의 척추를 끊어 뒤늦게 진나라에 복종을 해온 나라들은 기필코 먼저 망하게 될 것입니다. 무릇 합종을 행하는 나라는 양떼를 몰아 맹호를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양과 맹호는 그 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대왕께서는 맹호의 편에 서지 않고 양떼의 편에 섰으니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야말로 대왕의 잘못입니다.

대저 천하의 강국이라 함은 진나라가 아니라면 초나라이며, 또한 초나라가 아니면 진나라입니다. 두 나라가 서로 다투게 되면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대왕이 진나라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진나라는 무장 군사들 보내 의양(宜陽)을 점령하여 한나라의 북쪽 땅과 통하지 못하게 하고 다시 군사를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 하동(河東)으로 보내어 성고(成皐)24)를 점령하면 한나라는 어쩔 수 없이 진나라에 입조하여 신하의 예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위나라도 어쩔 수 없이 한나라의 뒤를 따라야만 합니다. 한·위(韓魏) 두 나라를 복종시킨 진나라가 초(楚)나라의 서쪽을 공격하면 한·위(韓魏) 두 나라는 초나라의 북쪽을 침범하게 되어 초나라의 사직의 안위는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무릇 합종론자들은 약한 제후국들을 모아 가장 강력한 나라를 공격하자고 하니 그것은 바로 상대국의 강약도 헤아리지 않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는 무모한 행위이며, 가난한 나라가 빈번하게 군사를 일으키는 경우이니 그것은 바로 나라를 위험에 빠뜨려 망하게 하는 술책입니다. 신은 듣건대 군사들의 수가 적은 군대는 정면으로 대적하면 안 되고 군량미가 충분치 않은 군대는 지구전을 벌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합종론자들은 언사를 그럴듯하게 꾸미고 헛된 의견만을 주장하니 자기 군주들의 절조가 높다고 치켜세우면서 단지 좋은 점만을 지적하고 위험하고 해로운 점은 지나칩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진나라로부터 환난을 입게 되어도 그때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희망컨대 대왕께서는 심사숙고하시어 이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진나라는 서쪽에 파군(巴郡)과 촉군(蜀郡)을 차지하고 있이 큰 배에 식량을 가득 싣고 문산(汶山)25)에서 출발하여 강수로 들어가 순류를 타고 3천 리를 남하하면 초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두 척의 배를 한 조로 삼아 매 한 척의 배에는 50명의 군사를, 다른 배에는 3개월 치의 양식을 실어 강수의 순류를 타게 되면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거리는 300리가 넘습니다. 비록 거리가 멀다고 하지마는 우마(牛馬)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10일이면 한관(扞關)26)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한관이 긴박하게 되면 초나라의 동쪽 국경은 모두 성 안에 갇혀 지키기에 급급하게 되어 검중(黔中)과 무군(巫郡)은 이미 대왕의 땅이 아니게 됩니다. 동시에 진나라가 함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무관을 통해 나아가 남쪽을 향해 진공시킨다면 초나라의 북쪽지방은 절단되어 고립되고 맙니다. 또한 무관을 통과한 진나라의 군사는 3개월이면 초나라를 위난에 빠뜨릴 수 있지만 제후국들의 구원군은 6개 월 안에는 당도할 수 없어 그 형세는 초나라가 필요할 때 이를 수 없습니다. 약한 제후국들의 구원을 믿으면서 막강한 진나라의 재난을 잊고 있는 대왕을 위해 신이 걱정하는 바입니다.

대왕께서는 지금까지 오나라와 싸워 다섯 번 싸워 3번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싸움에서 군사들을 모두 잃고 멀리 떨어진 새로 얻은 성을 지키느라 백성들은 질고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신은 듣건대 공이 큰 자는 위태롭고 피폐해진 백성들은 그 군주를 원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무릇 위태로워지기 쉬운 공을 지키느라 강대한 진나라의 뜻을 거스르고 있음은 신은 가만히 생각건대 대왕께서는 위태로운 처지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무릇 진나라가 15년 동안 함곡관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제(齊)와 조(趙) 등의 나라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천하를 합하려는 계책을 몰래 꾸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나라가 옛날 진나라에 재난을 일으켜 한중(漢中)에서 싸웠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집규(執珪)27)의 높은 작위를 갖고 있던 70여 명의 장수들이 전사하고 결국은 한중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한중을 잃자 대왕께서는 더욱 노하여 군사를 다시 일으켜 진나라를 습격하여 남전(藍田)에서 싸웠습니다. 이것을 소위 말하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 합니다. 이로써 진(秦)과 초(楚) 두 나라는 서로 피폐해지고 그 결과 한(韓)과 위(魏) 두 나라가 전력을 기우려 초나라의 배후를 공격했었습니다. 어찌 그보다 더 위험한 계책이 있었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진나라가 갑병을 출동시켜 위(衛)나라의 양진(陽晋)28)을 공격하여 점령한다면 그것은 필시 천하의 가슴에 해당하는 요충지를 봉쇄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대왕께서 전군을 동원하여 송나라로 진군시킨다면 몇 개월 내에 신속하게 점령할 수 있으며 이어서 송나라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공하면 사상(泗上) 12제후국29)들의 영토 또한 모두 대왕의 소유로 만들 수 있습니다.

무릇 천하는 서로 믿음으로써 합종을 견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 소진(蘇秦)은 조나라로부터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지고 이어서 연(燕)나라로 가서는 그곳의 상국(相國)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몰래 연왕과 함께 모의하여 제나라를 무찔러 그 땅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후에 다시 연나라에 죄를 지은 체 하고 도망쳐 제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소진을 총애한 제왕은 그를 상국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소진의 음모가 발각되어 제왕이 대노하여 소진을 시정에서 거열형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일 개 사기꾼에 불과한 소진이 천하를 경영하기 위해 제후들을 혼란에 빠뜨렸으니 결국은 그 뜻을 이룰 수 없었음은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30)

지금 진와 초 두 나라는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 원래부터 친하게 지내온 우호국이었습니다. 대왕께서 실로 신의 말에 귀를 기우리신다면 신은 청컨대 진나라의 태자를 초나라에 인질로 보내겠으니 초나라도 태자를 진나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대왕을 위해 진나라 공주를 보내 시첩(侍妾)으로 삼게 해드리겠으며 만호(萬戶)에 달하는 성읍을 바쳐 대왕의 탕목읍(湯沐邑)31)으로 삼아 오랫동안 형제의 나라에 종신토록 서로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신은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왕은 장의를 이미 얻었음으로 약속대로 검중(黔中)의 땅을 다시 내어 진나라에 할양하여 장의의 요청을 허락하려고 했다. 굴원이 초회왕을 보고 말했다.

「예전에 대왕께서 장의에게 속임을 당해, 그가 초나라에 들어오면 대왕께서는 팽살형에 처할 것이라고 신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다시 그를 죽이지 않고 방면해 주고 다시 그의 거짓된 말을 들으시려고 하니 그것은 결코 불가한 일입니다.」

「장의의 청을 허락하고 검중군(黔中郡)을 얻음은 큰 이득이나 후에 다시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불가한 일이오.」

초회왕(楚懷王)은 결국 장의의 제안을 허락하고 진나라와 수호했다. 초나라를 떠난 장의는 곧바로 한(韓)나라로 가서 한왕(韓王)에게 유세했다.

「한나라의 땅은 험한 산악지대로 둘려 쌓여있습니다. 생산되는 오곡은 대부분이 콩 아니면 보리뿐이라 백성들은 콩밥에 명아주국입니다. 일 년만 수확을 못해도 백성들은 술지게미와 쌀겨조처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영토는 900리에 불과한 나라가 2년 먹을 양식도 생산하지 못합니다. 대왕의 보유한 군사들은 모두 모아도 30만에도 못 미치고 그 숫자도 시도(厮徒)32)와 부양(負養)33)을 포함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변방의 요정(徼亭)34)과 요새를 지키는 군사들을 제외하면 20만 명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진나라는 갑옷을 두른 군사들은 백만이 넘고, 병거는 천 승(乘), 기병(騎兵)은 만 기(騎), 그리고 날쌘 동작으로 투구도 쓰지 않은 체 도두 손으로 뺨을 가리며 적진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호분(虎賁)35)의 용사는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진나라 산의 말은 모두 양마고 또한 기병들은 모두 융족(戎族) 출신들입니다. 앞발을 쳐들고 뒷발로 땅을 차면 한 번에 세 길을 내닫는 기병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산동의 군사들은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싸우지만 진나라의 군사들은 오히려 갑옷을 벗고 맨발에 웃통을 들어내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왼손에는 적의 수급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포로를 낚아챕니다. 진나라 군사들과 산동의 군사들을 비교하면 마치 맹분(孟賁)36)이 두려움에 떠는 겁부(怯夫)와 대결하는 것 같고, 눌러 내리는 중압감은 마치 오획(烏獲)37)이 어린아이를 다루는 일과 같습니다. 맹분이나 오획과 같은 용사들을 독전시켜 복종하지 않는 약소국들을 공격하게 하는 일은 마치 천균(千鈞)38)의 무게로 새알 위를 누르는 경우와 같으니 어찌 요행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육국의 군주들과 대신들은 자기들 나라의 국력이 약하다는 처지도 헤아리지 않고 합종을 주장하는 유세객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고, 유세객들은 그들과 작당하여 사리를 취하면서 모두 ‘우리들의 계책을 따른다면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국가의 먼 앞날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이익을 헤아리지 않고 단편적인 면만을 강조한 유세에 귀를 기우리게 합니다. 이것은 그 나라의 군주를 망치게 하는 행위이니 이 보다 더 나쁜 계책은 없습니다.

대왕께서 진나라를 받들지 않으신다면, 진나라는 갑옷으로 무장한 군사들을 의양(宜陽)에 주둔시켜 한나라의 상당군(上黨郡)과 통하는 길을 끊고,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성고(成皐)와 형양(滎陽)을 취하면 한나라의 홍대(鴻臺)와 상림원(桑林苑)은 더 이상 대왕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대저 성고가 봉쇄를 당하면 한나라의 하수 이북지역과는 두절되어 대왕의 나라는 양분되고 맙니다. 그래서 진나라를 섬기는 일은 한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되고 진나라를 섬기지 않음은 한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일입니다. 대저 재앙을 만들어 내면서 복으로 보답 받기를 추구하는 행위는 계책이 얕고 비루하여 깊은 원한을 사게 되는 일입니다. 진나라를 거역하고 초나라에 순종하는 행위는 비록 아무리 망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고 해도 어쩌지 못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대왕을 위해 계책을 올린다면 나라의 안전을 위해서는 진나라를 섬기는 일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나라가 약화되기를 원하는 나라는 진나라보다 더한 나라는 없고, 실제적으로 초나라를 능히 약화시킬 수 있는 나라는 한나라가 가장 적격이기 때문입니다. 한나라 없이는 초나라를 약화시킬 수 없음은 한나라가 초나라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그 지형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대왕께서 서쪽으로 얼굴을 돌려 진나라를 받들고 초나라를 공격한다면 진나라는 필시 기뻐할 것입니다.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얻는 이득을 얻음은 화를 돌려 진나라를 기쁘게 하는 일이니 이 보다 더 좋은 계책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왕이 장의의 계책을 따르겠다고 했다. 장의가 돌아가 그 사실을 고하자 진혜왕(秦惠王)은 그를 다섯 개의 고을에 봉하고 무신군(武信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다시 장의(張儀)가 제나라로 가서 민왕(湣王)에게 유세했다.39)

「천하에는 제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대신들과 부형들은 수 없이 많고 그 대부이분 부유한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을 위해 계책을 올린다면 그런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즐거움일 뿐이며 백세에 누릴 이익은 헤아리지 않는 일입니다. 대왕께 유세했던 합종론자들은 필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제나라의 서쪽에는 조(趙)라는 강국이 있고, 남쪽에는 한(韓)과 양(梁)이 있습니다. 제나라는 바다를 끼고 그 땅은 넓고 백성들은 많으며 군사들은 강하고 무사들은 용감합니다. 비록 진나라가 백 개가 있다 한들 제나라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그 말이 매우 고명하다는 점만을 아시고 실세적인 정황을 헤아리지 않고 계십니다. 합종론자들은 붕당을 만들어 사리를 꾀하고 다른 의견들은 모두 배척하기 때문에 합종은 따름으로써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제가 듣기에 제(齊)와 노(魯) 두 나라가 세 번 싸워 모두 노나라가 이겼으나 노나라는 이로 인해 나라가 망했습니다. 전쟁에 싸워 이긴 명성에 불구하고도 현실적으로는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제나라는 강대하고 노나라는 약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진과 제 두 나라를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마치 제와 노 두 나라의 경우와 같습니다. 또한 진과 조 두 나라가 장하(漳河)의 강안에는 두 번 싸워 조군이 모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후에 다시 파오(番吾)의 성 밑에서 두 번 교전하여 모두 조나라가 이겼습니다. 그러나 조나라는 4번의 싸움에서 수십 만의 군사를 잃고 근근히 그 도성 한단(邯鄲) 만을 지킬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4번에 걸쳐 승리를 거둔 조나라는 그 이름을 천하에 알렸으나 결국은 나라의 경제는 파국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진과 초 두 나라가 그 공녀를 시집보내고 부인으로 맞아들여 바로 형제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나라는 의양(宜陽)을, 위(魏)나라는 하외(河外)의 땅을 바치고, 조나라는 그 왕이 민지(澠池)에 들어가 진왕에게 조현을 올리고40) 하간(河間)의 땅을 떼어 바치면서 진나라를 받들기로 맹세했습니다. 대왕께서 진나라를 받들지 않는다면 진나라는 한·위 두 나라를 압박하여 제나라의 남쪽 땅을 공략하게 하고 다시 조나라의 전 군사들을 일으켜 청하(淸河)를 건너 박관(博關)과 임치(臨淄)를 향하게 하면 제나라의 즉묵(卽墨) 땅은 더 이상 왕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나라가 어느 날 외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면 그때는 제나라가 비록 진나라를 섬기려고 할지라도 불가한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이 점을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제왕(齊王)이 말했다.

「우리 제나라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동해 상에 숨어 있는 나라라 과인은 아직까지 사직을 위해 이렇듯 장구한 이득에 관해 들어보지 못했소. 」

제왕은 장의의 말을 쫓기로 했다.

장의가 제나라를 떠나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조나라로 들어가 조왕(趙王)에게 유세했다.

「저희 진왕께서는 신으로 하여금 사자로 삼아 대왕께 어리석으나마 계책을 올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저희 진나라를 배척하시고 계십니다. 진나라 군사들은 감히 함곡관(函谷關) 밖으로 나오지 못한지가 벌써 15년이나 되었습니다. 대왕의 위엄이 산동에 떨치니 우리 진나라는 두려움에 떨어 땅에 엎드려 무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단련시켰으며 또한 병거와 기마를 준비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습시켰습니다. 힘써 농사를 지어 양식을 저장하고 사방의 국경을 지키며 근심과 두려움으로 감히 동요하지 못하고 오로지 대왕께서 우리 진나라의 허물을 깊이 꾸짖을까봐 전전긍긍해왔습니다. 은인자중하게 하여 국력을 신장시켜주신 대왕의 덕분에 우리 진나라는 이제 파(巴), 촉(蜀)을 얻고 한중(漢中)을 병합하였으며 동서 양주(兩周)를 세력권 하에 두어 전국(傳國)의 보기(寶器)인 구정(九鼎)을 함양(咸陽)으로 옮기기 위해 백마진(白馬津)41)을 지키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비록 한쪽의 외지고 머나먼 곳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내심으로는 실로 오랫동안 분노와 원한을 품고 지내왔습니다. 오늘 진나라는 비록 허름하고 정예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 무기로 무장한 군사들을 민지(澠池)에 주둔시킨 후에 하수를 건너고 장하(漳河)를 뛰어 넘어 파오(番吾)를 점거하여 한단성 하에서 조군과 회전에 들어가 원컨대 갑자(甲子)42) 일에 결판을 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을 정벌하려고 하는 상황과 같으니 저의 왕께서는 신을 사신으로 보내 미리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합종을 믿으신 이유는 소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진은 제후들을 현혹시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나라에 들어가 반역을 꾀해 결국은 자청하여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에 처해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소진의 합종론으로는 천하를 하나로 만들 수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오늘 초(楚)와 진(秦) 두 나라는 형제지국이 되었고, 한(韓)과 양(梁) 두 나라는 진나라의 동쪽을 지키는 번국(藩國)을 칭했으며, 제나라는 그들의 땅 중 어염(魚鹽)이 나오는 곳을 우리 진나라에 헌상함으로 해서 조나라의 오른 팔이 되기를 거절했습니다. 대저 오른 팔이 잘리고도 다른 사람과 싸우기를 계속하고, 자기편을 잃고 고립에 처해 있으면서도 위태롭지 않을 것을 바란다면 어찌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까?

오늘날 진나라는 세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그 일군은 오도(午道)43)의 통행을 막고 제나라에 통고하여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청하(淸河)를 건너 한단의 동쪽으로 진격시키고, 다른 일군은 성고(成皐)에 주둔하면서 한과 양(梁) 두 나라를 압박하여 하외(河外)로 진군하게 하고, 남은 일군은 민지(澠池)에 주둔하게 할 것입니다. 이어서 진(秦), 제(齊), 한(韓), 양(梁) 등 네 나라는 서로 연합하여 조나라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에 그 땅을 넷으로 나누어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감히 그 계획을 숨기지 않고 먼저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진나라가 가만히 대왕을 위해 계책을 올린다면 진왕과 민지에서 회맹을 행하여 서로 대면하여 대화로써 해결하고 군사를 거두어 병화가 없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계책을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왕이 말했다.

「선왕44) 때 봉양군(奉陽君)45)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러 선왕을 속이고 정사를 오로지 했었소. 과인은 당시 깊은 궁궐에 기거하면서 스승으로부터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정에 참여를 할 수 없었소. 이윽고 선왕께서 돌아가시자 나이가 어렸던 과인은 사직을 받드는 군주의 자리에 오른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원래는 마음속으로 의심하는 바가 없지 않았었소. 합종책만을 쫓아 진나라를 받들지 않는 것은 국가의 먼 장래에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소. 그래서 마음을 바꿔 의심을 털어 버리고 조나라의 영토를 할양하여 옛날의 과오를 사과하고 진나라를 섬기기로 하겠소. 바야흐로 수레를 마련하여 진나라로 들어가 죄를 청하려고 하는 차제에 사자로 온 경의 밝은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이오.」

장의의 연횡책을 조왕이 받아들이기로 하자 장의는 곧바로 조나라를 떠났다.

조나라를 떠난 장의는 방향을 북쪽으로 향해 연나라에 가서 연소왕(燕昭王)46)에게 연횡책을 유세했다.

「대왕께 있어서 친한 나라는 조나라보다 더 한 나라는 없습니다. 옛날 조양자(趙襄子)47)가 그의 누이를 대왕(代王)의 부인으로 보내 놓고 대(代) 땅을 병합할 욕심으로 대왕(代王)과 구주(句注)48)의 관색(關塞)에서 만나 회맹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리고 공인(工人)에게 명을 내려 사람을 가격할 수 있는 자루가 긴 국자를 구리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양자가 대왕과 술을 마시면서 아무도 몰래 요리사에게 술자리가 거나하게 흥이 오르거든 뜨거운 국을 올린다고 하면서 국자의 자루를 잡고 그를 가격하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술자리가 거나하게 흥이 올랐을 때 요리사가 뜨거운 국을 올리고 다시 술을 따르다가 구리 국자의 자루를 돌려 잡아 내리쳐 죽였습니다. 대왕의 뇌는 깨져 땅에 쏟아졌습니다. 그 누이가 소식을 듣고 그 비녀를 갈아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그런 사연으로 지금도 그 산을 마계산(摩笄山)49)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대왕(代王)이 그렇게 죽은 것은 천하 사람들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50)

조나라 임금은 포악하여 그 육신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왕께서 분명히 아시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런 조왕과 어떻게 가까이 지낼 수 있겠습니까? 조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두 번이나 연도(燕都)를 포위함으로 해서 대왕을 범하자 대왕께서는 10개의 성을 떼어 주고 사죄를 했습니다. 지금 조왕은 이미 진나라에 들어가 민지(澠池)에서 진왕에게 조현을 올리고 하간(河間)51)의 땅을 바치고 진나라를 받들기로 맹세했습니다. 이에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의 길로 진격시키고 조나라를 압박하여 연나라를 공격하게 한다면 이수(易水)와 연장성(燕長城)은 이미 대왕의 소유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지금 조나라의 입장은 진나라의 군현(郡縣)과 같아 진나라의 허락 없이는 감히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연나라를 침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쪽에서는 강력한 진나라가 구원군을 보내고 남쪽으로부터는 조와 제 두 나라의 위협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는 이 점을 잘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

연왕이 말했다.

「과인은 구석진 만이(蠻夷)의 땅에 살고 있어, 비록 덩치는 큰 성인이나 그 행동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 올바른 계책을 얻을 수가 없었소. 오늘 다행히 상객(上客)께서 가르침을 주셨으니 청컨대 얼굴을 서쪽으로 돌려 진나라를 받들기로 하고 항산(恒山)의 끝자락에 있는 5개의 성을 바치기로 하겠습니다.」

연왕이 장의의 연횡책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장의는 진나라로 돌아갔다.

장의가 미처 함양에 이르기 전에 진혜왕(秦惠王)이 죽고 무왕(武王)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무왕은 태자시절부터 장의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왕이 즉위하자 여러 군신들이 장의를 헐뜯으며 말했다.

「장의는 신의가 없고 반복무사한 방법으로 나라를 팔아 군주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진나라가 장의를 다시 쓴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장의와 진왕 사이에 틈이 생겼음을 알게 된 제후들은 연횡을 깨고 다시 합종으로 돌아갔다.

진무왕(秦武王) 원년 기원전 310년 진나라의 대신들이 밤낮으로 장의를 비난하며 멈추지 않는 상태에서 제나라가 사자를 보내 장의를 책망했다. 장의가 혹시라도 무왕에게서 죄를 얻어 살해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기회를 살피다가 무왕에게 말했다.

「신에게 어리석으나마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엇이오?」

「진나라의 사직을 위한 계책입니다. 동쪽에서 대란을 일으킨다면 대왕께서는 그 땅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제가 들으니 제왕이 매우 저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의가 있는 곳이라면 제왕은 틀림없이 군사를 보내 공격할 것입니다. 원컨대 불초한 신을 위나라에 있게 하시면 제나라는 필시 제가 머물고 있는 위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위(魏)와 제 두 나라가 성 밑에서 엉켜 서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대왕께서 그 틈을 이용하여 한나라를 정벌하고 삼천(三川)으로 들어가 함곡관을 통해 군사를 내어 주나라에 임한다면, 천자의 제기(祭器)들을 얻어 진나라에 가져다 놓을 수 있습니다. 천자를 끼고 천하의 도적(圖籍)을 정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제왕의 공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의의 말을 옳다고 여긴 진무왕은 그에게 가죽으로 장식한 수레 30승을 내어주며 위나라로 가게 했다. 그러자 제나라가 과연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애왕(魏哀王)이 두려워하자 장의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청컨대 제나라의 군대가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장의는 곧바로 자기의 사인(舍人)으로 있던 풍희(馮喜)를 초나라에 보내 초왕의 사자 명의를 빌려 제나라로 들어가 제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대왕께서는 장의를 대단히 미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대왕께서는 진왕보다도 더 많이 장의에게 의탁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제왕이 대답했다.

「과인이 장의를 미워하기 때문에 장의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구애하지 않고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고 있는데 어째서 과인이 장의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말이오.」

풍희가 말했다.

「그것이 바로 대왕께서 장의에게 의탁하고 있음입니다. 장의가 진나라를 떠날 때 진왕과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합니다.

‘대왕을 위한 계책을 올리겠습니다. 동방에 대란이 일어나게 되면 대왕께서는 많은 땅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제왕이 신을 매우 미워하여 장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할 것입니다. 고로 신은 바라옵건대 불초한 이 몸을 양나라에 머물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제나라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양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제와 양 두 나라 군사가 양나라의 성 밑에서 엉켜 뒹굴며 서로 헤어나지 못하게 되면 대왕께서는 그 틈을 이용하여 한나라를 공격하여 삼천으로 들어가 주나라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주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전국의 보기들을 모두 함양으로 옮겨 천자의 이름으로 천하의 호적과 지적도를 정비한다면 그것이 바로 제업을 이루게 되는 일입니다.’

진왕이 장의의 말이 옳다고 여겨 가죽으로 장식한 수레 30승을 주어 양나라로 보냈습니다. 지금 장의가 양나라에 머물자 대왕께서는 과연 군사를 일으켜 양나라를 공격하고 계시니 이것은 대왕께서는 안으로는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밖으로는 이웃의 우호국을 쳐서 적국의 영토를 넓혀주는데 스스로 가담함으로 해서 진왕이 장의를 신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왕께서 ‘장의의 말에 의탁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왕이 풍희의 말을 옳다고 여겨 즉시 군사를 물리쳤다. 장의는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다가 1년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진진(陳軫)은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유세(遊說)했던 변사(辯士)다. 장의를 따라 몸을 일으켜 진혜왕을 섬겼다. 두 사람은 중용되어 서로 총애를 다투었다. 장의가 진혜왕 앞에서 진진을 폄훼하며 말했다.

「진진이 많은 예물을 가지고 진과 초 두 나라 사이를 사자의 임무를 띠고 빈번히 왕래하고 있음은 두 나라의 수교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초나라는 진나라에게는 잘 대해주지 않으면서도 진진 자신에게는 잘 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즉 진진이 자신을 위해서는 후하게 하고 대왕을 위해서는 박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금 진진은 진나라를 떠나 초나라에 가려고 합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그 이유를 진진에게 묻지 않으십니까?」

진왕이 진진을 불러 물었다.

「내가 들으니 그대는 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가려고 한다는데 사실이요?」

「사실입니다.」

「장의의 말이 과연 사실이었구나!」

「이 일은 유독 장의 혼자만 알고 있는 일이 아니고 길 가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옛날 오자서는 그 군주에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천하의 제후들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해 다투었습니다. 증삼(曾參)은 그 부모에게 효성스웠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기 위해 다투었습니다. 노복이나 시첩을 팔려고 할 때 마을 어귀를 벗어나기도 전에 팔리는 자들이 좋은 노복이거나 시첩입니다. 시댁에 쫓겨난 부녀자가 같은 향리에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여인이 좋은 여인입니다. 오늘 이 진진이 그 군주에게 불충했다면 초나라가 어찌 이 사람을 충성스럽다고 해서 불러서 쓰려고 하겠습니까? 충성스러움에도 버림을 받으니 제가 초나라에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진왕이 진진의 말이 옳다고 여겨 그를 잘 대우했다. 후에 진나라에 일 년이 지나자 진혜왕은 결국 장의를 상국으로 삼았음으로 진진은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는 진진을 미처 중용하기도 전에 진진을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진진이 위나라를 지나가다 서수(犀首)의 접견을 청했다. 그러나 서수가 만나지 않겠다고 사절했다. 진진이 말했다.

「내가 일을 위해 왔는데 공께서 이 진을 만나려고 하지 않으니 저는 이만 가봐야 합니다. 부득이 후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서수가 듣고 접견을 허락하자 진진이 말했다.

「공은 어찌하여 술만 마십니까?」

「할 일이 없기 때문이오.」

「청컨대 제가 공으로 하여금 일에 싫증이 나도록 만들어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오?」

「위상(魏相) 전수(田需)가 제후들과 합종을 맺으려고 하나 초왕이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공께서 위왕에게 ‘ 신은 연․조 두 나라 왕과 오래 동안 친분이 있어 왔습니다. 두 왕이 여러 번 사자를 저에게 보내 일도 없으면서 어찌하여 상견할 수 없냐고 물어가곤 했습니다. 원컨대 제가 가서 연조 두 나라 왕들을 배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옵소서!’라고 하십시오. 위왕이 비록 공에게 허락을 내려도 공은 결코 많은 거마를 청하지 마시고 30승만을 뜰에 도열시켜놓고 연․조 두 나라에 갈 예정이라고 크게 소문을 내십시오.」

이윽고 위나라에 머물고 있던 연․조의 두 나라의 문객들이 소문을 듣고 수레를 휘몰아 각기 자기나라로 달려가 그들의 왕에게 고하고는 사람을 보내 서수를 영접하도록 했다. 초왕이 듣고 대노하며 말했다.

「전수와 나는 맹약을 맺었음에도 서수를 연․조 두 나라에 보냈으니 이는 나를 속였음이라!」

초왕은 전수에게 속임을 당했다고 생각하여 그의 합종설을 따르지 않았다. 서수가 북쪽의 연․조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제나라가 사람을 보내 제나라의 일을 그에게 맡겼다. 서수는 마침내 제․연․조 세 나라의 상국이 되어 모든 일은 그에 의해 결정되었다. 진진은 마침내 진나라로 들어갔다.

  한․위(韓魏)가 서로 공격하여 일 년이 되어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진혜왕이 이를 구원하기 위해 좌우의 측근들에게 물었다. 측근들 중 어떤 자는 구하자 하고 어떤 자는 구하지 말자고 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진진이 진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혜왕이 진진을 보고 물었다.

「그대가 과인을 떠나서 초나라에 갔는데 과인을 생각한 적이 있었소?」

「왕께서는 월나라 사람 장석(莊舄)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못 들었소」

「월인 장석은 초나라에 출사하여 집규(執珪)가 되었으나 얼마 후에 병이 들었습니다. 초왕이 말했습니다. ‘장석은 옛날 월나라의 벽지에 살던 비천한 출신으로 부귀한 신분이 되었는데 아직도 월나라를 그리워하는가?’ 초왕의 시종관 중사(中謝)가 대답했습니다. ‘ 무릇 사람이 고향을 생각할 때는 몸에 병이 들었을 때입니다. 그가 월나라를 그리워한다면 월나라 말을 할 것이고 월나라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초나라 말을 할 것입니다.’ 초왕이 사람을 보내 그가 사용하는 말을 들어보게 하니 그는 여전히 월나라 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신이 버림받고 쫓겨서 초나라로 갔으니 어찌 진나라 말을 잊었겠습니까!」

「좋습니다. 지금 한․위(韓魏)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여 1년이 넘도록 해결이 되지 않고 있소. 어떤 사람은 과인에게 구하라 하고 더떤 사람은 구하지 말라고 하오. 그래서 과인은 어찌할 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원컨대 선생의 주인인 초왕을 위한 계책 중에 남은 것이 있으면 나를 위해서도 계책을 알려주시기 바라오.」

「변장자자호(卞莊子刺虎) 즉 변장자가 호랑이를 잡은 옛날 이야기를 아십니까? 변장자가 호랑이를 찌르기 위해 달려들려고 할 때 역관의 동자가 앞을 막으며 말했습니다. ‘두 호랑이가 바야흐로 소를 먼저 먹으려고 하는데 일단 맛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서로 다투게 되고 다투면 싸우게 되고 싸우게 되면 서로 간에 큰 부상을 입게 되어 작은 놈은 죽고 큰 놈은 부상을 입게 됩니다. 그때를 기다렸다가 부상을 입은 놈을 찔러서 잡으면 한 칼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변장자가 옳은 말이라고 여겨 서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더니 큰 호랑이는 상처를 입고 작은 호랑이는 물려 죽었습니다. 변장자가 부상 입은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칼로 찔러 죽여 한 칼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은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한․위 두 나라가 서로 싸워 일 년이 지나도 멈추지 않고 있으니 큰 나라는 상처를 입고 작은 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작은 나라가 망하면 상처를 입은 나라를 정벌하시면 일거에 두 나라를 얻는 실리를 취하실 수 있음입니다. 이것은 변장자가 호랑이를 잡는 방법과 같은 계책입니다. 신이 초왕을 위해 바치는 계책과 왕을 위해 바치는 계책이 어찌 틀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히 훌륭한 계책이라고 말한 진혜왕은 두 나라를 구하지 않았다. 마침내 작은 나라는 망하고 큰 나라는 크게 상했다. 이에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대국을 정벌하여 크게 이겼다. 이 일은 바로 진진의 계책에 의해서 였다.

  서수(犀首)는 위(魏)나라 음진(陰晉) 출신으로 성은 공손(公孫)에 이름은 연(衍)이다. 장의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장의가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로 들어가자 위왕은 장의를 상국에 임명했다. 서수는 그 일이 자기에게 이롭지 않다고 생각해서 사람을 시켜 한나라 공숙(公叔)에게 말하게 했다.

「장의는 이미 진나라와 위나라가 서로 연횡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위나라가 남양(南陽)을 공격하면 진나라는 삼천(三川)으로 진군한다.’라고 했습니다. 위왕은 장의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한나라 땅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이에 한나라는 남양 땅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소인에게 일을 맡겨 이 공손연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습니까? 제 말대로 한다면 진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연횡을 맺는 일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위나라는 필시 장의를 버리고 한나라와 친해 질 것이며 이 연은 위나라의 상국이 될 수 있습니다.」

공숙이 서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남양의 땅을 그에게 맡겨 공을 세우도록 했다. 서수는 결국 위나라의 상국이 되고 장의는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돌아갔다.

  의거(義渠)55)의 군주가 조현을 올리기 위해 위나라에 들어왔다. 마침 장의가 진나라의 상국의 자리에 복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수가 자기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의거의 군주를 만나 말했다. 「군주님의 나라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다시 오기 힘들 것 같으니 청컨대 중원의 정세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은 중원은 별다른 사고가 없이 무사하면 진나라는 분명 군주님의 나라를 파괴하고 불사를 것입니다. 반면에 중원나라들이 진나라를 치면 진나라는 신속하게 막대한 예물과 함께 사자를 보내 군주님을 달랠 것입니다.」

그 후 다섯 나라가 합종을 맺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때 마침 진진이 진왕에게 말했다.

「의거의 군주는 만이의 나라이지만 제법 현명합니다. 뇌물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달래십시오.」

진왕이 허락하고 의거의 군주에게 채색비단 천 필과 미녀 100명을 보냈다. 의거의 군주는 신하들을 볼러 의논했다.

「이것은 바로 공손연이 말한 대로 되지 않았나?」

의거의 군주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기습하여 진군을 이백성(李伯城) 밑에서 크게 무찔렀다.   장의가 죽자 서수는 진나라에 들어가 상국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다섯 나라의 상국인을 파고 합종장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삼진(三晉)에는 권무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한 유세가가 많았다. 무릇 합종이나 연횡을 주창하여 진나라를 강하게 만든 인사들은 모두 위나라 출신이었다. 장의가 행한 일들은 소진이 행한 것보다 더 심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소진을 더 싫어한 이유는 그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장의가 소진의 단점을 부풀리고 연횡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진실로 나라를 위난에 빠뜨리는 위험한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장의 끝>

주석1)당시 초나라의 재상은 소양(昭陽)이다. 초회왕(楚懷王) 때 주국(柱國)을 역임했다. 회왕6년 기원전 323년 군사를 이끌고 위(魏)를 공격하여 8개의 고을을 점령했다. 승세를 타고 군사를 돌려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제왕(齊王)이 두려워했다. 제왕은 진진(秦軫)을 보내 유세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게 하였다.

2)명첩(名帖)/ 중국 고대의 명함의 일종으로 관리나 지체가 높은 사람의 접견을 청할 때 사용하는 명패다.

3)저(苴)/ 촉족(蜀族)의 한 지파가 새운 나라로 지금의 사천성 가맹(葭萌)에 있었다. 일설에는 파군(巴郡)이라는 설도 있다.

4)십곡(什谷)/ 지금의 하남성 공현(鞏縣) 동북에 있는 계곡명이다.

5) 둔류(屯留)/ 지금의 산서성 둔류현 남쪽에 옛 고성이 남아있다. 산서와 산동을 가르는 태항산맥 위로 나있던 양장판(羊腸阪)의 길목을 막을 수 있었던 전략상의 요충지다.

6) 양장판(羊腸坂)/ 태항산맥 능선 위로 난 도로 이름이다. 3 곳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 번째 길은 산서성 진성현(晉城縣) 남쪽에 나 있고, 두 번째 길은 호관현(壺關縣) 동남이고, 세 째번 길은 평순현(平順縣) 동남으로 양장색(羊腸塞)이라는 별명을 갖오 있다. 전국시대에 지칭하는 양장판이라는 함은 첫 번째의 진성현에 나 있는 길을 지칭했다. 손자오기열전에 ‘ 하걸(河桀)의 나라는 왼쪽에서 하수(河水)와 제원(濟源)을 끼고 있고, 오른 쪽으로는 태주(泰州)와 화주(華州)를, 남쪽으로는 이궐(伊闕), 북쪽으로 양장(羊腸)에 이르렀다.

7)의양(宜陽)/ 전국(戰國) 때 한나라가 신정성(新鄭城)으로 천도하기 전의 도성(都城)으로 한(韓)나라의 중요한 요충지다. 진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진무왕이 주나라의 구정을 엿보기 위해 감무(甘茂)에게 명하여 의양성을 점령하도록 했다. 감무가 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공격했으나 오랫동안 성공하지 못하자 진무왕은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에 감무는 식양(息壤)에서의 약속을 상기시킴으로써 증원군을 얻어 결국은 의양성을 함락시켜 진무왕이 수레를 타고 주나라에 들어가 구정을 엿보게 한 고사가 있다.(감무열전 참조). 한나라는 건국에서 진나라에 망할 때까지 그 도성을 평양성(平陽城 ;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 의양성(宜陽城) → 신정성(新鄭城)으로 옮겼다.

8) 포양(蒲陽)/ 위(魏)나라 령으로 지금의 산서성 습현(隰縣)이다.

9) 상군(上郡)/ 섬서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황하의 서쪽 지역으로 황하와 낙수 사이에 위나라가 설치한 군현 이름이다.

10) 소량(少梁)/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부근이다.

11) 진나라가 왕호를 칭하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12) 섬(陝)/ 지금의 하남성 섬현(陝縣)을 말한다. 서주 초기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섭정을 행할 때 섬(陝)을 기준으로 서쪽은 주공이 동쪽은 소공이 맡아서 다스리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이 일로 인해 섬서(陝西)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13) 교상(嚙桑)/ 설상(齧桑)이라고도 하며 전국 때 위(魏)나라 령으로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 부근이다.

14) 곡옥(曲沃)/ 원래 춘추 때 당진국이 발흥했던 곳으로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聞喜縣)에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하남성 섬현(陝縣) 서남의 위(魏)나라 령의 고을을 칭했다.

15) 평주(平周)/ 지금의 산서성 개휴현(介休縣) 서쪽의 전국 때 위(魏)나라 고을이다.

16) 원수(洹水)/ 지금의 하남성 동북쪽 임현(林縣)의 융려산(隆慮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안양시(安陽市)를 지나 내황현(內黃縣) 북쪽에서 황하에 유입되었던 하천을 말한다. 지금의 안양하(安陽河)에 해당한다. 소진(蘇秦)이 조숙후에게 제후들과 원수(洹水)에서 만나 합종을 행해야 한다고 유세했다.

17) 권(卷)/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서쪽의 위나라 령이다.

18) 연(衍)/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북쪽의 위나라 성읍이다.

19) 산조(酸棗)/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서남의 위나라 령의 성읍니다.

20) 진진(陳軫)/ 전국 때 유세가(游說家). 초나라 하읍(夏邑 :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商邱市) 동남) 사람. 처음에는 장의(張儀)와 함께 진혜왕(秦惠王) 밑에서 벼슬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총애를 다투었다. 후에 진혜왕이 장의를 총애하여 상국으로 명하자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러나 초나라에서 중용 되지 못하고 다시 예전처럼 초나라의 사자로 진나라에 파견되었다. 한(韓)과 위(魏)나라가 서로 싸우며 몇 년이 가도록 멈추지 않아 진혜왕이 진진에게 계책을 물었다. 진진은 대답하기를 한나라와 위나라가 오래 동안 싸우게 되면 큰나라는 상처를 입을 것이며 작은나라는 망하게 될 것인바 그 때에 가서 군사를 내어 상처를 입은 나라를 정벌하면 일거에 두 나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진혜왕이 진진의 말을 따라 후에 큰 전공을 얻을 수 있었다.

21) 상용(上庸)/ 지금의 호북성 죽산현(竹山縣) 서남의 전국 때 초나라의 고을로 원래 용(庸)이라는 제후국이었으나 초나라가 멸하고 그 땅에 상용현을 설치했다.

22) 소진이 죽은 해는 제민왕(齊湣王) 말년의 일로 기원전 285년 직전이고 장의가 초나라에 들어가 상오(商於)의 땅으로 속여 초제(楚齊)간의 합종을 깬 결과 진초(秦楚) 간에 단수(丹水)와 남전(藍田)의 싸움이 일어난 해는 기원전 312년의 일이다. 소진은 기원전 300년에 죽은 장의보다 15년 가까이 더 살다가 죽었다. 이 부분은 사마천의 잘못이다.

23)상산(常山)/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에 있는 산으로 원래는 항산(恒山)이었으나 서한의 3대 황제 문제(文帝)의 이름인 항(恒)을 휘(諱)하여 상산(常山)으로 개명했다.

24)성고(成皐)/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서쪽의 사수진(汜水鎭)으로 춘추 때 제읍(制邑), 호뢰(虎牢) 등으로 불리웠던 한나라의 동쪽 변경을 지키던 전략상의 요충지다.

25)문산(汶山)/ 지금의 민산(岷山)으로 감숙성(甘肅省)과 사천성을 가르는 산으로 민강(岷江)의 발원지이다.

26)한관(扞關)/ 지금의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동쪽에 있던 관으로 초나라의 서쪽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이다.

27)집규(執珪)/ 춘추전국시대 때 초나라 작위(爵位) 등급의 하나. 지위는 봉국(封國)의 군주에 해당한 고위직이었다.

28)양진(陽晋)/ 지금의 산동성 운성(鄆城) 서쪽으로 전국 때 위(衛)나라 땅으로 후에 제(齊)나라에 속했다가 다시 조(趙)나라가 점령했다. 위(魏), 제(齊), 초(楚), 조(趙) 등의 경계가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 당시 전략적인 요청지였다.

29)사상(泗上) 12제후국/ 노나라 지방을 남북으로 흐르던 사수(泗水) 강변에 소재하고 있던 12개의 소 제후국들인 노(魯), 송(宋), 거(莒), 추(鄒), 담(郯), 비(費), 비(邳), 설(薛), 등(滕), 예(郳), 임(任), 위(衛) 등이다. (첨부지도 참조)

30)이 부분은 사마천의 착오다. 장의가 초나라에 들어가 초회왕(楚懷王)에게 친진정책을 권유했던 시기는 초회왕 18년 기원전 311년이다(초세가). 그 해에 진나라에 혜문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장의는 진나라를 떠나 위(魏)나라에 들어가 상국이 되었다가 2년 후인 기원전 309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소진(蘇秦)이 제나라에 들어가 연나라를 위해 활동하던 중 제나라 대신들이 보낸 자객이 살해되어 그 죄상이 발각된 해는 제민왕 17년 기원전 284년의 일이다. 이 기사는 기원전 309년에 죽은 장의가 25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된다. 참고로 장의의 권유에 따라 친진정책을 채택한 초회왕은 기원전 299년 진소왕과의 회맹을 위해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억류되어 결국은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

31)탕목읍(湯沐邑)/ 원래는 고대에 제후들이 천자를 조현할 때 영지의 일부를 하사하여 그곳에서 나오는 부세로 제후들이 조현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토록 한 것을 의미했으나 한나라 이후 황제, 황후, 공주 등의 사유토지를 지칭했다.

32)시도(厮徒)/ 잡일에 종사하는 군사

33)부양(負養)/ 군수품의 져나르는 잡부

34)요정(徼亭)/ 국경 지역에 설치한 역참

35)호분(虎賁)/ 호랑이처럼 용맹스러운 군사라는 뜻으로 중국 고대에 있어서 왕이나 군주의 근위병(近衛兵)을 말한다.

36)맹분(孟賁)/ 전국 때 진무왕의 호위 무사였던 맹열(孟說)을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용력이 있어 평소에 산 소의 뿔을 뽑았다고 했다. 그는 오획(烏獲)과 함께 용력으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 진나라 왕으로 즉위한 진무왕이 용사들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지의 용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로 들어가 높은 벼슬을 받았다. 무왕 4년 기원전 307년 무왕이 주나라에 들어가 구정 들기 시합을 맹열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이에 그 죄를 추궁 받아 살해되고 그 종족은 멸족되었다.

37)오획(烏獲)/ 전국 때 진나라의 역사로 진무왕의 호위무사다. 그의 힘은 능히 정을 들 수 있었다. 역시 힘이 장사인 진무왕이 힘겨루기를 좋아하여 그는 임비(任鄙), 맹열 등과 함께 진나라의 높은 관리가 되었다.

38)천균(千鈞)/ 일 균은 삼십 근을 말하며 춘추전국 때 한 근은 356그램임. 즉 일균은 약 10키로에 해당하니 천균이라 함은 10톤의 무게를 말한다.

39)장의가 모셨던 진혜왕의 재위기간은 기원전 337-311년이고 당시 같은 기간에 재위했던 제나라의 군주는 제위왕(전356-320)과 제선왕(전319-301)이다. 제민왕은 기원전 300년에 즉위해서 284년에 죽었음으로 진혜왕이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였다. 당시 장의가 유세했던 제나라 군주는 제민왕이 아니라 제선왕이라고 해야 한다..

40) 澠池會盟(민지회맹)/ 진소왕과 조효문왕이 기원전 279년에 지금의 하남성 澠池(민지)에서 회동한 일을 말한다. 장의는 진무왕 2년 기원전 309년에 죽었다. 이는 장의가 30년 후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음이다.

41)백마진(白馬津)/ 지금의 한남성 활현(滑縣) 동북에 있었던 중국 고대에 황하를 도하할 수 있었던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42)주무왕(周武王)이 은주왕(殷紂王)을 정벌할 때 제후와 그 군사들을 목야(牧野)의 뜰에 모아 놓고 서약(誓約)한 날이 갑자(甲子)일이다. 장의가 조왕에게 조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주무왕이 은주왕을 정벌한 것으로 비유해서 그 정벌일을 갑자일로 말한 것이다.

43)오도(午道)/ 종횡으로 교차하는 간선도로로 조와 제 두 나라의 접경지대에 있었다.

44)조무령왕(趙武靈王: 재위 전 325-299)의 부왕인 조숙후(趙肅侯)를 칭한다. 주현왕(周顯王) 20년 기원전 349년에 즉위하여 326년에 죽은 전국 때 조나라의 군주다. 성후(成侯)가 죽자 공자 설(紲)과 후계를 놓고 싸워 이겨 조나라 군주 자리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 제(齊)와 위(魏) 두 나라와 빈번하게 전쟁을 일으키고, 다시 북쪽의 운중(雲中)에서부터 대(代)까지 장성을 축조했다.

45)봉양군(奉陽君)/ 태어난 해는 알 수 업고 기원전 334년에 죽은 조나라의 대신이다. 이름은 성(成)이다. 조숙후(趙肅侯 : 재위 기원전 349-326)의 동생으로 그 밑에서 상국이 되어 봉양군으로 봉해졌다. 재임시 현자를 질시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조나라에 유세 온 소진을 배척하여 그로 하여금 연나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가 죽고 나서야 소진은 다시 조나라에 와서 유세를 행하여 조숙후로부터 신임을 받아 합종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후에 무령왕을 사구궁에서 아사케 만든 이태(李兌)의 봉호이기도 하다.

46)연소왕(燕昭王)/ 기원전 314년에 재위에 올라 279년에 죽은 전국 때 연나라의 군주다. 이름은 평(平) 혹은 직(職)이다. 연왕 쾌(噲)의 서자로 주난왕(周赧王) 원년에 상국 자지(子之)에 의해 연왕 쾌가 피살되자 소왕은 란을 피해 산으로 달아나 피신 중에 주난왕 4년(전314) 연나라 국인들에 의해 연왕에 옹립되었다. 일설에는 조무령왕(趙武靈王)에 의해 연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즉위 초에 황금대를 지어 천하에 현인을 구하자 위인(魏人) 악의(樂毅), 제인(齊人) 추연(鄒衍), 조인(趙人) 극신(劇辛) 등 일시에 천하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현인과 선비들을 예로써 대하고 백성들의 집에 문상을 하고 고아들을 돌보아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했다. 이에 시간이 지나자 연나라의 국세가 신장되었다. 주난왕 31년 기원전 284년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5국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70여 개 성과 그 도성 임치성을 점령했다. 연나라는 이로써 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47)조양자(趙襄子)/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25년에 죽은 춘추 말 당진국(唐晋國)의 대부로 영성(嬴姓) 조씨(趙氏)에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조간자(趙簡子) 조앙(趙鞅)의 아들로 당진국의 육경(六卿)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조간자가 아들 가운데 무휼이 현명하다고 생각해서 적자이며 큰 아들인 백로(伯魯)를 폐하고 그의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조앙이 죽고 조양자가 집정하자 그는 지(智), 한(韓), 위(魏) 등의 삼가와 힘을 합하여 육경 중 범씨와 중항씨(中行氏)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후에 세력이 강성해진 지씨들의 종주 지백(智伯)이 당진국의 군주 출공(出公)을 쫓아내고 의공(毅公)을 세워 정권을 멋대로 휘두르며 발호했다. 이어서 지백이 공개적으로 조씨들을 향해 영지의 할양을 요구하자 조양자가 거절했다. 이에 지백은 한(韓)과 위(魏) 두 종족과 연합하여 조씨들을 공격했다. 세가 불리했던 조양자는 지금의 산서성 태원(太原)의 진양(晋陽)으로 들어가 농성하며 대항했다. 지백은 분수(汾水)의 물을 막아 진양성으로 흘려보내 잠기게 했다. 이에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조양자는 그의 가신 장맹담(張孟談)을 보내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에게 당진국의 패권을 혼자 차지하려는 지백의 야욕을 설파하고 조씨들과 연합할 경우의 이해득실을 논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백에게 등을 돌리게 하였다. 주정왕(周定王) 16년 기원전 453년 조(趙), 한(韓), 위(魏) 삼가가 지가(智家)에게 반격을 가하여 멸하고 지가의 영지와 당진국의 공실의 땅 전부를 삼분하여 나누어 가졌다. 이 일을 역사상 삼가분진(三家分晋)이라 한다.

48)구주(句注)/ 산서성 대현(代縣) 서북에 있는 산이름으로 지금의 안문산(雁門山)을 말한다.

49)마계산(摩笄山)/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𣵠鹿縣) 동쪽에 있던 산이름이다. 탁록은 북경시 서북 쪽에 있다.

50)사기(史記) 조세가(趙世家) 조양자(趙襄子) 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조양자의 누이는 옛날 대왕(代王)의 부인이 되었다. 양자의 그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미처 상복을 벗기도 전에 북쪽의 하옥산(夏屋山)에 올라 잔치를 벌리고 대왕을 초청했다. 양자(襄子)가 요리사로 하여금 구리로 만든 국자를 들고 대왕과 그 시종들에게 음식을 바치며 술을 따르게 했다. 이윽고 주연이 무르익게 되자 양자가 아무로 몰래 이름이 락(犖)이라는 요리사로 하여금 구리로 만든 큰 국자로 대왕과 그 시종들을 쳐서 죽이도록 했다. 이어서 조양자는 대국(代國)의 땅을 평정하고 조씨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양자의 누이가 본국에 있다가 그 부군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호소를 하다가, 그녀의 비녀를 뾰쪽하게 갈아 찔러 죽었다. 대나라 사람들이 이를 가엾게 여겨 그녀가 죽은 곳의 이름을 마계산(摩笄山)이라고 불렀다.>

51)하간(河間)/ 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헌현(獻縣), 하간(河間), 청현(靑縣), 박두(泊頭) 일대의 통칭이다.

52)운중(雲中)/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자치구의 탁극탁(托克托) 동북쪽의 변방도시를 말함.

53)구원(九原)/ 지금의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治州) 포두시(包豆市) 동북

54)집규(執珪)/ 춘추전국시대 때 초나라의 군공(軍功)과 작위(爵位) 등급의 하나. 공신이 이 작위를 얻게 되면 집규(執圭)를 들고 국군을 조현했음으로 생긴 작위다. 지위는 열후(列侯)에 다음 가는 고위직이었다.

55)의거(義渠)/ 고대 중국의 이민족 이름으로 서융(西戎)의 일족이다. 지금의 감숙성 경양(涇陽)과 경수(涇水) 일대에 분포되어 살았다. 춘추 때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진나라와 매년 충돌하여 싸움을 벌렸다. 진소양왕 37년인 기원전 270년에 비로소 진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목록
8656
[일반]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16-2. 우경

열전16-2. 虞卿(우경) 1. 必疑合縱 媾乃可也(힐의합종 구내가야) - 우리가 합종을 행한다고 진나라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들어야만 강화조약
양승국 04-12-17
[일반]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13

열전13. 백기․왕전(白起王翦) 1104. 南拔鄢郢(남발언영),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도(郢都)를 함락시키고
양승국 04-12-15
[일반] 양후열전(穰侯列傳) 12.위염(魏冉)

열전12. 양후(穰侯) 위염(魏冉)   양후(穰侯) 위염(魏冉)은 진소왕(秦昭王)의 모친인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이다. 양후의 선조는
양승국 04-10-14
[일반]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 11.저리질, 감무, 감라

열전11. 저리자(樗里子)•감무(甘茂)•감라(甘羅)   저리자(樗裏子)는 이름이 질(疾)로 진혜왕(秦惠王)의 이모제(異母弟)고 저리질의
양승국 04-10-14
[일반] 장의열전(張儀列傳) 10

열전10. 장의(張儀) 장의(葬儀)는 위(魏)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鬼谷) 선생에게서 유세술(游說術)을 배웠다. 소진은 스
양승국 04-10-12
[일반] 소진열전(蘇秦列傳) 9

열전9. 소진(蘇秦) 소진(蘇秦)은 동주(東周)의 낙양(雒陽) 출신이다. 스승을 찾아 동쪽의 제나라로 들어가 귀곡선생(鬼谷先生)1) 선생에게
양승국 04-10-11
[일반] 상군열전(商君列傳) 8.상앙(商鞅)

상앙(商鞅) 열전8. 1. 不能任用 不會殺之(불능임용 불회살지), - 나를 임용할 능력도 없으니 죽일 능력도 없다. -. 상군(商君)은
양승국 06-04-16
[일반] 신릉군열전(申陵君列傳) 17.위무기(魏無忌)

열전17-1 신릉군 위무기(信陵君魏無忌) 能以富貴下貧賤(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賢能#
양승국 04-05-12
[일반]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18.황헐(黃歇)

열전18. 춘신군황헐(春申君黃歇) 以身徇君(이신순군),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遂脫强秦(수탈강진),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
양승국 04-05-12
[일반]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16-1.조승(趙勝)

평원군(平原君) 1120. 爭馮亭以權(쟁풍정이권),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1121. 如楚以救邯鄲之圍(여초이구한
양승국 04-05-12
[일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15.전문(田文)

열전15. 맹상군(孟嘗君) 1116. 好客喜士(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사귀우설), 천
양승국 04-05-12
[일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7

열전7 仲尼弟子(중니제자) -공자의 제자들- 공자가 말했다. 「나에게 배워 육예에 통한 자는 77명이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재
양승국 04-05-12
[일반] 외전. 도주공(陶朱公) 범려(范蠡)

외전 범려(范蠡) 범려외전(范蠡外傳)은 사마천의 사기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편과 화식열전(貨殖列傳)의 범려 부분을 발췌
양승국 04-05-12
[일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6

오자서(伍子胥) 열전5. 1073. 維建遇讒(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원급자서), 그 화가 오
양승국 04-05-12
[일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5-1. 손무(孫武)

열전5-1. 孫武列傳(손무열전) 손자(孫子) 무(武)는 제나라 사람이다. 병법으로 이름이 나, 오왕 합려(閤閭)를 접견하게 되었다. 합려가 말했다.
양승국 04-05-12
[처음][이전][1][2][3][4] 5 [6][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