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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2:07:308608 
신릉군열전(申陵君列傳) 17.위무기(魏無忌)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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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17-1 신릉군 위무기(信陵君魏無忌)

能以富貴下貧賤(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賢能詘于不肖(현능굴우불초),

현능하면서도 불초한 자들에게 능히 몸을 굽혔으니

唯信陵君爲能行之(유신릉군위능행지).

이는 오로지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

作<魏公子列傳>第十七(작<귀공자열전>제십칠)

그래서 <위공자열전>제십칠을 지었다.

1. 禮賢下士(예현하사)

- 현인들을 공경하고 선비들에게 몸을 낮춘 신릉군-

위(魏)나라의 공자 무기(無忌)는 위소왕(魏昭王)①의 막내아들이며 안리왕(安釐王)②의 이복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리왕이 서자 무기는 신릉군에 봉해졌다. 이때 위나라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해 진나라로 도망쳐 승상이 된 범수(范睢)③가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齊)④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진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대량성을 포위했다. 진나라의 장수 백기(白起)는 화양에서 진을 치고 있던 위군을 대파하고 그 장수 망묘(芒卯)⑤를 패주시켰다. 위왕과 신릉군은 그것을 매우 걱정했다.

위공자 무기(無忌)라는 위인은 어질고 선비들에게 스스로 몸을 낮추었다. 선비들이 어질지 않거나 불초하거나를 개의치 않고 모두에게 몸을 낮추어 예의로써 사귀며 자기가 부귀한 신분이라고 해서 감히 교만한 태도로 대하지 않았다. 이로써 선비들은 사방 천리의 땅에서 서로 다투어 달려와, 몸을 의탁하러 왔음으로 그들의 수효가3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여러 제후들은 어질 뿐 아니라 수많은 식객들을 거느리고 있던 공자의 존재 때문에 감히 군사를 동원하여10여 년 동안 위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어느 날 공자 무기와 안리왕이 마주 앉아 박(博)⑥을 두고 있는데 북쪽의 변경에서 봉화를 올려 급보를 전해왔다.

「조나라가 쳐들어와 조만 간에 우리나라 경계에 이를 예정입니다.」

외적이 쳐들어 온다는 급보에 박 판을 치우고 대신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하려고 하던 위왕을 무기가 제지하며 말했다.

「조왕은 단지 사냥을 하러 출병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경계를 침범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릉군은 여전히 박판을 치우지 않고 계속 두었다. 위왕은 두려워하여 박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북방에서 소식을 전해왔다.

「조왕은 단지 사냥을 위해 출병했지 우리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위왕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공자는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었는가?」

「조왕의 은밀한 일까지 깊이 알고 있는 신의 문객이 조왕이 하려는 일을 재빨리 저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은 그래서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위왕은 무기의 지혜와 능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무기에게 위나라의 국정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2. 夷門訪賢(이문방현)

- 이문에 숨어사는 현자를 방문하는 신릉군-

위나라에 후영(侯嬴)이라는 은사가 있었다. 나이가70이 되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대량의 이문(夷門)⑦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었다. 공자가 전해 듣고 많은 예물을 보내면서 만나보기를 청했다. 후영이 한사코 받지 않으며 말했다.

「신은 몸을 정결히 닦으며 수행하기를 수십 년이 되었으나 결국은 이문의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곤궁하게 산다하여 어찌 공자님이 보낸 재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자는 주연을 크게 열고 빈객들을 불렀다. 빈객들이 모두 좌정하자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병들을 뒤따르게 하고는 수레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공자는 수레의 상좌인 왼쪽 자리를 비어둔 체 자기가 직접 말고삐를 잡고 이문으로 갔다. 후생은 다 찢어진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곧바로 공자가 모는 수레에 올라 상석에 앉으며 전혀 거리끼는 바가 없이 행동하며 공자의 반응을 보려고 했다. 공자가 고삐를 잡으며 더욱 공손한 태도로 대했다. 후생이 공자에게 말했다.

「저에게는 시정의 푸줏간에 백정 일을 하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원컨대 수레를 몰아 그곳을 지나면서 그 친구를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공자가 수레의 방향을 바꿔 시장으로 들어가 푸줏간 앞에 당도하자 후생이 수레에서 내려 그의 친구 주해(朱亥)를 만나 거만한 모습으로 서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공자의 행동을 몰래 관찰했다. 그러나 공자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온화해졌다. 이때 공자의 집에는 위나라의 문무대신과 종친들이 대청을 가득 메우며 공자가 돌아와 술잔을 들어 연회를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공자가 후영을 기다리며 시종일관 수레의 고삐를 잡고 모습을 보았다. 공자를 수행했던 기병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후생의 행동에 욕을 해댔다. 후생은 자기의 거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공자의 태도를 보고 그의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수레에 다시 올라탔다. 이윽고 수레가 연회장에 당도하자, 공자는 후생을 인도하여 연회석의 상좌에 앉혔다. 공자가 좌중의 인사들에게 후생에 대해 찬양의 말로 두루 소개하자 손님들은 모두 놀랐다. 이윽고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생을 위해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올렸다. 후생이 공자의 말에 답하며 말했다.

「오늘 이 후영이 공자님을 난처하게 만든 일은 공자의 호의에 충분히 보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동문을 지키는 일개 문지기로 문을 보살피며 성문에 빗장을 지르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공자께서는 친히 수레의 고삐를 잡고 저를 찾아 왕림하여 저잣거리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맞이하셨음에도, 원래는 방문하지 않아도 될 친구의 집을 제가 찾아가려고 하자, 공자께서는 말머리를 돌려 특별히 그곳을 들려 저로 하여금 친구를 만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후영이 공자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오랫동안 공자님의 수레와 수행원들을 시장바닥에 오래 서 있게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는 더욱 그 태도를 공손히 하셨습니다. 이로써 시중 사람들은 모두 이 후영은 소인배고 공자님은 선비들에게 몸을 낮출 줄 아는 장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주연이 파하고 공자는 후생을 상객으로 모셨다. 후생이 공자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제가 방문했던 푸줏간에 일하던 주해(朱亥)라는 친구는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나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 그렇게 시정에 몸을 숨기고 백정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자가 듣고 사람을 몇 번이나 보내 청했으나 주해는 그때마다 사양했다. 공자는 결국은 주해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위안리왕20년 기원전257년, 장평(長平)에서

3. 竊符救趙(절부구조)

- 부절을 훔쳐 조나라를 구원하다. -

조군(趙軍)을 대파한 ⑧ 진소왕(秦昭王)이 보낸 진나라 군대는 승세를 타고 계속 진격하여 조나라의 도성 한단성을 포위했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의 동생 평원군(平原君)에게 시집을 가서 그의 부인이 된 위공자 무기의 누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안리왕과 신릉군에게 편지를 써서 구원군을 보내 한단을 구해 달라고 청했다. 무기의 누이는 위왕의 누이도 되었기 때문에 위안리왕은 장군 진비(晉鄙)에게10만의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원하도록 명했다. 진소왕이 알고 사자를 위왕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내가 조나라의 도성 한단성을 포위하여 이제 조석지간에 함락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감히 조나라를 구하려고 하는 제후들이 있다면, 내가 한단성을 함락시킨 후에 반드시 군사를 움직여 그 제후에게 죄를 물으리라!」

위왕이 진왕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사자를 진비에게 보내 진격을 멈추고 업성(鄴城)에 머무르며 조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는 양다리를 걸치며 정세를 관망하라고 했다. 위나라의 구원군이 행군을 멈추었다는 소식을 들은 평원군은 사자를 끊임없이 계속 위나라에 보내 신릉군을 책망하며 말했다.

「이 조승(趙勝)이 스스로 위나라의 공실과 혼인을 한 이유는 다른 사람이 곤궁한 처지에 빠졌을 때 그 위급함을 구하고자 하는 공자의 높은 의기를 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단성이 조석지간에 진나라에 항복하려 하고 있음에도 위나라의 구원군은 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 공자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능히 구할 수 있는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공자께서 이 승을 가볍게 보고 버림으로서 진왕에게 항복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군의 누이가 너무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신릉군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위왕에게 청하고 다시 문객들 중 변설에 능한 사람을 시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위왕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진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한 위왕은 끝내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릉군은 결국은 자기가 위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헤아린 끝에 조나라가 망하면 자기도 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시 문객들과 함께 전차100여 승을 준비한 신릉군은 조나라로 들어가 진나라 진영으로 돌격해서 조나라를 위해 죽겠다고 결심했다.

신릉군과 그 문객들 일행이 이문을 나설 때 성문을 지키고 있던 후생을 보게 되었다. 그는 후생을 찾아 그가 진군을 향해 돌격하여 목숨을 던져 죽으려고 한다는 결심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윽고 공자가 작별인사를 하고 성문을 나서는데 후생이 그를 향해 말했다.

「공자께서는 힘껏 싸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미 늙어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공자가 성문을 나와 몇 리를 가다가 속으로 불쾌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내가 후생을 지금까지 그렇게 후하게 대한 일을 세상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오늘 내가 싸우다 죽으려고 출전한다고 말했음에도 후선생은 일언반구의 송별하는 말도 없으니 도대체 내가 그에게 무슨 실례를 저질렀단 말인가?」

신릉군이 수레의 방향을 돌려 돌아가 후생에게 물었다. 후생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신은 공자께서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공자가 선비를 사귀시기를 즐겨하신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어려운 처지에 놓이시게 되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진나라 군사들과 싸우러 출정하려 합니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행위와 같습니다. 어찌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리 행동하신다면 지금까지 양성한 문객들을 어디다 써먹겠습니까? 공자께서는 평소에 신을 후하게 대우하셨지만, 오늘 죽음을 무릅쓰고 출전한다고 찾아온 공자를 전송하지도 않았으니, 공자께서는 가슴에 한을 품으시게 되어 이로 인하여 다시 돌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신릉군이 재배하며 계책을 물었다. 후생이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에 진비가 이끌고 있는 군사들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호부(虎符)가 위왕의 침실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 위왕에게 가장 총애를 받고 있는 여인은 여희(如姬)입니다. 그녀만이 왕의 침소를 무상으로 드나들 수 있어 호부를 몰래 훔쳐낼 수 있습니다. 옛날 여희의 부친이 어떤 사람에게 살해되었을 때 그녀가 품은 원한을 왕과 그 이하의 사람들이 그녀의 부친을 죽인 원수를 죽여 원한을 갚아주려고 했으나3년이나 되어도 그 원수의 머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여희가 공자에게 눈물로 호소했음으로 공자는 문객을 시켜 그 원수의 머리를 베어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여희는 공자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껏 기회를 얻지 못해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었습니다. 공자께서는 입을 한 번 열어 절실한 마음으로 여희에게 청하시면 그녀는 필시 기쁜 마음으로 허락할 것입니다. 그 호부로 이용하여 진비가 거느린 군사들을 빼앗은 후에 그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하여 진군을 물리쳐 조나라를 구원한다면, 공자께서는 오패(五覇)에 버금가는 공적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신릉군이 후영의 계책대로 여희에게 청하자 그녀는 과연 호부를 훔쳐 공자에게 주었다.

공자가 떠나라고 하자 후생이 말했다.

「장군이 밖에 있을 경우 왕의 명도 받들지 않을 수 있다는 법은 나라의 이익이 된다고 해서 생겼습니다. 공자께서 병부를 맞췄음에도 진비가 명을 받들지 않으면서 군사를 넘겨주지 않고 왕에게 다시 확인한다면, 일이 틀어져 공자는 위험에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신의 친구 주해를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역사라 진비가 공자의 명을 받든다면 좋은 일이지만, 듣지 않는다면 주해를 시켜 격살하십시오.」

후생의 말을 들은 공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후생이 물었다.

「공자께서는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어찌하여 우십니까?」

「진비는 용맹하고 기개 높은 숙장(宿將)입니다. 내가 호부를 제시했음에도 명을 듣지 않는다면 그를 죽여야 하는데 죄 없는 사람이 무고하게 죽여야 되니 이를 슬퍼해서지 어찌 내가 죽음을 두려워서 이겠습니까?」

말을 마친 공자가 즉시 주해를 찾아가 자기와 같이 갈 것을 청하자 주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시정의 푸줏간에서 방울 달린 칼을 들고 고기를 잡는 백정입니다. 저와 같은 비천한 사람을 공자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방문하여 저에 대해 문후를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때마다 답례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것들이 작은 예의에 불과하여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공자께서 급한 실이 생겼으니 이때가 바로 제가 목숨을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윽고 주해가 공자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공자가 성문을 나가다 후생을 만나 감사의 말을 했다. 후생이 말했다.

「신도 공자의 출행에 마땅히 따라야 하지만, 제가 이제 늙어 같이 갈 수 없습니다. 청컨대 공자의 일행이 진비의 군영에 당도하는 날짜를 계산하여 그 날이 되면 북향을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여 공자를 환송하려고 합니다.」

마침내 공자가 진비의 진영을 향해 길을 떠났다.

업성에 당도한 공자가 진비를 만나 그 직무를 대신한다는 위왕의 명을 거짓으로 전했다. 진비가 병부를 맞춰봤으나 마음속으로 의심하는 생각이 들어 손을 세차게 흔들며 공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가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라의 국경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나라의 막중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자께서는 단거(單車)로 와서 저를 대신하려고 하니 이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공자의 곁에 있던 주해가 소매 속에서40근이나 나가는 철퇴를 꺼내 진비를 격살했다. 공자가 진비의 군대를 장악하고 이어서 군사들을 점검한 후에 군령을 내렸다.

- 군중에 부자가 같이 종군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아버지 되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다.

- 형제가 같이 군중에 있다면 그 형은 집으로 돌아간다.

- 형제가 없는 독자가 있다면 돌아간다.」

남은 군사8만을 얻은 신릉군이 진나라 진영으로 진격하자 진군은 한단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신릉군은 마침내 한단성을 구원하고 조나라의 사직을 보존시켰다.

4. 人德不忘 德人忘之(인덕불망 덕인망지)

- 남에게서 받은 덕은 잊지 말고 남에게 베푼 덕은 잊어라-

조나라의 효성왕과 평원군이 몸소 국경 밖으로 나와 신릉군을 맞이했다. 평원군은 등에 화살통을 메고 향도가 되어 신릉군을 인도했다. 조왕이 신릉군에게 재배하며 말했다.

「옛날부터 지혜로운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공자에 미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때부터 평원군은 자기 자신을 감히 신릉군과 비교하지 못했다. 본국에 남아있던 후생은 신릉군이 진비의 군중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북쪽으로 머리를 향한 후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신릉군은 자기가 병부를 훔쳐 거짓 명으로 진비를 척살한 행위에 대해 위왕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은 진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조나라를 구원하려고 했던 목적을 달성한 신릉군은 그 군사들을 휘하의 장수에게 주어 위나라에 돌려보내고 자신은 혼자 조나라에 손님으로 남았다. 조효성왕은 진비의 군사들을 거짓 명으로 탈취하여 조나라를 구원해 준 신릉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평원군과 의논한 끝에 신릉군을 조나라의 다섯 개의 성에 봉하기로 했다. 신릉군이 듣고 그 마음에 교만과 자부심이 생겨 스스로 큰공을 세웠다고 얼굴에 덕색(德色)을 띄웠다. 그의 문객 한 사람이 신릉군에게 말했다.

「일에는 잊어야하는 하는 있고, 또한 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희부인이 공자에게 베푼 덕은 공자께서는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일이고, 원컨대 반대로 공자가 남에게 베푼 덕은 잊어야만 합니다. 하물며 위왕의 거짓 명을 전하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해서 공을 세웠으니 위나라의 입장에서는 충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공자께서는 스스로 자만하여 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공자께서는 조나라가 내리는 상을 받지 말기를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신릉군은 스스로를 책하며 마치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는 듯이 행동했다. 조왕이 자기의 왕궁을 소제토록 명한 후에 신릉군을 마치 주인을 맞이하듯이 대하며 서쪽 계단을 이용하여 전당에 오르게 했다.⑨공자가 사양하며 동쪽 계단을 이용하여 조왕의 뒤에서 옆걸음으로 올랐다. 신릉군이 스스로 자책하며 말하기를 자기는 위나라에 죄를 지은 죄인이라 조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고 했다. 조왕이 신릉군을 접대하며 저녁때까지 술을 마셨으나 차마 조나라의 다섯 개의 성에 봉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신릉군의 겸양하는 태도가 너무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신릉군은 결국은 위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조나라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왕은 호읍(鄗邑)⑩을 신릉군의 탕목읍(湯沐邑)⑪으로 하사했다. 이윽고 위나라도 신릉군의 봉작을 다시 돌려주었으나 신릉군은 계속 조나라에 머물렀다.

5. 折節大隱(절절대은)

- 조나라 시정에 몸을 숨기고 사는 은자와 몸을 굽혀 사귀다. -

조나라에 시정에 도박꾼 가운데 숨어 지내고 있던 모공(毛公)과 술도가에 숨어 지내고 있던 설공(薛公)이라는 처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릉군은 그 두 사람을 만나보려고 했다. 두 사람은 스스로 몸을 숨겨 신릉군을 피했다. 이에 다시 그들의 소재지를 확인한 신릉군은 두 사람이 숨어있는 곳에 아무도 몰래 접근하여 그들과 자리를 같이하며 매우 즐거워했다. 평원군이 그 소식을 듣고 신릉군의 누이인 그의 부인에게 말했다.

「나는 부인의 동생 신릉군이 천하에 견줄 수 없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망녕되게 시정의 도박꾼과 술도가와 같은 자들과 자리를 같이하며 어울렸다는 소문을 들었소. 신릉군이 망녕이 들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소!」

부인이 평원군의 말을 신릉군에게 전했다. 신릉군이 즉시 그 누이에게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

「나는 옛날부터 평원군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위왕에게 죄를 지으면서까지 조나라를 구원하여 평원군의 저에 대한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그러나 평원군의 친구 사귀는 방법은 단지 호방스러운 행동만 있었을 뿐 진정한 선비들을 구하려는 마음은 없는 듯합니다. 이 무기는 옛날 대량성에 있을 때부터 항상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지혜롭다는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제가 조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나 나는 단지 그 두 사람을 만나보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기가 그들을 따라가 비록 같이 사귀더라도 나는 그때도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평원군께서 그들과 사귀는 일을 수치로 여긴다하니 나 자신도 평원군에게는 사귀기에 부족한 사람인 듯합니다.」

신릉군이 부인 앞에서 물러나 자기의 숙사로 돌아가더니 행장을 꾸려 조나라를 떠나려고 했다. 부인이 평원군에게 신릉군의 말을 자세하게 전했다. 평원군은 즉시 신릉군을 찾아가 관을 벗고 사죄하며 조나라에 계속 머물러 주기를 애원했다. 평원군의 문객들이 이 소문을 듣고, 그들 중 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릉군에게로 옮겼다. 천하의 선비들도 달려와 신릉군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래서 신릉군의 문객이 평원군의 문객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6. 從毛薛(종모설)

- 모공과 설공의 설득으로 위급한 위나라를 구하기 위해 환국하다. -

신릉군 조나라에 머문 지10년이 되도록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진나라가 신릉군이 조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날 갑자기 군사를 내어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왕이 두려워하여 사자를 조나라에 보내 신릉군을 불렀다. 위왕이 자신의 옛날 행동에 대해 여전히 노여워하고 있다고 걱정한 신릉군은 대문에다 경계의 말을 써서 붙였다.

「감히 위왕의 사신을 위해 그 전하는 말은 나에게 고하는 자는 죽이리라!」

문객들은 모두 위나라를 등지고 조나라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라 감히 공자에게 권하여 위나라에 돌아가라고 권하지 못했다.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공자를 보고 말했다.

「공자님이 조나라로부터 존중을 받고, 그 이름이 제후들에게 높은 이유는 모두 위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위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공자를 부르고 있는데 공자는 오히려 남의 일처럼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대량성을 파하고 선왕을 모신 종묘를 무너뜨리게 가만히 내버려두려고 하는데, 공자는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니려 하십니까?」

두 사람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신릉군릐 얼굴색을 변하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객들에게 명하여 수레를 준비하도록 하여 그 즉시 귀국하여 위나라를 구원하려고 했다.

7. 河外敗秦 威振天下(하외패진 위진천하)

- 하외의 싸움에서 진군을 무찔러 이름이 천하를 진동시키다. -

위안리왕이10년 만에 조나라의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온 신릉군을 보자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서 위왕은 상장군의 인을 신릉군에 주어 위나라 군사들을 이끌도록 했다.

위안리왕30년 기원전247년, 신릉군이 제후들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가 위나라에 돌아와 장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제후들이 알고 나라마다 군사를 내어 위나라에 구원군을 보냈다. 신릉군이 제나라를 제외한 다섯 나라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 군사들을 하외(河外)에서 격파하고 진장 몽오(蒙驁)를 패주시켰다. 이에 승세를 탄 오국 연합군은 진군의 뒤를 추격하여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이에 진군은 감히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 일로 해서 신릉군의 이름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의 그 문객들로 하여금 신릉군에게 병법을 올리게 하자 신릉군은 그 병법들 모두에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일로 해서 세상에서는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라 칭했다.

8. 秦之反間 醇酒婦人(진지반간 순주부인)

- 진나라의 반간계에 빠져 술로 여인에 빠져서 죽다. -

진왕이 신릉군의 존재에 대해 걱정하여 황금 만 근을 뇌물로 사용하여 옛날 진비의 문객들 구하여 공자를 위왕에게 참소하도록 했다.

「공자가 도망쳐 외국에 산지10년만에 돌아와 위나라의 장군이 되었고 제후들이 보낸 장군들도 모두 공자의 휘하에 속해 있습니다. 제후들은 단지 위나라에는 공자만 있는 줄 알지 위왕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공자 역시 이 일로 인해 남면하여 왕이 되려고 하며 제후들은 또한 공자의 위세에 눌려 다 같이 함께 왕으로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간계를 써서 공자가 즉위하여 위왕이 되었는지를 안 되었는지를 묻는 축하의 편지를 거짓으로 보냈다. 위왕은 매일 신릉군을 모함하는 소문을 듣자 드디어는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위왕은 진나라의 반간계에 떨어져 다른 사람을 보내 신릉군을 대신하여 장군의 자리에 앉혔다. 신릉군도 남의 모함을 받아 다시 쫓겨나자, 즉시 병을 핑계로 조당에 나가지 않고 문객들과 함께 술자리를 벌려 밤새도록 독주를 마시면서 여인들을 가까이 했다. 매일 밤 여자와 즐기며 술을 마시면서4년 만에 이윽고 술로 인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해에 위안리왕도 역시 죽었다.

공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나라는 장군 몽오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하여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그 자리에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 후로 진나라는 위나라를 서서히 잠식하여18년 후인 기원전225년 위왕을 포로로 잡고 대량성을 폐허화 시켰다.

고조가 어려 미천한 신분일 때, 여러 차례에 걸쳐 공자의 지혜로움을 들어 알게 되었다. 이어서 천자의 지위에 올라 대량성을 지날 때마다 항상 공자를 위해 제사를 올렸다. 고조12년 기원전195년 군사를 이끌고 종군하여 경포(黥布)를 파하고 돌아올 때 신릉군의 묘를 지키기 위해 집 다섯 채를 지어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공자를 제사지내게 하였다.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대량성(大梁城)의 폐허를 지날 때 이문(夷門)이 있는 곳을 물어 찾아보았다. 이문은 대령성의 동쪽 문이다. 천하의 다른 공자들도 역시 선비들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신릉군처럼 산 속의 깊은 굴 안에 은둔해 있는 사람을 찾아 교유를 맺는 일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다 이유가 있다. 그의 명성이 제후들 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사실은 허전(虛傳)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고조가 매번 대량성을 지날 때마다 백성들에게 명하여 제사를 받들도록 하여 그의 제사를 끊이지 않게 했다.

《신릉군열전 끝》

주석

1)위소왕(魏昭王)/ 기원전295년 재위에 올라277년에 죽은 위나라의 왕이다. 즉위초인 기원전293년 진나라의 백기가 이끄는 진군과 이궐(伊闕)에서 싸워 대패하고10여 만의 군사를 잃었다. 이어서 계속 진나라의 공격에 시달린 결과 하내(河內)의60여 성과 하동(河東)의 땅400여 리 및 안읍(安邑)의 땅을 진나라에 바쳐야 했다.

2)안리왕(安釐王)/ 기원전276년에 재위에 올라 기원전243년에 죽은 전국 때 위나라 왕이다. 재위 중인 기원전273년 진장 백기(白起)와 화양(華陽)에서 싸워 대패하고 그 군사13만 명을 잃었다. 안리왕은 남양(南陽)의 땅을 진나라에 바치고 강화를 맺었다. 후에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성을 포위 공격하자 진비(晉鄙)에게10만의 군사를 주어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협을 가하자 진비에게 진군을 멈추고 전쟁의 상황을 살펴 본 후에 행동을 하도록 명했다. 후에 병부를 훔친 신릉군이 진비를 참살하고 위나라의 군권을 장악한 다음 진격하여 진군을 대파했다. 진장양왕이 다시 대군을 발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자 안리왕은 조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신릉군에게 구원을 청했다. 신릉군은 조나라에서 군사를 얻어 위나라로 진격하고 이어서 제나라를 제외한 다섯 나라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하여 하외에서 진나라 군사들을 크게 물리쳤다. 진나라는 이간책에 빠진 안리왕은 신릉군의 병권을 빼앗았다. 신릉군은 실의에 빠져 음주와 여색에 탐닉한 결과 병이 들어 죽었다.

3)범수(范睢)/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255년에 죽었다. 전국 때 진나라의 대신을 지냈으나 원래는 위(魏)나라 출신이다. 이론과 변설에 능했다. 남의 모함을 받아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齊)에게 잡혀 곤장을 맞은 치욕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다가 주검을 가장하여 목숨을 구해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바꾸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의 소양왕에게 여러 번에 걸쳐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여 군주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당시의 실권자인 양후(穰侯) 위염(魏冉)의 전횡과 발호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양왕은 위염으로부터 승상의 인장을 회수하여 범수에게 주고 지금의 하남성 보풍현(寶豊縣) 서남쪽의 응(應)을 식읍으로 내리고 응후에 봉했다. 그가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기간 중 진나라를 제외한 육국에 대한 외교를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에 입각하여 각개격파 전술을 사용했다. 진(秦)과 조(趙)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전국시대 때 제일 큰 싸움이었던 장평대전 후 명장 백기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를 대신하여 친구 정안평(鄭安平)을 천거하여 싸움에 임하게 했으나 그는 출전할 때마다 싸움에서 패했다. 이를 두려워한 범수는 스스로 진나라의 재상 직에서 물러났다. 일설에 의하면 소양왕이 그의 죄를 추궁하여 사형에 처했다고도 한다. 사기열전 범수채택(范睢蔡澤) 열전 참조

4)위제(魏齊)/ 전국 때 위나라의 대신. 위나라 공족 출신으로 소왕(昭王)과 안리왕(安釐王) 때 재상을 지냈다. 남의 무고하는 말을 믿고 범수(范睢)를 잡아 태형을 때리고 혼절시킨 다음 문객들에게 명하여 그의 몸에 오줌을 누게 하였다. 범수는 간신히 몸을 빼내 진나라로 가서 소양왕 밑에서 승상이 되었다. 범수가 옛날의 원한을 갚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여 위제를 잡으려고 하자 그는 조나라로 도망쳐 평원군에 몸을 의탁했다. 진나라가 다시 조나라를 위협하자 다시 조나라의 재상 우경(虞卿)의 도움으로 조나라에서 도망쳐 위나라로 돌아와 신릉군(信陵君)의 도움을 청했다. 신릉군이 위제를 의심하여 주저하자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위나라는 죽은 위제의 목을 잘라 진나라에 보냈다. 범수는 위제의 해골을 요강으로 사용하여 그의 원한을 갚았다.상세한 이야기는<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과 열국연의(列國演義) 97회과98회 참조>

5)망묘(芒卯)/ 전국 때 위나라의 대신이다. 지모와 사술로 위나라에 사도(司徒)에 중용되었다. 위안리왕(魏安釐王) 4년 기원전273년에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부근의 화양(華陽)에서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가 이끌던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그가 이끌던15만의 대군은 참수되고 그는 달아났다. 일설에 의하면 진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고 했다.

6)박(博)/ 12갈래의 길이 있는 말판에 올빼미(梟: 효), 사냥개(盧: 노), 꿩(雉: 치), 송아지(犢: 두), 주사위(塞: 색) 등의 여섯 가지 모양을 나무로 깎아 장기와 흡사하게 행마를 하는 놀이로 상고 때 오조(烏曹)가 발명했다고 했다. 자세한 행마법은 실전 되어 알 수가 없으나, 여섯 가지 말 중 효(梟)가 가장 강한 것으로 장기로 말하면 차(車)에 해당한다고 추정된다.

7)이문(夷門)/ 위나라 도성 대량성(大梁城)의 동문(東門)을 말한다.

8)장평대전(長平大戰)/ 기원전260년 진장(秦將) 백기(白起)가 이끌던 진군이 장평에서 조괄(趙括)이 이끌던40여 만의 조군(趙軍)과 싸워 조괄은 전사키고 항복한 조나라 군사들을40여 만 명을 모두 구덩이 파묻어 살해한 것을 말한다.

9)원문은 ‘引公子就西階’다. 고대에 손님을 전당으로 맞이할 때 취하는 규정으로 주인은 동쪽 계단을 이용하고 손님은 서쪽 계단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손님에 대해 존경심을 표하는 방법의 하나다. 손님이 만약 스스로 낮은 신분이라고 생각할 경우에는 주인의 뒤에서 동쪽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야 한다. 10)호읍(鄗邑)/ 지금의 하북성 백향현(栢鄕縣) 북쪽이다.

11)탕목읍(湯沐邑)/ 춘추시대 이전에는 천자가 제후들에게 하사한 봉읍이다. 제후가 입조할 때 몸을 깨끗이 하라는 뜻에 하사하여 그 비용으로 사용하라는 뜻에서 하사한 땅이다. 전국 시대에 접어들어서 제후가 그 대신들에게 하사한 땅도 같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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