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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18.황헐(黃歇)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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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18. 춘신군황헐(春申君黃歇)

以身徇君(이신순군),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遂脫强秦(수탈강진),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터 고열왕을 빼내었고

使馳說之士南鄕走楚者(사치설지사만향초자),

유세하던 선비들을 남쪽의 초나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黃歇之義(황헐지의).

황헐의 의로운 마음에서 였다.

作<春信君列傳>第十八(작<춘신군열전>제십팔)

이에 <춘신군열전>제십팔을 짓는다

1. 兩虎相鬪 駑犬受弊(양호상투 로견수폐)

-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다 지치면 늙은 개가 이익을 차지하는 법입니다. -

춘신군(春信君)은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헐(歇)이고 성은 황씨(黃氏)다. 세상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스승을 찾아 학문을 배워 초나라의 경양왕(頃襄王)을 모셨다. 경왕양은 변설에 능한 춘신군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때 진소왕(秦昭王)의 명을 받은 백기(白起)가 한(韓)과 위(魏)의 연합군을 화양(華陽)에서 격파하고 위나라 장수 망묘(芒卯)를 사로잡자, 한위(韓魏) 두 나라는 항복하고 진나라를 받들기로 했다. 이어서 진소왕은 다시 백기에게 명하여 한과 위 두 나라 군사들과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황헐이 초나라에서 사신의 임무를 띠고 진나라에 당도했을 때는 백기가 이미 출병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여 무(巫)와 검중(黔中)의 땅을 점령한 다음 영(郢)과 언(鄢)을 함락시키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경릉(竟陵)에 이르고 있었다. 초경양왕은 이로 인하여 나라를 진현(陳縣)으로 옮겼다. 그때 황헐은 진소왕(秦昭王)의 유인책에 걸려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속임을 당하여 억류된 초회왕(楚懷王)이 환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진나라는 초회왕의 아들 경양왕을 가볍게 보고 대군을 일으켜 초나라를 일거에 멸하려고 했다. 이에 황헐은 진나라로부터 초나라를 구하기 위해 표장을 써서 진소왕에게 올렸다.

「지금 천하에는 진(秦)과 초(楚)보다 더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오늘 저는 대왕께서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일과 같습니다. 즉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워 지쳐있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힘이 허약한 늙은 개가 이익을 취하는 경우와 같기 때문에 초나라를 정벌하기 보다는 친선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청컨대 그 이유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은 ‘사물의 이치가 극에 달하면 반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라 겨울과 여름이 번갈아 가며 찾아드는 이유도 그와 같은 이치 때문이다’라고 들었습니다. 즉 사물의 이치가 극에 달하면 위험에 빠지게 되고, 바둑알을 겹쳐 높이 쌓게 되면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날 진나라의 영토는 천하의 서쪽과 북쪽 두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세상이 생긴 이래 이처럼 넓은 땅을 차지했던 나라는 없었습니다. 선왕이신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그리고 대왕에 이르는 3세에 걸쳐 진나라는 제나라와 국경을 접함으로써 관동의 제후들이 합종의 친선을 맺으려고 시도하여 진나라 제나라와의 연횡을 끊으려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대왕께서 한나라에 보내 벼슬을 살게 한 성교(盛橋)가 한나라로 하여금 그 땅을 떼어 진나라에 바치게 했습니다. 이것은 한 명의 군사도 동원하지 않고, 또한 신의나 위엄도 필요 없이 한나라의 100리에 달하는 땅을 얻었으니 대왕은 가히 유능하신 군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대왕께서는 군사들을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대량성(大梁城)의 성문을 막고, 하내(河內)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연(燕), 산조(酸棗), 허(虛), 도(桃)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형(邢)으로 들어가자 위나라 군사들은 마치 흰구름이 바람에 날리듯이 흩어지며 감히 구원할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 대왕의 공적은 실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대왕께서는 용병을 중지하고 백성들을 쉬게 한 다음 2년이 지나자 다시 군사를 일으켜 포(蒲), 연(衍), 수(首), 원(垣)을 병합하고, 이어서 인(仁)과 평구(平丘)를 넘보다가, 황(黃)과 제양(濟陽)으로 되돌아와 스스로 지킴으로써 위나라는 드디어 진나라에 항복을 했습니다. 대왕께서는 다시 복마(濮磨)의 북쪽을 빼앗아 취해 진과 제나라가 통하는 허리로 삼음과 동시에 초와 조 두 나라가 통하는 척추를 끊었습니다. 천하의 여섯 나라 제후들은 다섯 번이나 한 곳에 집결하기는 했으나 감히 어려움에 빠진 제후국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대왕의 위엄은 실로 극에 달했다고 하겠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이미 이룩한 공적을 지키며 그 위엄을 유지하시며, 이웃나라를 공격하려는 마음을 버리시고, 인의지도(仁義之道)를 널리 행하시어 장래의 환난을 미연에 방지하신다면 삼왕(三王)의 반열에 올라 사왕(四王) 중의 한 사람이(以) 되실 수 있을 것이며, 오패(五覇)는 더하여져 육패(六覇)로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 백성이 많음을 믿고, 강한 군사력에 의지하여 위나라를 멸망시킨 위세를 가지고 힘으로써 천하의 주인이 되려고 하신다면 신은 감히 후환이 두려울 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 靡不有初 鮮克有終(미불유초 선극유종)」라고 했으며 <역경(易經)>에는 「狐涉水 濡其尾(호섭수 유기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하는 것을 쉬운 일이나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은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일 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옛날 지백(智伯)은 처음에 조씨들을 정벌하는 이로움만을 보고 후에 유차(楡次)에서 화를 당할 운명을 알지 못했고, 또한 오나라의 부차는 제나라를 정벌하는 이로움만 알았지 후에 간수(干隧)에서의 싸워 패배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두 나라는 대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눈앞의 이익이 곧바로 환난으로 바뀔 줄은 몰랐습니다. 오나라는 월나라를 믿은 나머지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 대군을 대파하고 돌아오다 삼저지포(三渚之浦)에서 월왕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지씨(智氏)가 한(韓)과 위(魏) 두 종족들을 믿고 그들의 군사들과 함께 조씨들을 공격하여 진양성(晉陽城)의 함락을 바로 눈앞에 두었을 때, 한위 두 종족이 반하여 지백(智伯) 요(瑤)는 유차(楡次)의 착대(鑿臺) 밑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오늘 대왕께서는 오로지 초나라가 망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지, 초나라가 망함으로써 한위 두 나라가 강해진다는 사실은 잊고 계십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염려되는 바는 그것은 취할 바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시(詩)에 이르기를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는 멀리 원정을 나가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초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우호국이고,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한위 두 나라는 적국에 해당합니다. 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깡충깡충 뛰는 교활한 토끼도, 사냥개 만나면 잡히게 되고, 남이 지닌 마음을 나는 헤아릴 수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한과 위나라를 믿으시는 이유는 그 두 나라가 대왕을 높이 받들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오나라가 월나라를 믿게 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신은「적은 용서하면 안 되고 시기는 놓치면 안 된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 과 위 두 나라가 대왕께 공손한 말로 진나라의 근심을 덜어 줄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대국을 속이고 있음을 신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나라는 한위 두 나라에 몇 대에 이르는 동안 아무런 은혜를 베풀지 않았고, 오히려 원한만 쌓았기 때문입니다. 무릇 한위 두 나라 부모 형제들은 진나라 군사들에게 줄을 이어 계속 죽어나가 이제 10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 나라는 황폐해지고 사직은 무너졌으며 종묘는 부셔졌습니다. 그들은 배가 갈라지고 창자가 끊어졌으며, 목은 잘리고 얼굴은 짓이겨졌으며 머리와 몸은 분리되어 그 해골은 잡초 밭에서 굴러다니거나 연못에 둥둥 떠다니고, 그 머리통은 땅에 굴러다니는 와중에 서로 국경을 맞대고 노려보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 자식, 늙은이, 어린아이들의 머리와 손을 묶어 줄지어 연결하여 무리를 지은 포로들의 행렬이 행길 위에 끊일 날이 없습니다. 또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외로운 귀신이 되어, 제사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구천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종족들은 모두 흩어지고 골육들은 사방으로 헤어져 여기저기 떠돌다가 모두가 남의 노복이나 비첩이 되어 그 수효가 천하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위 두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장차 그들은 필시 진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그 두 나라의 힘을 바탕으로 해서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시고 계시니, 어찌 그것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대왕께서는 장차 초나라를 공격하시려고 하는데 어떤 길을 취하여 군사들을 진격시키려고 하십니까? 대왕께서는 원수의 나라들인 한위 두 나라부터 길을 빌리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윽고 군사들이 출병할 때가 되면 대왕께서는 그 군사들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시게 될 것이며 그것은 바로 대왕의 군사들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원수나라들인 한위 두 나라를 돕게 되는 결과가 되는 일입니다. 대왕께서 한위(韓魏) 두 나라로부터 길을 빌리지 않고 다른 길을 취하여 초나라를 정벌하시려고 한다면 필시 수수(隨水)의 오른쪽 연안을 따라 나와 초나라를 공격해야 합니다. 수수의 오른 쪽 연안은 모두 넓고 큰 하천이거나 산림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험지라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입니다. 대왕께서 비록 그곳을 점령하신다 할지라도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고 할 수 없는 쓸모 없는 땅이 될 것이며, 결국은 대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했다는 이름만 얻을 뿐 실질적인 이익은 하나라도 취할 수 없으실 것입니다.

한편 대왕께서 군사를 보내 초나라를 공격한다면 한(韓), 위(魏), 조(趙), 제(齊) 4국은 필시 그 군사를 모두 일으켜 대왕에게 대항할 것입니다. 진과 초 두 나라의 군대가 오랫동안 맞붙어 싸우게 되면 위나라는 장차 자기나라에서 나와 유(留), 방여(方與), 질(銍), 호릉(胡陵), 탕(碭), 소(蕭), 상(相)을 공격하여 옛날 송나라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제나라가 남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면 사수(泗水) 연안의 땅은 모두 제나라 차지가 될 것입니다. 모두 사통팔달할 수 있는 기름지고 비옥한 평원인 이 땅들은 결국 위(魏)와 제(齊) 두 나라로 하여금 단독으로 차지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대왕께서 초나라를 무찌르는 일은 중원의 한과 위 두 나라를 살찌게 만들고 제나라를 강성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로써 강성하게 된 한과 위는 아마도 진나라와 어깨를 견주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제나라는 남쪽으로는 사수(泗水)를 경계로 삼고, 동쪽으로는 동해를 뒤에 업으며 북쪽으로는 하수(河水)에 의지하여 후환이 없어져 천하에는 제나라나 위나라보다 강성한 나라는 없게 될 것이며, 그 두 나라가 새로운 땅을 얻어 이득을 누리면서 하급관리만이라도 보내 조심스럽게 그 땅을 다스린다면, 1년 후에는 비록 그들 자신이 천하를 향해 칭제(稱帝)는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대왕으로 하여금 칭제를 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게 됩니다. 무릇 광대한 국토, 수많은 백성 및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신 대왕께서 일거에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원수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한(韓)과 위(魏) 두 나라로 하여금 제나라를 제(帝)로 받들게 하시는 일은 대왕의 실책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초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계책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이와 반대로 진과 초 양국이 연합하여 한나라를 압박한다면, 한나라는 필시 몸을 사리며 진나라에 대해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태항산(太行山) 동쪽의 험지에 요새를 세우고, 황하라는 수로의 이점을 이용한다면 한나라는 필시 대왕 관할의 제후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 대왕께서 10만의 군대로 신정성(新鄭城)을 지킨다면 위나라의 대량성은 두려움에 떨고, 허(許)와 언릉(鄢陵)의 성문을 닫아걸고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되면 상채(上蔡) 및 소릉(召陵)과는 그 통로가 단절되어 왕래가 불가하게 됨으로써 위나라도 결국은 대왕 관하의 제후로 남게 됩니다. 대왕께서 일단 초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으신다면, 한과 위라는 만승(萬乘)의 두 나라는 대왕의 관내후(關內侯)로 남게 되고, 그 결과 제나라와 국경을 맞닿게 되어 제나라 오른 쪽의 제수(濟水) 일대의 광활한 땅은 손을 한 번 드는 수고로움만으로도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대왕의 영토는 서해(西海)에서 동해(東海)에 이르게 되어 천하의 제후들을 아우를 수 있습니다. 이에 연과 조 두 나라는 제와 초의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되고, 제와 초 두 나라도 연과 조 두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어서 연과 조 두 나라를 궁지에 몰아 두려움에 떨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와 초 두 나라를 흔든다면 네 나라는 결국은 급하게 공격을 가하지 않아도 자연히 진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진소왕이 황헐(黃歇)이 올린 상서를 다 읽고 말했다.

「 과연 옳은 말이로다!」

진소왕은 즉시 백기(白起)의 출전을 중지시키고 한(韓)과 위(魏) 두 나라의 출병을 사절했다. 이어서 초나라에는 사자를 보내 예물을 전달하게 하고 친선관계를 맺었다.

2. 春信之明 太子出關(춘신지명 태자출관)

- 춘신군의 지혜로 태자를 탈출시키는 춘신군 -

황헐이 진소왕의 약속을 받고 초나라에 귀국하자 초나라는 다시 황헐을 사자로 삼아 태자 완(完)을 인질로 진나라에 보냈다. 진나라는 두 사람을 몇 년간 붙들어 두고 귀국시키지 않았다. 초경양왕(楚頃襄王)이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으나 태자는 귀국할 수 없었다. 태자와 진나라의 승상으로 있는 응후(應侯) 범수(范睢)와는 원래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황헐이 응후를 찾아가 말했다.

「상국께서는 정말로 초나라 태자와 친분이 깊으십니까?」

응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황헐이 다시 말했다.

「지금 초왕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태자를 귀국시키는 편이 진나라에 이로울 것입니다. 태자가 귀국하여 초왕의 자리에 오른다면 그는 필시 진나라를 중히 받들고, 또한 상국의 무한한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진과 초 두 나라 사이의 동맹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또한 만승지국에 베푸는 덕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 태자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단지 함양성에 사는 일개 필부에 불과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반면에 초나라 본국에서는 태자를 다른 사람으로 대신 세워 새로운 왕은 필시 진나라를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 동맹국을 잃고 만승지국과의 친선관계를 끊는 일은 좋은 계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상국께서는 심사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응후가 황헐의 말을 진소왕에게 고했다. 진왕이 듣고 말했다.

「그렇다면 태자의 태부(太傅)를 먼저 초나라에 보내 초왕의 병세를 먼저 살펴보고 오도록 하시오. 초왕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보고 나서 태자를 귀국시킬지의 여부를 결정하도록 합시다.」

범수로부터 소왕의 말을 전해들은 황헐이 태자 완에게 그의 계책을 말했다.

「진나라가 태자님을 억류시키고 있는 이유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초나라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지금 태자께서는 진나라에 이익을 줄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신은 그것을 심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나라 본국에서는 양문군(陽文君)의 두 아들이 있어 만일 부왕께서 졸지에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태자님께서 곁에 있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필시 양문군의 아들이 그 뒤를 이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태자께서는 결국 초나라의 종묘사직에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기회를 봐서 도망쳐 지금 초나라 본국에서 와 있는 사자들과 함께 진나라를 몰래 빠져나가시면 제가 목숨을 걸고 진나라의 추격을 지연시켜 보겠습니다.」

이윽고 태자가 변복을 하고 초나라 사자가 타는 수레의 어자가 되어 진나라의 관문을 빠져나갔다. 그 동안 황헐은 태자가 묵고 있던 관사를 지키며 그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찾아오는 빈객들을 피했다. 이윽고 태자의 일행이 멀리 벗어나 진나라 군사들이 그 뒤를 추격할 수 없다고 생각한 황헐은 즉시 진소왕을 알현하고 자기가 태자를 도망치게 했다고 자수했다.

「초태자는 이미 귀국길에 올라 관문을 빠져나가 멀리 가 있습니다. 이 황헐은 마땅히 죽을죄를 지었으니 저에게 죽음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진소왕이 대노하여 황헐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청을 허락하려고 했다. 그러나 응후가 황헐을 위해 말했다.

「황헐은 신하된 자로써 그 주인을 위해 몸을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태자는 이미 귀국했으니 초왕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이왕지사 태자가 이미 본국으로 달아났으니 황헐의 죄를 사하여 귀국시키신다면 그는 필시 초왕에게 중용될 것입니다. 대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우리 진나라를 받들 것입니다.」

진소왕은 황헐을 벌주지 않고 초나라에 귀국시켰다.

황헐이 초나라에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초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完)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초고열왕(楚考烈王)이다. 고열왕 원년, 기원전 262년 황헐은 초나라의 상국이 되고 춘신군(春信君)에 봉해져 회하(淮河) 북쪽의 땅 12개 현을 하사 받았다. 그리고 15년 후에 황헐은 초왕에게 상주했다.

「회수의 북쪽 땅은 제나라와 국경이 접한 변경의 땅입니다. 제나라와의 관계가 급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군으로 만들어 직접 다스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어서 황헐은 회수 북쪽의 봉지 12개 현을 공실에 바치고 그 대신 강동에 봉해줄 것을 청했다. 고열왕이 허락했다. 춘신군은 폐허가 된 오성에 다시 성을 쌓고 자기 봉지의 도읍으로 삼았다.

3. 三千珠履 自慚形穢(삼천주리 자참형예)

- 진주가 박힌 신발을 신은 춘신군의 3천 식객들이 평원군의 식객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하다. -

춘신군(春信君)이 초나라의 상국이 되었을 때는, 제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조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이,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다투어 선비들을 접대하고 빈객들을 초빙하는 데 힘을 기울여 서로 경쟁하여 그 힘으로 나라를 돕고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춘신군이 초나라의 상국이 된지 4년째 되는 해인 기원전 260년에 진나라가 장평(長平)에서 40여 만에 달하는 조나라의 군사들과 싸워 이겼다. 그 다음 해는 진나라 군사들이 조나라의 도성 한단성(邯鄲城)을 포위했다. 한단이 사태의 위급함을 초나라에 고하자, 초나라는 춘신군에게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한단성을 포위했던 진나라 군사들은 물러갔다. 춘신군을 군사들을 이끌고 초나라에 돌아왔다. 춘신군이 초나라 상국이 된지 8년째인 기원전 256년 초나라는 북쪽으로 군사를 발하여 노나라를 멸했다. 초나라는 순경(荀卿)을 난릉령(蘭陵令)에 임명했다. 그때부터 초나라는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조나라의 평원군이 춘신군에게 사자를 보내자, 춘신군은 그 사자를 상객들이 머무는 빈관에 머물게 했다. 조나라의 사자들이 머리에는 대모잠(玳瑁簪)을 꽂고, 허리에는 주옥으로 장식한 칼집을 차고 춘신군의 문객들을 상면하기를 청했다. 당시 춘신군은 3천 명의 문객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상객들은 조나라 사신들을 만나기 위해 모두 구슬로 장식한 신발들을 신고 나왔다. 조나라 사신들은 그것을 보고 매우 부끄러워했다.

춘신군이 초나라 상국이 된지 14년째인 기원전 250년에, 진나라에서는 장양왕(莊襄王)이 새로운 진왕의 자리에 올라 여불위(呂不韋)를 재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했다. 같은 해에 진나라가 동주를 멸하고 그 땅을 취했다.

그리고 22년째인 기원전 242년에, 진나라가 끊임없이 공격해 올 것을 걱정한 제후들이 서로 상의하여 합종을 행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초왕을 합종장으로 추대하자 춘신군이 합종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했다. 제후들의 연합군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진나라 군사들이 관을 나와 반격을 가했다. 제후들의 군사들은 싸움에서 지고 뿔뿔이 흩어졌다. 초고열왕은 그 책임을 물어 춘신군을 책망했다. 이로써 춘신군과 고열왕의 사이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4. 遷都壽春(천도수춘)

- 도성을 진현(陳縣)에서 수춘(壽春)으로 옮기는 춘신군 -

춘신군의 문객 중 관진(觀津) 출신의 주영(朱英)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초나라는 강하나 대감이 그 세를 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왕께서 살아 계실 때, 우리는 20년 동안이나 친선관계를 유지하여 진나라의 침공을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진나라가 민애(黽隘)의 요새(要塞)를 넘어서 초나라를 공격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또한 양주(兩周)로부터 길을 빌릴 경우는 한(韓)과 위(魏) 두 나라를 둥 뒤에 두고서는 초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위나라는 조만 간에 망하게 되어 있어 허(許)와 언릉(鄢陵)의 땅에 연연해하지 않고 기꺼이 진나라에 바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우리 초나라 도성과는 16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제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진과 초 두 나라간의 싸움은 날이 갈수록 더욱 빈번해 질 것입니다. 」

이에 초나라는 진현(陳縣)을 떠나 수춘(壽春)으로 천도했다. 한편 진나라는 위(衛)나라를 야왕성(野王城)으로 옮기고 위나라의 옛 땅에는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이에 춘신군은 자기의 봉지인 오성(吳城)에 머물며 초나라 상국의 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5. 李園獻妹(이원헌매)

- 이원이 천하절색인 자기 누이를 춘신군에 바치다. -

초고열왕에게 자식이 없는 것을 걱정한 춘신군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여인들을 선발하여 차례로 바쳤다. 그 여인들의 수가 매우 많았음에도 결코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 조나라 사람 이원(李園)이 자신의 여동생을 대동하고 초나라에 와서 초왕에게 바치려고 했으나, 왕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여동생이 왕의 총애를 잃을까봐 걱정했다. 이에 이원은 그이 여동생을 춘신군에게 바치기 위해 그의 문객이 되었다가 어느 날 고향집에 다녀오겠다고 휴가를 청해 일부러 기일을 어겨 늦게 돌아왔다. 춘신군이 돌아왔다고 배알을 하던 이원을 보고 늦은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제왕(齊王)이 사자를 보내 저의 여동생을 원함으로, 제가 그 사자와 함께 식사를 같이 하다 이렇게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

춘신군이 물었다.

「정혼을 했는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대의 동생을 한 번 볼 수 있겠는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어서 이원이 그의 여동생을 바치자 춘신군은 그녀를 매우 총애했다. 이윽고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 이원은 그의 여동생과 의논하여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춘신군이 한가한 틈을 타서 말했다.

「초왕이 비록 대감을 소중히 여기며 총애를 한다 할지라도, 그 형제나 자식과 같이 하겠습니까? 대감께서 초나라의 상국이 된지 어언 20년이 넘게 된 지금까지 초왕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한 결과 조만 간에 그가 죽게 되면 아마도 형제들 중 한 사람이 그 뒤를 잇게 되어 초왕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군주는 각각의 옛날 친했던 사람들을 기용하여 중용할 것인데, 어찌 대감께서 더 이상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비록 그렇게 되지 않을지라도, 대감께서는 오랫동안 중용되어 국정을 전담해오면서 왕의 형제들에게 실례를 범한 일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왕의 형제들 중 하나가 초왕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 화가 대감의 신상에 미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무슨 방법으로 재상의 인장과 강동의 봉지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오늘 첩은 대감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저의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첩은 또한 대감의 총애를 받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대감의 존귀한 지위를 이용하여 첩을 초왕에게 바친다면, 왕은 필시 첩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다행히 제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대감의 아들이 왕이 되어 초나라의 모든 것은 대감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제말을 따르는 것과 대감의 몸에 예측할 수 없는 화가 이르게 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좋겠습니까?」

이원의 여동생 말이 매우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춘신군은 즉시 그녀를 아무도 몰래 내보내 은밀한 곳의 관사에 머물게 한 다음 초왕에게 천거했다. 초왕이 그녀를 불러 사랑을 한 끝에 사내아이를 얻게 되어 태자로 봉하고 이어서 이원의 누이는 왕비가 되었다. 초왕이 이원(李園)을 귀하게 여기자, 이원은 이때부터 초나라의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원은 그이 여동생이 입궁하여 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태자가 되자 혹시 춘신군이 그 비밀을 누설하거나 혹은 더욱 교만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아무도 몰래 자객들을 고용하여 춘신군을 죽여 그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때는 이미 초나라 국인들 중에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꽤 있었다.

6. 毋望之福 毋望之禍(무망지복 무망지화)

- 예상치 못한 복과 예상이 못한 화 -

춘신군(春信君)이 초나라의 재상이 된지 25년째인 기원전 239년에 초고열왕이 병이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주영(朱英)이 춘신군을 찾아와 말했다.

「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복이 있고, 반면에 예상치 못한 화가 있습니다. 지금 대감께서는 생사가 무상한 세상에 살고 계시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주를 받들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사람을 곁에 두시지 않는 것입니까?」

「예상치 못한 복이란 무엇인가?」

「대감께서는 초나라의 재상 자리에 20년 이상을 계십니다. 비록 명목은 재상이지만 실제로는 초왕과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초왕은 병이 들어 조석지간에 죽을 운명입니다. 그리되면 대감께서는 계속해서 재상이 되고 어린 군주가 설 것이며, 재상이 군주를 대신해서 국정을 행할 것입니다. 마치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처럼 되는 일입니다. 이어서 왕이 장성하게 되면 즉시 정권을 돌려주던지, 아니면 자신이 직접 왕의 자리에 올라 남면(南面)하여 고(孤)라 칭하며 초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상치 못한 복입니다.」

「예상치 못한 화란 무엇을 말함인가?」

「이원은 자기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대감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대감을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군권을 갖지 못한 이원은 아무도 몰래 자객들을 거두어 기른 지 오래 되었습니다. 초왕이 죽으면 이원은 필시 먼저 자객을 풀어 대감을 죽여 그 입을 막으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예상치 못한 화입니다.」

「그렇다면 화를 미연에 막을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

「대감께서 저를 낭중(郎中)에 임명하시기 바랍니다. 초왕이 죽게 되면 이원이 먼저 입궁해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 제가 대감을 위해 이원을 잡아서 죽이겠습니다. 제가 바로 대감의 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두시오! 이원은 원래 심약한 위인인데다 또한 나와는 원수진 일이 없는 사람이오. 그런데 장차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일어 날 수 있단 말이오?」

자기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본 주영은 화가 자기 몸에 미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다른 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7. 當斷不斷 喪命滅族(당단부단 상명멸족)

- 결단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아 목숨을 잃고 멸족당하다. -

그리고 17일 후에 고열왕이 죽었다. 이원이 과연 먼저 입궁하여 자객을 성문 밖에 잠복시켰다. 이윽고 춘신군이 성문 앞에 이르자 이원이 보낸 자객들이 들고일어나 그를 협공하여 찔러 죽이고 그이 머리를 베어 성문 밖에 버렸다. 이어서 이원은 관리들을 보내 춘신군의 일족을 멸족시켰다. 이원의 여동생이 춘신군의 사랑을 받아 임신을 하고, 다시 춘신군이 임신한 그 여동생을 초왕에게 바쳐 태어난 아들이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이가 초유왕(楚幽王)이다.

그 해는 진시황 9년으로 노애(嫪毐)가 반란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삼족이 주살되고 그 여파로 여불위가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옛날 내가 초나라에 들렸을 때 춘신군이 살았던 옛 성과 궁궐은 참으로 화려했었다. 처음에, 춘신군이 진소왕을 설득하고, 다시 목숨을 걸고 태자를 탈출시켜 귀국시킨 일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었다. 후에 이원같은 필부에게 제압 당한 것은 그가 늙어 지혜가 무디어졌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 마땅히 결단을 해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도리어 화가 미칠 것이다’라고 했는데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석

1)초경양왕(楚頃襄王)/ 재위 기원전 299 - 263년. 초회왕(楚懷王)의 아들로 태자의 신분으로 제나라에 인질로 들어갔다가 기원전 299년 초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갔으나 억류당하고 귀환하지 못하자 제민왕의 허락을 얻어 귀국하여 다음 해에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진나라가 다시 공격하여 초나라의 16개 성을 빼앗아 가자 그는 할 수 없이 진나라와 강화를 맺고 다시 진, 한, 조, 위, 연 등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진나라와의 평화조약을 파기하고 이 번에는 제와 한 두 나라와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하고 주나라를 멸하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기원전 280년부터 277년까지 4년 동안 진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백기를 장수로 삼아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인 영도(郢都)를 함락시키고 그 주변일대를 점령하자 초나라는 400년 동안 도성으로 삼았던 땅을 버리고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나라를 옮겨야 했다. 이후로 초나라는 국세가 기우러져 다시는 중원의 패권다툼에 끼지 못했다. 후에 다시 진나라와 강화를 하고 태자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2)진소왕(秦昭王)/ 진소왕(秦昭王)/ 소양왕(昭襄王)이라고 한다. 재위 기원전 324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306년에 진왕의 자리에 올라 기원전 251년에 죽었다. 진시황의 증조부다. 이름은 직(稷), 혹은 측(側) 또한 즉(則)이라 했으며 성은 영씨(嬴氏)다. 진무왕(秦武王)의 이복동생으로 무왕이 재위시 연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이어서 그때까지 자식을 두지 못한 무왕이 주나라에 가서 정을 들어 힘내기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게 되자 연나라에서 귀국하여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18살의 어린 나이로 재위에 오르자 그 모친 선태후(宣太后)가 섭정을 행하고 그녀의 동생 위염(魏冉)을 장군으로 삼아 함양(咸陽)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무왕의 동생 서장(庶長) 영장(嬴壯)이 반란을 일으키자 위염은 장(壯)을 포함한 진나라의 수 많은 대신과 귀족들을 살해했다. 이후로 진나라의 정권은 선태후가 장악하고 저리질(樗里疾)과 위염(魏冉)을 앞뒤로 번갈아 가며 진나라의 승상으로 삼아 진나라의 정권은 공실의 귀족과 위척이 전단하게 되었다. 진소왕 11년 기원전 266년 소왕은 위나라 출신의 범수(范睢)의 계책을 받아들여 선태후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위염등의 귀척들을 쫓아냈다. 위염의 후임으로는 범수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백기(白起)와 사마착(司馬錯) 등을 장군으로 삼아 동진정책을 추진하여 군사적으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 기원전 290년 위나라를 공격하여 그 하동(河東)의 땅을 점령했다.

2. 기원전 284년 도위(都尉) 사리(斯離)가 한(韓), 위(魏), 연(燕), 조(趙) 등의 4국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정벌하여 그 국세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3. 기원전 278년 다시 백기로 하여금 남쪽으로 진격하게 하여 초나라의 영도를 점령함으로써 초나라의 근거지인 동정호 일대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초나라는 이로써 그 나라를 지금의 하남성 진현으로 옮겨야만 했다.

4. 기원전 260년 다시 조나라의 45만 대군과 장평에서 싸워 이겨 항복한 그 군사들을 구덩에 파묻어 모두 살해하고 그 땅에 상당군을 설치하여 진나라 영토로 삼았다.

5. 기원전 255년 계속해서 남진하여 주나라를 멸했다. 이로써 800년 이상 존속했던 주나라의 명맥을 끊었다.

진소양은 그의 재위시 진나라의 국력을 관동의 6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만듬으로써 후에 진시황의 중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3)언(鄢)/ 지금의 호북성 의성시(宜城市) 동남에 있던 초나라의 별도(別都)로 중원진출을 위한 전략적인 거점이었으나 백기의 수공으로 인해 십 수만의 군민이 수몰되어 전멸되자 초나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그 수도인 영성을 백기에게 내주소 나라를 옮겨야만 했다.

4)경릉(竟陵)/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잠강(潛江) 서쪽, 초나라 도성인 영성(郢城) 동 30키로 있었던 고을로 진나라는 이곳에 경릉현(竟陵縣)을 설치하고 한나라가 따랐다.

5)기원전 277년부터 2년에 걸쳐 백기가 이끌던 진군(秦軍)이 초나라의 별성(別城)인 언성(鄢城)과 도성(都城)인 영성(郢城)을 함락시킨 언영지전(鄢郢之戰)을 말한다. 초나라는 영성을 진나라에 빼앗기고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나라를 옮겼다.

6)원문에는 ‘先帝文王, 莊王之身, 三世不妄接地于齊’라고 되어 있으나 문왕은 무왕과 소양왕의 부왕인 혜문왕(惠文王)을 말하고 장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왕은 소양왕의 손자이며 진시황의 부왕인 장양왕(莊襄王)을 가리키는 듯 하나 문맥상 맞지 않는다. 따라서 소양왕을 포함해서 3세라 함은 혜문왕, 무왕을 말한다.

7)성교(盛橋)/ 전국 때 진나라의 대부 전국책에는 성교(成橋)로 되어있다. 진소양왕의 명을 받들어 세 번에 걸쳐 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한왕을 위협하여 그 북쪽의 백리에 달하는 땅을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또한 진시황의 동생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8)하내(河內)/ 지금의 하남성 황하 북쪽 연안을 말한다.

9)연(燕)/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경내의 전국 때 위나라 땅으로 남연(南燕)이다.

10)산조(酸棗)/ 지금의 하남성 연진(延津) 서남. 춘추 때 정나라 땅이었다가 후에 위(魏)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위문후(魏文侯) 32년 기원전 393년에 정나라를 정벌하고 산조(酸棗)에 성을 쌓았다.( 魏文侯32年‘ 伐鄭, 城酸棗) 후에 진나라가 산조현(酸棗縣)을 설치했다

11)허(虛)/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경내 서

12)도(桃)/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서북

13)형(邢)/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동쪽의 형구(邢丘)를 말한다.

14)포(蒲)/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경내에 있었던 포판(蒲阪)을 말한다.

15)연(衍)/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북쪽의 유림진(柳林鎭)을 말한다.

16)수(首)/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동남의 주당진(周堂鎭) 부근을 말한다.

17)원(垣)/ 지금의 산서성 원곡현(垣曲縣) 동남의 왕모진(王茅鎭)을 말한다.

18)인(仁)/ 세가지 설이 있다. ①國策地名考(程恩澤) : 今河南寧陵縣西南有仁州 ②讀史方與紀要 : 修武縣境有仁亭 則 河南修武縣境 ③金正煒說 ‘仁‘ 當爲 ’任‘ 任邑在今河北任縣東 春秋爲晉地

19)평구(平丘)/ 지금의 하남성 봉구현(封邱縣) 동

20)황(黃)/ 하남성 란고현(蘭考縣) 서 두량진(杜良鎭)을 말한다.

21)제양(濟陽)/ 하남성 란고현(蘭考縣) 동북의 고양진(堌陽鎭)을 말한다.

22)복마지북(濮磨之北)/ ①정은택(程恩澤) 설 : 복(濮)은 복수(濮水)를, 마(磨)는 역산(歷山)으로 지금의 하남성 범현(范縣) 동남을 말한다.. 즉 복마지북(濮磨之北)이라 함은 복수와 역산의 북쪽 지대를 가리킨다. ②장기(張琦) 설 : 복마지북이라 함은 지금의 하북성 동창(東昌), 대명(大名) 두 현 일대에 걸친 지역을 말한다. ③포표(鮑彪) 설 : 복(濮)은 지금의 강한지간(江漢之間)에 있었던 복국(濮國)을, 마(磨)는 지금의 하북성 형주시 부근을 흐르는 저수(沮水) 강안의 마성(磨城)을 말한다. 마성은 오자서가 초나라의 영도를 공략할 때 축조한 성곽으로 지금의 호북성 당양(當陽)부근에 있었다.

23)삼왕(三王)/ 하나라를 세운 우왕(禹王),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 주나라를 세운 주무왕(周武王)을 말한다.

24)<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탕지습(湯之什)에 나오는 문구로 ‘靡不有初(미불유초)는 - 처음부터 잘하지 않는 사람 없건만’, ‘鮮克有終(선극유종)는 - 끝까지 잘한 사람은 많지 않다네!’라는 뜻이다. 주려왕(周厲王)이 무도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고 법도와 장전(章典)이 문란해짐을 본 소목공(召穆公)이 개탄하며 지었다고 했다.

25)주역 64괘 중 감하리상(坎下離上)의 화수미제(火水未濟)의 卦爻辭(괘효사)다. 원문은 ‘小狐汔濟(소호흘제), 濡其尾(유기미), 無攸利(무유리)’로서 ‘작은 여우가 날쌔게 물을 건너려다가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라는 뜻이다.

26)유차(楡次)/ 지금의 산서성 유차시(楡次市)로 태원시 동남쪽의 춘추 때는 당진(唐晉), 전국 때는 조나라 령이었다가 진장양왕 3년 기원전 247년에 장군 몽오가 유차를 포함한 37개 성을 함락시키고 유차현(楡次縣)을 설치했다. 성안 안에 착대(鑿臺)가 있어 그 밑에서 조간자(趙簡子)가 진양의 싸움에서 지백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이를 유차지화(楡次之禍)라 한다.

27)간수(干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 오현(吳縣) 서북쪽의 고을로 춘추 말 때 오왕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句踐)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자결한 곳이다.

28)애릉(艾陵)/현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경내 남쪽에 있는 노산(魯山) 서쪽 산록의 고을로 제나라 땅이다. 기원전 489년 오왕 부차가 이 곳에서 제나라 대군을 대파했다.

29)삼저지포(三渚之浦)/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蘇州市) 동남쪽으로 동강(東江), 송강(松江), 루강(婁江)이 합쳐지는 포구를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는 삼강지포(三江之浦)로 되어있다.

30)원문은 ‘ 大武遠宅而不涉’이나 시경에는 이 구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31)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소민지습(小旻之什)> <교언(巧言)> 중의 한 구절이다. 본 시귀가 속하는 단락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奕奕寢廟 君子作之(혁혁침묘 군자작지)

크고 빛나는 저 종묘는 옛 선왕들이 지으셨고

秩秩大猷 聖人莫之(질질대유 성인막지)

위대하고 올바른 법도는 옛 성인이 정하셨네

他人有心 予忖度之(타인유심 여촌탁지)

남들이 지닌 마음은 내가 헤아릴 수 있으니

躍躍毚兎 遇犬獲之(적적참토 우견획지)

쏜살같이 달리는 약은 토끼도 사냥개 만나면 잡힌다네

32) 敵不可假 時不可失(적불가가 시불가실)

33)원문은 隨水右壤(수수우양)이다. 수수는 몇 가지 설이 있다. ①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 이서의 땅으로 전국 때 초나라 땅이다.② 지금의 호북성 수현(隨縣) 일대로 춘추 때 초나라에 병합된 수나라의 옛 땅이다. ③ 지금의 호북성 대홍산맥(大洪山脈) 일대를 말한다.

34)유(留)/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 동남.

35)방여(方與)/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서쪽

36)질(銍)/ 지금의 안휘성 숙주시(宿州市) 서쪽.

37)호릉(胡陵)/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동남쪽

38)탕(碭)/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碭山縣) 남

39)소(蕭)/ 지금의 안휘성 소현(蕭縣) 서북

40)상(相)/ 지금의 회북시(淮北市) 서쪽

41)허(許)/ 지금의 하남성 허창시(許昌市) 일대를 말한다.

42)언릉(鄢陵)/ 현 하남성(河南省) 허창시(許昌市) 동쪽 20km 지점인 언릉현 일대를 말한다. 기원전 575년 당진(唐晉)의 려공(厲公)이 이끄는 당진(唐晉), 제(齊), 로(魯), 송(宋), 위(衛)의 연합군과 초공왕(楚共王)이 이끄는 초(楚), 정(鄭) 연합군이 정나라를 사이에 두고 싸움이 벌어진 곳으로써 당진(唐晉)이 주도한 연합군이 승리하여 초장왕에게 빼앗긴 패자의 지위를 탈환했다.

43)상채(上蔡)/ 지금의 하남성 상채시(上蔡市) 서남에 있었던 전국시대 때의 고을로 원래 채읍(蔡邑)이다. 주무왕이 자기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을 이곳에 봉했다. 후에 채평후(蔡平侯)가 나라를 신채(新蔡)로 옮겼다가 채소후(蔡召侯) 때 주래(州來)로 다시 옮겨, 주래(州來)의 이름을 하채(下蔡)로 불렀다. 이에 원래의 채읍 이름을 상채(上蔡)로 부르게 된 것이다.

44)소릉(召陵)/ 지금의 하남성 탑하시(漯河市) 동쪽에 소릉진(召陵鎭)이라고 있다. 기원전 657년 제환공(齊桓公)은 일곱 제후국들의 군사를 규합하여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하여 이 곳에 이르렀다가 초나라가 주왕실에 조공(朝貢)하는 조건으로 초성왕(楚成王)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철군했다.

45)양문군(陽文君)/ 초경양왕(楚頃襄王)의 동생이다.

46)순경(荀卿)/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荀子)를 말한다.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는 동문수학한 순자의 제자들이다.

47)난릉령(蘭陵令)/ 지금의 산동성 창산현(蒼山縣) 난릉진(蘭陵鎭)이다.

48)대모잠(玳瑁簪)/ 대모로 만든 비녀의 일종으로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하나이다. 대모(玳瑁)는 열대지방의 바다에 사는 거북의 일종으로 그 등껍질은 단단하여 비녀나 공예품을 만든다.

49)관진(觀津)/ 지금의 하북성 무읍현(武邑縣) 동남

50)민애지새(黽隘之塞)/ 지금의 하남성 신양시(信陽市) 서남에 있는 평정관(平靖關)을 말한다.

51)초나라는 진현에서 바로 수춘으로 천도한 것이 아니라 거양(巨陽)으로 먼저 갔다가 다시 수춘으로 갔다. 초나라의 도성 이동사는 다음과 같다.

1)주난왕(周난王) 17년 기원전 278년 진나라의 장군 무안군 백기(白起)의 침입으로 영성(郢城)이 점령당하자 초경양왕은 초나라의 잔존세력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인 진성(陳城)으로 나라를 옮겼다.

2)초고열왕 10년 기원전 253년 초나라는 다시 도성을 진성(陳城)에서 지금의 안휘성 태화현(太和縣) 부근인 거양(巨陽)으로 옮겼다.

3)고열왕 22년 기원 241년 초나라는 거양에서 다시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인 수춘(壽春)으로 옮겼다.

4)초나라는 수춘에서 진나라 장군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기원전 223년에 멸망했다.

52)야왕성(野王城)/ 지금이 하남성 심양현(沁陽縣)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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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6-04-16
[일반] 신릉군열전(申陵君列傳) 17.위무기(魏無忌)

열전17-1 신릉군 위무기(信陵君魏無忌) 能以富貴下貧賤(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賢能#
양승국 04-05-12
[일반]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18.황헐(黃歇)

열전18. 춘신군황헐(春申君黃歇) 以身徇君(이신순군),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遂脫强秦(수탈강진),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
양승국 04-05-12
[일반]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16-1.조승(趙勝)

평원군(平原君) 1120. 爭馮亭以權(쟁풍정이권),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1121. 如楚以救邯鄲之圍(여초이구한
양승국 04-05-12
[일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15.전문(田文)

열전15. 맹상군(孟嘗君) 1116. 好客喜士(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사귀우설), 천
양승국 04-05-12
[일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7

열전7 仲尼弟子(중니제자) -공자의 제자들- 공자가 말했다. 「나에게 배워 육예에 통한 자는 77명이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재
양승국 04-05-12
[일반] 외전. 도주공(陶朱公) 범려(范蠡)

외전 범려(范蠡) 범려외전(范蠡外傳)은 사마천의 사기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편과 화식열전(貨殖列傳)의 범려 부분을 발췌
양승국 04-05-12
[일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6

오자서(伍子胥) 열전5. 1073. 維建遇讒(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원급자서), 그 화가 오
양승국 04-05-12
[일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5-1. 손무(孫武)

열전5-1. 孫武列傳(손무열전) 손자(孫子) 무(武)는 제나라 사람이다. 병법으로 이름이 나, 오왕 합려(閤閭)를 접견하게 되었다. 합려가 말했다.
양승국 0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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