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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2:05:3112261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15.전문(田文)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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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15. 맹상군(孟嘗君)

1116. 好客喜士(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사귀우설),

천하의 많은 선비들이 설(薛) 땅으로 모여들었다.

1118. 爲齊扞楚魏(위제한초위).

맹상군은 그 선비들의 힘으로 제나라를 위해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었다.

1119. 作<孟嘗君列傳>第十五(작<맹상군열전>제십오)

이에 <맹상군열전>제십오를 지었다.

맹상군의 이름은 문(文)이고 성은 전(田) 씨다. 문(文)의 부 정곽군(竫郭君) 전영(田嬰)은 제위왕(齊威王)의 막내아들이며 제선왕(齊宣王)의 배다른 동생이다. 전영은 제위왕 때부터 조정에 나가 정사에 참여했으며 성후(成侯) 추기(鄒忌)1) 및 전기(田忌)2)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나라를 정벌했다. 성후와 전기가 제왕의 총애를 다투다가 마침내 성후가 전기를 모함했다. 전기는 두려워하여 제나라의 변읍(邊邑)을 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위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선왕(宣王)은 성후가 전기를 모함한 사실을 알고 그를 다시 불러들여 장군으로 삼았다. 선왕 2년 기원전 341년 전기와 손빈(孫臏), 그리고 전영이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전하여 마릉(馬陵)3)에서 위군(魏軍)을 대파하고 위나라의 태자신(太子申)은 포로로 잡고 대장 방연(龐涓)을 죽였다. 선왕 7년 기원전 336년 전영(田嬰)이 사자가 되어 한(韓), 위(魏)두 나라를 차례로 방문하자 두 나라는 제나라에 복종했다. 한소후(韓昭侯), 양혜왕(梁惠王)이 제나라 땅인 동아(東阿)4)로 들어와 전영과 만나 회맹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음해에 다시 전영과 양혜왕이 견(甄)5)에서 회견했다. 이 해에 양혜왕이 죽었다. 선왕 9년 즉 기원전 334년 전영이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제선왕과 위양왕(魏襄王)이 서주(徐州)6)에서 서로 만나 서로 왕호를 칭하기로 했다7). 초위왕(楚威王)이 듣고 전영에 대해 원한을 품었다. 다음해에 초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서주에서 제군을 격파하고 사자를 제왕에게 보내 전영을 쫓아내라고 했다. 전영이 장축(張丑)을 세객으로 보내 초위왕을 설득하게 하자 초위왕은 생각을 바꿨다. 전영은 제나라의 상국 자리에 11년 동안 있었다. 제선왕 19년 기원전 301년 선왕이 죽고 태자 지(地)가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제민왕(齊湣王)이다. 민왕 3년 기원전 298년 전영을 설(薛)8)에 봉했다.

1. 受命于天 非于門楣(수명우천 비우문미)

- 사람의 수명은 하늘이 준 것이지 문설주 따위가 주는 것이 아니다. -

원래 전영은 40여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 천비 소생의 이름이 문(文)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5월 5일 생이었다. 전영이 전문의 생모에게 말했다.

「밖에 내다 버리라!」

그러나 그 모친은 전문을 거두어 몰래 길렀다. 이윽고 전문이 자라자 그 모친은 전문의 형제들을 통해 그를 전영에게 보였다. 전영이 노하여 그 모친을 꾸짖었다.

「내가 이 놈을 내다 버리라고 말했거늘, 어찌 감히 내 명을 어기고 몰래 기른 것인가?」

전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전영에게 말했다.

「부친께서는 제가 5월 5일 날 태어났다고 해서 키우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던데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5월 5일 날 태어난 사람은 그 키가 문설주 높이와 같아지게 되면 장차 그 부모를 해치게 될 것이라고 해서이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서 정해준 것입니까? 아니면 문설주가 정해준 것입니까?」

전영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전문이 다시 말했다.

「사람의 운명을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라면 아버님께서는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며, 또한 문설주가 정해준 것이라면 그 높이를 계속 키운다면 그 누가 높은 문설주에 닿을 수 있겠습니까?」

「그만하면 되었다.」

2. 玄孫之玄孫爲何(현손지현소위하)

- 현손의 현손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

그리고 얼마 후에, 전문은 그 부친 전영이 한가한 틈을 타서 물었다.

「아들의 아들은 무엇이라 합니까?」

「손자라 한다.」

「그렇다면 손자의 손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현손(玄孫)이라 한다.」

「현손의 현손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모르겠다.」

「부친께서는 출사하여 제나라의 상국이 된 이래 지금까지 세 분의 왕을 모셨지만, 제나라를 위해서는 그 영토를 한 뼘도 넓히지 못한 반면에 부친은 오히려 그 사재만 늘려 누만금의 부를 쌓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친의 문하에는 한 사람의 현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장군의 집에는 필시 장군의 재목이 있고, 재상의 집에는 재상의 제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친의 첩실들은 비단 옷을 밟고 다니지만, 선비들은 짧은 잠방이도 얻어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친의 비첩과 노복들은 하얀 쌀밥에 고기들을 다 먹지 못하고 남기지만, 선비들은 술지게미나 겨조차 없어서 못 먹고 있습니다. 더욱이 부친께서는 아직도 저장한 재물들이 남아돌도록 더욱 재산을 축적하시어, 비록 자손이라고는 하겠지만 까마득한 훗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려는 생각으로 나라의 일을 날이 갈수록 손상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계십니다. 부친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에 전영은 마침내 전문을 예를 갖추어 대하고 그로 하여금 집안의 일을 주재하고 빈객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이윽고 빈객들의 내왕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게 되자 전문의 명성은 천하의 제후들 사이에 떨치게 되었다. 제후들은 사자를 보내 전문을 전영의 후계자로 삼을 것을 청하자 그가 허락했다. 전영이 죽자 그 시호를 정곽군(竫郭君)이라고 했다. 전문이 과연 전영의 뒤를 이어 설공(薛公)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이가 맹상군(孟嘗君)이다.

3. 모명구상(慕名求相)

- 명성을 듣고 재상을 찾다. -

맹상군이 설(薛)에 있을 때 제후들의 빈객과, 죄를 짓고 도망다니던 망인(亡人)들을 불러들이자 그들은 모두 맹상군에게 귀의했다. 맹상군이 숙사를 짓고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 그로 인하여 천하의 어진 선비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그 식객이 수천 명에 달하게 되었지만 모두가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한결 같이 자기와 동등하게 대접했다. 맹상군이 자리에 앉아서 손님을 대하며 대화를 나눌 때는 항상 병풍 뒤에 그 대화를 기록하는 사람을 두어 자기와 손님이 나눈 대화와 그 손님의 친척이 있는 곳 등을 묻게 되면 기록하게 했다. 손님이 가고 난 후에는 사람을 보내어 그가 말한 친척들을 방문하여 선물을 주었다.

일찍이 맹상군이 손님을 대접하며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불빛을 가렸다. 그 손님은 식사의 종류가 같지 않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며 밥을 먹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했다. 맹상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먹던 그릇을 들고 그 손님이 먹던 음식과 비교해 보이니 그 손님은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천하의 어진 선비들이 더욱 맹상군에게 모여들었다. 맹상군은 오는 선비는 모두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누구든지 똑 같이 잘 대해 주었다. 손님들은 저마다 자기는 맹상군과 절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진나라의 소양왕이 맹상군의 어진 이름을 듣고 즉시 자기의 동생 경양군(涇陽君)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맹상군을 초청해 보고 싶어했다. 맹상군이 진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자 빈객들 중 아무도 같이 가려고 하지 않으며 그로 하여금 진나라에 가지 말도록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소대(蘇代)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이 대(代)가 제나라로 오던 중에 나무 인형과 흙 인형이 서로 나누고 있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나무 인형이 말하기를 ‘비가 내린다면 너는 부서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자 흙 인형이 말했습니다. ‘나는 원래 흙에서 태어난 몸이라 빗물에 부셔진다면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오늘 비가 내린다면 너는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 멈추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나라라 대감께서 일단 그곳으로 들어가신다면 결국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흙 인형의 비웃음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맹상군이 소대의 말을 듣고 진나라에 들어가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제민왕(齊湣王) 25년 기원전 299년 맹상군은 결국 진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진나라에 들어온 맹상군을 진소양왕은 진나라의 상국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소양왕에게 말했다.

「맹상군은 어진 사람이긴 해도 제나라 출신입니다. 지금 그를 진나라의 재상으로 임명하면 필시 제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진나라는 나중에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진나라가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소양왕은 맹상군을 상국에 임명하려는 생각을 그만 두고 역관에 가두고 장차 죽이려고 했다.

4. 계명구도(鷄鳴求盜)

- 계명구도의 도움으로 함곡관을 탈출하여 목숨을 구하는 맹상군 -

맹상군을 사람을 시켜 소양왕이 총애하는 첩에게 구원을 청했다. 소양의 총희(寵姬)가 말했다.

「이 첩은 군이 갖고 있던 호백구(狐白裘)9)를 원합니다.」

그 당시 맹상군은 호백구라는 은백색의 가죽옷 한 벌을 가지고 있었다. 그 호백구의 가치는 천금을 호가하는 천하의 둘도 없는 진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진나라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와서 소양왕에게 바쳤기 때문에 그와 같은 귀중한 의복을 달리 구할 수 없었다. 맹상군이 이를 근심하여 그의 문객들과 상의를 했으나 아무도 시원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때 가장 아래쪽 자리에 개의 흉내를 내어 도적질을 잘하는 사람이 맹상군을 향해 말했다.

「제가 능히 호백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그 사람은 개로 분장하고 진나라 궁중의 재물창고로 잠입해 들어가 예전에 맹상군이 소양왕에게 바친 호백구를 훔쳐냈다. 맹상군이 훔친 호백구를 사람을 시켜 소양왕의 첩에게 바쳤다. 총희의 간청을 받은 소양왕은 맹상군을 풀어줬다. 맹상군이 석방되자 그는 즉시 말을 타고 달리면서 봉전(封傳)10)을 위조하여 이름과 성을 바꾸어 진나라 관문을 통과했다. 이윽고 맹상군의 일행이 한밤중에 함곡관(函谷關)에 당도했다. 한편 맹상군을 석방한 일을 후회하게 된 소양왕은 다시 잡아들이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맹상군 일행은 도성 밖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그래서 즉시 사람을 시켜 말을 타고 그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밤을 달려 함곡관에 당도한 맹상군 일행은 그 당시 관문의 통행제도는 닭이 울어야 사람들을 통행시켰기 때문에 그 사이에 진왕이 보낸 추격군에게 붙잡히게 되지나 않을까 매우 두려워했다. 그때 맹상군의 말단 식객 중에 닭우는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한 번 닭 우는 소리를 내자 진짜 닭들이 일제히 따라서 울었다. 마침내 맹상군의 일행은 위조한 봉전을 보이고 관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이 관을 빠져 나온 다음 한 식경 쯤 되었을 때 과연 진왕이 보낸 추격군이 함곡관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맹상군 일행이 관문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왕의 추격군은 함양으로 되돌아갔다. 처음에 맹상군이 계명구도(鷄鳴狗盜)한 두 사람을 빈객의 반열에 세우자, 여러 빈객들은 그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해야 한다는 처사에 수치로 여겼었다. 진나라에서 난관을 당한 맹상군이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자 그후로는 빈객들은 그들에 대해 마음속으로 승복했다.

맹상군이 진나라를 탈출하여 제나라로 향하던 중 조나라로 들어가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빈객이 되었다. 맹상군이 어질다는 소문을 들은 조나라 사람들은 그를 구경하기 위해 거리로 나와 그를 보자 모두들 비웃으며 말했다.

「설공(薛公)의 아들이라 그 풍채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단지 왜소하고 위약한 소장부에 불과한 위인이로구나!」

맹상군이 듣고 노하여 그 문객들과 함께 수레에서 내려 그를 구경하던 조나라 사람들을 칼로 마구 찔러 수백 명을 살해한 다음 계속해서 그곳 현을 전멸시키고 제나라로 돌아갔다.

맹상군을 진나라에 보내 놓고 스스로 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제민왕은 그가 다시 돌아오자 제나라의 재상에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그때 마침 제나라가 한(韓)과 위(魏) 두 나라를 돕기 위해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진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맹상군은 서주(西周)로부터 군량을 빌려 한위(韓魏) 두 나라와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소대(蘇代)가 서주를 위해 맹상군을 찾아와 말했다.

「군(君)께서는 제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과거 9년 동안 초나라를 공격하여 완(宛)과 섭(葉) 이북의 땅을 한위 두 나라가 취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두 나라를 위해 진나라를 공격하여 더욱 강한 나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한위(韓魏) 두 나라는 그 남쪽의 초나라 때문에 근심하는 바가 없고 서쪽으로는 진나라 때문에 걱정하는 바가 없게 된다면 그때는 제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한과 위 두 나라는 필시 제나라를 가볍게 보는 대신 진나라를 두렵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되면 군의 신상은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군께서는 차라리 서주에 명하여 진나라에 귀의하라고 명하고 서주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빌리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군께서는 다만 함곡관에 임하기만 하고 절대 진나라를 공격하지 마십시오. 그런 다음 서주로 하여금 군의 마음을 소양왕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게 하십시오. ‘설공은 진나라를 공격하여 한위(韓魏) 두 나라를 강하게 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설공이 진나라를 공격하려는 목적은 현재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초회왕(楚懷王)11)을 풀려나게 하여 초나라에 은혜를 배품으로써 초왕이 초나라의 서국(徐國)12) 땅을 제나라에 할양하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군께서는 우리 서주로 하여금 진나라에 은혜를 베풀도록 만드는 것이며 진나라 또한 군대가 패하는 일도 없이 동쪽의 땅을 보전하며 스스로의 화를 면할 수 있으니 진나라로서는 싫어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의 도움으로 초회왕이 풀려 나오면 초나라는 필시 제나라에 은혜를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제나라는 초나라부터 서국을 얻어 더욱 강해지고 설국(薛國)은 대대손손이 반석 위에 놓일 것입니다. 진나라가 크게 약해지지 않는다면 그 서쪽의 삼진(三晋)은 필시 제나라를 중히 여길 것입니다.」

「훌륭한 생각입니다.」

설공이 곧이어 한와 위 두 나라에 진나라에 하례의 사절을 보내도록 하고 제를 포함한 3국의 공격을 중지시키고 서주로부터 군량을 빌리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때 진나라는 자기 나라를 방문했던 초회왕을 억류시키고 있어 소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초회왕을 석방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는 소대의 기대와는 달리 초회왕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맹상군이 제나라의 상국의 자리에 있을 때 그의 사인(舍人) 위자(魏子)로 하여금 맹상군의 봉읍으로부터 세수를 걷어 들이게 하였으나 세 번이나 봉읍을 왕복하면서도 한 번도 걷은 세금을 가져오지 않았다. 맹상군이 그 연고를 묻자 위자가 대답했다.

「이곳으로 오다가 현자가 있어 걷은 세금을 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맹상군이 화를 내며 위자를 내쳤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어떤 사람이 맹상군을 제민왕에게 모함하며 말했다.

「맹상군이 자기의 봉읍을 시켜 반란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전갑(田甲)이 란을 일으켜 제민왕을 범하려고 했던 사건이 일어나 민왕은 마음속으로 맹상군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맹상군은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옛날 위자(魏子)로부터 돈을 받았던 현자(賢者)가 그 소식을 듣고 민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는 맹상군이 반란을 획책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맹세했다. 위자는 이어서 곧바로 제나라 도성으로 올라가 궁문 앞에서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맹상군의 결백을 밝혔다. 민왕이 놀라 사람을 시켜 맹상군의 행적을 조사케 한 바 맹상군은 과연 반란을 획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민왕은 즉시 맹상군을 불러 상국의 자리를 돌려주려고 했다. 맹상군은 몸에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봉읍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겠다고 청했다. 민왕이 허락했다.

그 후에 진나라 장군이었다가 제나라로 망명해와 상국이 된 여례(呂禮)가 소대(蘇代)를 해치려고 했다. 소대가 맹상군을 찾아가 말했다.

「제왕이 신임했던 주최(周最)를 쫓아내고 친불(親弗)의 말을 듣고 여례(呂禮)를 제나라의 재상으로 삼은 이유는 제나라가 진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와 진 두 나라가 수호를 맺으면 친불(親弗)과 여례(呂禮)가 중용되어 제나라는 군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군께서는 하루 빨리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조나라를 압박해서 조나라로 하여금 진나라와 강화를 맺게 하고 쫓겨난 주최를 거두어 후하게 대접하여 그에 대한 제왕의 신임을 다시 찾도록 하십시오. 제와 초 두 나라가 우호를 맺어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천하의 변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제나라가 진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홀로 선다면 천하의 제후들은 제나라의 그늘로 모두 모여들고, 친불은 다른 나라로 도망쳐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제왕은 군 말고 누구와 함께 제나라를 같이 다스리겠습니까?」

그래서 맹상군이 소대의 계책을 따르자 여례가 질시하여 맹상군을 해치려고 했다. 맹상군이 두려워하여 진나라의 재상 위염(魏冉)13)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내가 들으니 진나라가 여례를 통해 제나라와 친선을 맺으려고 한다고 했소. 제나라는 천하의 강국이오. 여례가 진나라의 환심을 산다면 그대는 필시 진나라로부터 내침을 당할 것이오. 진과 제 두 나라가 손을 잡고 삼진(三晋)에 대항하려고 한다면 여례는 필시 두 나라의 재상을 겸직하게 될 것이오. 이는 그대로 인해 여례가 제나라에서 중하게 여김을 받게 만드는 일이오. 그 결과 진제(秦齊)가 친교를 맺어 제나라가 천하로부터 병화를 면하게 된다면 옛날에 당한 병화가 모두 그대 양후 때문이라고 생각한 제나라는 그대를 철천지원수로 여길 것이오. 그대는 차라리 진왕에게 권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시오. 나는 진나라가 제나라의 군사를 파해 얻은 땅을 그대의 봉지로 주라고 진왕에게 요청하겠소.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진 제나라와 수호를 맺어 강해지는 삼진(三晋)을 두려워하는 진나라는 그대를 중용하여 삼진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할 것이오. 한편 제나라와 싸워 국토가 황폐해진 삼진은 진(秦)나라가 쳐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자연히 삼진은 그대를 통하여 진나라의 환심을 사려고 할 것이오. 그것이야말로 그대는 제나라를 격파한 공을 세움과 동시에 삼진을 끼고 진나라에서 중하게 여겨지게 되는 일이오. 또한 제나라를 파함으로 해서 그대는 새로운 봉지를 얻게 되고 진나라와 삼진은 동시에 그대를 중용하게 될 것이오. 만약 그대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여례는 중용될 것이고 그대의 운명은 매우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이오.」

이에 양후(穰侯) 위염이 소양왕게게 진언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로써 여례는 제나라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송나라를 멸해13) 더욱 교만해진 제민왕(齊湣王)은 맹상군을 멀리했다. 맹상군이 두려워하여 제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들어갔다. 위소왕(魏昭王)은 맹상군을 상국으로 삼고 진(秦)나라, 조(趙)나라, 연(燕)나라와 힘을 합쳐 제나라를 정벌했다. 제민왕은 임치성을 버리고 달아나 거성(莒城)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제양왕(齊襄王)이 새로 서자 맹상군은 제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어느 제후들에게도 속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이 제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오른 제양왕은 맹상군을 두려워하여 그와 우호를 맺고 다시 설공(薛公)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했다. 이윽고 그가 죽자 시호를 맹상군이라고 했다. 그러나 맹상군의 아들들이 서로 후계를 다투자 위와 제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설(薛)을 멸했다. 이에 맹상군의 후사는 끊어지고 말았다.

5. 탄협식객(彈鋏食客)

- 식객으로 찾아온 풍환이 장검을 두드리며 좋은 대접을 요구하다. -

맹상군이 제나라의 상국 자리에 있을 때, 풍환(馮驩)이라는 사람이 맹상군이 선비를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짚신을 신고 먼길을 걸어와 접견을 청했다. 맹상군이 보고 물었다.

「선생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신 것은 이 문(文)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들으니 군께서는 선비를 좋아하신다 해서 가난한 몸을 의탁할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맹상군이 풍환을 전사(傳舍)에 묵게 했다. 그리고 10여 일이 지나서 전사장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새로 온 손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가?」

「풍선생은 워낙 가난하여 몸에는 단지 칼 한 자루 밖에 가진 것이 없는데 그것도 칼집마저 없이 단지 띠풀로 얽어매어 허리에 차고 다닙니다. 그런 풍선생이 매일 그 칼을 풀어 식탁 위에 놓고 두드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장검아, 장검아! 돌아가자꾸나! 식탁에는 생선요리도 올라오지 않는구나!」

맹상군이 풍환을 행사(幸舍)를 옮겨 지내도록 하여 식탁에 생선 요리를 올려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나자 다시 전사장(專舍長)에게 풍환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풍선생이 다시 칼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를 ‘ 장검아, 장검아! 돌아가자꾸나! 나에게 수레도 내 주지 않는구나!’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맹상군이 듣고 풍환을 대사(代舍)로 옮겨 머물게 하고 출입시에 수레를 타고 다니게 했다. 그리고 다시 5일 후에 맹상군이 전사장에게 풍환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풍선생이 여전히 식사를 할 때는 칼을 식탁 위에 풀어 놓고 두드리며 ‘ 장검아, 장검아! 돌아가자꾸나! 나에게 집도 한 칸 마련해 주지 않는구나!’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15)

맹상군이 듣고 마음속으로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도록 풍환은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6. 풍환매의(馮驩買義)

- 픙환이 설읍(薛邑)의 백성들로부터 의를 사오다. -

맹상군이 제나라의 상국에 임명되어 설읍의 1만 호에 봉해지고 그 식객은 계속 늘어나 3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어서 봉읍에서 나오는 부세만으로는 식객을 모두 먹일 수 없게 되자 사람을 시켜 설읍의 주민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이자를 받도록 했다. 해가 바뀌어도 빌려 준 돈과 이자가 들어오지 않고 돈을 빌려간 사람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자를 갚을 수 없게 되자 식객들을 모두 먹이는데 비용이 부족하게 되었다. 맹상군이 매우 근심하여 좌우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가 설읍에 가서 빌려준 돈과 이자를 받아 오겠는가?」

전사장이 나서서 말했다.

「대사에 묶고 계시는 풍공은 풍체가 훤칠하고 언변이 심히 뛰어날 뿐만 아니라 나이도 연장이나, 그에게 별다른 일이 없으니 마땅히 이번에 봉읍에 가서 돈을 걷어오도록 시키십시요.」

맹상군이 즉시 풍환을 불러 청을 하며 말했다.

「빈객들이 이 전문(田文)이 불초함을 알지 못하고 찾아온 사람의 수효가 3천 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내 휘하의 읍인들이 내는 부세만으로는 빈객들을 먹여 살릴 수 없어 내가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이자를 받아 그 부족한 식대를 보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설읍의 백성들에게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가 들어오지 않아 아마도 그들은 빌려간 돈에 대해 이자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빈객들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니 선생께서는 이 일을 책임지고 돈을 받아 오시기 바랍니다.」

풍환이 맹상군의 청을 허락하고 길을 떠나 설읍에 당도했다. 풍환은 맹상군의 돈을 빌려간 백성들을 불러 모두 모이게 하여 그 이자로 10만 전의 돈을 받았다. 그래서 그 돈으로 많은 술을 담그고 살찐 소를 사서 잔치 준비를 한 다음 돈을 빌려간 사람들을 모두 불렀다. 이자를 낼 수 있는 사람이거나, 낼 수 없는 사람들 모두가 와서 채무증서를 대조했다. 이어서 백성들을 모두 모일 수 있는 날을 정해 다시 약속하고 이윽고 그 날이 되자 소를 잡고 술자리를 마련했다. 곧이어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백성들이 소지하고 있던 채무증서를 다시 확인한 다음 이자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 기일을 다시 정하고, 가난하여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채무증서를 수거하여 불에 태워버렸다. 풍환이 백성들을 향해 말했다.

「맹상군께서 여러분들에게 돈을 빌려 준 것은 돈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이자를 받고자 한 것은 수하의 빈객들의 식비에 보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 기한을 다시 정하고 가난하여 갚을 길이 없는 사람은 그 채무증서를 불에 태워 없애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무 걱정 마시고 준비한 음식을 마음껏 드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을 대하는 맹상군과 같은 주인이 있으니 어찌 그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일어나 풍환에게 재배를 올렸다.

풍환이 채무증서를 거두어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는 소식에 화가 난 맹상군이 사람을 보내 그를 소환했다. 임치성에 당도한 풍환에게 맹상군이 말했다.

「이 문은 식객을 3천 명이나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식비를 다소나마 충당하기 위해 설읍의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이자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 문의 식읍은 매우 적어 돈을 빌려간 많은 백성들이 때가 되어도 이자를 내지 않아 여기 객사의 빈객들에게 공급하는 식사가 부족할 까봐 선생에게 책임을 지고 걷어 오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선생이 걷은 돈으로 소와 술을 사고 이어서 채무증서를 수거하여 불에 태웠다고 하던데 그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술과 소고기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백성들을 같은 시간에 한 장소에 모이게 할 수 없어 여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을 구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기일을 다시 정하여 주고 여유가 없는 사람은 비록 10년을 기다린다 해도 그 이자는 더욱 불어나 이윽고 사정이 급하게 되면 다른 고을로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만약 그 이자의 상환을 급하게 다그친다면 돈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위로는 군께서 돈만 좋아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아래로는 백성들이 돈을 갚지 않고 군을 떠나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선비와 백성들을 격려하고 군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군께서는 어찌하여 이것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맹상군은 마침내 손뼉을 마주치면서 풍환에게 감사의 말을 올렸다.

7. 교토삼굴(狡免三窟)

-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마련하여 숨을 곳을 마련해둔다. -

제민왕은 진과 초 두 나라가 맹상군을 비방하는 소리에 현혹되어 맹상군의 이름이 그 군주보다 더 높고 제나라의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여기고 마침내 맹상군을 재상의 자리에서 내쫓았다. 맹산군의 식객들은 그가 재상의 자리에 쫓겨난 것을 보고 모두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풍환이 보고 말했다.

「저에게 수레 한 대만 내 주시면 진나라고 가서 내 필히 군을 제나라에 중용되도록 하고 식읍을 더욱 넓히도록 하겠습니다.」

맹상군이 수레와 재물을 준비하여 풍환에게 주어 보냈다. 풍환이 곧바로 진나라로 달려가 진왕에게 유세했다.

「천하의 유세하는 선비들이 수레를 몰아 서쪽으로 와서 진나라에 들어오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제나라를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며, 수레를 동쪽으로 몰아 제나라에 들어가는 이유는 또한 제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진나라를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진나라와 제나라는 싸워서 승패를 내야할 자웅(雌雄)과 같은 나라들이라서 두 나라는 양립할 수 없고 웅(雄)이 되는 나라가 천하를 병합할 것입니다. 」

진왕이 무릎을 꿇으며 풍환에게 물었다.

「선생은 진나라가 어떻게 하면 연약하고 무력한 국가가 되지 않는 지 그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대왕께서는 혹시 제나라가 맹산군을 상국의 자리에서 쫓아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있습니다.」

「제나라가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존중함을 받는 이유는 바로 맹상군이 제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왕은 맹상군을 비방하는 참언을 듣고 그를 상국의 자리에서 내쳤습니다. 맹상군은 지금 마음속으로 제왕을 원망하고 필시 제나라를 떠날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제나라를 등지고 진나라에 들어온다면 제나라의 모든 정세와, 조정의 위로는 군왕에서 아래로는 관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진실된 정황은 모두 진나라에 의해 장악될 것이며 그리되면 제나라의 땅을 진나라가 거둘 수 있어 어찌 진나라가 웅자(雄者)가 되는 것에만 한하겠습니까? 대왕께서 사자에게 폐백을 주어 몰래 맹상군에 보내 맞이해 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만일 제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맹상군을 다시 불러 쓰게 된다면 누가 자웅(雌雄)이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진왕이 크게 기뻐하며 황금 백일(百鎰)과 폐백을 가득 실은 수레 10대를 보내 맹상군을 모셔오도록 했다. 풍환이 진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진나라의 사자보다 앞서 달려 제나라에 달려와 제왕을 접견하고 말했다.

「천하의 유세객들이 수레의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제나라에 들어오는 이유는 제나라를 강하게 하고 진나라를 약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수레를 서쪽으로 돌려 진나라에 들어가는 이유는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제나라를 약하게 하려고 해서입니다. 제나라와 진나라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오늘 신이 가만히 들으니 진나라가 황금 100일과 폐백을 가득 실은 수레 10대와 함께 사자를 보내 맹상군을 모셔가려 한다고 합니다. 맹상군이 서쪽의 진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 마음이 움직여 진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재상이 된다면 천하는 모두 진나라에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진나라는 웅(雄)이 되고 제나라는 자(雌)가 될 것이며, 또한 제나라가 자(雌)가 된다면 임치(臨淄)와 즉묵(卽墨)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진나라의 사자가 설읍에 당도하기 전에 맹상군을 다시 불러 그의 봉읍을 더 넓혀주고 그를 재상의 자리에서 쫓아낸 일을 사과하지 않습니까? 대왕께서 그리하신다면 맹상군은 필시 기뻐하며 대왕의 명을 받들 것입니다. 진나라가 비록 강성한 나라이지만 어찌 감히 남의 나라 재상을 청하여 맞이해 갈 수 있겠습니까? 부디 맹상군을 다시 기용하여 진나라의 음모를 꺾어 그들이 강포한 패자가 되려는 책략을 막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민왕은 즉시 사람을 시켜 제나라 국경으로 보내 과연 진나라의 사자가 오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때 마침 제나라의 국경에 당도한 진나라 사자 일행의 모습을 본 제왕의 사자가 곧바로 임치성으로 달려가 제민왕에게 고했다. 제민왕이 즉시 맹상군을 불러 재상의 자리에 앉히고 이어서 그의 옛날 봉읍에 천 호를 더해 돌려주었다. 진나라의 사자는 맹상군이 이미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수레의 방향을 돌려 진나라로 돌아갔다.

8. 富貴多士 貧賤寡友(부귀다사 빈천과우)

- 부귀하면 친구가 많고 빈천하면 친구가 떠나는 것은 세상의 섭리다. -

처음에 제왕이 맹상군을 파직하고 봉읍마저 빼앗자, 그의 식객들 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후에 맹상군이 다시 복직하자 풍환이 그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식객들이 미처 맹상군의 객사에 모이기 전에 맹상군이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이 문이 선비들을 좋아해서 예를 갖추어 그들을 접대하여 3천 명이 넘는 식객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선생은 이미 아시고 계시는 일입니다. 내가 어느 날 아침 파직 당하고 봉읍도 잃게 되자 3천 명의 식객들 모두가 내 곁을 떠나 이 문을 쳐다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 선생의 노력에 힘입어 제가 재상의 자리와 봉읍을 다지 찾게 되자 그들이 나를 다시 찾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나를 다시 보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어 크게 욕일 보이고야 말겠습니다.」

풍환이 말의 고삐를 메어 놓고 수레에서 내려 맹상군에게 큰절을 올렸다. 맹상군도 수레에서 같이 내려 그를 맞으며 말했다.

「선생께서 어찌하여 그 뻔뻔한 식객들을 위해 대신 사죄하는 것입니까?」

「제가 식객들을 위해 사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군께서 실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릇 만물에는 모두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모든 일에는 당연히 그렇게 되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군께서는 혹시 알고 계십니까?」

「저는 어리석어 선생께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사람이 부귀하게 되면 많은 선비가 몰려오고, 가난하고 천하게 되면 친구가 적게 되는 것은 세상일의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군께서는 아침에는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모이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까? 새벽이 되면 사람들이 어깨를 비비며 다투어 시장통의 문안으로 들어갔다가 해가 저물면 시장을 지나가던 사람도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저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찾는 물건이 그 시장 안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옛날 군께서 파직을 당하니 빈객들이 떠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오늘 군의 곁을 떠난 빈객들을 원망하며 그들이 돌아오는 길을 구태여 막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원컨대, 군께서는 빈객들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맹상군이 풍환에게 재배하며 말했다.

「삼가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선생의 말씀을 듣고 어찌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일찍이 설읍(薛邑)을 지난 적이 있었다. 그곳의 픙속은 마을의 골목에 대체로 거칠고 사나운 젊은이들이 몰려 다녀 추(鄒)와 노(魯) 나라와의 것과는 판이했다. 내가 그 연유를 묻자 그곳 사람이 말했다.

「맹상군이 옛날 천하의 협객들과 무뢰배들을 불러 모아 이윽고 그들의 수효가 6만여 호가 넘게 되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맹상군이 빈객을 좋아하여 스스로 즐겨했다고 하던데, 그 이름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맹상군 끝>

2004. 1. 8

주석

1)추기(鄒忌)/ 전국 때 제나라의 대신으로 제환공(齊桓公) 때 대부로 임명되었다. 환공 5년 기원전 370년 진(秦)과 위(魏) 두 나라가 합세하여 한나라를 공격하자 환공은 한나라를 구원하려고 하자 추기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한나라를 구원하는 대신 연나라를 기습하자고 했다. 환공이 추기의 계책을 받아 들여 연나라를 공격하여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북쪽의 상구(桑丘)를 점령했다. 환공이 죽고 이어서 제위왕이 즉위하여 제나라를 개혁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추기는 거문고를 타며 설득하여 위왕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위왕 21년 기원전 358년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고 다음해에 지금의 강소성 비현(邳縣)에 봉해지고 성후(成侯)라 불리웠다. 그는 정치를 혁신하고, 법률을 실정에 맞게 고치며, 어질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임용하여, 군제를 정비하고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나라는 이로써 점점 강성해졌다. 또한 위나라를 공격하여 조나라를 구원해야 한다고 하여 기원전 353년 제나라 군대는 계릉(桂陵)에서 위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전기와 불화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전기를 모함하여 결국은 전기는 초나라로 도망쳐야 했다. 제위왕 34년 기원전 345년에 노환으로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제선왕 2년 기원전 341년에 죽었다고도 했다.

2)전기(田忌)/전국(戰國) 시대 때 제나라 장수. 사서(史書)에는 전기(田期) 혹은 전기사(田期思)라고도 했으며 서주(徐州 : 지금의 산동성 등주시(滕州市) 남)에 봉해져 서주기자(徐州期子)라고 불리웠다. 제위왕(齊威王) 26년 (기원전 353년) 손빈(孫臏)과 함께 위(魏)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조(趙)나라를 구원하고 계릉(桂陵: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서북) 에서 방연이 거느리던 위군을 크게 무찔렀다. 제선왕(齊宣王) 2년 (기원전 341년)에 다시 전영(田嬰), 전반(田盼), 손빈(孫臏)과 함께 마릉(馬陵: 지금의 하남성 범현(范縣) 서남)에서 위군을 대파하고 위나라의 대장 방연을 죽이고 태자신(太子申)은 포로로 하였다. 후에 제나라의 상국(相國) 추기(騶忌)의 참소로 초나라로 도망쳤다. 초나라는 전기를 강남(江南)에 봉했다.

3)마릉(馬陵)/ 전국 때인 기원전 341년 제나라의 장군 전기(田忌)와 전영(田嬰)이 군사 손빈(孫臏)의 계책에 따라 방연(龐涓)이 이끌던 위(魏)나라의 대군을 물리친 곳을 말하며 지금의 하남성 북쪽의 접경지역인 산동성 범현(范縣)설과 산동성 남쪽의 담성(郯城) 설 2가지 설이 있다. 위나라 대군이 이 싸움에서 전멸됨으로 인해서 위나라는 패권을 상실하고 중원의 2류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4)동아(東阿)/ <전제세가(田齊世家)> 및 <육국연표(六國年表)>에는 평아(平阿)로 되어있다. 평아는 지금의 산동성 양곡현(陽谷縣) 동북으로, 일설에는 안휘성 회원현(懷遠縣)이라고도 하나 당시 회원현은 제나라 령에 속해 있지 않아 취하기 어렵다.

5)견(甄)/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甄城縣) 동북으로 전국 때 제나라 땅이다.

6)서주(徐州)/ 지금의 산동성 등현(滕縣) 동남으로 후에 설읍(薛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7)서주상왕(徐州相王)/ 기원전 341년에 당시의 패권국 위나라의 대군을 마릉에서 전멸시킨 제위왕은 7년 뒨 기원전 334년에 위혜왕과 한소왕을 서주로 불러 그들로부터 조현을 받았다. 위와 한 두 왕은 서주의 회견에서 당시 왕호를 칭하고 있지 않았던 제위왕을 왕으로 높여 칭하자 제위왕도 위(魏)와 한(韓) 두 군주가 왕호를 칭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를 역사상 서주상왕이라고 한다.

8)설(薛)/ 지금의 산동성 등현(滕縣) 남쪽

9)호백구(狐白裘)/ 여우 겨드랑의 하얀 가죽을 이용하여 만든 가죽 옷이다.

10)봉전(封傳)/ 당시 진나라가 시행하던 통행증제도이다. 나무판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윗면에 이름 등의 인적사항을 쓰고 다시 나무판을 이용하여 봉한 뒤 인장을 찍었다. 때문에 봉전(封傳)이라 한 것이다.

11)초회왕(楚懷王)/기원전 328년에 즉위하여 296년까지 재위한 초나라 군주다. 미(羋) 성에 이름은 웅괴(熊槐)이며 초위왕(楚威王)의 아들이다. 집정기간 중, 제나라와 합종을 맺어 진나라의 동진을 막았다. 이에 진혜왕(秦惠王)이 장의(張儀)를 보내 제나라와 절교를 하면 그 댓가로 상오(商於)의 땅 6백리를 할양하겠다고 했다. 상오의 땅을 탐내 제나라와 절교한 초회왕이 사람을 보내 상오의 땅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장의는 주기로 한 땅은 6리라고 발뺌 했다. 분노한 회왕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계속된 싸움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영토를 빼앗겼다. 진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왕(昭王)이 회담을 제의하자 무관(武關) 들어간 회왕은 진나라에 의해 억류되고 말았다. 진나라는 회왕을 협박하여 초나라 땅의 할양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구금된 상태로 있다가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했으나 진나라의 추격군에게 사로잡혀 결국은 환국하지 못하고 진나라에서 병들어 죽었다.

12)서(徐)/ 지금의 안휘성 사홍현(泗洪縣) 남쪽에 있었던 회하(淮河) 강안의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로 서주 초 때 서언왕(徐偃王)이 주목왕(周穆王)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멸망당했다. 후에 다시 복국되었다가 기원전 512년에 오나라에 병합되었고 오나라는 다시 월나라에, 또한 월나라는 초나라에 병합되어 서국은 초나라 령이 되었다. 전국 때 제나라 령인 서주(徐州)는 맹상군의 봉지인 설읍(薛邑)을 말하는 것으로 서국과는 다른 지명이다.

13)위염(魏冉)/ 전국 때 진나라 대신으로 시호(諡號)는 양후(穰侯)다. 초나라 사람으로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모후인 선태후의 이부(異父) 동생이다. 혜왕(惠王), 무왕(武王) 때부터 중책을 맡아 진나라의 정사를 돌봤다. 무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형제들이 진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위염이 소양왕을 진왕의 자리에 올렸다. 소양왕 2년 기원전 305년 무왕의 동생인 서장(庶長) 장(壯)이 반란을 일으키지 위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진압하고 장(壯)과 그를 따르던 대소 신료와 공족들을 살해하고 무왕의 부인을 위나라로 쫓아냈다. 이후로 위염의 위세는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양왕 7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15년 기원전 292년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인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를 더하고 양후(穰侯)라는 봉호를 받았다. 전후로 4번에 걸쳐 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으며 한 번은 조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일찍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세 번이나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하내(河內)에 있던 크고 작은 성 60여 개를 점령했으며 위나라에 압박을 가하여 하동(河東)의 땅 400리를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위나라의 도성 대량성을 포위했으며, 조(趙)와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화양(華陽 :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북)에서 대파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등의 땅을 점령하여 그의 봉지인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혔다. 백기(白起)를 발탁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한 때 그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의 사가의 부는 왕실보다도 더 컸다. 결국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발호하다가 소양왕 41년 기원전 266년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었다. 다음 해 선태후가 죽고 그는 봉읍인 도읍(陶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14)송나라의 멸망/ 제민왕이 송나라를 정벌하고 그 폭군 언왕(偃王)을 죽여 멸한 해는 기원전 286년의 일이다.

15)객사(客舍)/ 맹상군은 문객들이 거처하는 객사(客舍)를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상등의 객사는 대사(代舍), 중등의 객사는 행사(幸舍), 그리고 하등 객사를 전사(傳舍)라고 불렀다. 상등객사를 대사(代舍)라고 한 것은 ‘ 가히 맹상군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객사 ’라는 뜻에서였으며 상객들을 거주하게 하여 고기를 먹게 하고 수레를 내주어 타고 다니게 했다. 행사(幸舍)란 ‘ 가히 믿고 일을 맡길만한 사람들이 살고있는 객사’라는 뜻으로 중객(中客)들을 머물게 하고 음식으로 고기를 먹게 했으나 수레는 내주지 않았다. 전사(傳舍)란 껍질을 벗겨 지은 밥이나마 내주어 기아(飢餓)나 면하게 해주며, 출입 시에는 자기들 스스로 해결해야하며, 하객(下客)들을 머물게 했다. 옛날 진나라에 갔을 때 계명구도(鷄鳴狗盜)한 사람과 역권(驛券)을 위조하여 자기를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들은 모두 대사(代舍)에 거주하는 상객들의 반열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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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6-04-16
[일반] 신릉군열전(申陵君列傳) 17.위무기(魏無忌)

열전17-1 신릉군 위무기(信陵君魏無忌) 能以富貴下貧賤(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賢能#
양승국 04-05-12
[일반]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18.황헐(黃歇)

열전18. 춘신군황헐(春申君黃歇) 以身徇君(이신순군),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遂脫强秦(수탈강진),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
양승국 04-05-12
[일반]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16-1.조승(趙勝)

평원군(平原君) 1120. 爭馮亭以權(쟁풍정이권),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1121. 如楚以救邯鄲之圍(여초이구한
양승국 04-05-12
[일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15.전문(田文)

열전15. 맹상군(孟嘗君) 1116. 好客喜士(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사귀우설), 천
양승국 04-05-12
[일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7

열전7 仲尼弟子(중니제자) -공자의 제자들- 공자가 말했다. 「나에게 배워 육예에 통한 자는 77명이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재
양승국 04-05-12
[일반] 외전. 도주공(陶朱公) 범려(范蠡)

외전 범려(范蠡) 범려외전(范蠡外傳)은 사마천의 사기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편과 화식열전(貨殖列傳)의 범려 부분을 발췌
양승국 04-05-12
[일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6

오자서(伍子胥) 열전5. 1073. 維建遇讒(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원급자서), 그 화가 오
양승국 04-05-12
[일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5-1. 손무(孫武)

열전5-1. 孫武列傳(손무열전) 손자(孫子) 무(武)는 제나라 사람이다. 병법으로 이름이 나, 오왕 합려(閤閭)를 접견하게 되었다. 합려가 말했다.
양승국 0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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