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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4-16 18:42:119521 
상군열전(商君列傳) 8.상앙(商鞅)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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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앙(商鞅)

열전8.

1. 不能任用 不會殺之(불능임용 불회살지),

- 나를 임용할 능력도 없으니 죽일 능력도 없다. -.

상군(商君)은 위(衛)나라 서얼(庶孼) 공자다. 이름은 앙(鞅)이고 성은 공손(公孫) 씨다①. 그의 조상은 원래 주나라 왕족과 같은 희(姬) 성이다. 공손앙(公孫鞅)은 어려서부터 형명학(形名學)을 좋아했다. 후에 위(魏)나라 상국 공숙좌(公叔座)②를 섬겨 그의 중서자(中庶子)③가 되었다. 공숙좌는 그가 현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위왕에게 천거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공숙좌가 병이 들자 위왕이 몸소 거동하여 문병하며 물었다.

「공숙께서 만일 병상에서 일어날 수 없다면 누구에게 사직을 맡겨야 하겠습니까?」

공숙좌가 대답했다.

「저의 중서자 공손앙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재능이 뛰어나니 원컨대 그에게 나라를 맡기십시오.」

위왕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위왕이 돌아가려고 하자 공숙좌가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했다.

「왕께서 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그를 죽여 결코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마십시오.」

위왕이 공숙좌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한 후에 돌아갔다. 왕이 돌아간 뒤에 공숙좌가 공손앙을 불러 사과하며 말했다.

「오늘 왕이 나의 후임으로 누구를 상국으로 삼았으면 좋겠냐고 묻기에 내가 그대를 천거했으나 왕의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소. 나는 군주에게 먼저 충성을 다하고 후에 밑의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만일 공손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말했소. 왕이 내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고 돌아갔소. 그대는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왕에게 잡혀서 죽게 되오.」

공손앙이 대답했다.

「왕께서 대감의 말을 받아들여 나를 쓸 능력도 없는데 어찌 대감의 말을 듣고 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공손앙은 결국은 달아나지 않았다. 혜왕이 궁궐로 돌아가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공숙좌가 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하니 참으로 슬프도다! 과인에게 나라를 공손앙에게 맡기라고 하다니 황당한 일이로다!」

2. 治國三術(치국삼술)

- 상앙이 진효공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세 가지 술법을 유세하다. -

공숙좌가 죽고 얼마 후에 상앙은 진나라의 효공(孝公)이 나라 안에 령을 내려 인재를 구해 목공(穆公)④의 공업을 계승하여 동쪽의 빼앗긴 땅을 수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상앙은 곧바로 서쪽의 진나라로 들어가 총신 경감(景監)을 통하여 효공의 접견을 청했다. 효공이 위앙을 불러 만났으나 위앙의 말이 장황하고 지루하여 효공이 때때로 졸면서 듣지 않기도 했다. 접견이 끝나고 위앙이 물러가자 효공은 경감을 불러 꾸짖었다.

「그대가 천거한 객은 망령된 자라 어떻게 쓸 수 있단 말인가?」

이에 경감이 위앙을 책망하자 위앙이 대답했다.

「제가 전하께 요순(堯舜)의 제도(帝道)를 가지고 말씀드렸는데 그 뜻을 깨닫지 못하신 듯합니다.」

그리고 5일 후에 다시 경감이 진효공에게 위앙을 불러 다시 접견해주기를 청했다. 위앙이 효공을 만나 유세했는데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효공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다시 효공의 꾸중을 듣게 된 경감이 위앙을 책망했다. 위앙이 말했다.

「나는 우(禹), 탕(湯), 문(文), 무(武)가 행한 왕도(王道)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만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이에 경감이 다시 한 번 상앙을 위해 접견을 청했다. 효공을 접견한 상앙이 유세를 행하자 효공이 좋아하기는 했으나 곧바로 등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접견이 끝나고 상앙이 물러가자 효공이 경감을 불러 말했다.

「너의 손님은 매우 훌륭하다. 그와 함께 말을 나눌만 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상앙이 경감에게 자기가 효공에게 말한 내용을 설명했다.

「제가 패도(覇道)를 설명하자 전하께서는 그것을 채용하려고 합니다. 한 번만 더 뵙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위앙이 효공을 다시 접견했다. 효공이 위앙과 대화를 나누는데 열중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무릎이 자리 앞으로 나오는지 알지 못했다. 효공은 몇 날을 상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결코 싫증을 내지 않았다. 접견을 끝내고 나온 상앙을 보고 경감이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까? 전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고 계십니다.」

「제가 전하께 제왕의 도를 행하면 하은주(夏殷周) 삼대에 버금가는 공업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전하께서는 ‘너무 멀구나!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다. 마땅히 현명한 군주라면 각기 자신의 당대에서 공적을 이루어내어 이름을 천하에 떨치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답답하게 수십 년이나 수백 년 동안을 기다려야만 성취할 수 있다는 제왕의 도를 채택할 수 있단 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국강병의 술을 전하께 말씀드렸더니 전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은(殷)이나 주(周)가 이룩한 덕과 비교하기에는 매우 어렵습니다.」

3. 醞釀變法(온양변법)

- 변법을 준비하다. -

효공이 위앙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하려고 했으나 천하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비난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위앙이 말했다.

「의심하면서 하는 행동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하면서 하는 사업에는 성공이 없습니다. 또 대체로 남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본래부터 세상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고 홀로 아는 지혜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백성들에게 경멸을 받습니다. 또한 우매한 자는 일의 성과에 대해 어둡고 지혜있는 자는 일의 징조가 있기 전에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란 함께 일을 의논할 수는 없으나 함께 일의 성과를 즐길 수 있습니다. 지극한 덕을 논하는 자는 속세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큰 공을 성취하는 자는 대중과 함께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성인이 진실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 옛 것을 법으로 지키지 않으며 백성들을 진실로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구례를 쫓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효공이‘좋소’라고 대답하며 상앙의 변법을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감룡(甘龍)이라는 사람이 변법에 반대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聖人)은 백성들의 풍속을 고치지 않고도 교화시킬 수 있으며, 지혜로운 자는 변법을 행하지 않고도 치세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풍속에 따라 그들을 교화시키면 힘을 들이지 않고도 공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미 있는 법에 따라 다스린다면 관리들은 익숙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게 됩니다. 」

위앙이 감룡의 말에 반박하며 말했다.

「감룡은 세속적으로 진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범인들은 옛 습속에 안주하며 학자들은 알고 있는 일에만 빠져들게 됩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관리로 만들어 법을 지키게 할 수는 있으나 법 밖의 일을 더불어 의논할 수 없습니다. 삼대는 같지 않은 예로써도 왕이 될 수 있었으며, 오패는 서로 같지 않은 법으로도 패자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의 지배를 당합니다. 현자는 예를 바꾸나 불초한 자는 예에 구애되는 법입니다.」

그러자 다시 두지(杜摯)가 반대하며 말했다.

「백 배의 이득이 생기지 않으면 법을 변경하지 않고, 열배의 공업을 이룰 수 없을 때는 그릇을 바꾸지 않습니다. 옛 법을 따르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옛날의 예를 따르게 되면 사악함이 없게 됩니다.」

위앙이 말했다.

「세상에 치세를 이룰 수 있는 도는 하나만이 아니며 나라를 개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옛 법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나라의 탕왕이나 주나라의 무왕은 옛 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왕자가 되었고, 하와 은이 망한 이유는 옛 제도만을 고집하며 시세에 맞게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로 옛 제도에 어긋난다고 해서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예를 쫓는 방법만으로 해서 그 행위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효공이 위앙의 말이 옳다고 여겨 위앙을 좌서장(左庶長)⑤으로 삼아 마침내 변법의 법령을 제정하라고 명했다.

백성들을 모두10호를 십(什)으로 5호를 오(伍)로 짜서 서로 감독하게 하는 연좌제를 실시했다. 죄를 범한 자를 고발하지 않은 사람은 요참(腰斬) 형에 처하고, 고발한 사람은 전장에 나가 적의 수급을 베어 공을 세운 사람과 동일한 상을 내렸다. 법을 어긴 자를 숨긴 사람은 적에게 항복한 사람과 같은 죄를 주었다. 한 가정에 두 사람 이상의 장정이 있음에도 분가하지 않았을 경우, 그 세금을 두 배로 물렸다. 군공이 있는 사람은 그 공적의 크고 작음에 따라 각각 높은 작위를 받았다. 또한 사사로이 종족간의 싸움을 일으킨 자는 각기 그 경중을 따져 형벌을 내렸다. 백성된 자들은 온 힘을 다하여 본업에 종사하게 하고, 밭갈이나 베짜기를 하여 곡식을 많이 수확하고 비단을 많이 생산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역과 부세를 면제했다. 이익만을 취하여 장사에 종사하며 게으름을 피움으로써 가난하게 된 자는 그 가족들과 함께 모두 잡아들여 노비로 만들었다. 공실의 귀족일지라도 군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논의를 거쳐 족보에 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존비와 작위, 봉록의 등급을 분명히 하고 각각 규정을 두어 전답과 저택, 노비의 수, 의복의 종류 등에 따라 그 집의 직급을 정했다. 공이 있는 자는 영예를 누리고 공이 없는 자는 비록 부유하더라도 그 호사함을 누릴 수 없게 했다.

4. 移木立信(이목입신)

- 나무를 옮기게 해서 백성들에게 신의를 세우다. -

법령은 이미 마련되었으나 백성들이 믿고 따르지 않을 경우를 걱정하여 반포하지 않고, 즉시 3장 길이의 나무를 도성의 남문 거리에 세워 놓고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백성에게는 10금의 상금을 주겠다는 방문을 걸었다. 백성들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감히 나무를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방문을 걸었다.

「이 나무를 옮기는 자에게는50금의 상금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그 나무를 옮기자 즉시 50금 주어 나라가 백성들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마침내 법령을 포고했다.

법령이 반포되어 시행된 지 한 해가 지나자 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처음에는 법령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그래서 태자가 일부러 법령을 범했다. 위앙이 말했다.

「법이 시행되지 않는 원인은 위에서 스스로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이어서 태자에게 죄를 물으려고 했으나 태자는 후에 나라를 이을 사람임으로 태자의 몸에 직접적으로 형을 가할 수 없어 그 태부(太傅) 공자건(公子虔)에게 죄를 묻고, 사부(師傅) 공손고(公孫賈)는 경형(黥刑)에 처했다. 그 다음날이 되자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상앙이 제정한 법령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자 진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법을 지키게 됨을 매우 기뻐했다.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산속에는 도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 모두는 부유하게 되어 풍족한 삶을 살게 되었다. 백성들은 국가가 벌이는 전쟁에 나가서는 용감하게 싸웠으며, 사사로운 싸움을 벌이는 행위를 두렵게 생각했다. 이윽고 나라는 성읍이나 향촌이나 잘 다스려졌다. 처음 변법이 시행되자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했던 사람들이 그때는 법령이 편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위앙이 말했다.

「이런 자들이야 말로 백성들의 교화를 문란하게 하는 자들이다.」

위앙은 그들 모두를 변방으로 옮겨 살게 했다. 그 후로는 진나라 백성들 중 상앙의 변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게 되었다.

진효공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위앙의 작위를 대양조(大良造)⑥로 올렸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위나라의 안읍을 포위한 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3년 후에⑦ 함양에 궁궐과 기궐(冀闕)⑧을 새로 축조하고 도읍을 옹(雍)에서 함양으로 옮겼다. 다시 법령을 공포하여 성인으로써 부자나 형제가 한 방안에서 같이 혼숙하는 행위를 금했다⑨. 작은 읍과 향들을 모아 현(縣)으로 만들어 그 장관에 현령(縣令)과 현승(縣丞)⑩을 두었다. 진나라의 전국을 모두 31개 현으로 정비했다. 정전(井田)를 폐지하고 새로이 천맥(阡陌)⑪으로 경계선을 삼아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했고 부세의 부담을 공평하게 했다. 두통(斗桶)⑫, 권형(權衡)⑬ 및 장척(丈尺)을 통일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났을 때 공자건이 다시 법을 어겨 코를 베는 의형(劓刑)에 처했다. 그리고 다시 5년이 지나자 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부강해졌다. 천자가 제사를 지낸 고기를 효공에게 보내와 진나라의 치세를 포상하자 제후들도 모두 축하했다.

5. 詐俘故友(사부고우)

- 사술을 이용하여 옛 친구를 포로로 잡은 상앙 -

그 다음 해에⑭에 제나라가 위나라를 마릉(馬陵)에서 패배시키고 위나라의 태자 신(申)을 포로로 하고 그 장수 방연(龐涓)을 죽였다. 다음 해가 되자 위앙이 효공에게 말했다.

「진(秦)과 위(魏) 두 나라는 사람으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서로 간에 마치 심복질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나라가 진나라를 병탄하지 못한다면 진나라가 위나라를 병탄하게 되어있습니다. 어째서 그러겠습니까? 위나라는 서쪽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한 안읍(安邑)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진나라와는 하수를 경계로 삼아 산동의 지리적인 이점을 혼자 누리고 있습니다. 유리하면 서쪽으로 진출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고 피로해지면 동쪽으로 나아가 땅을 차지합니다. 지금 우리 진나라는 전하의 성스럽고 어진 덕으로 국세가 강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위나라의 군사는 작년에 제나라 군사에 의해 크게 무너졌기 때문에 제후들과 틈이 벌어졌습니다. 이때를 이용하여 위나라를 정벌한다면 위나라는 버티지 못하고 그 주력을 모두 동쪽으로 옮겨가야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위나라가 나라를 모두 동쪽으로 옮겨간다면 진나라는 하수와 효산(殽山)의 험지에 굳게 의지하여 동쪽의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제왕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효공이 위앙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군사를 주어 위나라를 정벌하라고 했다. 위나라가 공자 앙(卬)을 장수로 삼아 진나라 군사를 막도록 했다. 진과 위 두 나라 군대가 보루를 세우고 대치상태로 들어가자 위앙이 편지를 써서 공자앙에게 보냈다.

「원래 나와 공자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지금은 모두가 적대국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옛날 공자와 나눈 정리가 생각이 나서 차마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공자와 서로 만나 대면하고 휴전을 기약하는 회맹이나 행하면서 술잔을 기우린 후에 군사들을 거두어 돌아간다면 진과 위 두 나라는 안전을 보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자앙이 믿고 비무장으로 회맹에 참석하여 술을 마시다가 위앙이 매복시킨 갑사들에게 기습을 받아 사로잡히게 되었다. 위앙은 대장이 없는 위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진나라로 개선했다. 당시 위혜왕은 위나라의 군사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제와 진 두 나라 군사들에게 참패당하여 국내는 텅 비어 있고 날이 갈수록 영토는 줄어들어 두려운 마음에 사자를 보내어 하서의 땅을 떼어 진나라에 바치고 강화했다. 그리고 드디어 위나라는 안읍을 버리고 대량(大梁)으로 도성을 옮겼다.⑮ 양혜왕(梁惠王)⑯이 말했다.

「내가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이 되는구나!」

위앙이 하동의 위군을 격파하고 개선하자 진나라는 그를 오(於)와 상(商)⑰ 등의 15개 읍에 봉하고 위앙을 상군(商君)이라 칭했다.

6. 忠言逆耳(충언역이)

- 조량의 충언을 듣지 않은 상앙-

상앙이 진나라의 재상이 된지10년이 지나자 종실과 귀척들 중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조량(趙良)이라는 사람이 상앙을 방문했다. 상앙이 조량을 보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맹란고(孟蘭皐)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당신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같은 비천한 사람이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 공자(孔子)의 말씀에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받들어 모시면 자연히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성공하게 되고, 불초한 자를 모아 왕 노릇을 하게 되면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재주가 없는 비천한 사람이니 감히 공의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앉아서는 안 될 사람이 높은 자리를 있는 행위를 탐위(貪位)라 하고, 가질 수 없는 명성을 누리는 행위를 탐명(貪名)이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진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내가 탐탁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반성하면서 다른 사람의 충고에 귀를 기우리는 행위를 총(聰)이라 하고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행위를 명(明)이라 하며, 자기 자신을 이기는 행위를 강(强)이라 합니다. 순임금께서도 ‘스스로를 낮추면 남으로부터 높임을 받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군께서 만약 순임금의 도를 행하지 않겠다면 저에게 구태여 물으실 필요가 있으시겠습니까?」

「원래 진나라는 융적의 풍습을 배워서 부자가 무별하여 같은 방에서 남녀가 같이 기거했던 풍습을 내가 고쳐서 남녀가 유별하게 만들었소. 함양에 기궐(冀闕)을 크게 축조하여 법령을 반포함으로 해서 진나라를 노(魯)나 위(衛)나라처럼 백성들로 하여금 중원문화를 알게 했소. 그대는 진나라를 다스리는 나와 오고대부(五羖大夫)⑱를 비교해서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까?」

「천 마리의 양 가죽도 한 마리의 여우 겨드랑이 가죽보다 못합니다. 또한 천 사람의 아부하는 말보다 한 사람의 꼿꼿한 자세로 하는 직언만 못합니다. 주무왕은 신하들의 꼿꼿한 자세로 한 직언으로 창성했고 은의 주왕은 신하들이 입을 봉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군께서 만일 무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가 곁에 있으면서 하루 종일 직언만을 해도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소. 겉으로 하는 말은 화려하고, 지극한 말은 진실되며, 입에 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병이 된다고 했소. 당신의 말대로 하루 종일 나에게 바른 말만 해 준다면 이 사람에게는 약이 되오. 나는 당신의 말을 받들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계속 사양하기만 하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고대부는 초나라의 미관말직의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진목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보기를 원해 가려고 했으나 여비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진나라에서 온 손님에게 자신을 팔아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소를 길렀습니다. 일 년이 지나서야 진목공이 알고 소를 기르던 그를 끌어 올려 만백성들의 위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진나라 백성들 중 아무도 감히 그를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의 재상이 된지 6-7년이 되자 동쪽으로는 정나라를 쳤고⑲, 당진(唐晉)의 군주를 세 번이나 앉혔으며⑳, 중원에 가해지는 초나라의 침략을 물리쳤으며㉑, 그가 베푼 덕화는 진나라 밖의 파인(巴人)에게 까지 미쳐 그들로 하여금 조공(朝貢)을 바치게 만들었으며, 제후들에게 덕을 베풀어 융족의 8개 부족을 복속시켰습니다. 유여(由余)㉒가 소문을 듣고 동쪽으로 달려와 진나라의 관문을 두들기면서 접견을 청했습니다. 백리해는 미천한 처지에서 재상이 되었지만 피로해도 앉아서 타는 수레를 타지 않았으며㉓, 날씨가 찌는 듯이 더워도 수레에 덮개를 덥지 않았습니다. 나라 안을 순행할 때도 호종하는 수레를 거느리지 않았으며 무기를 든 호위병들도 데리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의 공업과 명성은 기록되어 부고에 보관되었고 덕행은 후세에 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백리해가 죽자 진나라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동자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절구에 방아를 찧는 사람들은 구령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백리해의 덕입니다. 지금 군께서는 진왕을 접견하실 때 왕의 총애를 받던 경감(景監)에게 천거를 부탁한 일은 선비로써 명예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음에도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하지 않고 기궐을 크게 지어 엄혹한 법령만을 남발했으니 그것이 공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태자의 태부와 사부에게 각각 경형 등의 형벌을 가했고, 잔혹한 형벌로 백성들을 상하게 했으니 이것은 바로 백성들의 원한을 사서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치게 하는 행위입니다. 당신의 호령은 군왕의 명령보다 깊고, 백성들은 군왕의 명령보다는 당신의 호령에 더욱 민첩하게 대합니다. 오늘 군께서 세운 제도는 도리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다시 법을 바꾸려고 해도 인정에 어긋나니 그것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없습니다. 더욱이 군께서는 군왕의 자세로 남면하여 군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과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매일 진나라의 공자들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시(詩)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㉔

보건데 쥐도 사지가 있거늘

사람으로써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써 예의가 없으니

어찌하여 빨리 죽지 않겠는가?

相鼠有體 人而無禮(상서유체 인이무례)

人而無禮 何不遄死(인이무례 하불천사)

이 시에서 보건데 군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태자의 태부 공자건에게 묵형을 가하여 8년 동안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으며, 사부 공손고(公孫賈)는 처형했습니다. 또 시(詩)에 ‘인심을 얻으면 흥하고 인심을 잃으면 망한다(得人者興 失人者崩)㉕’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께서 지금까지 한 일들은 모두 인심을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군께서 한 번 집 밖에 출타할 때는 뒤를 따르는 수레는 10여 대가 넘고 그 수레에는 무장한 군사들을 가득 싣고 힘이 장사인 무사들을 배석시켜 호위를 받으며 모(矛)와 극(戟)으로 무장한 군사들은 수레 옆에 붙어 달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 중 단 한 가지라도 갖춰지지 않으면 군께서는 결코 외출하지 않습니다. 《서경(書經)》에 ‘ 덕에 의지하는 자는 번창하고, 힘에 의지하는 자는 망한다.’라고 했습니다. 군의 운명은 마치 아침이슬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는데 여전히 직위를 탐하여 오래 살려고 하십니다. 어찌하여 상오(商於)의 15개 고을을 반납한 후에 전원으로 돌아가 화초에 물을 주며 남은 여생을 보내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동굴에 숨어 사는 처사들을 찾아 쓰도록 진왕에게 권하고 노인과 고아는 봉양하며 보살피며, 부모와 형제들은 서로 화목하여 살게 하고, 공을 세운 자들은 그 순서에 따라 상을 주고, 덕이 있는 자는 높인다면 조금은 백성들의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군께서는 상오에서 나오는 부를 탐하고 진나라에 시행한 법령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여 백성들로부터 원한을 계속 쌓아만 가고 있습니다. 만약 진왕이 하루아침에 군처럼 외국에서 손님으로 들어와 벼슬을 하고 있는 선비들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기라도 한다면 진나라에서 군을 잡으려고 들고 일어서는 사람의 수효가 적다고 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군의 패망은 발돋움하고 기다리는 일처럼 조석지간에 있습니다.」

그러나 상군은 결국은 조량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7. 作法自斃(작법자폐)

- 자기가 만든 법에 저촉되어 목숨을 잃다. -

그리고5개 월 후에 진효공이 죽고 태자가 그 뒤를 이었다. 공자건이 상군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변을 하자 진왕은 관리를 보내 상군을 체포하려고 했다. 상군은 도망쳐 진나라의 관문 앞에 이르러 객사에 투숙하려고 했다. 객사의 주인은 투숙하려고 하는 사람이 상군인줄 모르고 말했다.

「상군의 법에 증명서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재워주면 죄를 받게 됩니다.」

상군이 듣고 한탄하며 말했다.

「아아 내가 만든 법의 폐해가 나에게까지 이르렀구나!」

상군은 관문을 빠져나와 위나라로 갔다. 옛날 상군이 공자앙을 속이고 위군을 무찌른 행위에 원한을 품고 있던 위나라 사람들이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상군이 삼국으로 가려고 하자 위나라 사람들이 말했다.

「상군은 진나라에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이다. 강대한 국력을 지닌 진나라의 반역자가 위나라에 들어왔으니, 그를 잡아 송환시키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위나라 사람들이 상군을 체포하여 진나라로 들여보냈다. 진나라에 송환되던 중 도망쳐 그의 봉지로 들어간 상군은 그를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봉지의 군사를 일으켜 정(鄭)㉖을 공격했다.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상군을 공격하여 민지(黽池)㉗에서 죽였다. 진혜왕은 상군의 시신을 가져와 거열형에 처하고 시중에 「상앙처럼 모반하지 말지어다.」라는 방과 함께 전시했다. 그리고 이어서 상군의 일가를 멸족시켰다.

태사공이 말한다.

상군은 그 성품이 각박한 자다. 그가 처음에 진효공에게 제왕의 도를 유세한 행위를 살펴보면 헛소리를 빌렸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총신의 소개를 통해 임용되더니 공자건에게 형을 가하고 위나라 장수 공자앙을 속였으며 조량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행위를 보면 그는 역시 마음이 각박한 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일찍이 그가 저술한 《상군서(商君書)》㉘ 중의 《개색(開塞)》과 《경전(耕戰)》편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그의 행적과 비슷했다. 상군이 결국은 진나라에서 악명을 떨치고 비명에 죽은 원인은 모두가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앙열전 끝》

주석

①중국의 고대에는 성(姓)과 씨(氏)를 구별했는데, 성은 가족 계통을 기준으로 한 칭호이고, 씨는 종족집단을 지칭하는 칭호다.

②공숙좌(公叔座)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위혜왕 10년인 기원전 361년에 죽었다. 성은 희(姬)이고 씨는 위(魏)이고 이름은 좌(痤)이다. 위나라 공족 출신으로 위무후(魏武侯) 때 전문(田文)의 뒤를 이어 위나라 재상이 되었다. 왕착(王錯)과 함께 오기를 모함하여 오기가 초나라로 달아나게 했다. 위혜왕 8년 기원전 362년 그는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회수(澮水) 북안에서 한(韓), 조(趙) 두 나라의 연합군을 대파하고 조나라 땅으로 진공하여 피뢰(皮牢)의 땅을 점령했다. 같은 해 진나라가 위나라 땅인 소량(少梁)을 공격해 오자 공손좌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여 싸웠으나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후에 진나라로부터 석방되어 돌아와 위나라의 재상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③중서자(中庶子) : 주나라가 설치한 관직으로 제후나 경(卿). 대부(大夫)들의 자식들 중 서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후에 춘추와 전국을 거치면서 제후들도 따라서 설치했다.

④진목공(秦穆公) :기원전 659년부터 621년까지 재위한 춘추 때 섬진(陝秦)의 군주다.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으로 재위 기간 중 다음과 같은 치적을 올렸다.

1. 백리해(百里奚)와 건숙(蹇叔) 등의 모신(謀臣)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다.

2. 즉위 초에 동쪽의 중원으로 진출하여 패업을 이룩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당진을 공격하여 하곡(河曲)에서 싸웠다.

3. 주양왕 원년, 기원전 651년 하서(河西) 및 하외오성(河外五城)을 섬진에게 할양한다는 제안을 수락하고 군사를 동원 진헌공의 아들 이오(夷吾)를 귀국시켜 당진국의 군주자리에 올렸다. 이가 진혜공이다.

4, 기원전 645년 당진의 혜공이 약속을 파기하고 섬진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자 그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당진을 공격하여 한원(韓原)에서 당진군을 대파하고 혜공을 포로로 잡았다. 당진의 혜공은 옛날 할양하기로 약속한 하서의 땅 8개의 성을 섬진에게 넘기고 석방되었다.

5. 기원전 641년, 이민족이 세운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남쪽에 있었던 양(梁)과 대려현(大荔縣) 부근의 예(芮)를 멸하고 섬진의 영토에 병합했다.

6. 그 전에 당진의 헌공과 혜공의 핍박으로 중원 여러 나라를 전전하던 공자 중이(重耳)를 기원전 636년, 섬진으로 초치한 후에, 군사를 내어 당진으로 귀국시켜 군주자리에 앉혔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진문공은 조카 진회공(晉懷公)의 군주자리를 빼앗은 후에 살해했다.

7. 다시 진문공이 국내의 반대세력이 일으킨 반란으로 쫓겨오자, 진목공은 군사를 내어 반란을 진압하고 당진의 정권을 안정시켰다.

8. 기원전 628년 진문공이 죽자 건숙과 백리해의 간하는 말을 뿌리치고 정나라를 기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정나라 공격을 성공하지 못하고 중도에 회군하는 섬진군은 그 다음 해인 기원전 627년에 효산에서 당진군의 매복에 걸려 500백 승에 달하는 군사가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9. 이에 진공 방향을 서쪽으로 돌린 진목공은 내사 요(寥)의 계책을 이용하여 융왕(戎王)과 그 신하를 이간시킨 결과 섬진국에 항복해 온 유여(由餘)의 계책을 이용, 융국을 포함한 서융의 20여 개 나라를 병탄하여 천여 리에 달하는 영토를 넓혔다. 이에 진목공을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10. 그러나 그가 이루었던 패업도 기원전 621년 죽을 때 170명에 달하는 섬진의 대소 신료들을 순장시킴으로 해서 허사가 되었다.

⑤좌서장(左庶長) : 진나라 관직의 명칭. 진나라의 관직은 모두 20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좌서장은 그 중 10등급의 직위로써 군사의 일을 관장하였다

⑥대양조(大良造) : 전국시대 초기에 진나라 군정(軍政)의 최고 책임자였다. 뒤에 작위로 바뀌었는데 진나라 20등급의 작위 중 16번째다.

⑦기원전 350년을 말한다. 이 해에 진나라는 상앙의 2차 변법을 시행하여 내정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주요한 조치들은 1)함양 천도, 2)전국을 현으로 개편하고 令과 丞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3)정전(井田)을 폐하고 천맥(阡陌)을 개간하여 농지를 확대했다. 4)도량형(度量衡)을 통일했다. 5)부자나 형제가 같은 집에서 거주하는 것을 금했다.

⑧기궐(冀闕) : 옛날 궁문의 양쪽에 설치했던 관루(觀樓)로써 법령을 기록하여 발표했던 했던 곳이다. 기(冀)는 기(記)와 통한다. 상위(象魏) 혹은 상궐(象闕)이라고도 한다. 상(象)은 법률을 의미하고 위(魏)는 높다는 뜻이다.

⑨원문은 同室內息(동실내식)이다. 당시 진나라는 서융의 풍속이 남아 있어 성인이 되어도 남녀가 함께 같은 방에서 혼숙하며 살았다.

⑩현승(縣丞) : 현령(縣令) 밑에서 경제와 사법을 관장하고 양식과 마초를 징발 및 현의 중요한 안건을 직접 심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⑪천(阡)은 남북으로, 맥(陌)은 동서로 난 전답의 경계선을 말한다.

⑫두통(斗桶) : 곡식을 재는 용기로 1통(桶)은 6말이다.

⑬권형(權衡) : 권(權)은 저울추 형(衡)은 저울을 말한다.

⑭기원전 342년 제(齊)와 위(魏) 두 나라 군사가 마릉(馬陵)에서 교전한 결과 전기와 손빈이 이끄는 제군이 방연이 이끌던 위군을 대파했다. 이로써 전국 초기에 패자로 군림했던 위나라는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그 틈을 노린 진나라가 상앙의 변법으로 비약적으로 신장된 국세를 이용한 진나라가 동진해 오자 위나라는 하서와 하동 지역의 땅을 진나라에게 빼앗겼다.

⑮상앙이 출전하여 공자앙이 이끌던 하동의 위군을 공격하여 격파한 해는 기원전 340년이고 위나라가 동진하는 진나라의 세력에 위협을 느낌과 동시에 당시 내정을 일신하여 중원으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제나라와의 패권 투쟁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그 도성을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긴 해는 진효공(秦孝公)이 즉위하던 기원전 361년이 되는 해다. 이 부분은 위세가(魏世家)의 기록과 함께 사마천의 착오다. 상앙은 그 2년 후인 기원전 338년에 사망했다.

⑯위(魏)가 그 도성을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긴 후부터 그 국호를 양(梁)으로 불렀다.

⑰통상 상오(商於)라 하며 상(商)은 지금의 섬서성 상현(商縣) 동남, 오(於)는 하남성 내향현(內鄕縣)이다.

⑱오고대부(五羖大夫) : 진목공 때 재상을 지낸 백리해(百里奚)를 말한다. 원래 춘추 초기 때 우(虞)나라의 대부였으나 당진(唐晉)이 가도멸괵(假道滅虢) 작전으로 우나라를 멸할 때 당진국의 포로가 되었다가 뒤이어 진헌공의 딸 목희가 진목공에게 시집갈 때 그녀의 몸종으로 진나라에 보내졌다.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한 백리해는 진나라에 호송 도중 도망쳐 초나라로 들어갔다. 소를 기르데 특별한 재주가 있음을 알게 된 초나라는 그를 말을 기르는 미관(微官)에 임명했다. 이를 안 진목공이 초(楚)나라에 암양가죽 다섯 장을 주고 대속하고 데려와 대부로 삼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백리해는 건숙(蹇叔), 유여(由余) 등과 함께 진나라의 국정을 보좌하여 진목공이 패자가 되게 했다.

⑲東伐鄭(동벌정) : 좌전 노희공(魯僖公) 32년 즉 기원전 627년 정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주둔하고 있던 진군(秦軍)의 장수 기자(杞子)가 진목공에게 편지를 보내, 정나라가 그에게 정나라의 도성 신정성(新鄭城)의 수비를 맡도록 했기 때문에 만일 진나라가 비밀리에 군사를 보내 기습한다면 정나라를 점령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진목공은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孟明視) 등의 세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정나라를 기습하도록 했다. 다음 해인 33년 맹명시 등이 이끌던 진군이 정나라에 가까운 지금의 하남성 언사시(偃師市) 부근에 있었던 활국(滑國)에 이르렀을 때 진군의 행군이 발각되어 정나라가 방어를 강화하자 기습전이 아니고 정면으로 신정성을 공격했을 경우 중과부적으로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대신 활국을 멸했다. 활국을 멸하고 포로와 전리품을 갖고 귀환하던 500승의 달하는 진나라 군사들은 효산의 험지에서 당진군(唐晉軍)의 매복에 걸려 모두 전사하고 세 장수는 당진국의 포로가 되었다.

⑳三置晉國之君(삼치진국지군) : 진목공 9년 기원전 651년 당진의 獻公(헌공)이 죽자 그 대부 리극(里克)의 란을 일으켜 어린 군주 해제(奚齊)를 살해했다. 이에 타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당진의 공자 이오(夷吾)가 사람을 목공에게 보내 자기가 당진국의 군주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했다. 진목공이 허락하고 백리해로 하여금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이오를 호송하여 당진국의 군주 자리에 앉혔다. 이가 진혜공(晉惠公)이다. 진목공 23년 기원전 537년 섬진에 인질로 와 있던 당진국의 태자 어(圉)가 혜공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도망쳤다. 태자 어가 도망친 이유는 자기가 없을 때 혜공이 죽기라도 한다면 군주 자리가 다른 공자에게 넘어가지나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해인 기원전 536년 진혜공이 죽자 태자 어가 그 뒤를 이어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회공(晉懷公)이다. 도망친 회공의 행위에 분노한 진목공은 당시 초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당진국의 또 다른 공자 중이(重耳)를 섬진국으로 데려와 군사를 시켜 호송하게 하여 회공을 쫓아내고 당진의 군주 자리에 앉혔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후에 당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문공이 몰래 도망쳐 섬진으로 들어와 구원을 요청하자 진목공은 다시 군사를 출동시켜 반란을 진압하고 진문공을 복위시켰다. 섬진국의 군주를 세 번 올렸다는 말은 진혜공 1번, 진문공 2번 을 군위에 올렸다는 말이다.

㉑원문은 一救荊國之禍(일구형국지화)로 기원전 632년 당진(唐晉)과 초(楚) 사이에 벌어진 성복대전(城濮大戰)에서 당진국을 도와 초나라 세력의 북진을 저지한 일을 말한다. 기원전 633년 겨울 진(陳), 채(蔡), 정(鄭) 등의 위성국을 이끈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송나라의 위급함을 당진국에 알려 구원을 요청했다. 해가 바뀐 다음 해에 선진(先軫)의 계책을 채용한 당진국은 섬진(陝秦) 및 제(齊) 양국과 항초동맹을 체결했다. 진목공은 그의 아들 영(甯)에게 군사를 주어 참전하여 당진군을 구원하도록 했다. 그해 여름 당진, 송, 제, 섬진 등의 4국 연합국은 성복에서 초군과 회전한 결과 대승을 거두오 송나라를 구원하고 초나라의 북진을 저지시켰다. 救荊國之禍(구형국지화)란 형국(荊國) 즉 초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송나라를 구원했다는 뜻이다. 성복에서 초군을 대파한 일은 진나라 재상이었던 백리해와는 크게 관계가 없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당진국과 당진군을 이끌었던 장수 선진이다. 또한 당진국의 군주를 처음 세운 해는 진목공 9년이고, 초나라의 군사를 물리치고 송나라를 구한 일은 진목공 28년, 진나라 군사가 동쪽의 정나라를 공격했던 일은 진목공 33년의 일로써 모두 24년에 걸쳐서 일어난 일이다. 본문의 ‘백리해가 진나라 재상이 되고 6-7년’이라는 기술은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하지 않다. 진목공이 다섯 장의 암염소 가죽을 주고 백리해를 대속하고 진나라로 데려온 해는 진목공 5년 즉 기원전 655년의 일로 목공은 백리해와 3일 밤낮으로 대화를 나누며 크게 기뻐한 나머지 국정을 그에게 맡겼다. 그때 백리해의 나이는 이미 70이 넘어선 상태였으며 동쪽의 정나라 정벌군을 일으킨 해는 진목공 23년의 일로써 그때는 백리해의 나이는 근 100살이나 아니면 100살을 넘어섰을 때였다.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봤을 때 본문에서 조량이 한 말은 역사적인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㉒유여(由余) :진목공 때 섬진의 대부다. 그는 당진국 출신이나 윤락하여 융(戎)으로 들어가 융왕을 모셨다. 진목공 34년 기원전 626년 융왕에 의해 섬진에 사자로 온 유여를 진목공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계책을 세워 그로 하여금 섬진에 귀의토록 한 다음 대부로 임명했다. 진목공은 융족의 지리에 밝은 유여의 계책을 이용하여 12개에 달하는 융족의 나라를 평정하고 그 1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넓혔다. 이로써 진목공은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유여(由余)》라는 3편의 저서가 지금까지 전한다.

㉓원문은 勞不坐乘(노부좌승)이다. 옛날 중국 고대에는 통상적으로 일반인이 수레를 이용할 때는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다녔고 좌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들은 군주나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인사에 한해서 였다. 백리해는 앉아서 다닐 수 있는 수레를 이용할 수 있는 신분이었지만 겸손하여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㉔시경(詩經) 용풍(鄘風) 상서(相鼠)의 3절 중 마지막 절이다. 쥐가 사람을 보면 앞다리를 서로 맞잡은 모양이 마치 사람이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여 예를 알고 있다는 뜻에서 예서(禮鼠)라고도 한다. 처음의 두 절은 다음과 같다.

相鼠有皮 人而無儀(상서유피 인이무의),

보건데 쥐도 가죽이 있거늘 사람임에도 예의가 없구나

人而無儀 不死何爲(인이무의 불사하위)

사람이 예의가 없으니 어찌 죽지 않겠는가?

相鼠有齒 人而無止(상서유치 인이무지)

보건데 쥐도 이빨이 있거늘 사람임에도 버릇이 없구나

人而無止 不死何俟(인이무지 불사하사)

사람이 버릇이 없으니 어찌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㉕이 시는 실전되어 시경에 보이지 않는다.

㉖정(鄭) : 지금의 섬서성 화현(華縣)에 있었다. 원래 춘추 때 정나라는 이곳에 봉해졌다고 주나라가 낙읍으로 동천하자 정나라도 같이 봉국을 옮겨 그 지명을 신정(新鄭)이라고 지었다.

㉗민지(黽池) : 동지(彤池)의 잘못이다. 동지(彤池)는 지금의 섬서성 화현 서남에 동은(彤恩)이라고 있다.

㉘상군서(商君書) : 상앙이 죽자 후세의 법가들이 그의 변법을 시행하는데 동원된 이론을 편찬하고 이름을 상군서라 지었다. 한서 예문지에 모두 29편이 언급되어 있는데 지금은 24편 만이 전해지고 있다. 《개색(開塞)》은 7편이고 《경전(耕戰)》 즉 《농전(農戰)》은 3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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