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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5 10:14:333730 
경술국치 100년 2. 야마다 쇼지
운영자

“조선 침략 진행될수록 천황의 인기 치솟아”




야마다 쇼지 전 릿쿄대 교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뿐만 아니라 전후 책임, 사후 책임을 집요하게 추궁해왔다. 그의 문제제기는 일본 정부에 그치지 않고, ‘국가범죄’에 가담하고 묵인해온 일본 민중에도 향해 있다. 자신이 30여년 재직했던 대학도 비판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릿쿄대학이 일제 때 침략전쟁에 협력한 사례를 모아 자료집을 내고 논문을 썼다. 그는 잘못된 과거를 따지는 지식인의 자세에 대해 “말하지 않고 생각만 한다면 도피하는 것이다. 고치려면 역시 배수진을 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야마다는 여든의 나이에도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시민의 모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철저한 무시 전략을 깨기 위해 유엔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그를 지난해 11월3일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의 자택으로 찾아가 의견을 들었다.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등

일 정부 무시에 유엔제소 검토




-언제부터 한국(조선)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나는 도코로자와 인근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 일제 말 상업학교를 다닐 때 근처의 육군항공병 훈련학교에서 근로봉사를 했다. 황국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실제로 본토결전이 됐다면 만주나 오키나와에서처럼 집단자결 무리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난 후 보통 일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했다. 자신이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아시아에 가해자라는 것을 명확히 자각하게 된 것은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하면서부터다. 당시 일본에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논리는 북한·중국 등 사회주의권에 대항하는 군사동맹 강화 움직임을 저지하자는 것이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속죄나 보상이 빠져서 반대한다는 생각은 진보 진영에도 없었다. 나는 그보다는 일본이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채 다시 한국에 가서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출발점이 됐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혐의로 71년 구속된 서승·서준식 형제 구출위원회 활동을 오래 했는데.




“서승은 도쿄교육대학(현재는 쓰쿠바대학으로 통합됨) 후배이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 그가 입학했을 것이다. 1심에서 사형, 징역 15년의 중형이 형제에게 선고되자 가지무라 히데키가 구원활동에 나서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신은 68년 2월 시즈오카의 스마타쿄 온천에서 벌어진 김희로 사건 대책 때문에 여력이 없다고 했다. 71년 11월 서씨 형제를 지키는 모임을 결성해 그들이 풀려날 때까지 운동을 계속했다. 72년부터 탄원 활동을 하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통역 없이 찾아다녀야 하니까 한국말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함석헌 선생을 찾아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두 분 다 도쿄교육대학의 전신인 도쿄고등사범학교 출신이다. 함 선생은 와세다나 게이오대학 출신과 달리 도쿄고등사범은 동창회 활동이 활발하지 않고, 최 대통령과 친분이 없다고 했다. 당시 명동 위장결혼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함 선생은 그 와중에도 “최근 경찰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고 농담을 하더라. 결국 주한 일본대사관의 직원과 함께 청와대로 가 탄원서를 접수시키고 돌아간 적도 있다. 사건을 맡았던 이돈명 변호사를 비롯한 한국의 민주인사를 많이 알게 된 것이 나로서는 큰 기쁨이었다.”




메이지 유신뒤 절 안하던 백성

청일전쟁 이후 ‘천황’에 환호성




-한국 정부나 기관의 위협을 받지는 않았나?




“노골적 위협은 없었지만 입국비자를 신청해도 나오지 않았다. 도이 다카코 사회당 의원의 비서가 보증을 해줘 비자를 받았다. 대체로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갔는데 한번은 부산으로 간 적이 있다. 무정부주의자인 박열과 결혼했다가 옥사한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무덤이 경북 문경에 있다. 묘소를 보고 싶어 부산 공항으로 갔는데 입국심사관이 ‘북괴와 관련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심사를 통과한 뒤 여권을 자세히 보니 비자 번호 외에 연필로 쓴 번호가 있었다. 요주의인물이라는 표시였던 것 같다. 김포에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운이 좋았던 편이다. 탄원서를 갖고 들어가다 공항에서 압수당하는 일이 제법 있었다.”




-서씨 형제의 모친 오기순씨에 대한 인상을 글로 쓰기도 했는데.




“민족차별, 성적 차별에 꿋꿋하게 버틴 대단한 여성이다. 어렸을 때 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니 글을 깨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아들이 체포되고 나서 면회를 다녀야 하니 출입국 서류를 쓰기 위해 필사적으로 글을 배웠다. 감옥에서 면회할 때 아들이 무슨무슨 책을 넣어달라고 하면 받아쓰느라 고생을 했다. 다 적지 못해도 교도관은 접견시간이 지나면 냉정하게 끊어버렸다. 서씨 형제의 맏형이 옥중의 동생들보다 더 고생했을지 모른다. 그는 묵묵히 사업을 하면서 변호사 비용 등 온갖 뒷바라지를 했다. 역사란 것은 앞에 드러난 사람이 항상 훌륭한 것이 아니다. 서준식은 획정된 징역 7년형을 살고도 오랜 기간 석방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이 일제의 치안유지법, 예방구금법의 복사판으로 생각돼 역시 식민지라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절감했다.”




-가네코 후미코 연구가 서씨 형제 구원활동의 부산물이었다고 하던데.




“가네코는 어렵게 자라 호적도 없었고 가부장제 사회의 성적 차별도 받았다. 그래서 식민지 지배 아래 있던 조선인들의 고통과 투쟁에 공감했을 것이다. 3·1운동 때 보통 일본인은 무섭다고 했지만 그는 기뻐했다. 가네코의 삶은 나에게도 격려가 됐다. 구원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가네코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위령비 세워진 곳 제법 있지만

학살 주체 명기된 것 거의 없어




-1923년 간토(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문제에 뛰어든 계기는?




“71년 12월부터 73년 8월까지 나가노현 미나미사쿠군 오히나타 마을에서 만주국 농업이민에 대한 조사를 대학생들과 함께 했다. 만주국을 세우고 나서 개척이민을 보낸다고 마을을 나눠 주민들을 보내곤 했는데 그 지역이 첫 번째 사례였다.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간토대지진 때 도망쳐온 조선인들이 주변 산에 은신을 해 수색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오지까지 조선인들이 도망쳐 왔다면 학살이 단지 간토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당시 지방신문의 보도를 조사해보았다. 곳곳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몰려온다고 난리였다. 그것이 간토대지진 학살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경찰서에 수용돼 있던 조선인들을 자경단이 습격해서 죽인 사례들도 있었다.




80년대에는 희생된 조선인들의 위령비를 쭉 둘러보았다. 사이타마·군마·가나가와·지바현 등에 위령비가 제법 있다. 재일 조선인들의 건립 요구에 공감하는 일본인 유지들이 지방자치단체나 주민들과 상의해 세운 것이다. 비문을 읽어보고 느낀 것은 학살 주체가 명기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체로 ‘간토대지진에 즈음해 조선인이 동란을 일으켰다는 뜬소문에 의해 도쿄 방면에서 보내져온 수십명이 이 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식이었다. 비문을 쓴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다. 원·수폭 금지 등 평화운동에 앞장선 활동가나 진보적 학자들이다. 이들의 평소 행동이나 사상으로 보아 스스로 원해서 비문을 그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현지 주민들의 반발이 있어 타협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지진 때 학살 방식도 잔혹했다. 여성을 죽창으로 찌른다든가 배를 눌러 내장을 뽑아내는 일도 있었다. 민족차별만이 아니라 동시에 성적 차별도 행해진 것이다. 이런 행위가 처벌받지 않고 관심을 끌지도 않았으니 군대위안부 문제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정부에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움직임은 없었나?




“학살 사건 3개월 후인 1923년 12월 나가이 류타로 의원이 중의원 본회의에서 야마모토 곤베에 총리에게 사죄를 요구했다. 모든 책임을 자경단에 돌리고 있는데 정부 스스로 유언비어를 낸 것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가라고 따졌다. 야마모토 총리는 ‘현재 조사중이며 언젠가 발표할 것’이라고 답변했지만, 이제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는 없다. 재일 조선인들은 일제하에서도 항의·추도집회를 어디에서건 열었지만 일본 관헌이 철저하게 탄압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탄압이 심해져 조선인들도 집회를 하지 못했다. 금병동 전 조선대 도서관 부관장(1927∼2008)이 일본인들이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성의는 인정하지만 왜 국가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일본인의 아픈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2003년 8월 일본변호사연합회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진상조사·책임인정·사죄를 요구하는 권고서를 냈지만 아무 응답이 없다.”







“국가범죄 가담하고 묵인해온 일본민중도 책임”







-일본 정부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 무엇이 가능한가?




“일본 사법부에 제소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의원을 통해 정부에 압력을 가하거나 아예 유엔으로 가져가자는 의견도 있어 논의중이다.”




-일본에서는 45년 8월15일의 항복을 패전이라기보다는 종전으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전 대신 8·15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종전은 천황제 국가가 항복한 것을 속이는 말이니 쓰면 안 된다. 패전으로 일본인이 해방되기는 했지만 국가권력에 맹종해서 전쟁을 치른 가해자였던 것도 분명해 단순히 해방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아직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8·15를 쓰고 있다. 조선·조선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쓴 첫 논문이 68년 1월 발표한 ‘8·15를 둘러싼 일본인과 조선인의 단층’이다. 나중에 단층을 단절이란 말로 바꿨다. 좋은 평가도 있었지만 좌우 양쪽에서 반발이 있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메이지 시기로 가져간 것이 정한론과 자유민권론 비판이다. 그전에는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이 조선과 연대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메이지 시기에 그런 발상을 했을 리가 없어 조사해보니, 자유민권운동파가 불평등 조약을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조선 문제와 천황제는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이 교토에서 도쿄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마차를 타고 다니면 일반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머리를 숙인 것은 관료들뿐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때 메이지가 히로시마에 대본영을 두고 진두지휘를 한 뒤 도쿄로 돌아올 때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30년이 되지 않아 그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조선 침략이 진행될수록 천황의 주가가 올라갔다.”







패소전례 없고 논리 모순 우려

정부쪽 변호인 반대신문 안해




-전쟁 책임을 얘기하면서 ‘전후 책임’ ‘사후 책임’, 나아가 ‘민중 책임’까지 거론했다. 민중 책임을 얘기하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아마도 민중 책임은 내가 처음 얘기했을 것이다. 민중은 일제 때 관헌에 가담해 학살을 하고 전후에는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못한 이중의 책임이 있다. 나는 후자가 더 무겁다고 본다. 대지진 때 일본 관헌이 조선인 폭동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민중이 죽였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나서 왜 그렇게 했는지를 따지면 국가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책임은 물론 국가가 져야 한다. 하지만 민중이 가만히 있으니 국가 책임도 감춰졌다. 나로서는 그게 더 충격이다.”




-전후 보상재판에 한국인 원고 쪽 증인으로 나가 의견서를 내는 활동을 오래 했는데.




“유감스럽지만 대체로 패소했다. 일본강관의 경우는 재판부가 화해를 권고해 회사가 돈을 냈지만 사죄는 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강제연행을 인정하더라도, 한-일조약으로 보상은 끝났다며 기각을 한다. 재판에서 재미있는 것은 정부 쪽 변호사가 반대신문을 하지 않는 점이다. 잘못하면 모순이 드러나는데다 패소할 리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침묵을 지킨다. 여자 근로정신대 재판에서는 한 강제연행 연구자가 증인으로 나왔다가 당사자에게 상처를 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일본인 자원봉사자가 나에게 달려와 증언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잘 모르는 분야이니 양해해달라고 거절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달라고 해 할 수 없이 반년 정도 맹렬히 공부해 증언대에 섰다. 힘들었지만 좋은 공부가 되기도 했다.”




-교과서 검정에 항의해 수십년에 걸쳐 법정투쟁을 한 이에나가 사부로(1913~2002) 와는 어떤 관계인가?




“패전 직전 도쿄고등사범 교수로 와 교육대학에서 30여년 근무했으니 나의 은사다. 원래 일본사상사 고대사 쪽이 전공이었던 그분에게 조선 문제는 가장 약했던 부분이다. 대세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항상 재검토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수정하는 태도가 좋았다. 좀 보수적인 학자였으나 검정제도 때문에 교과서가 우경화하자 그분은 좌로 선회했다. 서씨 형제 지원 관계로 교과서 재판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편지를 보냈더니 ‘지금은 좀 다르지만 최종적으로 같은 지점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답신이 와 아주 기뻤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나쁘지만

일본정부는 조선에 더 심한 짓




-성공회가 세운 릿쿄대학이 1930, 40년대에 일제의 전쟁수행에 협력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논문을 몇 차례 발표했다. 1962년부터 30여년 재직했던 대학의 과거를 들춰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학교 쪽의 반응은 어떠했나?




“그냥 침묵을 지켰다. 나에게 아무런 압력도 없었다. 주변도 마찬가지여서 비난하지 않고, 그렇다고 잘했다고도 하지 않았다. 전쟁 책임을 명백히 하지 않으면 논쟁이 되지 않는다.”




-납치 문제로 북한에 대한 일본의 여론이 아주 좋지 않다. 북한 때리기 현상도 계속되고 있다.




“납치야 물론 나쁜 일이지만, 간토대지진 때 일본인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제대로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이 훨씬 심한 짓을 했다.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가서는 안 된다. 납치는 국가범죄이지만 강제연행도 국가범죄다. 나는 그동안 강제연행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된 가족을 찾아달라는 편지를 한국인들로부터 많이 받았다. 수많은 강제연행 행방불명자에 대해 보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납치문제만 떠들어대면, 북이 무슨 말을 하느냐며 반발하는 것도 당연하다.”




-조선 문제에 매달려온 학자로서 100년을 맞는 감상이 있다면?




“새로운 한일관계를 쌓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의 국가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움직이면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스타일이다.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학을 택했다. 지금의 젊은 연구자들에게는 그런 태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유감스럽지만 업적 경쟁에 몰입돼 있는데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코로자와/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 야마다 쇼지 약력




1930년생. 도쿄교육대학 졸. 릿쿄대학 교수. 저서 <가네코 후미코>(1996)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2003) <조선인 전시 노동동원>(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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