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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22 07:58:045527 
일본의 밀정으로 활약한 매국녀 배정자 일대기
운영자

일본의 밀정으로 활약한 매국녀 배정자 일대기










배정자(裵貞子, 1870~1951)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경남 김해 출생













이토의 양녀가 되어 밀정교육을 받다




일제시기 요화(妖花)로 불렸던 배정자는 뛰어난 미모와 함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로 숱한 화제를 뿌렸으며 또한 일제를 위해서라면목숨까지 무릅쓰고 정보를 얻어내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실력을 보여 주었던일제의 밀정이었다.그런데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배정자를 일제의 밀정으로서보다는 뛰어난용모를 지녔던 이토의 양녀로 많이 알고 있다. 또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를다룬 어떤 소설에서는 배정자가 마치 조선을 위해 일본 밀정으로 위장활동을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배정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시각의 차원을넘어서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배정자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일제의 충견이었다.




배정자는 1870년 김해에서 밀양부의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의 딸로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분남(粉男)이었다. 배정자라는 이름은 나중에이토가 직접 지어준 일본 이름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에서 나온 것이었다. 4세 되던 1873년 배정자는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당시 대원군이권좌에서 쫏겨난 뒤 불어닥친 숙청 바람에 휩쓸려 대구감영에서 처형되었다. 졸지에 아버지가 죽고 집안이 산산조각이 나자 어머니로서는 살길이막막했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마음대로일할 수도 없었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받아 눈까지 멀어 버렸다.




이에 어머니는 어린 배정자를 데리고 집을 뛰쳐나와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나 집을 나와 유랑생활을 한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는 어린 배정자를 양산에 있는 통도사에맡겨서 키워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때가 1882년으로 12세 되던 해이다. 배정자는 이때부터 여승이 되어 절에서 승려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승려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았는지 1년도 넘기지 못하고 그녀는 절에서 뛰쳐나왔다. 절에서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녀는 죄적에 올라 있는 역적의자손이었기 때문에 곧 밀양관청에 체포되었다.그런데 당시 밀양부사로 있던 정병하(鄭秉夏)는 배정자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사이여서 그녀를 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살기 어려운 그녀의처지를 생각하여 당시 무역상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던 일본인 밀정마쓰오(松尾)에게 부탁하여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이렇게 하여 배정자는 1885년 15세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배정자는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물 안경수(安경壽)를 알게되었다. 안경수와의 만남은 이후 배정자의 일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안경수는 배정자를 역시 일본에 망명중이던 김옥균에게 소개하였는데,김옥균은 그녀를 데리고 있으면서 보호해 주었다. 바로 이때 배정자의 인생을바꿔 놓은 일본의 실력자 이토를 만나게 된 것이다. 배정자를 만난 이토는그녀의 빼어난 미모가 마음에 들어 자기집에서 살게 하고, 하녀 또는 양녀로생각하면서 새로이 다야마 데이코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 주었다. 이토는 배정자에게 수영, 승마, 자전거, 사격술, 변장술을 가르쳐 밀정으로써먹을 날을 대비했으며, 당시의 동양 정세를 설명하면서 일제가 동양 3국을지배해야 동양의 평화가 온다는 일제의 침략사상으로 그녀를 철저하게무장시켰다.




고종의 총애 속에 세도를 부리다




이토에게 세뇌된 배정자는 드디어 1894년 24세의 나이에 밀정으로 조선에파견되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도중 체포되었다. 이 때 그녀는김옥균이 국내의 어윤중(魚允中), 김홍집(金弘集) 등에게 보내는 편지와 안경수의 밀서를 지니고 있었다. 체포되어 조사 받는 과정에서 김옥균의 편지와 밀서가 발견되자 그녀는 심한 고초를 겪었다.




당시 김옥균, 안경수 등을 비롯한 망명 개화파는 나라의 역적으로 몰려있었기에 배정자는 역적의 연락원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결국 첫번째밀정으로서의 임무는 실패로 끝났지만, 배정자는 이토의 양녀라는 신분을내세워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그러나 일본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영근(高永根)을 만나면서 다시 밀정으로 파견되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고영근은 민비 살해사건의 주범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우범선*을 일본에서 살해한 사람이었다. 당시 일본 경찰은 고영근을 붙잡아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고영근은 살인범에 지나지 않았지만, 조선 정부에게는충신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었다.




배정자는 고영근의 신임장을 가지고, 당시 서울에 부임하던 하야시(林權助)공사의 통역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밀정으로 들어왔다. 배정자에게 부여된임무는 일제의 조선 침략에 장애가 되는 러시아 세력을 황실에서 몰아내는것이었다. 조선에 들어온 배정자는 주로 일본공사관에서 생활했다. 그러다가1903년, 당시의 세도가였던 엄비의 조카사위 김영진(金永鎭)과이용복(李容馥)을 만나게 되었고, 또 이들을 통해 황실로 들어갈 수 있는기회를 얻게 되었다. 배정자는 엄비의 주선으로 고종에게 소개되었는데,고종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면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줄 것을부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화려한 미모와 뛰어난 일본어 실력으로그녀는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신임을 바탕으로 배정자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3년 말, 밀정으로서 큰공을 세우게 된다. 당시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는상황이었다. 민영휘*, 이용익(李容翊) 등 친러파 거두들은 러시아와 일본이전쟁을 벌릴 경우, 러시아가 승리한다고 내다보고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군대를 끌어들여 일본과 전쟁을 벌이려고 생각하였고, 이를 구실삼아 고종을 외유라는 이름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 가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배정자에게 블라디보스톡에 갈 때 그녀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비밀이 일본으로 사전에 새나가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밀정으로서의 진면목을 훌륭하게 발휘한 것이었다.




35세가 될 때까지 혼자 살고 있던 배정자가 재혼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녀는 원래 일본에서 김옥균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전재식(田在植)과 결혼한적이 있었다.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한때 기생집에 있었을 때 대구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알게 되어 깊은 관계에빠졌다가, 훗날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자 배정자는 그와 다시 만나결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배정자의 첫 결혼생활은 당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다니던 전재식이 잠깐 귀국했다가 병을 얻어 죽는바람에 끝장나고 말았다.




두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玄英運)이었다.




현영운은 배정자의 노력으로 박영철*, 박두영(朴斗榮) 등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배정자에 대한 고종의 총애 덕분에 현영운은 결혼한 뒤 눈에 띠는 대우를 받았다. 즉,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여 육군 참령, 육군 참장, 육군 총장, 삼남 순무사를 거쳐궁내부 대신 서리까지 오른 것이다. 현영운의 남다른 출세는 고종이 일제의 밀정이었던 배정자를 얼마나 아끼고 신임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한 예이다.




밀서사건으로 절영도로 유배가다




러일전쟁이 점차 확대되자 배정자는 일본 군부의 종군 명령을 받고 만주로갔다. 배정자는 만주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하여 여자 밀정 배정자 하면일본군 장교들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다시 친러파가 득세하자 배정자는 이를 막으려는 일본군의명령을 받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고, 서울에서 친러파를 몰아내는 작업에 밀정으로서 봉사하다가, 고종이 이토에게 보내는 친서를 받아들고 일본으로건너간다.




오랫만에 배정자를 만난 이토는 너무도 기뻐 그녀를 스루가타이(駿河臺)하마다(濱田)병원에 입원시켜 피로한 심신을 풀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되지않아 그녀는 이토로부터 중요 밀서를 받아 귀국하여 고종에게 전달하였다. 한편 이때 이봉래(李鳳來), 강석호(姜錫鎬) 등이 배정자를 암살하려는 계획을세웠으나 일본군이 보호하고 있어 성사되지 못하였다.




밀서는 일제가 고종에게 보내는 일종의 권고서로서 일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오만 방자한 문서였다. 밀서를 전달받은 정부에서는 너무 놀라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다짐하였다. 특히 이때 고종과 일본이 가까워지는 것을 염려한 친러파 내각은 일제의 밀정 배정자의 밀서 전달을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 고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배정자도 밀서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배정자는1905년 2월, 3년 유배형을 받고 부산 앞바다에 있는 절영도(絶影島)로쫓겨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 34세였다.




일본에 충성을 다했던 밀정 배정자가 유배되자 일본공사관에서는 서기관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 간카와 이치타로(監川一太郞) 등을 파견하여위문하였다. 또 일본 정부에서도 이토 등이 대리사절을 보내 위로하였다. 배정자의 유배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끝나자 1905년 11월 14일 부산에 도착한 이토는 비서관을 보내 배정자의사면을 정부에 종용하였다. 당시 이토는 일본특파대사 자격으로 조선의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오는 길이었다. 이에정부는 할 수 없이 배정자를 석방하였다. 이제 배정자로서는 자신의 양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이토가 서울로 옴으로써 자신의 친일 능력을 발휘할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잡게 된 것이다. 또 일제의 야심이 노골화되던시기여서 고종에게도 일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배정자는 어느 정도 필요한존재였다.




고종은 배정자를 불러 이토의 방문에 공로가 컸다고 치하하면서 이토가 어떤사람인지를 물었다. 배정자가 이토는 폐하와 한국을 돕기 위해 왔다고 대답하자, 고종은 이토는 일본의 중신(重臣)이니 응당 자국을 위하고 그다음에 우리나라를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대가 이토를 성의껏 모셔 이 나라에도움을 주도록 하라고 말했다.




배정자에게서 고종의 말을 전해 들은 이토는 네 남편 현영운이 의병대장이되고 엄비나 순비도 요즈음 너를 멀리한다는데, 궁중에서 나의 일을 도울수가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배정자는 궁중의 김영진과 이용복,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이갑(李甲)과 유동열(劉東悅), 그리고 일진회의 이용구*와송병준*이 모두 일제를 위한 좋은 협력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이토를안심시켰다.




이토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석에 눕다




을사조약에 따라 1906년 3월, 이토가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고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밀정 배정자는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배정자덕분에 그의 오빠 배국태(裵國泰)는 한성판윤, 동생은 경무 감독관으로 승진되기도 하였다. 밀정 배정자가 그야말로 생애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것이었다. 배정자는 이토라는 막강한 보호막을 뒷배경으로 삼아 아무 거리낌없이 밀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그녀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 일제가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을 때, 밀정으로서의 역할을톡톡히 했다.




그러나 배정자는 1909년 6월 이토가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빛을 잃기시작하였다. 막강한 후원자였던 이토와 운명을 같이해 온 배정자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배정자는 당시 조선에서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던 청나라와의 국제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도쿄로 갔다. 도쿄로 떠나던 날 배정자를 자신의 관저로 부른 이토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지시를 내렸다.




청나라의 앞으로의 움직임은 조선과 일본은 물론 동양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것이며, 또한 위안 스카이(袁世凱)의 부인이 조선인이라 하니 그대가접근하여 일본과 청의 화목을 이루도록 하라. 나의 이상은 동양 3국을병합하여 동양평화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배정자는 그러나 이러한 지시를 실천에 옮기기도 전인 1909년 10월 26일,이토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이토가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마음의 태양같이 믿고 따르던 이토가 죽은 뒤 배정자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생활하다 드디어 병으로 드러누웠다. 이토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고 따랐던 일제 밀정 배정자 다운 자세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배정자는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실의와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배정자에게 다시 구세주로 나타난 것은 조선주둔군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밀정 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일본도 시베리아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게 되자,배정자도 일본군을 따라 함께 갔다. 이곳에서 배정자는 포로가 되기도 하고마적단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죽을 고비를 몇번씩 넘기면서도 일본군의 밀정으로 맹활약했다. 이때 배정자는 중국 마적단의 두목과 상당 기간 동거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빼내 일본군에 넘겨주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몸과마음을 다 바치면서 일제의 밀정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 뒤 배정자는 일본 외무부 촉탁으로 자리를 옮겨 펑톈(奉天)영사관에근무하면서 주로 남만주 일대의 조선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감시하여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그후 국내로 들어와 얼마동안 활동하다가는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임무를 부여받고 만주로 갔다. 일제가 배정자에게내려준 임무는 만주에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하는 것이엇다.




1920년 봄, 일제 총독부는 최정규(崔晶圭), 이인수(李寅秀) 등을 중심으로 한 옛날의 일진회 잔당들을 끌어모아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파괴하기 위한 무장 첩보단체로서 보민회를 만들었다. 보민회의 후원자는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 총독부 경무국장 등이었다. 보민회의 반민족적 성격은 1920년 4월11일 초대 보민회 회장 최정규 등이 독립군 장기정을 잡고 무기와 서류를 빼앗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최정규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뒷날 중추원 참의에 오르기도 했다. 배정자는 밀정이었으므로 제우교 성부인(濟愚敎誠夫人)이라는 직함으로 발기인에 참여했으며, 보민회 고문이 되었다. 배정자는 보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총독부로부터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기도했다.




같은 조선여성을 일본군의 노리개감으로 바치다




배정자는 보민회 활동을 마치고 1922년 국내에 들어와 총독부 경무국촉탁으로 있으면서 밀정노릇을 계속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마루야마(丸山鶴吉)의 주선으로 촉탁이 된 배정자는 그의 지령으로 항일독립투사를 잡아들이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총독부는 이러한 공로를높이 평가하여 약 600여 평이나 되는 토지를 그녀에게 주기도 했다. 배정자는1924년 57세로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총독부는 그 뒤에도 촉탁이라는 이름으로 봉급을 계속 주어 넉넉한 생활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배정자는 70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남양군도로달려갔다. 당시 배정자는 전선에서 자신의 조국 일본 장병들이 고생하는것이 가슴 아프다하여 일본군의 후원으로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다. 배정자는 같은 조선인 여성들을 성욕에굶주린 일본군들의 노리개감으로 바치면서 까지 일제의 승리를 위해 충성을다했던 것이다.




배정자는 뛰어난 미모에 걸맞게 늙은 나이에도 항상 파마머리를 하고 당당하게 걸어다녔다. 밀정으로 활약하면서 서울과 일본에서 숱한 염문을뿌리고 다닐 만큼 남성 편력도 화려했다. 그녀는 두번째 남편인 현영운과 1년살다가 이혼한 뒤, 동생으로 부르던 박영철과 다시 결혼했다가는 또 1년 만에 헤어졌다. 이와 함께 일본인 오하시(大橋), 은행원 최모, 전라도 갑부조익헌, 대구 부호의 2세 정경진 등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또 57세로은퇴할 때에도 25세 된 일본인 순사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광복될 때, 배정자는 지난날의 반민족적인 밀정 행위에 대한 응징이 두려워 집에서 숨어 지냈다. 1948년어느 기자가 성북동의 집으로 찾아가 배정자에게 조선이 광복되고 새로정부가 세워진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배정자는 기쁜마음이 가득 차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친일행위에대해서는 지금 아무 기억도 없고 다 어리석고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어찌할수 없었던 일이라고 변명하였다. 이 때 옆에 있던 배정자의 손자가 할머니를 흔들면서 자백하라 용서를 빌어라면서 다그치기도 하였다. 광복된 뒤, 배정자로서는 자신의 밀정 행위를 진정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948년 9월 국회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통과되자,배정자도 국민의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일제시기의 악질적인 친일행위로 인하여 구속된 여성은 모두 6명이었다. 이가운데 배정자는 반민특위에 제일 먼저 검거되었다. 밀정으로서의 악명이 일찍부터 알려졌고 국민들의 처벌 요구가 그 누구보다 드높았기 때문일것이다.




반민특위의 해산으로 감옥에서 나온 배정자는 주위에 돌봐 주는 사람 없이 어렵게 생활하다가 1951년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81세로 사망하였다.지난날의 화려했던 영화를 간직한 채 쓸쓸한 말로를 맞이한 것이었다.




■ 김무용(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민족정기의 심판}, 혁신출판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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