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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18 10:03:286742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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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武亭)은 초기 중국공산당원이며 첫 팔로군포병퇀 퇀장으로서 우수한 군사지휘관이다. 그는 팽덕회(彭德懷)가 지휘하는 홍군 제3군단에 소속되여 유명한 2만5천리장정에 참가한 조선족혁명가이고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 사령원이다.




무정의 본명은 김무정이며 1905년 조선 함경남도 경성군에서 태여났다. 14세때 3·1운동에 참가했으며 그후 서울 기독교중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난으로 하여 18세때에 퇴학당하였다. 혁명의 길을 찾아 중국에 건너 북경에 온 그는 19세때 중국 하북성 보정군관학교(강무당) 포병과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22세에 포병중좌가 되였다. 1924년에 포병과를 졸업하였고 그 이듬해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무정은 상해에 가서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에서 사업하다가 다시 서금에 가서 중국로농홍군에 입대하였다.




서금은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에 중앙쏘베트구역이라고 불리웠고 거기에는 30여명의 조선족혁명가들이 있었다. 무정은 서금에서 팽덕회가 전위서기로 있는 홍군 제3군단에 소속되였다. 1930년 7월에 제3군단이 동정호전투를 할 때였다. 수중에 홍군이 적에게서 로획한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을 수중에 장악하고 있은 무정은 팽덕회를 찾아가 대포로 적들을 반격할 생각을 털어놓았다. 팽덕회는 그의 의견을 동의하였다. 홍군패장인 무정은 전사들에게 포사격요령을 가르치고 포에 장탄하였다. 적들이 다가오자 무정은 친히 적들을 묘준하면서 사격하였다. 적들은 무더기로 쓰려졌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후 무정은 홍군 제3군단의 포병련장이 되였으며 그의 이름은 전 홍군에 알려졌고 홍군에 조선인이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1934년 10월 세계를 뒤흔든 2만5천리장정이 시작되였다. 홍군대학과 팽양보병학교, 공량보병학교 및 특과학교 등 4개소의 홍군학교 장병들로 홍색간부퇀을 편성하였는데 퇀장은 진갱(陳 ), 정치위원은 송임궁(宋任窮)이였다. 양림(楊林)은 이 간부퇀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홍군특과학교 교장 겸 포병영장으로 있던 무정은 중앙군사위원회 기관인원들로 구성된 군사위원회 제1종대 제3대대의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여 장정의 길에 올랐다. 대도하를 건느고 설산을 넘어 파서에 이르렀을 때였다. 장국도는 각 군과 당중앙과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자기의 우세한 병력으로 홍군 제3군단을 남하하도록 강박하기 위하여 홍군 제4방면군의 무전암호를 거두어들였다. 장국도의 이 음모를 분쇄하려면 홍군 제3군단은 아계로 진출한 홍군 제1방면군과 무전련계를 가져야 했다. 그러자면 홍군 제3군단에서 만든 무전암호를 홍군 제1방면군에 보내주어야 했다. 이 중요한 임무를 팽덕회는 무정에게 맡겼다. 인적없는 초원에서 길잡이도 없이 홀로 방향을 잡는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무정은 지남침을 들고 북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던 그는 물웅뎅이옆에서 풀무데기 하나를 발견했는데 헤치고 보니 한 홍군전사의 시체가 묻혀있었다. 그는 다시 시체를 묻고 얼마간 걸었는데 앞에 솥을 걸었던 자리가 있어서 만져보니 온기가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다그쳐 끝내 제1방면군의 대오를 따라잡고 무전암호를 넘겨주었다.




홍군은 아계를 지나 백룡강 량안의 험준한 낭떠러지인 랍자구의 천험을 정복하였다. 팽덕회의 조수로 일하던 무정은 부대를 따라 행군하였다. 중앙홍군에는 조선인이 원래 1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장정의 길에 올랐다. 하지만 장정도중에 조선인전사들은 대부분이 희생되고 섬북에 도착한 사람은 무정과 양림 두사람이였다.




1936년 2월 홍군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일제침략군과 싸우기 위하여 황하를 건너 동정을 시작하였다. 홍군동정부대는 팽덕회가 지휘하였는데 무정과 양림도 출정하였다. 황하도강작전은 동정부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무정은 용감하고 지혜롭게 정찰임무를 완성하였다. 한달동안의 준비가 끝나자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제15군단 제75사의 참모장이던 양림은 소속 제223퇀 1영을 지휘하여 도하작전의 선봉대가 되고 무정은 참모가 되였다. 작전임무를 완수한후 무정은 홍군대학에서 특과영 영장으로 있으면서 포병간부와 포사격수를 양성하였다.




1937년 8월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18집단군)으로 개편되였다. 무정은 팔로군 총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였다. 주덕(朱德)과 팽덕회의 사랑과 신임을 받은 그는 성격이 과격하였지만 군인으로서의 강한 의지를 갖고있었다. 팽덕회의 주선으로 직속포병퇀의 한 지도원과 결혼한 무정은 평소에는 라서경(羅瑞卿)과 함께 숙식하였다. 1937년말에 무정은 부대를 거느리고 진서남 림분에 주둔하고있었다. 항일전쟁형세의 새로운 변화에 따라 팔로군총부에서는 포병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부에서는 무정에게 그가 거느리고있는 병력을 기초로 평양, 평성 일대에서 활동하고있는 총부직속 유격제2대를 접수하여 포병퇀을 편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총병력이 천여명에 달하는 포병퇀이 건립되였는데 포병퇀에는 6개 련이 있고 그외에 봉사기관과 관찰통신대 및 선전대가 있었다. 이 포병퇀은 팔로군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창건된 포병퇀이였다. 팔로군총부에서는 무정을 퇀장으로, 구창선을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38년 1월 28일 림분부근의 류촌과 와구지간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성립대회가 열렸다. 팔로군판사처 주임 팽설풍(彭雪楓)이 중공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서를 랑독하고 중앙북방국 책임자 양상곤(楊尙昆)이 축사를 하였으며 항일구국10대강령을 랑독하였다. 대회가 끝난후 무정의 제의에 의해 포병퇀의 명의로 전국에 팔로군포병퇀의 성립을 알리는 통보를 발포였다.




1938년 2월 일본침략군은 태원을 강점한후 계속하여 진남을 진공하였다. 포병퇀은 상급의 명령에 따라 연안을 거쳐 락천에 가 정비훈련을 하였다. 이 기간 주은래(周恩來), 주덕, 팽덕회가 포병퇀을 시찰하였다. 주은래는 짧은 시일내에 포병퇀사업이 신속하게 궤도에 오르고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고 치하하였다. 그후 동필무(董必武), 하룡(賀龍)도 포병퇀을 시찰하고 격려하였다. 정비훈련을 거쳐 포병퇀은 5월에 황하를 건너 중양현에서 류백승(劉伯承), 등소평(鄧小平)이 지휘하는 129사와 련합하여 전투를 하였고 일본침략군이 섬감녕변구에 침입했을 때 4년, 9련, 관찰통신대의 일부 병력이 황하가의 미가천에서 포진지를 구축하고 변구를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0년 국내외를 진감한 백퇀대전이 벌어졌다. 총부포병퇀은 정태선전역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에 따라 무정은 부대를 거느리고 적진지의 가까이에 포를 걸어놓고 사격하여 적의 또치까를 까부심으로써 부대의 작전을 엄호하고 진공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포병퇀은 항일전쟁의 포화속에서 전투의 세례를 받으면서 끊임없이 장성하였다. 이때 포병퇀에 소속되였던 지휘관과 전사들은 그후 중국인민해방군의 여러 포병부대에서 활약하였고 많은 고위급지휘원들이 나왔다.




백퇀대전이 끝난후 팔로군내의 조선간부들을 앞으로 본 민족간부양성에 중점을 두라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무정은 관내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인항일단체들을 통일하고 련합하는 사업을 맡게 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이 활동하던 각 유격구내에는 무정과 같은 많은 조선인혁명가들이 팔로군, 신사군과 함께 일본침략군에 항거하고 있었다. 1939년초, 연안에서 무정 등 조선인혁명가 12명이 중국관내지구의 많은 저명한 항일독립운동가 김구, 김약산 등 26명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내의 항일운동단체들이 합작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할것을 호소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황하이남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의 대부분이 황하를 넘어 그 활동지역을 화북으로 지정하였다.




무정은 중앙의 지시를 받고 1941년 1월 10일에 팔로군항일근거지인 산서성 료현 동욕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창립하였다. 회의는 3일동안이나 계속되였고 첫날 회의에는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축사를 하였다. 마지막날에는 여섯가지 강령을 발표하였다. 회장에 무정, 조직부장에 리유민, 선전부장에 장지광, 경제부장에 한덕지로 한 지도부가 구성되였다. 1941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조선의용대 대부분의 대원들이 차례로 락양에서 산서 료현 동욕에 도착하였고 따라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와 접촉하고 련계하였다. 1941년 7월 산서 료현 동욕에 있는 조선의용대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령도를 받아들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성립후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령도하에 대원들은 모두 무기를 갖추고 화북의 태항산과 진찰기변구 산서 중부, 산동, 안휘 등지의 유격구와 항일근거지에서 활약하였고 팔로군, 신사군과 함께 작전에 참가하여 투쟁과 선전을 진행하였다. 1942년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태항산에서 제4차대표대회를 열었다. 회의는 4일동안 열렸고 참석인원은 20여명이였다.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당중앙과 팔로군의 대표로 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대회는 여러차례의 토론을 거쳐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확대, 개편하고 조선독립동맹으로 명칭을 바꾸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할것을 전원일치로 결의하였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군정련합의 통일체로 규정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 제1기 집행위원은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야화, 김창만, 왕지연, 리유민, 진한중, 리춘암이였고 조선의용군 사령은 무정, 부사령은 박효삼, 박일우였다. 사령부는 잠시 동욕에 두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의용군은 조선독립동맹의 지도하에 팔로군과 함께 작전하여 적을 용감히 무찔렀다.




인재양성을 위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총부는 군정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화북조선간부훈련반으로 명칭을 달았다가 후에 화북조선청년학명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44년에는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광복까지 이 학교의 교장은 무정이 직접 맡았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의 승리에 눈앞에 박두하자 팔로군 총사령 주덕은 무정이 지휘하는 조선의용군에게 팔로군총부의 제6호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다음과 같다.




중국과 조선경내로 진출하여 쏘련홍군과 합동작전을 하고 조선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원과 박효삼, 박일우 부사령원에게 소속부대를 통솔하고 팔로군과 원동북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괴뢰군을 소멸하고 동북에 있는 조선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것을 명령한다.




1945년 8월 11일 주덕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관내에 있던 조선의용군은 무정사령원의 령도하에 륙속 동북으로 진출하며 1945년 11월경에 심양에 집결하였다. 심양에 도착한 조선독립동맹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아래와 같은 결정을 짓게 되였다.




1, 조선독립동맹지도부와 조선의용군의 일부 간부들은 즉시 북조선으로 귀국한다.




2, 조선의용군의 나머지 간부와 대원들은 중국에 남아서 지역을 분할하여 부대를 확대하고 우리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3, 남만, 북만, 동만으로 구분하여 각 지대를 편성하고 주요책임자를 임명한다.




긴급회의 직후 동북조선의용군 군인대회를 심양시 대홍구 오가황학교 운동장에서 진행하였고 무정사령원이 국내외형세에 대해서 연설을 하였으며 남만에 조선의용군 1지대를, 북만에 조선의용군 3지대를, 동만에 조선의용군 5지대를 파견한다고 선포하고 각 지대의 주요간부명단을 발표하였는바 1지대 지대장은 김웅, 정치위원은 방호산, 3지대 지대장은 김택명, 정치위원은 주덕해, 5지대 지대장은 리익성, 정치위원은 박훈일이였다. 이때로부터 동북에서 조선의용군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회의후 무정을 포함한 조선독립동맹 전체 중앙집행위원과 일부 간부들은 북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그후 무정은 민족보위성부상, 1946년 포병담당 부사령,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평양방위사령을 력임하였다.




무정장군은 연안에서 조선으로 건너간 뒤 6.25전쟁 발발 당시에는 인민군 2군단장으로, 조중연합군 시기에는 제 2전선사령관과 포병사령관으로 지내다가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1951년 조선에서 46세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중국측자료에 보면 무정은 김일성의 명령은 무시하고 지원군사령부의 명령만 따르는 행동으로 1951년 조선로동당 제 3차전원회의에서 <군벌주의자>라는 죄명과 인민군의 9월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내외의 일체 직무를 파면당했다.

당시 같은 연안파이며 새로 편성된 인민군 제 2사단장이던 방호산장군이 이 결정에 불복하여 중국의 림표장군에게 무정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중조연합군사령관 팽덕회도 사실을 알자 모택동에게 서신을 띄워 무정의 홍군(팔로군)내에서의 군사직함을 회복시켜주고 적당한 직책을 맡길 것을 부탁했다.

이에 모택동은 직접 무정을 접견하고 사연의 전말을 요해했으며 이너 주은래가 그를 만난뒤 중국에 머무를 것을 권유한다.

워낙 성격이 조폭하여 고민하던 끝에 남경군사학원 포병교수 겸 포병전술연구실 부주임으로 발령이 났다.

1953년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1953년 말에는 위궤양으로 북경육군병원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었다.

1956년 청도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 장례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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