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한국사
1. 선사
2. 고조선
3. 삼국
4. 남북국
5. 고려
6. 조선전기
7. 조선후기
8. 일제
9. 공화국
10. 통사
· 오늘 :  290 
· 어제 :  947 
· 최대 :  6,990 
· 전체 :  2,119,209 
 
  2007-06-13 18:15:303461 
간도영유권 문제
운영자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19세기 후반 조선은 간도를 분명한 자국영토로 인식했다. 1885년과 1887년 청(淸)과의 국경회담 당시 조선은 불리한 정치상황에도 불구하고 간도에 대한 영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뒤 간도 영유권 주장은 더욱 강화됐다. 1898년 함경북도 관찰사 이종관은 토문강-송화강-흑룡강 국경설을 주장하며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또 1901년 대한제국 정부는 회령에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해 간도 한인을 보호ㆍ관할했으며 1902년에는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이듬해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해 간도를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정작 1909년 청과 일본 사이에 간도의 청국령을 인정하는 간도협약이 체결될 때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불과 수 년 사이에 간도에 대한 대한제국 정부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계명대 이성환 교수는 16일 창원대에서 열리는 부산경남사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통감부 지배정책기의 간도인식'이라는 발표문을 통해 1905년 이후 간도에 대한 대한제국 정부의 무관심은 '전략적 외면'이었다고 주장할 예정이다.



이 교수는 당시 가장 민족주의적이며 반일적 매체였던 '대한매일신보'의 간도문제 보도를 중심으로 1900-1910년 대한제국의 간도 인식 변화를 분석했다.



대한매일신보에 간도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1906년 8월12일자의 '간도문제'라는 논설이다. 논설은 간도의 한국 영유설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일본은 해지(該地.이땅)에 호말(毫末.털끝)이라도 간섭할 권한이 무(無)한지라'라고 결론을 맺는다.



1907년 9월21일의 '북간도'라는 논설에서는 "일진회의 사주로 진출한 일본이 청국과 교섭해 국경을 확정할 것이나 간도는 한국의 영토인 것이 당연하며 간도의 조선인은 결코 일본의 보호를 원치 않는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한국의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논설을 일관되게 게재했다.



그러나 1907년 12월의 '간도사건'이라는 논설에서부터 간도 영유권 인식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간도가 실로 청국령이라 할만한 사실은 증거가 많이 있거늘 강박히 고집하야 원수를 짓고 싸움을 구하는 불같은 욕심을 뵈이는 듯하도다'



1908년 2월6일 '간도'라는 논설에서는 결국 간도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완전히 인정하기에 이른다.



'평화정책으로 하자면 그 땅에서 청국의 주권을 허락하는 외에는 별로이 다른 계책이 없는데 이등공작(이토 히로부미)이 지금 이렇게 급속히 하는 태도는 어떠한 이유인지 우리는 알기 어렵도다'



간도문제 해결의 실적을 보이기 위해 이토는 일본 정부를 재촉하고 있으나 간도는 중국의 영토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한인이 실제로 박해를 받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일본의 간도 진출을 한국의 영토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침략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비록 몇 년 전까지도 간도 영유권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한국 영토문제 해결을 내세우며 간도 진출을 꾀하는 일본을 옹호할 경우 일본의 한국침략 마저 정당화할 수 있어 간도에 대한 인식이 급변하게 됐다는 것.



이 교수는 대한제국 정부 내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파악된다며 1906년 참정대신 박제순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간도에 일본 관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 공문서를 근거로 들었다.



박제순의 요청서는 '안(按)컨데 한청조약 제12관에 변민으로 이미 월간(越墾)한 자는…'이라는 문구를 담아 간도를 한청통상조약 제12조의 적용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는 간도 한인은 '월경한 자'이며 간도는 조선의 경계 밖으로 본다는 의미다.



청국영토인 간도에 일본 관리를 파견해 달라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자 대한제국 정부의 의지에 따른 요청이 아니라는 뜻을 내비친 것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을사조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인의 간도에 대한 태도가 돌변한 까닭은 '한반도 전체가 일본의 지배하에 놓인 상황에서 간도 영유권을 확보할 지라도 일본의 영토를 확장하는 결과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논리의 비약을 허용한다면 간도가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오히려 청나라의 영토가 되는 것이 항일운동에 유리하다는 전략적인 인식도 반영됐을 수 있다"고 추론했다.



그는 이어 "당시의 간도 인식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부정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며 "반드시 시대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09-04-02 23:08:03 한국사(으)로 부터 이동됨]

목록
5524
[] 조선백성의 탈을 쓴 황국의 신민들

조선백성의 탈을 쓴 황국의 신민들 2010 08/17ㅣ위클리경향 888호 ㆍ대한제국 고위관료들의 매국 행각… ㆍ귀족 작위 받고 부와 권력 누려
운영자 10-08-15
[] 경술국치 100년 2. 야마다 쇼지

“조선 침략 진행될수록 천황의 인기 치솟아” 야마다 쇼지 전 릿쿄대 교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뿐만 아니라 전후 책임, 사후 책임을 집요하게
운영자 10-01-05
[] 경술국치 100년 -1. 미야타 세쓰코

총독부 일본관리 출신들 “조선에 대해 좋은 일 했다” 자부심 가져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한겨레 -평생
운영자 10-01-04
[] 형은 독립군자금 조달, 동생은 ‘방패막이’ 친일

형은 독립군자금 조달, 동생은 ‘방패막이’ 친일 경주 최부잣집 12대손 최준·윤 형제 ‘눈길’ 홍명희 집안도 ‘조부는 친일·부친은 자결
운영자 09-11-18
[] 박정희에 대한 친일인명사전의 기록

박정희 朴正熙│高木正雄, 1917~1979 만주국군 중위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다. 1926년 4월 구미공립보
운영자 09-11-08
[] 귀화한 일본인 윤치호, 그리고 그가 작사한 애국가를 마르고 닳도록 부르고 있는 한국…

윤치호 ( 尹致昊, 창씨명 伊東致昊, 1865∼1945 )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1941년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장.
운영자 09-10-01
[] 일본의 밀정으로 활약한 매국녀 배정자 일대기

일본의 밀정으로 활약한 매국녀 배정자 일대기 배정자(裵貞子, 1870~1951)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경
운영자 09-06-22
[] <아리랑>의 김산 발굴한 중국동포 학자 최용수의 '쓸쓸한 영면'

역사에 우연은 없지만 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훗날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작가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 님 웨일즈는 르포를 쓸 혁명가를
운영자 08-03-26
[] 이러다가 안중근의사도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 아니야?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한국 근현대사를 서술한 ‘대안교과서’를 출간하자 학계와 네티즌들의 비판이 폭주하고 있다. 인터넷상에는 벌써부터 '출
운영자 08-03-26
[]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자 정율성(鄭律成) 선생

정율성 [약력] 1914년 광주 출생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 졸업 1929년 전라북도 전주시 신흥중학교 입학 1933년 중국 남경 의열단에서 설
운영자 07-06-18
[]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장군

무정(武亭)은 초기 중국공산당원이며 첫 팔로군포병퇀 퇀장으로서 우수한 군사지휘관이다. 그는 팽덕회(彭德懷)가 지휘하는 홍군 제3군단에
운영자 07-06-18
[] 간도영유권 문제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19세기 후반 조선은 간도를 분명한 자국영토로 인식했다. 1885년과 1887년 청(淸)과의 국경회담 당시 조선
운영자 07-06-13
[]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문'

1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川澤)
운영자 06-10-10
[]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이만열 교수

단재 신 채 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 이만열 1. 신채호는 누구인가? 최근 백여년의 역사를 돌이켜 볼때,
운영자 06-08-27
[] 단제 신채호선생 유족의 ‘슬픈 광복절’

《“훈장을 받기보다는 시아버지의 호적에 아들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소원입니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 국채보상운동을 이끌고 일제강점기 대한
양승국 06-08-24
[처음][이전][1] 2 [3][4][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