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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4 10:27:313469 
경술국치 100년 -1. 미야타 세쓰코
운영자

총독부 일본관리 출신들 “조선에 대해 좋은 일 했다” 자부심 가져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한겨레




-평생 조선사 연구를 해왔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




"1954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고 나서는 대학생들의 학습모임인 중국연구회에 들어갔다. 사회주의정권이 등장한 신중국에 대한 관심이 거세게 일던 때다. 어느 날 중국연구회 모임이 끝나갈 무렵 대학 선배인 강덕상이 모두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종잡을 수 없는 얘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사실 조선인이고 앞으로 조선 연구를 하겠다고 말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 여학교를 다녔는데, 조선이라는 이웃 나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했다거나 일본에 조선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배운 적이 없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나에게 강덕상이 조선지배 사료가 많이 남아 있을 터인데 아무도 하지 않으니 함께 공부하자고 제의했다. 조선인학교 폐쇄 논란이 벌어졌을 때 진보적 대학교수들이 보여준 이중적 태도도 작용했다. 일본 패전 후 각지에 세워졌던 조선인 민족학교는 1949년 점령군사령부의 명령으로 폐쇄되거나 일부가 일본 교육당국의 직접관리를 받는 형태로 전환됐다. 도쿄도에는 몇 개의 도립 조선인학교가 세워지고 일본말만 '교육 용어' 로 쓰도록 했다. 다시 도립 조선인학교 폐쇄 논란이 일자 반대서명을 받기 위해 중국사를 전공하는 교수에게 찾아갔는데 '조선은 좀 그렇다'며 거절을 했다."




진보층도 조선문제 무시하는데

'우방문고' 식민자료 세상 알려




-조선이라고 몸을 뺀 이유는 무엇일까?




"식민지해방 투쟁을 지원했다는 공산당이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 좌익사대주의가 있었던 것 같다. 중국 침략에 대해서는 마치 자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갔던 당사자처럼 잘못된 일이라고 흥분하던 교수조차 '조선인들은 스파이가 많으니 사귈 때 조심하라'는 투로 얘기했다."




-당시 조선사 강좌를 학부에 설치한 대학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공부를 했나?




"강덕상 같은 와세다대의 재일동포 학생들과 모임을 만들어 책을 읽고 소감을 얘기하는 정도였다. 나중에 도쿄대학생이던 가지무라 히데키(1935~1989, 가나가와대 교수, 백범일지를 번역하고 김희로 사건 대책에 관여)가 합류했다. 57년 4학년 때 졸업논문 테마로 중국을 잡았다가 3·1운동으로 바꾸었다. 조선근대사에서 유일하게 알던 것이 3.1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졸업논문을 쓰기에 앞서 주임교수에게 주제를 보고하고 승낙을 받아야 했다. 3·1운동이란 용어도 없던 때였다. 중국 고대사가 전공인 나의 주임교수는 3·1운동이란 용어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다이쇼(대정)천황 시대에 조선인 '만세 소동' 이란 것이 있지 않았느냐고 하니, 아 그런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을 3·1운동이라고 하나라고 되물었다. 중국 역사를 공부하는 교수조차 모른다고 하니 더욱 해보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교수가 아는 게 없으니 지도는 그뿐이었다."




-논문 쓰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만세 소동' '만세 소요' 에 관한 자료를 찾아다녔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일본에 식민지지배 자료가 많이 있을 것이라는 강덕상의 말을 믿고 조선으로 테마를 바꾸었다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니 후회스러웠다. 57년 11월까지는 논문을 제출해야 하는데 여름방학 때까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한 교수가 도쿄 마루노우치 빌딩에 우방협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혹시 단서가 될 만한 자료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해주었다. 총독부 시절의 고위관료들이 모여 만든 곳이라고 했다. 아무 소개장도 없이 물어물어 찾아가 만세 소동 관련 자료가 있느냐고 했더니 저쪽 구석에 가보라고 했다. 검은 보자기로 싼 두 꾸러미가 있었다. 열어보니 전부 3·1운동에 관한 원자료였다. 사카타니 문서라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는 정말 흥분했다. 아무것도 없는 제로상태의 노숙자가 마치 저택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복사기가 없던 때라 매일 가서 자료를 읽고 인용할 만한 것은 필사를 했다."




3·1운동이 뭔지도 모르던 때

'사카타니 문서' 발견에 쾌재




-사카타니 문서란 게 무엇인가?




"러일전쟁 때 대장성 차관으로 전비 조달을 했고 나중에 대장성 장관, 도쿄시장을 지낸 사카타니 요시로(1863~1941)란 사람이 모은 자료이다. 경부선 철도 건설 때도 관여를 했다고 들었다. 그가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 5, 6월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며 각종 선언서, 체포된 사람들의 직업별 연령별 통계 등을 모아 일일이 번호를 붙여 놓았다. '조선문제 잡찬' 이 4권 있는데 1, 2권이 주로 3·1운동 관련이다.




졸업논문을 쓰고 무사히 졸업을 했다. 우방협회를 찾아가 덕분에 졸업할 수 있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안쪽에 있던 백발의 노인이 좀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우방협회가 생기고 나서 조선을 연구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통치에 대해 어떤 비판도 들을 귀를 갖고 있으나, 하지도 않은 것을 했다거나 사실과 다른 것을 비판하는 것은 승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곳에 관련 자료를 모아서 정리하고 있으니 함께 연구하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했다. 그때까지는 전문적으로 연구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깜짝 놀랐다. 조그만 공부 모임을 하는 친구들과 그냥 상의해보겠다고 답했다."




이 노인의 이름은 호즈미 신로쿠로(1889~1970)다. 1913년 도쿄제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나와 다음해 고등문관시험에 통과해 총독부 사무관시보로 조선에 왔다. 총독부 식산국장 자리에 장기 재직했고 군부와의 알력으로 41년 관료생활을 그만둔 뒤 조선상공회의소 회두, 경성전기 사장 등을 지냈다. 일본 패전 때는 만주나 조선에서 철수하는 일본인 지원 모임을 이끌었고 본국에 돌아가서는 47년 총독부 관료나 사업가들을 모아 동화(同和·도와)협회 결성에 주도적 구실을 했다. 수십년 조선과 관련해서 쌓아올린 관계자들의 지능과 기술을 살려 일본과 조선 사이의 문화교류 무역에 공헌토록 한다는 것이 취지였다.




호즈미의 사후 < 나의 생애를 조선에 > 라는 추도문집이 1974년에 우방협회에서 나왔다. 이 책에는 호즈미의 가계도가 실려 있는데 화려한 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장형은 민법학자로 지금 일왕 아키히토의 동궁 시절 시종장을 했고 아버지는 도쿄제대 법과대학장, 마지막 추밀원 의장을 지냈다. 1866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견학하고 5백여개의 회사를 세워 일본 자본주의의 최고 지도자라고 일컬어지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그의 외할아버지이고 앞에 나온 사카타니는 이모부이다. 러일전쟁 때 만주군 총참모장으로 러시아군 제압에 큰 공을 세운 고다마 겐타로는 장형의 장인이다.




총독부 관료였던 호즈미 제안

세미나 통해서 자료 공동연구




-호즈미가 거의 50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젊은 여성에게 왜 그런 제의를 했을까?




"당시 그는 몸이 좋지 않아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학자 집안에 태어나 학문에 대한 존경심이 기본적으로 있었고 자료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아마도 젊은 사람의 힘을 빌리려 한 것 같다. 가지무라, 강덕상 등과 상의를 하니 모두 절호의 찬스라고 했다. 논문은 나중에라도 쓸 수 있으니 총독부 고위관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철저히 자료를 모으자고 바로 의견 통일을 보았다.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오월동주식 공동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공동연구가 어떤 식으로 진행됐나?




"58년 5월 조선근대사료연구회라는 모임을 발족시켰다.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중앙일한협회의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모여서 토론회를 열었다. 내용을 알지 못하면 질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젊은 연구자들이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해야 했다. 우리가 어떤 분야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면 호즈미가 담당했던 사람을 불렀다. 거물이어서 그런지 그가 부르면 총독부의 2인자였던 정무총감을 비롯해 거의 다 왔다. 이렇게 시작된 모임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4년 동안 300회 지속됐다. 토론 내용은 전부 녹음을 했다."




-입장 차이로 의견 충돌은 없었나?




"질의응답은 자유롭게 했다. 관료들이나 식민통치에 관계했던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우리 연구자들이 어떤 점이 이상하다고 질문을 했다. 그런 논쟁 속에서 일본의 동화정책이란 것이 얼마나 모순에 찬 것인지 알 수 있었고 논문 주제도 많이 찾아냈다."




질의응답 통해 일본 '동화정책' 모순 저절로 드러나




-옛 관료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무조건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기본적으로 그들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에 대해 좋은 일을 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정무총감을 지낸 다나카 다케오(1891~1966)는 자신이 답변할 수 없을 정도로 질문을 하라며 먼저 도발을 했다. 30년대 농촌진흥운동을 벌일 때 고문을 했던 한 사람은 우리가 당시 조선인 청년으로 보였는지 언젠가 '반도의 청년제군' 이라고 말해 웃음바다가 일기도 했다. 아무리 합리화를 하려 해도 논쟁의 과정에서 식민통치의 속셈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문제를 둘러싸고도 격론이 오갔다."




-세미나가 장기간 지속됐는데 갈등은 없었나?




"경성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곤도 겐이치란 사람이 중간관리 역할을 했는데 계속 불만의 뜻을 나타냈다. 우방협회 쪽 내부에서 '빨갱이 같은 대학생들한테 왜 민감한 자료를 다 보여주느냐'고 불평을 한다는 거였다. 곤도는 사람들이 호즈미한테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니 전부 자기에게 온다고 푸념을 했다. 내가 공산당 기관지 < 아카하타 > 에 3·1운동에 대해 두 차례 기고한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나는 조선문제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라면 좌우 어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아카하타 기자의 요청을 받고 본명으로 기고를 했다. 우방협회에 공안 관계자들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우리를 좋게 보지 않았던 쪽에서 문제를 삼았다. 곤도는 '호즈미한테 그렇게 귀여움을 받으면서 뒤에서 흙탕물을 끼얹었다'고 비난을 했다. 호즈미의 집으로 찾아가 이런 일이 있다고 알리니 '그렇게 큰 전쟁을 치르고, 지고 나서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는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세미나는 호즈미가 몸이 아파 잘 나오지 않자 동력이 떨어졌고 그가 숨진 후에는 접촉이 끊어졌다."




경성신문 논설위원 출신

"민감자료 왜 빨갱이에…"




-조선사연구회가 1959년 1월에 발족한 배경은?




"당시 도쿄지역에서 대학원에 조선사 강좌가 있던 곳은 도립대학과 메이지대학뿐이었다. 그나마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데는 없었다. 70대의 원로 학자부터 초보 연구자인 대학원생까지 50여명이 모여 학회를 출범시켰다. 초기 단계의 대들보 구실은 하타다 다카시(1908~1994)가 했는데 고려사 전공이었다. 전문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 문호를 개방한 것이 특색인데 벌써 50년이 지났다."




-그때와 현재의 연구 수준이나 풍토를 비교할 수 있나?




"당시는 눈에 보이는 것부터 해야 하니 고발이 먼저였고 사실을 규명해 체계화하는 것이 늦어져 틈이 있었다. 그 정도의 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본다.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한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지와 편견이 있었다면 어디서 왔는지 내면의 투쟁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논문이나 책을 쓸 때는 서문이 길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전부 없어졌다. 늙은 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요즘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연구가 대단히 많아졌다."




-우방문고 문헌 가운데 아직도 분석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있나?




"그렇다. 예를 들어 제국의회 설명 자료는 4부만 만들어 정무총감 등에게 배포됐다. 극비 도장을 찍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것이다. 예산이 어떻게 편성돼 배분 사용됐는지 분석하면 총독부의 중점사항이 드러난다. 그러면 정책결정 과정도 알게 된다."




제국의회 예산 편성 등

식민지 정책결정 알수있어




-녹음된 테이프를 풀어서 주와 해설을 붙여 학술지 < 동양문화연구 > 에 내는 작업을 10년이나 하고 있다.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당초 1회만 하고 손을 뗄 작정이었다. 현재 2020년까지 작업 일정이 잡혀 있다. 아직은 건강이 괜찮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나 자신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업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50년 이전에 녹음돼 음질이 좋지 않은데다 증언자 대부분이 숨져 내용을 듣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던 자료가 결과적으로 좋은 곳에 안착된 것에 안도하고 있다."




-강사 생활을 수십년 했는데 왜 정식교수의 자리를 찾지 않았는가?




"내가 공부할 때는 재야의 연구자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으로 치면 선비다. 조직에 속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배려할 것 없으니 자유롭게 연구를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




-북한에 간 적이 있나?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굶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가서 대접받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일본 사회도 문제다. 한때는 북을 지상의 낙원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지옥이라고 한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 같다."




미야타에게는 꼭 보고 싶은 사람이 하나 북한에 있다. 50년대 후반 함께 공부를 하던 재일동포 김종국이다. 아직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미야타보다 세살 위인 그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당시 동포사회에서 한문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정평이 있었다. 도립대 교수로 있던 하타다 다카시를 찾아가 < 고려사 > 를 함께 읽었다고 한다. 생업을 하면서 고려사 연구에 매달리던 그는 62년 북한으로 가는 '귀국선' 을 탔다. 배웅하기 위해 배가 출항하는 니가타까지 갔을 때 봤던 그의 희망찬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북에서 편지가 한 번 오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 지난해 10월17일 조선사연구회 창립 50돌을 맞아 열린 기념식에서 미야타는 젊은 시절 함께 공부 모임을 할 때의 사진을 돌렸다. "당신이 뿌린 한 알의 씨앗이 크고 다양한 열매를 맺었다"는 감사의 말과 함께. 그는 북에서 그토록 소망하던 역사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마쓰도/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미야타 세쓰코(가쿠슈인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약력




1935년생/와세다대 문학부 졸/메이지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와세다대, 히토쓰바시대, 일본여자대학 등에서 강의/저서 <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 > (1985), < 창씨개명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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