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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18 10:15:335172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자 정율성(鄭律成) 선생
운영자


정율성

[약력]

1914년 광주 출생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 졸업

1929년 전라북도 전주시 신흥중학교 입학

1933년 중국 남경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

1934년 의열단의 남경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 비밀항일운동을 하며 피아노/바이올린과 성악을 배움

1935년 남경에서「5월 문예사」에 참여

1937년 첫 작품「유격전가」,「전투적녀성의 노래」창작

1938년 예안의 루쉰예술학교(노신예술학교) 음악학부에 입학

1939년 루쉰예술학교에서 성악을 가르침

1942년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육장 역임,「조선의용군행진곡」창작

1945년 광복 후 북한으로 건너감

1946년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정부장 역임

1947년 평양으로 전근, 조선인민구락부 부장 역임, 협주단단장 겸임

1949년 조선음악대학 작곡부 부장 역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돌아감

1951년 북경인민예술극장에서 활동, 베를린 세계청년연환절에 참가

1953년 중앙가무단으로 활동

1954년 중국음악협회창작조에서 활동

1958년 문예계복건전선위문단에 참가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창작의 권리를 빼앗김

1976년 12월 사망

1988년「팔로군행진곡」이 정식 인민해방군군가로 비준을 받음




[대표작품]

1937년 유격전가 / 전투적녀성의 노래

1938년 연안송 / 삼림에서 / 10월혁명행진곡 / 항전돌격운동가

1939년 연수요 / 생산요 / 아랑에게 / 팔로군대합창

1942년 조선의용군행진곡 / 혁명가

1949년 조선해방행진곡 / 조선인민행진곡 / 조중친선 / 동해어부 / 두만강

1952년 강상의 노랫소리 / 평화의 비둘기

1953년 소흥안령노래 / 류송합창 / 흥안령에 눈내리네 / 채벌가 / 행복한 농장

1954년 강대한 함대 바다를 달리네 / 바다어부의 노래 / 포함대대 출동했네 / 우린 얼마나 행복해요 / 친선평화행진곡

1956년 소년운동원노래 / 아름다운 청도 / 철도 노동자 노래 / 유쾌한 동년

1957년 망부운 / 시냇물은 용같네 / 장강대교 / 처녀는 누구 집으로 달려가나

1958년 문예계복건전선위문단 / 해안의 초병 / 유쾌한 해안포병 / 우리는 인민의 쾌속정

1960년 추수봉기

1963년 비행원의 노래 / 인민공군앞으로 / 노랫소리 높이 전진하자

1964년 붉은 우편길 / 붉은 선동원

1965년 중일청년우

1972년 공남유격사 / 매령3장 / 동지에게 드림 / 해방군조가

1973년 운천전가







1)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자

"음악은 단순한 오락을 위한 것이라 하기보다 중요하게는 혁명의 무기이고 전투의 무기이다."

자신의 말처럼 항일무장투쟁부터 문화혁명에 이르는 중국현대사의 격변기를 불꽃처럼 살다간 혁명적 음악가,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자 정율성(1918-1976).

조선인이면서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섭이(攝伊, 중국국가의 작곡가), 선성해와 더불어 중국 최고의 음악인 반열에 올랐으며, 200만 조선족 동포의 추앙을 받고 있는 그는 1918년 8월 광주시 양림동의 가난한 농가에서 4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2) 혁명가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나다

정율성의 가족은 모두가 혁명가였다. 부친 정해업은 가난한 농사꾼이었지만 장인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서법에도 능한 지식인이었으며 민족적 절개로 가득 찬 애국자였다. 부친의 장인 최씨는 대한제국 말기에 감사를 역임 한 적이 있는 소문난 양반계급이었고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정율성의 큰형 효룡과 둘째형 인제는 3.1운동에 가담 한 후 일본의 체포령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항일투쟁을 계속한 독립투사였다.이후 큰형 효룡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을 계속하였고, 둘째형 인제는 중국에 남아 항일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에 온 힘을 쏟았다. 셋째형 의은도 남경 조선의용단 군정학원에서 학생모집책으로 항일투쟁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서울직업동맹의 총무부장으로 일하다 한국전쟁 때 연합군에게 처형당하였다. 정율성의 하나뿐인 누이 봉은의 남편 박건웅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서 상해에서 김산, 김성숙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중경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해방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좌우합작위원회 좌파대표를 지낸 열혈투사였다.

정율성의 어릴 때 이름은 부은이었다. 훗날 부은은 자신의 삶을 아름답고 힘찬 선율을 이뤄 인민에게 봉사하리라 결심하고 이름을 율성(律成)이라 고치게 된다.

그는 사립 숭일 소학교 시절부터 음악과 운동에 남다른 흥미와 재주를 보였는데, 1930년 12세에 전주시 시립 신흥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악보와 만돌린을 배우게 되었다. 신흥중 시절 정율성은 '대중을 위하자'는 운동(브나로드 운동)에 활발하게 참가하였다. 그가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와 마을 앞 탈곡마당에서 조선어와 "내고향", "조각달", "노임 받는 날", "까투리 타령" 등 노래와 춤을 가르칠 때면, 뒤늦게 온 사람들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14세 되던 1932년 정율성은 더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 때문이었다. 그리고 누이 봉은 마저도 박건웅과 결혼하여 상해로 가버리게 되었다.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사랑해주고 자기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던 아버지를 여의고, 누이마저 곁을 떠나자 정율성은 셋째형 의은을 따라 중국 상해로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의은이 남경 조선의용단 군정학원의 밀령을 받고 학생을 모집하러 조선에 파견된 것이다. 1933년 5월 하순 정율성은 목포에서 '평안환'배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셋째형과 함께 나가사끼를 거쳐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열다섯 살이었다.




3) 남경에서의 항일운동과 진보적 문예활동

1933년 5월 정율성은 남경에서 김원봉이 운영하는 의열단 산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삼민주의와 맑스-레닌주의을 배웠으며 조선역사도 배웠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청포도로 널리 알려진 이육사 시인도 다녔던 학교였다. 이듬해인 1934년 학교를 졸업한 정율성은 의열단에서 비밀항일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레닌그라드 교수 출신인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우기 위해 4년을 매주 일요일마다 상해를 오가면서 음악학습을 계속하였다. 이때 그는 교수로부터 '이탈리아에 가서 계속 공부하면 동방의 카루소가 될 수 있다'는 격찬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보였다.

1936년 봄 남경에서 정율성은 김산과 김성숙의 소개로 라청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라청은 1930년부터 김산과 친교를 맺고 있었던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자형 박건웅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이 당시 김산은 연이은 체포와 '일본의 스파이', '트로츠키 분자'라는 누명 때문에 중국공산당적이 정지되어 있는 등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정율성은 라청의 집에서 김산이 8월 연안으로 떠나기까지 한달이 넘게 그와 함께 지냈다. 정율성보다 20세정도 연상이었던 라청은 그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고 항일구국을 취지로 하는 '남경 5월문예사'라는 진보적 문예 단체에 정율성이 활동할 수 있도록 추천해 주었다. 한편으로 정율성은 1936년에 김산 등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참가 활동하였다.

이 후 2년 남짓한 '5월문예사'에서의 진보적인 문예활동을 통하여 정율성은 남경문예계와 폭넓은 교제와 접촉을 할 수 있었다. 1937년 8월, 19세의 정율성은 남경의 중앙호텔에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훗날 섭이와 더불어 중국최고의 민족 작곡가로 존경 받게 되는 선성해를 만나 선생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폭발하였다.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홍군은 팔로군으로 편입되었다. 팔로군은 일본군과 장개석 군대라는 내외의 적과 싸우면서 장장 2만 5천리 대장정의 신화를 일구어냈다. 바야흐로 연안은 혁명의 심장부가 되고 있었다. 정율성은 자신의 조국이 오래 전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는데, 지금 또다시 중국의 영토가 일제에 의해 유린되고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마침내 그는 상해에서 하고 있던 항일선전사업을 정리하고 그 당시 모든 혁명가가 그러했듯이 혁명의 도시 연안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4) 혁명의 도시 연안을 노래하다

1937년 가을, 정율성이 도착한 연안은 황막하였다. 산은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이었고 사람들은 움집에서 살며 좁쌀밥을 먹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안은 혁명의 성지로서 당시 중국인민의 등탑이었고 희망이었다. 사람들은 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각지로부터 연안을 찾아왔으며, 또 이곳으로부터 혁명의 불씨를 사방으로 가져갔다. 연안시절은 정율성에 있어서도 불같이 타오르던 시기였다.

정율성은 섬북공학을 거쳐 20세가 되던 1938년 3월에 '로신예술학교'음악학부에 입학하였다. 들끓는 연안의 혁명적 분위기는 정율성에게 있어서 창작의 바다 그 자체였다.

1938년 봄, 연안성의 예당에서는 모택동까지 참석한 야회가 열렸다. 정율성은 만돌린을 타면서 여자 소프라노 가수 당영매와 함께 격앙된 목소리로 '연안을 노래한다'라는 곡을 불렀다. 모택동 이하 전 청중은 노래가 끝나자 감격한 나머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날 밤 그가 불렀던 이 곡이 막야 작사, 정율성 작곡의 그 유명한 '연안송'이었다. 곡조가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전투적 기분이 있는 이 곡은 삽시간에 항일근거지로부터 국민당 통치구까지, 화북에서 멀리 동남아까지 항일지사의 영원한 노래가 되었다.







보탑산 산봉우에 노을 불타고

연하강 물결우에 달빛 흐르네

.....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로운 도시

정열에 끓어 넘치누나




'아, 연안!'하는 대목에서 항일전사들은 일부러 목소리를 더욱 높여 가슴 후련하게 목청을 뽑곤 하였다.




5)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

정율성은 혁명에 대한 열정을 잇따라 작품으로 형상화 하기 시작하였다. 2만5천리 홍군의 대장정을 직접 답사한 뒤 '팔로군 대합창'이라는 불멸의 위대한 작곡을 해 낸 것이다.

"나는 신비로운 심정으로 전사들이 총을 메고 줄지어 선 것을 보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쿵쿵 대포소리가 울려오는데 전사들이 웅글지고 씩씩한 목소리로 '전진.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대오!"하고 부르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이 노래 소리에 맞추기라도 하는 듯이 저쪽 우거진 숲 속으로부터 다른 대오가 '조국의 대지에 섰다.민족의 희망을 안은 이'라고 부르면서 걸어나왔다. 뒤이어 다른 한 대오가 '우리의 힘을 막을 자 그 누구냐!'하고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며 씩씩하게 걸어왔다...... 회색군복을 입은 전사들 뒤로는 진붉은 감나무 잎과 자홍색 단풍잎이 황혼 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푸른 안개는 그 산골짜기로부터 노래소리를 싣고 하늘로 피어올랐다. '들으라, 혁명노래 우렁차다'...."고 팔로군 전사 관화가 회고한 '팔로군 대합창'은 그야말로 맹호가 날개를 단 듯 후방에서 전선으로 해방구로부터 심지어는 국민당 통치구까지 퍼져나가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팔로군 군가>, <팔로군 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등 총 8개곡으로 구성된 '팔로군대합창'중 특히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대오, 조국의 대지위에 섰다"로 시작되는 팔로군 행진곡은 중국건국과 함께 정식으로 인민해방군가로 정부의 비준을 받았고,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때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연주되기도 하였다.




6) 중국공산당 가입과 결혼

1939년 1월, 21세가 된 정율성은 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그 해 5월 중국공산당원으로서의 정식비준을 받았다. 앞서 연안으로 출발했던 김산이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 물리학 등을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정율성과 접촉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음악지도를 담임하고 있던 정율성은 그의 평생의 애인(연변에선 아내를 애인이라 부른다)인 정설송을 만나 열애에 빠지게 되었다. 정설송은 당시 항일군정학교 여학생 대대장이었는데 그녀는 후에 중국의 주멕시코, 네덜란드 대사를 역임하는 등 고위 외교관을 지내게 된다.

"집안에는 미세한 변화가 일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문가에 놓인 책상은 말끔하게 정돈되고 책상위에 놓여져 있는 붉은 도장밥이 깨끗이 닦아졌다. 며칠 후에는 창문턱에 또 들꽃 몇 송이가 놓였다..... 하루는 뜻밖에도 나의 책상위에 소설책'안나 까레니나'와 '동백꽃 처녀'가 놓였고 그 위에 정율성이 손수 쓴 '꼬마 여군관에게 드림'이란 쪽지가 놓여 있었다.....얼굴이 불그스레하게 상기된 그는 오래전부터 나에게 주의를 돌려왔다고 말하였다."라고 그의 애인 정설송은 정율성과의 첫만남을 회상하였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심각한 난관에 부딪쳤다.정율성이 김산처럼 '일본의 스파이'라는 정치적인 의심을 당으로부터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심때문에 김산은 1938년 가을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되기까지 하였지 않았던가! 더구나 정율성은 김산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다만 '연안송'같이 영향력 있는 노래를 창작하였기 때문에 당적은 제명당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기간 우리 사이에는 만남이 중단되었지만 그에 대한 상념은 한시도 나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어 그의 모습이 자주 나의 눈앞에 나타났고, 열정에 벅차 오르는 그의 노래소리가 귓가에 울렸다"고 정설송은 그 당시 그들의 처지를 회고하였다.

이때 팔로군 포병 퇀퇀장 무정장군이 회의 차 전선으로부터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본명이 김무정(金武亭)으로서 김산과 동갑이고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서금 중화소비에트 정부 수립과 2만5천리의 대장정에도 참가한, 중국인 사이에도 신뢰가 높던 인물이었다. 무정은 정율성의 큰형, 둘째형과도 잘아는 사이였고 정율성을 친동생처럼 사랑하였다. 무정의 적극적인 노력과 그에 대한 당의 의심이 풀린 1941년 겨울, 마침내 정율성은 정설송과 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연애 3년만의 결실이었고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7) 태항산에서 무정과 함께 항일투쟁

1942년 8월 정율성은 연안을 떠나 산서 동남부의 태항산 팔로군 본부 부근으로 항일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정율성은 태항산을 근거지로 집결한 120여명의 조선동지들과 함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을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치하였다.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장은 무정이 맡고 정율성은 교육장(교무주임)을 담임하였다. 주요임무는 적후로부터 온 조선 청년전사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는데, 때론 전투에도 참가하고 일제 스파이를 심사하며, 적후로 들어가 적군와해사업도 하였다. 이러한 포연자욱한 나날 속에서도 정율성은 창작활동을 쉬지 않고 '조선의용군 행진곡', '혁명가'등의 곡을 만들어 조선 항일전사들에게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조선사람들의 서정이 들어 있는가 하면 짙은 중국 민요색채도 있었다. 격정으로 흘러 넘치는 듯 격앙되었다 낮아지는 선율은 마치 항일투사들을 첩첩준령의 태항산으로 이끌어간 듯 했고, 휘몰아치는 광풍과 도도히 굽이치는 장하수의 물결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다. 노래를 끝마치자 삽시간에 장내는 박수소리로 들끓었다. 그는 재청! 하고 요구하는 동지들의 소리를 거절할 수 없어 또 노래를 불렀다.

1944년 2월 연안의 팔로군 본부에서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연안으로 철수시키자 정율성도 다시 연안으로 돌아왔다. 태항산 시절 2년만이었다. 라가평이란 곳에서 정율성은 감과 수박, 고추 등을 심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건강을 추스리고 있었다. 봄에 심은 수박이며 고추가 주렁주렁 유난히도 잘 영글던 1945년 여름, 마침내 일본제국주의가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되었다. 산과 들에는 횃불로 불야성을 이루고 동지들은 기뻐서 얼싸안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였다. 연안에 있던 조선의 항일투사들은 한시라도 빨리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준비를 서둘렀다. 이 때 정율성의 나이 27세였다.




8) 해방과 귀국 그리고 한국전쟁

그 해 9월, 정율성은 아내 정설송과 함께 태항산 시절 낳은 딸 소제를 당나귀에 태우고 걸어서 4개월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조국을 떠난 지 실로 12년만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전까지 정율성은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 평양의 조선인민구락부 담임(군대 문화부장에 해당)과 평양음악대학 작곡부 담임 등을 맡으며, 해주음악전과학교, 인민군협주단을 건립하고 북한 전역을 순회공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이 기간 흑사병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한 정율성은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 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 10여곡의 작품을 창작하여 1948년에는 북한에서 수여하는 '모범근로자'칭호를 수여 받기까지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정율성의 아내 정설송은 신화통신사 종군기자로 서울 등 전선에 참가하다가 주은래와 김일성과의 협상하에 중국국적과 당적을 회복하여 딸 소재를 데리고 먼저 귀국하였다. 이 때 정율성은 조국을 떠나기 싫어 "나는 뒤로 갈테니 당신이 아이를 데리고 먼저 떠나오"라고 그녀에게 말한 뒤 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에야 어머니를 모시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2개월만인 12월, 중국인민지원군창작조와 함께 다시 전선으로 돌아 온 그는 이듬해 4월까지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등을 창작하고 1951년, 33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아주 돌아갔다. 그토록 그리던 조국에서의 생활 불과 5년만이었다.

정율성이 다시 중국으로 가게 된 배경에는 그가 숙청대상이었던 연안파와 관련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에 부인 정설송과 매우 절친했던 주은래 총리가 김일성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중국으로 소환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9) 생활 속에는 투쟁만 있고 붉은 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화 속의 조국을 등 뒤로 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정율성의 심정은 비통했다. 이제 조국은 남과 북이라는 서로 다른 체제로 분단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정율성은 쓰라린 심정을 더욱 폭넓고 아름다운 창작활동으로 달래어 나갔다. "생활속에는 투쟁만 있고 붉은 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도 있어야 하지만 자기의 유쾌한 심정으로 아름다운 조국산천도 노래하여야 한다."고 마음을 다지곤 했다.

1952년부터 문화혁명전까지 정율성은 조선족이 거주한 연변은 물론 호남, 사천, 관서, 귀주, 운남 등 소수민족의 민요와 민간의 음악을 수집하고 더욱 풍부하게 창작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52년 정율성은 눈 덮힌 홍안령의 생활을 통해 '벌목가'와 '홍안령에 눈 내리네'를 작곡하였다. 이 곳에서도 정율성은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흰 눈위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벌목노동자들과 둘러 앉아 "노동 속에서 산출된 음악이 진정한 민간의 음악입니다. 작곡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자들에 대하여 등불처럼 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그들과 함께 노동하고 땀 흘리면서,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는가를 알아야 합니다"라며 이야기 하곤 하였다. 그가 노래를 목청 껏 부르면 고드름이 달린 노동자의 얼굴에서는 웃음꽃이 피어 올랐으며, 향기로운 술에 취한 듯 즐거워하곤 했다.

정율성의 창작태도와 활동은 진지하고도 엄숙하였고 격의가 없었다. "만강기슭의 한 여관에서 거기서 쉬고 있는 뱃사공을 만났는데 그는 새벽닭이 세번째 홰를 칠 때까지 사공들이 부르는 먹임 소리를 기록하고 먹임 소리를 확실히 배웠다. 그리고 천강의 먹임 소리를 잘 부르는 사공을 발견하자 그는 사공과 함께 밤낮 여드레 동안 배를 타면서 <강상의 노래소리>를 창작하였다"고 아내 정설송은 정율성의 창작에 대한 열정을 회고하였다.




11) 문화혁명기의 시련에 맞서

정율성은 또한 솔직하고 의지가 강건한 혁명가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숨긴 적이 없었으며 바람 부는 데로 따라가지 않았으며 과감히 진리를 견지하였다. 이런 솔직하고도 숨김이 없는 태도 때문에 그는 59년의 반우경운동에서 '엄중한 우경', '반당'이라는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신념을 한치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마침내 62년에 당으로부터 정식사과를 받아 내었다.

그러나 보다 더 크고 결정적인 시련이 연이어 그에게 몰아쳐 왔다. 강청 등 이른바 4인방의 극좌노선이 '문화혁명'의 이름으로 1966년부터 10년 동안 전 중국에 휘몰아친 것이다. 정율성은 이 폭풍앞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홍위병들이 "혁명은 손님대접도 아니며 글짓기도 아니며 그림 그리기나 수 놓기도 아니므로 그렇게 우아하게 그렇게 찬찬하고 점잖게 그렇게 온화하고 겸손하게 될 수는 없다. 혁명은 폭동이며 이 계급이 저 계급을 전복하는 폭력적 행동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도처에서 사람들을 잡아가두는 정황을 보고, "이렇게 하는 것은 토지혁명시대에 투쟁하던 방법으로서 우리가 정권을 전취한 오늘에는 이렇게 할 수 없으며,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동란 속에 빠지게 할 따름이다... 정권을 이미 전취한 이상 헌법과 법률에 따라 처사하여야 하지 함부로 사람을 비판하고 잡아 가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문화혁명을 지지하는 음악을 작곡해 달라는 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하지만 그 결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스파이', '검은 무리'라는 비난과 멸시와 감금이었고, 창작 및 발표의 자유를 포함한 일체의 권리 박탈이었다. 4인방을 위해서는 단 하나의 노래도 써 주지 않았던 정율성은 북경교회에서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노동자, 농민들의 벗으로 사귀면서 울분을 달래었다.

"어느 해 봄날 우리는 그물을 이쪽 강가에서 저쪽 강가에까지 쳐 놓고 나는 풀밭에 누워 볕쪼임을 하며 소설책을 읽고 그는 필기책을 꺼내어 수시로 생각나는 선율들을 적어 넣었다. 이렇게 한 두 시간 지난 다음 우리가 그물을 건져내면 그물코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물고기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율성동지는 기뻐하며 <보오! 그물에 걸린 고기들은 모두 콩나물 대가리요!>라고 외쳐댔다"고 그의 아내 정설송은 그들의 시련기를 회상하였다. 하지만 10년간의 문화혁명의 찬바람도 정율성의 창작에 대한 열정을 식히지 못하였다. 이 기간에도 그는 모택동의 시사를 작곡한 20곡의 작품과, 연극음악 '운천전가', 영화대본 '무장선전대'의 초고를 쓰는 등 창작하기를 쉬지 않았다. 이처럼 정율성은 전생애를 통하여 닥쳐왔던 역경과 난관을 오히려 풍부한 창작의 자양분이자 원천으로 되돌려 놓는 삶을 살았다.

1976년 10월, 마침내 '4인방'이 분쇄되자 정율성은 더없이 들끓는 열정으로 새로운 창작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기쁨과 정열이 너무 지나쳤을까? 주은래 총리를 노래하는 연가와 건국 5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작품을 구상하던 겨울, 즐겨 고기잡이하던 북경근교 강가에서 그는 그만 고혈압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젊음을 불살랐으면서도 정작 당신은 조국땅에 살 수 없었던 정율성. 생전에 사랑하던 어머니께서 숨을 거두시자 유해를 잘 보존했다가 조국이 통일되면 어머니의 고향으로 모시겠다면서 어린 딸 앞에서 눈물을 쏟던 그 역시도, 이국 하늘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1976년 12월 7일 아침, 정율성 그의 나이 이제 58세 때였다.




12)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노래소리

불과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40여년 평생을 항일무장투쟁과 사회주의 건설, 그리고 문화혁명에 이르는 중국현대사의 격변기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며 살다간 한국인 음악가 정율성. 정규음악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정규적인 작곡훈련을 거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열정에 넘치는 군가, 가사, 대합창, 가극, 영화삽입곡, 동요 등 300여 곡을 작곡한 문예전사. 중국인이 아니었기에 겪어야만 했던 풍습과 언어 상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김산, 이철부 등과 함께 중국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민족의 기개를 떨친 혁명전사 정율성.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처럼 열정에 넘치는 삶을 살게 하였을까? 정율성, 그는 식민지 민족으로서의 역사적 과제에 충실하고자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였다. 또한 노동자, 농민 등 절대 다수의 민중의 고통스런 생활에 함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역사의 발전이라는 명제를 퇴색하지 않는 신념과 낙관으로 한 순간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생전에 그토록 존경했던 베에토벤의 운명처럼 그도 그렇게 주어진 운명 앞에 물러서거나 타협함 없이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가 서거한 후 한 돌에 즈음하여 북경에서는 '정율성 작품 음악회'가 조직되었고, 이후 해마다 북경과 연변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음악회가 성대히 개최되고 있다. 또한 일본 동경의 음악청에서도 NHK합창단과 중국민악대가 합작하여 '홍안령에 눈 내리네'등의 그의 가요를 공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를 낳아준 조국에서는 정율성이라는 이름마저 낯설기 만하다.

1992년 8월 24일 마침내 한중수교가 이루어졌다. 태극기와 오성홍기가 북경과 서울 하늘 아래에서 펄럭이게 된 것이다. 지난 현대사의 골짜기를 되돌아보면 정말 감회가 남다를 현실이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이역만리로 한번 내몰리고, 해방 후에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현대사의 사각지대로 또다시 파묻힌 그와 그의 작품을 이젠 고향 광주 하늘 아래로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떨어져 나간 역사의 한 귀퉁이나마 복원하는 첫 걸음이자, 살아 있는 자의 당연한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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