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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3-18 15:59:065895 
세계가 평가하는 김대중(3)
양승국

세계가 평가하는 김대중

[제3편] 동서통합, 야당 대통령 후보에서 사형선고까지

김대중은 1961년 5월 14일에 치러진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 되었으나,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여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16일 당선 등록만은 해두려고 급히 서울로 올라왔지만 이미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로 인해 국회가 해산된 뒤였다.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후광에게 처음 선물한 당선무효라는 날벼락은,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총칼로 민주정부를 접수한 군인들은 정당 부패를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후광을 체포하여 형무소에 수감하였다. 그들은 당비 횡령과 용공 혐의를 걸어 무려 3개월간이나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아무런 혐의점도 나오지 않자 형무소에서 내보냈다.

암담한 시절이었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1962년 5월, 정치적 동지이며 인생의 반려자인 이희호와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신혼생활 불과 열흘 만에 다시 ‘반혁명’ 죄목으로 체포되어 한 달 동안 구치소 생활을 하게 된다. 이희호가 결혼하여 맨 처음 한 일이 남편의 옥바라지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30년 가까이 이어졌던 정치공작과 고문, 납치와 연금 등 생사를 넘나드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군사쿠데타정권 시절이었던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고 이틀 뒤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말이 사임이지 군사쿠데타가 100%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마지막 사건이었다.

박정희가 민정(民政)불참선언에 이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잉크도 마르기 전에 말을 바꿔 군정(軍政)4년 연장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을 보면 장기집권을 위한 그의 계략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부터 짜여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3년 2월, 김대중은 거의 2년 만에 해금이 되었다. 그해 1월1일을 기해 부산이 직할시(直轄市)로 승격되고, 10월에는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민주당에서는 따로 후보를 내지 않았다. 군인으로 돌아가겠다던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박정희와 윤보선 사이에서 야당 후보인 윤보선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후광은 야당 대변인으로서 박정희 후보를 공략할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듯, 쿠데타 후 박정희가 직접 제정한 국가재건특별조치법을 위반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의 군 퇴역과 공화당 입당 순서가 그 조치법에 걸리는 것이었다. 후광은 즉각 박정희 후보의 위반 사실을 국민 앞에 공개했고 당황한 공화당은 부랴부랴 특별 조치법을 개정하는 소란을 피웠다.

1970년 10월, 후광(後光)은 대통령 후보가 된 뒤 처음 가진 기자회견에서 통일정책을 제일먼저 언급했다. 북한과의 교류 제의는 물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조차 금지곡이었던 시절이었으니 충격적인 정책 제시가 아닐 수 없었다.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 건 그로부터 불과 1년 뒤였다. 반공과 방공을 내세우던 박 대통령도 결국 후광이 제시했던 정책을 따라준 꼴이었다.

후광은 1971년 2월 대선을 앞두고 아내와 함께 일본과 미국을 방문하며 지도자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방문 기간 중 닉슨 대통령의 부인과[Tssmep] 아내인 이휘호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 필름을 귀국하여 사진점에 맡겼다. 그 소식을 접한 중앙정보부에서는 사진점에 탈세 혐의를 걸고 샅샅이 수색하여 필름을 훔쳐가는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아내와 함께 워싱턴에 체류하고 있을 때 동교동 집 대문에 폭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후광의 정치 선배이면서도 대통령선거 때 사무장을 흔쾌히 맡아주었던 정일형 박사의 자택이 전소되는 사건도 그 무렵 발생했다. 경찰에서는 폭탄은 한 중학생의 철없는 장난이었고 화재는 고양이가 저지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김대중 사형 “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후광은 94만 7천여 표 차이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금권과 관권 동원은 물론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을 처음 시도한 부정선거였다. 이 선거 이튿날인 4.29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은 ‘무효, 부정표 속출’이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군(軍)의 공개투표가 자행되고 야당대통령 후보 당사자와 아내가 찍은 표조차 무효로 처리 되었으니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김대중은 20일간의 선거운동 기간 중 "박정희대통령의 총통제 음모를 막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통령 선거 때보다도 더 많은 선거구를 돌아다녔다. 교통사고를 가장한 박 정권의 살해기도도 이 때 나왔다.이후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는 김대중...

5월 25일, 선거를 이틀 앞두고 목포 비행장에서 광주로 향하고 있던 중에 마주 오던 대형 트럭이 돌진해 온 것이다. 운전사의 기지로 정면충돌은 면했지만, 뒤따라오던 택시는 그대로 화를 당하여 세 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후광은 양팔의 정맥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나들이를 할 때 마다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다리의 고관절 장애는 이 살해기도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제2의 쿠데타는 후광이 고관절 치료를 받기 위해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에 행해졌다.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광은 서둘러 돌아오려던 계획을 바꿔 도쿄에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국내에서는 정치활동이 전면 중지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총통제를 꿈꾸던 박대통령의 유신은 긴급조치를 발표하면서 착착 진행되어 갔고, 후광은 그때마다 그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낀 후광은 정치무대를 미국으로 넓혔다. 미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상대로 강연하고 정가의 유력자들을 만나 외교전을 전개하였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인질(人質)처럼 고국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그 혹독한 겨울이 끝나기만을 빌었다고 전한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도시 중심에 있는 호텔에서 후광을 납치하여 살해하려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다에서 죽을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다음, 납치 엿새째 되는 날 오후 젊은 남자가 찾아왔다. 젊은이는 왜 외국에서 반국가 활동을 하느냐며 추궁한 뒤 회유하기 시작했다. 박 정권의 회유는 공화당 창당 초기부터 있었다. 부통령 자리까지 제안한 적도 있었지만 모든 걸 거부했다. 후광을 현해탄에 수장시키지 못하고 서울까지 대려와 풀어놓은 곳은 달빛이 밝은 밤, 동교동 집 근처의 주유소였다.

가택연금은 그로부터 무려 14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후광은 1987년 6월에 일어난 국민항쟁으로 비로소 울타리 없는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연금 기간 동안 불효 중에 가장 극심한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문병을 가지 못했고, 돌아가실 때의 임종은 물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하늘이 통곡할 일이었다.

1976년 3월 1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민주 구국선언’이 이었다. 이 선언은 유신체제 하에서 박 정권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비판한 의거였다.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 문익환, 윤보선, 이우정, 안병무, 김지하, 이태영, 정일형, 서남동, 함세웅, 문동환, 이문영, 그리고 김대중이었다. 후광은 1심에서 징역 7년의 판결을 받았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대한 의회 청문회가 있었는데, 망명 중이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씨는 흥미로운 증언을 했다.

‘박정희 씨가 가장 두려워하는 두 세력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의 상대 후보 김대중과 미국의회’라고 한 것이다. 아울러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지휘자는 이후락 당시 정보부장이지만, 대통령의 허가 없이 그러한 사건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1978년 12월 27일, 박정희는 후광에게 생애 마지막 선물이 되는 특사를 베풀었다. 그해 7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석상에서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난 뒤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다음해에 죽을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자신의 충직한 동지이자 부하인 김재규의 권총에 18년의 장기집권을 마감했다. “이것 참 기가 찰 노릇이오, 누군가 정말 큰일 날 짓을 한 모양입니다.” 박정희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인 이휘호에게 했던 후광의 첫마디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쟁취되어야지, 암살이나 쿠데타에 의해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10.26사건이 일어나기 서너 달 전 후광은 박 대통령에게 대화를 간절히 요청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 걸 보면 후광의 박정희 시대의 불행은 적과는 대화를 거부하는 군사문화의 잔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듬해, 짧았던 80년 서울의 봄이 지나고 5월17일 밤9시, 집으로 들이닥친 전두환 신구부의 계엄군 병사들은 총검을 겨누며 후광을 연행해갔다. 죄목은 ‘내란음모죄’였고, 사유는 정동년이라는 전남대 복학생에게 돈을 주고 ‘광주폭동’을 일으키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동년 학생은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신군부가 조작, 날조한 문서대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 뒤 정동년 학생은 형무소에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 플라스틱 숟가락을 뾰족하게 갈아 동맥을 잘라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전두환은 ‘반국가 단체 수괴죄’. 미국과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할 당시 조직했던 ‘한민통’을 걸고넘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민통은 오래전부터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절대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고, 그 입장을 견지해온 터였다.

결국 후광은 1980년 9월 계엄법 위반과 내란혐의라는 신군부의 날조된 서류에 의해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1월 고등군법회의를 거쳐 1981년 1월 23일에는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사형확정판결과 함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2004년 1월 29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무죄판결이 내려졌지만 당시 조작된 기록들은 권력찬탈에만 눈이 어두웠던 전두환의 만행이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006/03/18 [12:00] ⓒ 이조은뉴스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3-01-20 12:45:47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이동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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