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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0 21:40:334458 
관리자의 15대조 학포공 양팽손
양승국

학포 양팽손-한국의 문화인물


학포공 양팽손 님께서 문화관광부에서 주관하고 있는 <이달의 문화인물>에서 2003년 4월의 인물로 지정되어 홍보책자가 나왔습니다. 문화관광부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유작에 학포집이 있습니다.

양팽손(梁彭孫) : 1488-1545)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1519년 교리(校埋)로 재직 중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뒤 복관(復官)됨. 글씨를 잘 썼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능주(綾州)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됨. 문집에 《학포유집(學圃遺集)》이 있음. 양팽손은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中宗, 재위1506-1544)대에 문장(文章)과 서화(書畵)로 명성을 얻은 문신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윤두서(尹斗緖, 1668-1715), 말기의 허련(許鍊, 1809-1892)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데, 특히 양팽손은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본관은 제주로 1488년 9월 19일 전남 능성현(현 능주) 월곡리에서 양이하(梁以河)의 아들로 출생하여 1545년 8월 18일 학포당에서 타계했다. 그의 사후 3백년 이상 지난 1863년(철종 14년) 혜강(惠康)이란 시호를 받았으니, '부지런하고 사(私)가 없으므로 혜(惠)라 하고 연원(淵源)이 유통(流通)하므로 강(康)이라 한다'는 뜻으로 한평생 일관된 삶의 태도와 성품을 잘 대변한다 하겠다. 여섯 살 연상으로 1510년 생원시에 같이 등과한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그와 평생 뜻을 같이한 지인(知人)인데, 그는 양팽손에 대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芝草)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 묘사했다. 조광조의 유배 당시 곁에서 함께한 이가 학포였고 조광조가 타계하자 학포는 그의 사신(捨身)을 수습하였다. 58년 간의 삶 동안 올곧은 행동으로 청사(靑史)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으며 학자이자 문장가이며 문인화가(文人畵家)이기도 했다.

그는 송흠(宋欽,1459-1547) 문하에서 수학했고, 20세인 1507년 향시에 참여, 29세인 151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공조 좌랑, 형조 좌랑, 사관원 정원, 이조 정랑,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다. 32세인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재상들이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사류를 몰아낸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관직이 삭탈된 뒤 낙향했다. 고향에 학포당을 짓고 은거하여 서화에 잠심(潛心)하였다. 50세에 관직이 회복되었고, 타계 1년 전 용담현령에 제수되었다.


그의 문학적인 위상을 살필 수 있는 문집이 남아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에 관한 언급은 중종(中宗) 12년부터 36년까지 25년 동안 40여 회에 이른다.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이 두드러졌고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벗들이 그의 촌스러움을 헐뜯었다고 하나 강직함이 익히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6세기 전반 조선 화단에서 화가로서 어엿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비록 전해지는 작품이 몹시 드물어 그의 화풍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에는 한계가 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는 전래작이 희귀한 16세기 한국회화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화풍상 시대성이 선명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 조선이 일본에 끼친 영향 등 양국 회화교류의 측면에서도 거론 되고있는 명품(名品)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그림들은 주지되듯 전래되는 것이 몹시 드물다. 오늘날 그의 유전작은 전칭작(傳稱作)을 포함하여 10점 내외에 불과하나 장르상으로는 산수, 영모, 사군자, 기명절지 등에 걸쳐있다.


산수화부터 살피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는 화면 우상단에 학포가 지어 쓴 2수의 제시(題詩)가 적혀있는 것으로 일찍부터 알려진 그의 대표작인데, 일제시대 데라우치총독이 박물관에 기증한 그림이다. 이 밖에 문중에는 원화는 아니나 '학포선생산수도'라는 제목이 화면상에 있는〈산수도판각〉이 전해지는데 화면구성 및 산세표현 나무처리기법 등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산수도〉와 친연성이 감지되는 작품으로 양팽손의 문집 발간시 제작된 것으로 사료된다. 일본에서는 유현재(幽玄齋) 소장의 전술한 〈산수도〉와 매우 유사한 그림이 알려져 있고, 1996년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에서 개최된 조선회화특별전에 김익주(金翊胄)의 1720년 간기가 있는 〈호렵도〉와 〈산수도〉전칭작이 출품되었다. 사군자로는 현재 문중이 소장한〈매죽도판각(梅竹圖板刻)〉이 있고, 원래는 8폭 병풍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4폭만 전해지는〈묵죽(墨竹)〉이 알려져 있는데 화풍상 고식(古式)을 지녀 주목된다. 노산 이은상의 언급에 따르면 이본호남가(異本湖南歌)의 실내묘사에 '학포의 묵죽'이란 대목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양팽손이 대나무를 그렸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묵죽의 경우 죽순이 등장한 봄, 바람에 휘날리는 세죽(細竹)과 굵은 줄기의 통죽(筒竹) 등 계절이 안배된 일괄품이다. 매폭에 화가이름을 알려주는 도장과 묵서의 작품명이 있는데 이는 후대의 것으로 사료된다. 매폭 예외 없이 새들이 등장하여. 조선중기에 문인화가들이 수묵으로 즐겨 그려 크게 유행한 사계영모도(四季翎毛圖) 계열, 그리고 15∼16세기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등장하는 대나무 및 새들과 친연성이 감지되는 그림들이다. 종가집에 소장된 기명절지도에 속한〈연지도(蓮芝圖)〉는 문중 후손이 1916년 서울에 위치한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본가에서 옮겨온 그림이다. 양팽손의 외손인 이이장(李彛章,1708-1764)이 1761년에 쓴 제발이 첨부되어 있어 양팽손이 그림을 잘 그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이기도 하다. 다기(茶器)와 함께 각기 연꽃과 영지가 주된 소재가 된 2폭의 그림으로, 오늘날 이 소재의 그림은 윤두서에 이어 책가도(冊架圖) 계열의 조선말기 것들이 전래되는데 이 분야의 그림 중에서는 시대가 올라가는 점에서도 중시된다.


조선왕조의 화단에 있어 전과 구별되는 파천황(破天荒)의 새로운 화풍을 이룩한 것은 전문적인 직업화가가 아닌 문인화가들 이었다. 화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두드러진 이들 지식인 화가들 중에는 당쟁에 연루되어 사대부로서의 정치적 활동이 거세되었기에 서화로 평생을 보낸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양팽손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조선화단에서 크게 주목되는 문인화가인 양팽손을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함은 큰 의의가 있다하겠다.



양팽손의 이 〈산수도〉는 당시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안견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산수도와 비슷한 화풍을 보인다. 한편으로 치우친 구도, 봉우리가 겹쳐지면서 점차 멀어지는 원경의 모습, 근경 물가의 언덕에 모인 선비들의 모습 등 당시 공통적인 산수화 양식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는 학포라는 호가 쓰여 있어서 양팽손의 그림으로 전해지나, 그의 다른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 비교해 볼 수는 없다. 이 작품은 전경(前景)에서 중경(中景)으로 이어지는 구도가 자연스럽고, 경물 사이에 연운(煙雲)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표현되어 있는 점이나,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바위의 모습 등 조선 전기의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의 하나로서 가치를 지닌다. 화면의 오른쪽 위에는 은둔 생활을 노래한 두 수의 오언시와 함께 양팽손의 호인 학포(學圃)라는 낙관이 되어 있고, 그 아래에 방형(方形)의 양각 도장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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