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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28 11:29:115004 
한글창제에 대한 최만리상소문과 세종의 대응
운영자

1. 최만리 상소문(www.hyundaedang.com)




崔萬理等 諺文創制 反對上疏文 (世宗實錄 券一百三 十九張)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出千古 然以臣等 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




신등이 엎드려 언문의 제작을 살피옵건데, 지극히 신묘하와 창물운지(創物運智)가 천고에 뛰어나나, 신등의 구구한 관견(管見)으로는 오히려 의심스러운 바가 있사오므로, 감히 위간(危懇)을 베풀고 삼가 뒤에 조목을 드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는 바, 거룩한 재결을 바라는 바입니다.




【解設】이것은 세종 26년 2월20일에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집현전의 일부학자들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기 위하여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의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이 반대 상소에 가담한 대표적인 학자는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들은 당시 집현전을 대표하던 쟁쟁한 학자들로 당대의 학풍을 주름잡던 사람들이다. 이에 흥미 있는 사실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사람도 집현전 학자요, 반대한 사람들도 집현전의 학자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집현전 내부의 갈등과 학문적 바탕의 대립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볼수 있다. 또한 여기 보인 반대상서의 내용은 어떤 의미로는 당대 학계의 여론을 집약한 것이라고도 할만하다.이런 의미에서 이 반대 상소문은 훈민정음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曰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우리나라는 조종이래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고,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수하여 지금 동문동궤(同文同軌)의 때를 당하옵는데 언문을 창작하신 것을 듣고 봄에 이상히 여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혹시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으로 삼은 것으로 새로운 자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곧 자형(字形)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더라도 용음(用音)과 합자(合字)가 옛것과 반대되는 일이며,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만약 중국에 흘러가서 혹시 옳지 못함을 의논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어찌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解說】지금까지 써오던 한자를 버리고 새로이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은 동문동궤라는 사대의 기본정신에 크게 벗어나기 때문에 사대모화에 위배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二.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惟蒙古,西夏,女眞,日本, 西蕃之類 名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歷代中國 皆以我國 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 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螳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둘째, 예로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가 비록 다르나, 방언으로 말미암아 따로 문자를 만든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의 무리들이 각각 문자를 가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이적의 일일뿐 족이 말할 것이 못되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중화(中華)로 오랑캐를 변(變)하게 한다고는 하였으되, 오랑캐로 중화를 변하게 한다는 말은 듣지 못 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 있다고 하였고, 예악(禮樂)과 문물이 중화에 견줄만하다고 하였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지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夷狄)과 함께하니 이야말로 소합(蘇合)의 향(香)을 버리고 당랑의 환(丸)을 취하는 것이라, 어찌 문명의 큰 누(累)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解說】한자를 버리고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은 문화인으로써 긍지를 버리고 후환을 만드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 앞항의 내용을 부연함




三. 新羅薛聰吏讀 雖爲鄙俚 然皆借中國通行之字 施於語助 與文字元不相離 故雖至胥吏僕隷之徒 必欲習之 先讀數書 粗知文字 然後乃用吏讀 用吏讀字 須憑文字 乃能達意 故因吏讀而知文字者頗多 亦興學之一助也 若我國元不知文字 結繩之世 則姑借諺文 以資一時之用猶何 而執正議者 必曰與其行諺文以姑息 不若寧遲緩而習中國通行之文字 以爲久長之計也 而況吏讀行之 數千年 而簿書期會等事 無有防礎者 何用改舊行無弊之文 別創鄙諺無益之字乎




셋째, 신라 설총의 이두(吏讀)는 비록 비루(鄙陋)하고 속(俗) 된다고 하더라도 모두 중국에서 통용하는 글자를 빌려서 어조사에 쓰는 까닭에 문자(文字)와 더불어 본시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옵니다. 그런 까닭에 서리(胥吏)나 하인의 무리들까지도 반드시 이를 배우자면 먼저 몇 가지의 글을 읽고, 얼마만큼의 문자를 안 연후에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고 이두를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한자에 의지해야만, 이에 능히 뜻에 통달할 수 있으므로 이두로 말미암아 한자를 알게 되는 일이 매우 많아 역시 학문을 일으키는데 일조(一助)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처음부터 글자를 알지 못하고 결승(結繩)의 세상과 같다면 곧 비로소 언문을 빌려서 한때의 쓰임으로 삼는 것은 오히려 가당하겠다고 할 수 있으나,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언문을 써서 고식적(姑息的)인 편의를 도모하기보다는 차라리 늦고 느리더라도 중국에서 통행하는 문자를 익히어 오래고 긴 계책을 삼는 것보다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가 통행된 지 수천 년에 관청의 문서기록(簿書)나 약속으로 쓰임(期會) 등의 일에 탈이 없었거늘 무엇 때문에 예로부터 행함에 폐단(弊端)이 없는 글을 고치어서 따로 비언(鄙諺)하고 이익 됨이 없는 문자를 창작하고자 하시나이까.







[참고}이두(吏讀)는 한자(漢字)의 훈(訓)이나 음(音)을 이용해서 한문에 토(토)를 달거나 혹은 국어의 표기에 이용한 표기법의 일종을 일컫는다. 결승(結繩)은 일정한 사상이나 개념을 끈의 매듭으로 표시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기 이전에 기억을 오래 간직하거나, 상대방에 무엇을 전달하기 위하여 기호로 쓴 것이다. 비언(鄙諺)은 야비하고 속된 것.




若行諺文則爲吏者 傳習諺字 不顧學文 文字吏員岐而爲二 苟爲吏者以諺文而宦達 則後進皆見基如此也 以爲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 如此則數十年之後 知文字者必少 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 不知聖賢之文字則不學墻面 昧於事理之是非 徒工於諺文 將何用哉 我國家積累右文之化恐漸至掃地矣 前此吏讀 雖不外於文字 有識者尙且鄙之 思欲以吏文易之而況諺文與文字 暫不于涉 專用委巷俚語者乎 借使諺文 自前朝有之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지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約然可知之理也 厭舊喜新 古今通患 今此諺文 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提 於治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也




만약에 언문이 통행하게 되면 관리된 자는 오로지 언문자만 익히고 학문을 돌아보지 않게 되어 한자와 관리는 갈라져 둘이 될 것이오며, 진실로 관리된 자가 언문만으로 환달(宦達)하게 되면 곧 후진들도 모두 이와 같이 됨을 보고 스물일곱자의 언문만으로도 능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 할 것이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勞思)해서 성리의 학을 궁구하려고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여 수십 년이 지낸 다음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반드시 적을 것이오며 비록 언문으로서 관공서의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온들 성현의 한자를 알지 못함은 곧 배우지 못함이 담장을 면대한 것과 같아,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데 어두울 것이오니 부질없이 언문에 힘쓴들 장차 무엇에 쓰겠나이까? 우리나라는 누대(累代)로 쌓여온 우문(右文)의 풍화가 점차 땅을 쓴 듯 없어져 버릴지 두렵나이다. 앞서 쓰여온 이두는 비록 문자에 벗어남이 없음에도 유식자들은 아직도 이것을 비루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이것을 바꾸고자 생각하거늘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는 조금도 상관함이 없는 것이며 시장거리의 속된 말만을 쓰는 것임에 있어서야(더 무엇을 말하겠나이까). 가사(假使) 언문이 전조(前朝)에서 있어온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날 같은 문명의 정치에 있어서 변노지도(變魯至道)로 아직도 옳다고 여기어 그대로 이어받아 습용할만한 것이오리까? 반드시 다시 의논할 자가 있을 것임은 자연히 알 수 있는 이치이옵나이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의 통환이라 하겠거니와 지금 이 언문도 신기한 재주에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학문에 손해됨이 있고 정치에 이익이 없는 것인바, 뒤엎어 이를 헤아려도 옳은 점을 발견할 수가 없는 바입니다.




【解說】앞 조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모든 문화의 척도를 한자 한문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던 사대주의 한학자들의 그릇된 생각이 얼마나 민족주체성에 병들어 있었는가를 가히 알만한 것이다.




四. 若曰 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惑致寃 今以諺文 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 然自古中國 言與文同 獄訟之間 寃枉甚多 借以我國言之 獄囚之解吏讀者 親讀招辭 知其誣而不勝楚 多有枉服者 是非不知招辭之文意 而被寃也 明矣若然則雖用言文 何異於此 是知刑獄之乎不乎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 欲以諺文而乎獄辭 臣等未見其可也




넷째, 혹시 말하기를 형살(刑殺)과 옥사(獄辭)같은 것도 이두로써 이를 쓰게 되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우민(愚民)도 한글자의 차이로 말미암아 간혹 원통하게 될 것도 이제 언문으로써 그 말을 바로 써서 읽고 듣을 수 있게 한다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다 쉽게 알아듣게 되어 억울하게 당할 사람이라도 다 쉽게 알아듣게 되어 억울하게 당할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오나, 자고로 중국은 말이 글과 같은데도 옥송(獄松)간에 원통하게 당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만일에 우리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옥수(獄囚)중에 이두를 해득하는 사람이 몸소 초사(招辭)에 이기지 못하여 왕복(枉服)하는 사람이 많이 있사오니, 이는 곧 초사의 글 뜻을 몰라서 원통하게 당하는 것이 아님은 명백한 일입니다. 그러하온즉 비록 언문을 쓴들 무엇이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이러써 죄인을 다스리는 공평함과 불공평함은 옥리(獄吏)의 여하에 있고 말이 글과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하고자 하신다면 신등은 그 타당함을 찾지 못하겠나이다.




【解說】이것은 훈민정음이 지닌 편민주의(便民主義)를 부당하다고 반박한 대목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바가 있어도 제 뜻을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많도다"고 한 점을 상기할 것이다. 진실로 훈민정음 창제의 근본 동기는 이 서문에서 명확히 들어나는 바, 최만리등이 이 대목을 들고 나온 것은 사전에 세종이 이러한 내용을 설명한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훈민정음이 백성을 위한 백성의 글이 되게 하고자 한 세종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을 곳이다.




五. 凡立事功 不貴近速 國家此來措置 皆務速成 恐非爲治之體 曰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謀及宰相下至百僚 國人皆曰可 猶先甲先庚 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 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工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其於天下 後世公議如何 且今淸州椒水地幸 特慮年?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 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 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燮之時乎 臣等尤未見其可也




다섯째, 무릇 일의 공(功)을 세움에 있어서 가깝게 속히 하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의 근래의 조치(措置)가 모두 속성으로 힘쓰오니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에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만약 이르기를 언문을 부득이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오면 이는 풍속을 바꾸는 큰일이라, 마땅히 재상(宰相)에게 상의하셔야 하옵고 아래로 백관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이를지라도 선갑선경(先甲先庚)으로 거듭 생각을 더 하시옵고 여러 제왕에게 물어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시옵고 백세에 성인이 나타나셔도 의심스러운바가 없는 연후에야 이에 가히 행하실 것이옵나이다.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들으시지도 않으시고 갑자기 하급관리 십여 인으로 하여금 익히어 배우게 하옵시며, 또 경솔히 옛사람의 이미 이루어 놓은 운서를 고치어 근거 없는 언문으로 부회(附會)하고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이를 새기어 급히 천하에 광포하고자 하시니 후세에 공의(公議)가 어떠하겠습니까. 또 지금 청주(淸州) 초수(椒水)의 행차에 있어서는 염려하시어 호종(扈從)하옵는 공무(公務)까지도 대신들에게 위임하고 계시온데, 저 언문은 국가의 완급함이 부득이 기한(期限)에 미칠 일도 아니온데, 어찌하여 유독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의 조섭(調燮)하실 때를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등이 더욱 그 타당함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참고] 선갑선경(先甲先庚)...역(易)의 "先甲三日 後甲三日"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새로 만드는 법령으로 백성들이 아직 익지 못한 까닭에 반포하기 3일 전에 은근히 타이르고 반포 후 3일 만에 실시한다는 뜻이다.

언문부회(諺文附會)...세종은 25년 12월에 훈민정음을 지으시고 곧 달아서 26년 2월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중국의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의 언해(諺解)를 명하였다. 여기서는 이 운해에 대한 언해의 작업을 이르는 것이다.




【解說】이 대목은 세종의 결심과 결의, 그리고 굳은 신념이 여하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그러한 세종의 의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1) 여러 사람의 의논도 듣지 않고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추진했다.

(2) 제작과 동시에 이배(吏輩) 즉 하급관리에게 훈습시켰다.

(3) 운해의 언해를 촉진하고 빠른 시일 안에 인각시키고자 했다.

(4) 훈민정음의 창제를 국가의 여하한 일보다도 중요한 과업으로 생각했다.




六. 先儒云 凡百玩好 皆奪志 至於書札 於儒者事最近 然一向好着 亦自喪志 今東宮 雖德性成就 猶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 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臣等 俱以文墨末技 待罪侍從 心有所懷 不敢含默 謹 肺腑 仰瀆聖總




여섯째, 옛 유학자가 이르기를 법백의 완호(玩好)가 모두 뜻을 빼앗는다고 하였는데 서찰에 이르러서는 유학자에게 가장 가까운 일이나 오로지 그 일만을 좋아해서는 또한 스스로 뜻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동국(東宮)께서는 비록 덕성이 성취되었다 하시더라도 오히려 성학(聖學)에 잠심(潛心)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구함이 마땅할 것이옵나이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고 이르더라도 특히 문사의 육예(六藝)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하물며 만만으로 치도에는 조금도 이(利)가 없는 것이온 데 이에 정신을 연마하시고 생각을 허비하심에 날을 다 하고 때를 옮기시나이까? 실로 현시점에서 학문의 손실됨이 있는 것이옵니다. 신등은 다함께 문묵(文墨)의 말기(末技)를 가지고 상감을 모심에 대죄하옵는 터이므로 마음에 품은 바를 감히 함묵(含默)할 수가 없어 삼가 마음에 있는 말씀을 다아뢰어 우러러 성총(聖總)을 더럽히옵나이다.







육예(六藝)...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옛날 주나라에서 국자(國子)를 교육하는데 이 여섯 가지로써 행했다고 한다. 예는 예절,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말타기, 서는 글자를 쓰는 것, 수는 수학이라는 뜻이다. 언문은 글자로써 육예의 하나인 서(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 최만리 상소문에 대한 세종의 대응(세종실록)




임금이 상소를 보고 최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 음(音)을 사용하고 자(字)를 합한 것이 모두 옛글에 위반된다'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함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은 또한 백성을 편리하게 하지 않는 것이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 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 잡을 것이냐? 또 상소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라 하였으니 내 늙으막에 소일하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 것은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한 전렵(사냥)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또한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여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최만리 등이 대답했다.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音)이 다르다 하나 음(音)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音과 해석을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라 하는 것은 특히 문세(文勢)에 인하여 이 말을 한 것뿐이옵고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결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여 심려하시옵니까?"하다.




임금이 말씀하셨다.

"전번에 김문(金汶)이 이르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하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 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용속한 선비이다."




전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셨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녀,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로 것이다" 하였는데, 정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는 것이다.




임금이 또 하교했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상소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꿔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 등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임금명령)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바꿔 계달한 사유를 국문하여 아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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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黃喜, 1363~1452) 고려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가30세(1392)되던 해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72
운영자 08-07-14
[] 난중일기 누락부분 발견

"하늘과 땅 사이에 원균처럼 망령된 이가 없을 것" 난중일기에서 빠진 32일치의 새로운 내용 밝혀졌다. 편집부
운영자 08-04-03
[] ‘조선통신사의 200여 년 여행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17~19세기 12차례나 일본을 다녀간 조선 왕조 외교사절 통신사의 여로가 2008년 한·일 학계와 문화재 동네의 민감한 화두로 떠오를 조짐이다. 한
운영자 0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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