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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2-04 09:46:266674 
관동군이 소련군에게 참패한 노몬한전투 ( Battle of Khalkhingol River.)
운영자
일반

38년 8월 두만강 하류 장고봉에서의 소련군과 일본군의 충돌은 일단 쌍방이 물러나는 것으로 타협했으나 한낱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양측의 긴장관계는 여전히 지속되었고 이후에도 곳곳에서 소규모 국경충돌이 벌어집니다. 더욱이 일본군은 이를 결코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특히 청일전쟁이래 "불패"라며 한껏 우쭐해 있던 관동군은 "장고봉에서의 후퇴는 조선군의 소극적인 대응탓"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심지어 "국내군인 조선주둔군이 싸웠기에 실패한 것이고 관동군이 했더라면 훌륭하게 해치웠을 것"2이라는 것이 당시 관동군 내부의 인식이었으니 그들의 하늘 높은줄 모르는 오만함과 우월의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했죠.

한편, 중일전쟁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국제 연맹과 서구 열강들이 일본에 대한 제재에 소극적인 것에 실망한 장개석은 소련을 동맹국으로 끌여들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합니다. 남경함락직후인 38년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송자문은 스탈린에게 중일이 공동으로 대일선전포고를 선언하여 일본에 맞설 것을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첫째로 국제연맹이 일본에 대한 제재를 결정하거나, 둘째로 미, 영, 프가 소련과 함께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거나, 셋째로 일본이 소련을 침략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참전할 수 없다, 라고 못 박습니다.


이런 소련의 태도는 장고봉사건이후에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장고봉에서 양측이 격렬하게 충돌했던 7월 30일 공상희는 소비에트 전권대표인 루간츠 오렐스키를 초청하여 재차 중소군사동맹과 대일전쟁 참전을 요청했으나 소련은 9월 8일에야 "NO"라는 답변을 통보합니다.


사실 소련으로서는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은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음에도 소극적이었던 것은 바로 서구 열강들의 견제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소련군이 중일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경우 파시즘국가들의 팽창보다 오히려 소련의 팽창을 더 경계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가 "중국의 볼세비키화"라고 보고 도리어 일본을 원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탈린은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고 체코사태 이전부터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 방공협정에 대항하기 위한 "집단안보체제" 구축을 미, 영, 프에 여러 차례 적극적으로 제안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아예 관심조차 없었고 영, 프는 여전히 소극적이었습니다. 뮌헨회담에서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결국 체코 전체를 합병하자 영, 프는 소련에 대해 이전보다는 좀 더 전향적인 입장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39년 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삼국의 회담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로서 스탈린은 서구 열강이 소련과 반추축 동맹을 맺을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하였고 장개석에게도 "다른 국가들이 공동으로 일본에 대해 무력 제재한다면 소련은 언제라도 함께 하겠지만 소련 단독으로 일본과 전쟁을 할 수는 없다"라고 답변합니다. 즉,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 극동에서 소련의 정책은 "수세적"이었고 일본이 선제공격하지 않는 한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다, 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장고봉사건이나 노몬한전투를 확대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타협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습니다.


일본 대본영은 장고봉사건을 통해 소련이 적극적으로 남하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으나 그럼에도 대소전을 대비해 만주에 지속적으로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습니다. 38년 말 일본 참모본부에서는 이른바 "작전계획 8번"이라는 대소전쟁계획을 수립합니다. 이것은 A안과 B안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A안은 "연해주와 아무르, 자바이칼 지역에서 동시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다"라는 것이었고 B안은 "자바이칼과 외몽골에 대해 병력을 집중하여 장악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약 25개 사단이 필요할 것으로 보았고 39년당시 9개사단에 불과한 군사력으로는 소련에게 명백히 열세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대본영은 대소작전은 43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고 독일의 충분한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대본영의 방침과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대소강경론을 주장하던 관동군은 39년 4월 "소만국경분쟁 처리 요강"을 시달하여 양국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 "자주적인 입장"에서 소련에게 일본이 정한 국경선을 인정토록 하겠다는 것을 방침으로 정합니다. 이렇듯 관동군은 소련의 군사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국경충돌에서 소련군을 압도하여 나아가 소련 동부지역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서부 몽골과 만주국의 경계에 있는 칼킨골(Khakhingol) 강에서의 충돌은 처음에는 단지 우발적인 소규모 분쟁에 불과했지만 "작은 전쟁"으로 비화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현재 몽골공화국 령인 노몬한 서쪽으로 16km떨어진 곳에 칼킨골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일본은 서쪽의 칼킨골강을 국경선이라고 주장한 반면, 소련과 몽골은 동쪽의 노몬한마을을 국경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당시 이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일뿐이고 쌍방이 대규모로 충돌하여 수만 명이 죽거나 다쳐야 할만큼 전략적으로 가치를 가진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명확하지 못한 국경선과 일본의 야심은 그게 어느 장소가 되었건 간에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고 호되게 깨진 연후에야 일본은 자신의 "만용"을 깨닫게 됩니다. (참고로, 구소련시절에 이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고 현재 중국과 몽골 합작으로 유전을 개발하여 시추중입니다. 조사에 따르면 이 일대에 무려 30억톤이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39년 5월 11일 외몽골군 기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가 칼킨골강 동쪽을 도하하여 현지의 만주국 수비대간에 소규모 충돌이 벌어집니다. 현지 수비대가 "외몽골군이 불법월경했다"고 보고하자 제23사단은 5월 12일 아즈마 야조중좌가 지휘하는 아즈마지대(사단수색대, 2개 보병중대, 만주국 기병으로 구성)를 현지에 출동시킵니다. 이들은 3일뒤인 15일에 현장에 도착했는데 이들이 오자 몽골군은 일단 철수하였고 일본군도 귀환합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번에는 소련군이 몽골군과 함께 노몬한에 출동했고 일본군 역시 아즈마지대를 보강하여 제64보병연대장 야마가타 타케미츠대좌가 지휘하는 야마가타지대를 파견하여 쌍방은 노몬한에서 대치하면서 병력을 증강합니다.


일본군은 보병 제64연대 제3대대를 주축으로 2개 포병중대, 만주국 기병 등을 합해 도합 2천명정도였고 산포 3문, 속사포 3문, 92식 경장갑차 1대가 있었습니다. 프이코프대좌가 지휘하는소련군은 제11전차여단 소속의 1개 기계화저격대대, 1개 정찰중대 등 소련군 1,200명과 몽골군 제6기병사단소속 250명 등 1,450명정도로 숫적으로는 열세했으나 대신 BA-6 장갑차 16량을 비롯해 장갑차 39량과 자주포 4문, 대전차포 6문을 보유하고 있어 화력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압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야마가타대좌는 상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숫적 우세를 활용해 이들을 포위섬멸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제3대대 주력을 북쪽에서 공격하고 동쪽과 남쪽에는 만주국기병과 일본군 보병 일부를 배치합니다. 한편, 칼킨골강 동쪽을 도하한 소련군은 강을 등에 지고 반월형의 수비진형으로 병력을 배치하는 한편 서안에 포병을 배치합니다.


공격은 5월 28일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초반에는 일본군이 우세하여 소련-몽골군은 조금씩 뒤로 밀려납니다. 그러나 오후부터 소련군 제36자차화저격사단 제149연대가 증원되었고 이때부터 우세한 기갑전력과 화력으로 일본군을 밀어붙여 29일 저녁 아즈마지대가 전멸했고 아즈마중좌도 전사합니다. 아즈마지대가 전멸하자 야마가타 지대는 후퇴하였고 칼킨골강은 완전히 소련군이 제압함으로서 제1차 노몬한 전투는 소련군의 압승으로 끝납니다.


노몬한에서 야마가타지대가 패퇴했다는 보고를 받은 관동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6월 27일 대본영의 승인도 없이 독단적으로 중폭격기 24기, 경폭격기 6기, 전투기 77기 등 총 107기에 달하는 대규모 항공부대를 출격시켜 외몽고 톰스크 비행장을 폭격하여 큰 피해를 입힙니다. 대본영에서는 천황 히로히토가 직접 나서서 "사태를 확대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동군 사령부의 중급참모들을 주축으로 "자존심 회복"을 외치며 제23사단에 "침략자를 격퇴하라"고 명령합니다.


특히 당시 작전참모인 핫토리 중좌와 쓰지소좌는 선제공격하여 소련군을 철저히 손봐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쓰지는 "현지 부대가 작전을 함에 있어 중앙의 인가를 받을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대본영에서 톰스크 비행장 폭격에 대해 "작전 중지"명령을 내렸음에도 대본영의 전보를 숨기고 과장, 참모장, 군사령관의 결재란에 자신이 "대리"라는 이름을 붙여 멋대로 서명한 후 현지부대에 명령을 하달합니다. 한낱 소좌에 불과한 주제에 명백한 월권이자 명령불복, 직권남용, 공문서위조에 해당되어 군법상 중형에 처할 일이었으나 아무런 문책도 받지 않았습니다. 현대 군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용납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군의 분위기가 이런 것을 "군인의 용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겉보기에만 근대무기를 사용했을뿐 실제로는 여전히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그들은 군인의 용기와 전사의 용기를 구분할 줄 몰랐고 공격은 명령 불복이라도 용납되었으나 후퇴는 명령에 의한 것이라도 "비겁"으로 치부하였습니다. 그것이 당시 일본군, 그 중에서도 특히 관동군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관동군은 현지에 제23사단외에 추가로 제1전차단, 제7사단 보병 제26연대 등을 파견하였고 이중 제1전차단은 당시 일본이 여단급으로 편성한 첫번째 기갑부대이자 유일한 기갑부대이기도 했습니다. 2개 기갑연대(제3연대, 제4연대)로 구성되었고 89식 전차 34대, 97식 전차 4대, 95식 경전차 35대 등 전차, 장갑차 합하여 모두 87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7사단은 관동군의 최강 사단 중 하나였습니다. 즉, 관동군으로서는 노몬한에서 소련을 꺾어보겠다고 자존심을 걸고 히든카드를 꺼낸 셈이었습니다.


노몬한전투를 배후에서 기획하고 지휘했던 쓰지 마사노부는 일본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였으나 이를 악용하여 일본군내에서도 가장 독단적이며 무단으로 월권을 행사하여 군의 기강을 문란하게 만든 대표적인 위인이었습니다. 만주사변을 주도했던 이시하라 간지를 "도사님"이라며 부르며 인생의 스승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노몬한 직전 관동군 작전참모였던 그는 39년 4월 "만소국경분쟁 처리요강"을 입안하였고 소련군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으나 졸렬한 작전으로 참패하자 도리어 현지부대장들의 지휘 잘못이라며 할복을 강요하였습니다. 언변의 달인으로 자칭 "작전의 신"이라고 떠들고 다녔으나 군내에서는 그를 배척하여 "쇼와의 요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근대시대의 군인이라기보다 봉건시대의 음모가나 책략가에 가까운 위인이었습니다. 전범에 해당되는 인물임에도 그는 운좋게 처벌을 면했고 전후 중의원에 당선되어 승승장구했으나 라오스 여행중 실종되어 사망처리 되었습니다. 


사실 노몬한은 철도에서 750km나 떨어져 있는데도 도로망이 매우 열악한 변두리 오지였기에 관동군 참모들은 소련군이 일본군에 대항해 신속하게 대병력을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승산이 있다고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동군의 생각과 달리, 소련은 훨씬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6월 5일 노몬한에 새로운 지휘관이 도착합니다. 당시 벨라루스 군관구 부사령관이었고 2년 후 벌어지는 전쟁에서 소련 제일의 명장이 되는 게오고르 쥬코프대장이었죠. 그는 투하체프스키가 제창한 기계화전 이론의 강력한 신봉자이자 기동전의 달인이었습니다.


게오르기 쥬코프(1896~1974)는 1차대전당시 일개 사병으로 시작하여 후에 원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자 독소전쟁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소련 최고의 명장입니다. 그는 모스크바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독일군을 격퇴하여 소련을 위기에서 구했고 스탈린그라드, 레닌그라드, 베를린공방전까지 주요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난폭한데다 오만하고 자기 과시가 심하여 스탈린의 미움을 샀고 일시 좌천되었다가 스탈린이 죽은 후 다시 복권되었으나 흐루시초프가 군의 축소를 추진하자 격렬하게 대립하여 결국 해임됩니다.


동몽골 국경지대의 제57저격군단 신임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현장에 도착하자말자 병력의 대규모 증원을 요청하였고 3개 소총병사단, 2개 전차 여단, 3개 장갑차 여단, 1개 기관총 여단, 1개 공수 여단과 몽골군 2개 기병사단 등 총병력 5만7천명, 전차 498대, 장갑차 385대, 야포 540문, 항공기 557대를 보유하게 됩니다. 이는 일본군의 전력을 양적으로 완전히 압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맞서는 일본군의 전력은 1개 사단, 1개 전차여단, 1개 독립연대 등 병력 3만에 전차 135대, 항공기 250대, 야포 112문에 불과했습니다. 아직 이때에는 2차대전 걸작 중전차라는 T-34/76이나 KV-1, KV-2와 같은 중전차는 없었고 BT-5, BT-7, T-26와 같은 경전차뿐이었지만 어쨌든 일본군의 89식, 97식에 비해서는 속도, 화력에서 명백한 우위에 있었습니다. 이런데도 관동군 참모들은 적의 전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채 막연히 "별 것 없다"는 식으로 일관했으니 악몽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죠.


노몬한전투당시 소련군의 주력이었던 BT-5 고속전차는 스페인내전과 겨울전쟁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소련은 독일군조차 위압하던 그런 괴물같은 중전차는 없었고 세계 각국의 전차들은 고만고만한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장갑이 얇고 화염병공격에 취약하여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의 "몰로토프 칵테일"에게 호되게 당했습니다. 노몬한에서도 일본군의 중기관총에도 쉽게 관통당했고 보병의 육탄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으나 대신 속도가 빠르고 45mm대전차포의 관통력은 500m에서 60mm, 1km에서도 38mm에 달하여 일본군 전차들과의 전차전에서는 확실한 우위를 보였습니다. 일본군의 단포신 주포는 관통력은 물론 명중률이 형편없어 아주 근거리에서만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었습니다. 


소련군이 대거 증원되고 있음에도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채 국경지대에 병력을 집결시킨 일본군은 7월 1일 선제공격에 나섭니다. 일본군의 계획은 우선 공병대가 칼킨골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전차부대를 앞세워 도하 후 우회하여 소련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다음으로 전차부대가 이들의 후방을 강타하여 괴멸시키고 남하하여 완전히 섬멸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병대의 자재와 장비가 빈약하여 다리가 매우 부실했고 보병만 건너고 전차는 도하하지 못한 채 강 건너편에 기다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로 인해 병참선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으니 시작단계부터 그들이 얼마나 졸속으로 추진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었죠. 반면 주코프는 현지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여 2,300대의 트럭을 투입해 병참선을 확보하였고 탄약과 식량, 연료 등 5만2천톤에 달하는 물자를 비축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제23사단 부사단장 코바야시 코우이치 소장이 지휘하에 제71보병연대, 제72보병연대와 자동차화보병 제26연대, 포병대, 공병대 등이 차례로 강을 도하하였고 강 동안에는 제1기갑단을 비롯해 제28보병연대,제64보병연대 등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병력은 도합 1만5천정도였습니다.


이에 대항해 소련군은 칼킨골 강 동쪽에 제149자동차화보병연대와 제9기계화연대를 배치하고 있었고 쥬코프는 일본군의 병참선이 취약하고 기갑부대가 도하하지 못한 것을 감안해 강을 도하한 일본군 보병부대를 압도적인 기갑부대로 포위섬멸키로 하고 제7기계화여단, 제11전차여단, 제24차량화연대가 현지로 출동합니다.


강을 도하한 일본군은 몽골군 제6기병사단을 손쉽게 격퇴했으나 곧 소련군 기갑부대와 마주쳤고 이들은 육탄돌격으로 보병없이 단독으로 돌격하는 소련 전차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그들 역시 막대한 사상자를 내어 결국 3일 저녁 제23사단은 후퇴합니다. 또한 강을 도하하지 못한 채 동안에서 대기중이던 기갑부대가 87대의 전차를 동원해 야습을 시도했으나 대참패를 당했고 제3기갑연대장이 전사합니다. 점차 우세를 점한 소련군은 6일부터 반격을 개시하여 일본군을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고 있었으나 일본 정찰기는 오히려 "소련군이 후퇴중"이라고 보고합니다.


칼킨골강 동안으로 후퇴한 제23사단은 병력을 재편한 후 기갑부대와 화력의 열세를 보병이 숫적 우세와 야습을 통한 보병의 착검돌격으로 극복하려고 소련군 제149자동차화저격연대를 공격했으나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방어선을 돌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포병화력을 증강하여 82문의 야포로 7월 23일 재차 총공격을 감행했음에도 포탄의 부족과 지형적 불리함, 게다가 소련군 역시 포병전력을 증강했기에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전병력의 1/3을 상실합니다. 결국 일본군은 칼킨골강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동쪽의 홀스텐강까지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제2차 노몬한 전투 역시 일본군의 완패로 끝납니다.


그럼에도 관동군은 제3차 공격을 준비하였고 노몬한 일대의 병력을 재편하여 제6군(사령관 : 오기스 릿페이중장)을 창설합니다. 소련군 역시 제57저격군단을 제1집단군으로 승격합니다.


오기스 릿페이 중장(1884~1949)은 제13사단장에서 신임 제6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몬한의 패배로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다음해인 1940년 1월 강제 예편됩니다. 일종의 희생양이 된 셈이죠.


전선은 일시적으로 교착상태가 되었으나, 관동군은 8월 24일 제3차 공격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도로의 열악함으로 병력과 물자의 증원이 어려워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오히려 숫적으로 2배 이상 압도적인 우세를 점한 소련군이 8월 20일 선제공격을 개시합니다. 일본군은 얇고 길게 일렬로 배치된 데다 예비대도 없어 종심방어가 불가능하였습니다. 쥬코프는 정면에서 보병이, 양익에서 기갑부대가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삼면에서 포위섬멸키로 합니다. 보병과 포병에서 두배, 전차 498대, 장갑차 346대 등 압도적인 전력으로 공격을 시작하여 공중폭격과 포격, 기갑전력으로 홀스텐강에 포진한 일본군을 전전선에 걸쳐 강타합니다.


가장 먼저 북쪽에서 우익을 맡고 있던 만주군이 소련군의 공격을 받지 말자 도주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후방의 고지에 있던 일본군 제23사단 수색대가 고립되어 이들 역시 24일까지 죄다 도주합니다. 쥬코프는 즉시 예비대를 투입해 북쪽에서 일본군의 배후로 우회시켰고 다음날인 21일 남쪽에서 기갑부대가 일본군의 배후로 진출함으로서 양익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포위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후방에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제6군 사령부는 23일에야 노몬한 인근으로 전진하였고 제26, 제71, 제72 보병연대를 동원해 8월 24일부터 남쪽에서 반격할 계획을 수립했으나 졸속적인 계획과 준비부족으로 실제 반격에 나설 수 있엇던 것은 제72보병연대뿐이었고 포병지원도 없이 무작정 시작된 반격은 완전히 실패하여 제72보병연대는 완전히 괴멸당합니다.


더욱이 제6군의 무리한 반격작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방어선은 더욱 취약해졌고 소련군이 일본군의 배후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서 제23사단은 포위된 데다 일본군 포병대도 전멸당합니다. 제23사단은 26일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재차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합니다. 소련군은 이들에 대해 투항을 권고했고 일본군은 거부합니다. 제6군은 고립된 상태에서 각 부대는 개별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차량을 모두 상실했기에 도보로 탈출해야 했고 따라서 탈출에 성공한 것은 극소수였습니다. 소련군은 8월 31일 포위망을 압축한후 일본군 잔존부대를 완전히 섬멸함으로서 노몬한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럼에도 관동군은 병력을 증원하여 재차 복수전을 준비했으나 소련군의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라 반격은 어떻게 보더라도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대본영에서 9월 3일 관동군에게 노몬한에서의 작전을 중지할 것을 명령함으로서 관동군도 더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5월부터 8월까지의 전투에서 쌍방의 피해는 일본군이 전사 8,440명, 부상 8,766명이었고(일설에는 전사자만 1만8천명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음) 소련군도 전사 7,974명, 부상 15,251명에 달했습니다. 제6군의 손실은 전체 참전병력의 32%에 달했는데 특히 주력이었던 제23사단은 80% 가까운 손실을 입었으며 부사단장인 고바야시 소장은 중상, 보병 제 71연대장인 모리타 대좌, 야포병 제 13연대장인 이세 대좌, 보병 제 71연대장 대리이던 히가시 중좌가 전사하고 보병 제 64연대장인 야마가타 다케미츠 대좌 및 보병 제 72연대장인 사카이 대좌, 사단수색대장인 이나오 중좌가 자결합니다.


※ 노몬한에서 쌍방의 피해에 대한 신뢰성 있는 자료는 아직도 없으나, 소련군은 숫적으로나 화력에서 월등해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을 낸 것은 병사들의 훈련이 상당히 미숙했고 인해전술식 교리,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전과 확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있지만, 쥬코프의 지휘방식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매우 과감하고 결단력과 단호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서구 기준에서 본다면 그는 스탈린만큼 비정하고 난폭했으며 승리를 위해서라면 부하들의 희생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시로 구설수에 올랐던 패튼조차 그에게 비한다면 아주 얌전한 편에 속했습니다.


손실만 따진다면 양쪽 모두 거의 대등했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소련군의 명백한 승리였고 일본군은 노몬한 동쪽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소련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350량에 달하는 전차를 상실하였는데 특히 장갑이 빈약한 소련제 전차들은 일본군 보병의 화염병공격에 심각한 취약성을 드러냈으며 당시 소련군의 전차교리상 무전기가 지휘차량에만 장착되어 있고 전차장의 손짓에 의존한다는 점을 이용해 일본군은 지휘차량만을 집중적으로 노려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일본은 약 30대의 전차만을 상실했는데 이는 전차손실이 두려워 전멸되기 전에 전장에서 재빨리 철수시켰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중전에서는 일본기 손실 180대에 소련기의 손실은 그 두배에 달하는 350대에 달하였는데 이는 기체의 성능과 조종사의 실력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반에는 소련이 열세했으나 후반에는 항공기를 대거 증원하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베테랑 조종사들을 투입하면서 제공권을 확보합니다.


노몬한의 패배에 대해 흔히 "鐵과 肉의 대결"이라며 소련군의 압도적인 기갑부대에 보병으로 맞선 관동군이 패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기갑부대의 역할보다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관동군의 오판과 상대에 대한 경시, 충분한 준비 없는 성급한 공격때문이었습니다. 작전을 주도했던 쓰지소좌는 "적이 설마 그와 같은 병력을 외몽고의 초원에 전개할 수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라며 변명합니다. 한편, 쥬코프의 소련군은 무리한 보병 돌격과 기갑-보병-포병 합동전술의 미숙함으로 많은 희생을 치루는 등 전술적인 문제는 있었으나 숫적으로 상대를 완전히 압도했고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격퇴한후 삼면에서 포위하여 섬멸하였습니다.


이 패배로 우에다 관동군 사령관, 이소타니 참모장이 파면되었고 제6군사령관 오기스중장과 제23사단장 고마츠바라중장 역시 강제예편됩니다. 그러나 정작 사건을 주도하고 독단적으로 월권행동을 했던 핫토리와 쓰지는 문책은 커녕 오히려 동경의 참모본부로 보직이동되어 대미개전의 주역이 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한창 노몬한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독소불가침조약(이른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체결이었습니다. 8월초만 해도 영, 프와의 대독공동전선을 구축하려고 온갖 노력을 했던 소련이 바로 10일뒤에는 180도 뒤집어 독일과 손을 잡은 것은 그야말로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독일 외무장관인 리벤트로프에게 "독일이 나서서 일본과의 중재를 해달라"를 요구하였고 독일도 이에 찬성하고 베를린에 있는 일본대사를 통해 노몬한에서의 분쟁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21 일본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노몬한에서 병력을 철수시켰고 9월 15일 양측은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서 만주국 건국이래 계속되었던 국경에서의 무력충돌은 중단됩니다.


사실 일본은 노몬한에서의 충돌을 통해 소련군의 강력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러일전쟁 당시의 무기력한 제정러시아군이 아니라 전차와 중포 등 막강한 화력과 기계화장비를 갖춘 현대식 군대였습니다. 노몬한에서 소련은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더 확대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명백히 열세임을 깨달은 일본으로서는 정전협정에서 소련이 주장하는 국경선을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노에 수상은 일본주재 독일 대사와의 면담에서 "우리는 2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라며 군사적 열세를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리고 대소전 대신 남방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였고 이를 위해서 40년 7월 2일 소련에 일소불가침조약의 체결을 제의합니다.


일본은 기왕 소련과 조약을 맺는다면 독소불가침조약과 유사한 형태의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했는데, 이는 독소불가침조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일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던 스탈린으로서도 나쁠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러일전쟁당시 일본에게 빼앗겼던 사할린에 대해 석탄과 석유 체굴권을 소련에게 넘기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고 따라서 불가침조약은 결렬되었죠.


한편, 40년 9월 27일에 베를린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 동맹이 체결됩니다. 3국동맹의 주요내용은 독, 이, 일 삼국이 각각 유럽과 아시아에서 주도적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고 3국중 하나가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서로 원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외무상인 마쓰오카는 여기에 소련까지 넣어 "4국 동맹"이라는 아이디어를 냈고 10월 30일 소련에 공식적으로 제안합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상호 불가침 조약의 체결

2. 소련은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은 소련이 동유럽에서 획득한 영토에 대해 승인한다

3. 소련은 장개석정권에 대한 지지와 원조를 중단한다

4. 소련은 내몽고와 화북, 중국 서북지역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고 일본은 외몽골과 신장에서 소련의 이익을 보장한다

5. 소련은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 점령을 인정하고 일본은 소련의 아프간, 이란, 인도의 점령을 인정한다

6.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소련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4국 동맹을 체결한다


11월 18일 소련은 이에 대한 답변을 보냈는데 "불가침조약의 체결을 위해서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강탈한 남사할린과 쿠릴열도를 반환해야만 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요구를 일본이 받아들일리가 없으므로 사실상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 역시 소련에게 4국동맹의 체결을 제안하고 4개국이 연합하여 세계를 4등분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소련은 4국동맹의 선결조건으로 "핀란드에서 독일군의 철수와 불가리아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 인정" 등 독일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내겁니다.


스탈린은 왜 4국동맹의 제안을 거부했는가?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후 독일과의 관계 개선에 많은 노력을 했고 41년 6월 독일이 일방적으로 조약을 깨고 기습적인 공격을 개시할 때까지도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86만 5천톤의 석유와 150만톤의 곡물, 64만 8천톤의 목재 등 막대한 자원과 군사 원조를 제공하였고 독일 해군을 위해 기지를 제공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독일과 소련이 함께라면 우리는 천하무적일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하였습니다.27


사실 독일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스탈린은 어차피 "4국동맹"이라는 것은 서로간의 모순 때문에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이로 인해 미, 영, 프 등 서구열강들과의 관계까지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따라서 거부한 것이었죠. 이는 그의 편집광적인 성격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그토록 불신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히틀러가 막상 공격준비를 하자 눈앞의 닥쳐온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는 모순을 범했고 그로 인해 엄청난 댓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어쨌든 41년 4월 13일 일본과 소련은 불가침조약 대신 5년 기한의 중립조약에 서명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히틀러의 "바바롯사작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이를 주도한 마쓰오카조차 "독일이 소련과 전쟁을 할 줄 알았다면 중립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일본은 이미 남방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결정하고 있었고 중립조약으로 "북방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 역시 중립조약 덕분에 독일이 침공하자 70만에 달하는 극동군을 서쪽으로 돌릴 수 있었고 이들은 41년 12월 모스크바를 함락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양측의 전쟁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45년 8월에서야 다시 시작됩니다.





[출처] 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22화 < 노몬한 전투, 관동군 불곰에게 참패하다 > |작성자 욱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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