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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이란 무엇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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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이란 무엇인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국은 아직도 정신적인 식민지

식민사관을 연구하다 보면 ‘대한민국은 과연 독립국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외형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엇지만 정시까지 해방되었는지를 묻게 된다. 3년 간의 미군정을 거쳐서 1948년 8월 15일 한국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친일청산에 실패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조선총독부가 만든 역사관이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관이란 한마디로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을 영구히 노예로 만드는 식민사관을 만들었다. 식민사관은 일본인들에게는 주인의 사관일지 몰라도 한국인들에게는 노예사관이다. 식민사관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이란성 쌍둥이다. 그런데 광복 71주년이 넘은 현재 까지도 이런 노예사관이 득세하고 있고, 이를 국가기관들까지 나서서 옹호하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극우파의 역사왜곡에 맞서는 이론을 연구하라고 실럽한 국가기관이 동북아역사재단이다. 2006년에 설립되었지만 2004년에 설립된 고구려연구재단까지 합치면 10년이 넘었다. 그간 들어간 예산만 3천여억원 가까이 될 것이다. 그 많은 예산을 쓰고서도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책 한 권 제대로 낸 것이 없다. 거꾸로 동북공정을 옹호하는 책들은 여러 권 냈다. 두 사례만 들어보자. 한 사례는 동북아역사재단이 2007년부터 하바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 대한민국 국고 10억원을 상납해서 시행한 ‘고대한국(Early Korea) 프로잭트‘ 라는 것이 있다. 또 한 사례는 대한민국 국고 45억 원을 들여서 만든 ’동북아역사지도‘라는 사업이다.

먼저 ‘고대한국(Early Korea) 프로젝트’는 한국고대사를 6권의 영문서적으로 간행하는 것인데 “서구학계에 한국한계의 한국고대사의 연구성과를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 명분이다. 이 일환으로 2013년 12월에 발간한 『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한국고대사 속의 한사군)』과 2010년 발간한 『The Samhan period in Korean History(한국역사 속의 삼한시기)』는 조선총독부나 아베내각, 또는 중국 국무원 산하 동북공정 영도소조에서 간행했다고 하면 걸맞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일반적인 대한민국 국민들이 상식이라면 한국고대사의 첫 장면은 당연히 ‘고조선’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은 지워버리고 중국 한(漢)나라의 식민지라는 한사군으로 대체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주장한 것처럼 한국사는 외국의 식민지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한사군의 위치를 시종 북한강역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는 정체성론 따위의 여러 변종 식민사관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핵심은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고대사는 순수 고대사가 아니라 현대사의 영역이며 지금도 한중일 삼국이 치열하게 싸우는 역사전쟁의 최전신이다. 무원 김교헌,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위당 정인보 선생 등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이 모두 역사에 집중했던 것은 한국 고대사가 순수 고대사가 아니라 일제와 싸우는 현대사 역사전쟁의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이 일제가 빼앗은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전쟁일뿐만 아니라 일제와 역사해석권을 둘러싼 역사전쟁었던 가닭이 여기에 있다.

2. 한사군 한반도설은 논리파탄에 불과하다.

일제가 만든 고대사는 크게 두 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는 ‘한사군 한반도설’이고 다른 하나는 ‘임나일본부설’인데, 임나일본부설은『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과 한 몸이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대한민국 국민세금으로 진행한 ‘고대한국(Early Korea) 프로젝트’와 ‘동북아역사지도’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와 중국 동북공정 영조소조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유사시 중국이 북한 강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킨 후 북한은 원래 중국의 역사강역이었다고 주장해도 반박할 논리가 없게 된다. 대한민국의 역사관련 국가기관이 그렇게 서술했지 않느냐고 말하면 뭐라고 반박하겠는가?

실제로 동북아역사재단은 그런 행위를 자행했다. 2012년 중국은 북한 강역 전체가 한때 자신들의 역사강역이었다는 내용의 문건을 미국 상원 의회조사국에 보냈다. ‘중국과 조선(북한) 사이의 강역 변경에 관하여’라는 문건인데, 여러 건의 지도가 붙어있다. 지도는 일제식민사관을 베낀 것이다. 중국이 동남아, 동북아 할 것 없이 여기저기에서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던 미국상원은 이 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견해를 물었다. 당시 이명박정부는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동북아여사지도’의 책임자급 인물, 외교부 고위관료를 미상원에 파견해 사실상 중국의 주장이 옳다는 내용의 자료를 전달하고 왔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은 ‘고대한국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간된『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한국고대사 속의 한사군)』에서 한사군을 한반도 내로 가두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발음 표기에 있어서도 낙랑(樂浪)을 우리 식 발음대로 낙랑(Laklang)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러랑(Lelang)이라고 표기한 것을 비롯해서 모든 지명을 중국발음으로 표기했다. 북한지역은 중국의 역사 강역이라는 뜻으로 담고 있다. 심지어 조선총독부 산하 식민사학자들끼지 견해가 다른 부분들까지 그대로 서술했다. 진번군에 대해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진번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이른바 ‘북부설(평안북도)’를 주장했고 아미니시 류〔今西龍〕의 그보다 남부에 있었다는 ‘남부설(황해도)’을 주장했는데, 이 두 주장을 그대로 실어 놓았다. 자신들이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이라는 생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동북아역사지도’도 마찬가지로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을 모두 한반도 내로 비정했다. 문제는 이런 주장들이 사료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서기 108년 세워진 한사군의 위치를 찾으려면 한사군 설치 당시 생존했던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漢書)』를 비롯해서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진서(晉書)』처럼 한사군에 대해 쓰고 있는 고대 사서들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3. 낙랑군 조선현을 어디인가?

일제 식민사관과 현재의 한국 식민사관은 모두 ‘기자조선="위만조선=낙랑군’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기자조선의 도읍지가 곧 위만조선의 도읍지고 여기가 낙랑군 조선현인데 현재 위치는 대동강 남쪽의 대동면 토성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작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한나라의 정사인 『한서•지리지』의 역사지리 인식과는 다른 곳이라고 나누어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것은 ‘낙랑군’ 소속의 조선현이고, 위만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것은 ‘요동군’ 소속의 험독현(險瀆縣)으로 달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한서•지리지』낙랑군 기사를 보자.

「낙랑군, 한무제 원봉 3년에 열었다. 왕망은 낙선군(樂善君)이라고 불렀는데, 유주(幽州)에 속해있다. 호수는 62,812호이고, 인구는 406,748 명이다. 운장(雲鄣)이 있고, 25개 속현이 있다. 응소(應劭)는 조선현(朝鮮縣)이 주무왕에 의해 기자가 봉해진 곳이라고 말했다.」

기자조선의 도읍지에 낙랑군 조선현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한사군 설치 당시부터 『사기』및『한서』의 여러 주석자들을 비롯해서 당나라 때까지 여러 학자들이 일치된 견해다. 그리고 위만조선의 수도 자리에 세운 것은 요동군 험독현이라는 것이다. 『한서•지리지』요동군 험독현에 대한 설명을 보자.

「요동군 험독현 : 응소가 ‘조선왕 위만의 도습니다. 물이 험한데 의지했음으로 험독(險瀆)이라고 불렀다.’라고 했다. 안사고(顏師古)는 ‘신찬(臣瓚)의 설이 옳다고’고 했다(『한서•지리지』요동군 험독현)

응소는 2세기 후반경의 학자이니 위만조선의 자리에 세운 것이 낙랑군이라는 식민사학의 견해대로라면 험독현이 대동강 남쪽에 있을 때 생존했던 사람이다. 그가 위만조선의 도읍자리에 세운 험독현은 한반도가 아니라 고대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운 험독현이 요동군 소속이라는 『한서•지리지』의 이 한 가지 기술만으로도 ‘한사군 한반도설’은 역사적, 학문적으로 설 곳이 없는 것이다. 『한서•지리지』의 이 역사지리 지식은 2세기 때 인물은 응소를 비롯해서 당나라 때 학자인 안사고까지 모든 중국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다라서 ‘기자조선="위만조선=낙랑군=평양’이라는" 지금껏 이어지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1차사료에 대한 기초적 검증도 거치지 않은 무지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기자조선 도읍지에 세운 낙랑군 조선현이 지금의 대동강 남쪽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자가 평양에 온 적이 없었던 것처럼 요동군은 물론 낙랑군도 고대 요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서•광무제본기』건무 6년(서기 30년) 조에 낙랑인 왕조(王調)에 대한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처음에 낙랑인 왕조가 낙랑군을 근거로 복종하지 않았다.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가을 왕준(王遵)이 이를 공격하자 낙랑군의 관리들이 왕조를 죽이고 항복했다. (『후한서•광무제본기』건무 6년)

낙랑인 왕조가 후한에 저항한 이야기를 실으면서“ 낙랑군도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서기 30년의 상활을 묘사한 기록이다. 313년에 낙랑군이 요동으로 이동했다는 이른바 교군(僑郡)이니 교치(僑置)니 하는 변종 이론이 근거로 삼은 4세기 무렵보다 300년 이상 앞선 30년에도 낙랑군은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후한서』의 지리 인식은 『후한서•군국지』에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후한서•군국지』낙랑군조에는 조선현과 함께 열구현(列口縣)이 나온다. 열구현도 조선현처럼 낙랑군의 속현인데 열구현에 대한 주석에서 곽박(郭璞)은 “산해경에서 주석하기를 ‘열은 강의 이름이다. 열수는 요동에 있다.’”라고 라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 열구현은 열수가 있어서 생긴 지명인데 열수는 요동에 있다는 것이다. 3세기 경 생존했던 서진의 학자 곽박(276-324)이 열수는 요동에 있다고 말하는데 한국의 식민사학계는 열수를 대동강, 또는 한강이라고 막무가내로 우기로 있는 것이다. 『진서•지리지』는 낙랑군 조선현에 대해서 “주(周)나라에서 기자를 봉한 것이다.”라고 『한서•지리지』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중국 사료로 비교적 정확하게 비정할 수 있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는 북송의 낙사(樂史 : 930-1007)가 편찬했는데, 노룡현이 낙랑군 조선현이라는 인식은 이후 수많은 중국의 학자들이 일관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내용이다. 명나라 때 편찬한 『일지록(日知錄)』로 마찬가지다.

「『일통지(一統志)』에서, “조선성이 영평부(永平府)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라고 말했다. 곧 이는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 지금의 영평부라는 뜻이다.」

일지록(日知錄)』은 명나라 때 학자 고염무(顧炎武 : 1613-1682)가 지은 역사지리서다. 이때의 영평부는 현재 하북성 노룡현을 뜻하는데, 그가 인용한 일통지(一統志)』는 13세기 작성된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를 뜻할 것이다. 여기에도 하북성 노룡현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고 기록했다는 뜻이다.

다음은 청나라 고조우(顧祖禹 : 1631-1692년)가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를 보자. 『독사방여기요』의 영평부 조는 지금의 하북성 노령현의 역대 변천 사실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노룡현 신창성(영평부의 치소다.)은 수나라 때 노룡현으로 개칭했다. 또 조선성이 있는데 영평부 북쪽 40리이고,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

313년 모용씨가 낙랑군 1천 가구를 가지고 만든 낙랑군이 아니라 “한나라 때의 낙랑군 속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대동강 남쪽 대동면 토성리가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에 있었다. 이것이 낙랑군 조선현 설치 당부터 있었던 중국인들의 인식이다. 『사기』,『한서』주석자들의 생각이 그랬고, 그 이후의 모든 중국 역사지리학자들의 생각이 그랬다.

4. 요동군 험독현은 어디인가?

그럼 위만의 도읍지에 세운 요동군 험독현은 어디일까? 먼저 요동군 소속이니 한반도 내에 있을 수 없다. 이 부분에서는 동북공정을 수행하는 중국학자들이 한국이나 일본 식민사학자들보다 양심적이다. 요동군 험독현도 평양 일대라고 막무가내로 우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북공정 인식을 닮고 있는 담기양(譚其驤) 주편(主編)의 『중국역사지도집』제2권 27-28쪽에 ‘유주자사부’가 있다. 한나라 때 유주자사가 다스리던 행정구역을 그린 지도다. 이 도엽은 낙랑군 조선현과 요동군 험독현을 모두 표기하고 있다. 낙랑군 조선현은 일제 식민사학의 견해에 따라 대동강 남쪽으로 표시해놓았지만 요동군 험독현은 지금의 요하부근으로 표시해 놓았다. 『한서∙지리지』에서 조선현을 낙랑군, 험독현을 요동군 관할로 표기했기 때문에 이를 막무가내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지도집』에 대한 문헌설명서가 『석문회편(釋文匯編)』인데 내용 중 『동북권(東北卷)』이 만주지방의 지도를 왜 그렇게 그렸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의 제1장 『양한∙위진시기』의 요동군 편에는 험독현에 관한 기사가 있다. 이 구절은 중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동북공정 차원에서 역사왜곡을 하더라도 어디에선가는 그 모순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 험독은 후한 때 요동속국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요동속국에 소속된 각 현은 모두 요하 서쪽에 있었는데, 험독 한 현만 조선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험독과 왕험성은 두 개 지방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석문회편∙동북권』)

여기에서 문명하게, 위만조선의 수도 자리에 세운 험독현이 ‘조선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를 스스로 파탄 낸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중국에서도 위만조선의 수도 자리에 세운 험독현이 ‘조선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조선반도에 있다.’라고 우기는 형국이다. 『중국역사지도집』은 험독과 왕섬성을 두 개 지방에 있었다고 호도하고 있지만 이는 지도 제작자들이 내심으로는 요동군과 낙랑군이 고대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그들은 만주지역은 물론 미래 유사시 북한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염두에 두고 『중국역사지도집』을 만든 것이다.

『중국역사지도집』제2권 『진한(秦漢)』편은 요동속국에 속해 있던 험독현의 위치를 지금의 요녕성 안산시(鞍山市) 관할의 태안현(台安縣) 동남쪽 20리 의 손성자(孫城子) 지역으로 명기하고 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지금의 요녕성 안산시 태안현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서 아무리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왜곡에 나서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모순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고대사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역사왜곡에 나선 이래 지금의 중국 동북공정이 말해준 것처럼 치열한 역사전댕의 무대가 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 사실의 인식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역사주권과 미래의 영토주권과도 관련되 중차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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