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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2:45:045184 
제89회. 馬陵道死(마릉도사) 商鞅車裂(상앙거열)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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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89회 馬陵道死 商鞅車裂(마릉도사 상앙거열)

마릉의 길목에서 만전(萬箭) 하에 죽은 방연과

함양성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에 처해진 상앙.

1. 溺水援手(익수원수)

- 물에 빠진 사람은 익사하기 직전에 구해라. -

한편 방연은 위나라의 태자 신(申)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 길에 올랐다. 위나라 군사들의 행렬이 외황(外黃)①을 지날 때 몸에 포의를 걸친 서생(徐生)이란 사람이 찾아와 태자신에게 접견을 청했다. 태자가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 부족한 사람에게 무슨 가르침을 주려고 찾아오셨습니까?」

「태자님의 이번 출정 길은 한나라를 공격해서가 아닙니까? 신에게는 백전백승의 계책이 있는데 태자께서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요!」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태자님의 부가 위나라 보다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그 지위는 위왕의 자리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태자께서 스스로 장수가 되어 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고 있는데 다행히 싸움에서 이기게 되더라도 그 부는 위나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지위는 위왕의 자리를 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싸움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군사를 거두신다면 싸움에서 패한 죄도 받지 않게 되고 또한 위왕의 자리를 이어 받아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신이 소위 말하는 백전백승의 계책입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오늘로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회군하겠습니다.」

「태자께서는 비록 저의 말을 옳다고 생각하시지만 결코 군사를 철수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한 사람이 국을 끓이게 되면 여러 사람이 국물을 마시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태자께서 끓인 국물을 마시려고 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 태자께서 회군하려고 한다 해도 그 말을 따르는 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서생이 태자에게 인사를 올리고 물러갔다. 태자가 영을 발하여 회군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방연이 와서 태자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우리 위나라의 모든 군사들을 내어 태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적군과 싸워보기도 전에 갑자기 철수한다면 싸움에 진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어서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하고 하는 회군을 여러 장수들도 역시 원하지 않았다. 태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못하고 방연 이하 여러 장군들의 의견을 따라 앞으로 진격하여 곧바로 한나라 도성인 신정성에 당도했다.

위나라의 침략을 받게 된 한소후는 사태의 급함을 제나라에 고하고 군사를 내어 도와주기를 청했다. 제선왕이 제나라의 모든 군신들을 조정에 불러서 대책을 상의했다. 제선왕이 물었다.

「한나라를 구하는 것과 구하지 않는 것 중 어느 편이 제나라에 이익이 되겠는가?」

상국 추기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한과 위가 서로 합쳐지면 이것은 이웃 나라의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기와 전영이 같이 말했다.

「위나라가 한나라를 병합하게 되면 증강된 군사력으로 필시 제나라에 화를 끼치게 됩니다. 따라서 한나라를 구하여 그 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손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여러 신하들이 말을 듣고만 있었다. 선왕이 손빈을 향해 말했다.

「군사께서는 어찌하여 한 마디도 없으십니까? 한나라를 구하는 것과 구하지 않은 것 중에 어느 편이 우리 제나라에 이롭겠습니까?」

「무릇 위나라는 스스로 그 국세가 강성함을 믿고 지난번에는 조나라를 공격하였고 이번에는 한나라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위나라는 잠시도 우리 제나라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한나라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한나라를 위나라에 주어 위나라를 살찌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한나라를 구하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한나라에 대한 위나라의 공격이 지금 시작되었음으로 한나라는 아직 대항할 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미리 구원군을 보낸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한나라를 대신해서 위나라의 병화를 맞이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안전함을 즐기게 되는 상황이 되는 반면에, 우리는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그들이 받아야할 위험을 대신하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한나라를 구원하자고 하는 사람들의 말도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대왕을 위해 한 가지 계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은 한나라를 반드시 구해준다고 사자에가 말하여 한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십시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병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온 힘을 기우려 위나라의 공격에 맞서 싸우게 되고, 위나라도 역시 있는 힘을 다하여 한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나라가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서히 군사를 발하여 지칠대로 지친 위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여 한나라를 구원한다면 작은 힘으로 큰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어찌 앞서의 두 가지 방책보다 못하다 하겠습니까?」

제선왕이 박수를 치며 손빈의 계책을 치하하고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신 계책입니다.」

제선왕은 손빈의 말을 쫓아 구원을 청하러 온 한나라의 사자에게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허락하면서 말했다.

「우리 제나라는 조석지간에 군사를 수습하여 한나라를 구원하겠소!」

제나라에서 돌아온 사자의 보고를 받은 한소후는 크게 기뻐하며 온 나라의 힘을 기우려 위나라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어서 벌어진 대여섯 번의 싸움에서 한나라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자 한소후는 다시 사자를 제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독촉했다. 제나라는 다시 전기를 대장으로, 부장에는 전영을, 그리고 손빈은 군사로 삼아 병거 500승을 이끌고 출병하여 한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전기가 다시 한나라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자 손빈이 말했다.

「한나라로 진격하면 안 됩니다. 옛날에 우리가 조나라를 구원하려고 했을 때 조나라로 직접 진격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한나라를 구원하려고 하면서 어찌하여 한나라로 직접 진격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군사께서는 어디로 진격하려고 합니까?」

「무릇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급소를 쳐야만 풀어지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취할 계책은 오로지 위나라 도성으로 곧바로 진격하는 방법뿐입니다.」

전기가 손빈의 계책을 따라 위나라 땅을 향해 진군 명령을 내렸다.

방연이 한나라 군사들을 계속해서 파하고 이어서 한나라의 새로운 도성인 신정성을 향해 진격하려는 순간에 갑자기 본국에서 급보를 받았다.

「제나라 군사들이 또다시 위나라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방원수는 속히 한나라에서 본국으로 회군하여 제나라 군사들의 침략으로부터 도성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 減竈之計(감조지계)

- 아궁이의 수를 줄여 위군을 유인하다. -

방연이 급보를 읽어보고 크게 놀라 즉시 영을 발하여 한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위나라 본국으로 향해 회군 길에 올랐다. 한나라 군사들은 방연이 이끄는 위나라 군사들의 뒤를 추격하지 않았다. 조만간에 방연이 군사를 이끌고 제군의 진영으로 진격해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던 손빈이 전기에게 말했다.

「삼진의 군사들은 평소에 용맹하여 우리 제나라 군사들이 겁이 많다고 얕보아 왔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자는 그 기세를 자기에게 이롭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병법에 말하기를 ‘백 리를 추격하여 승리를 구하려고 하는 군사들은 그 상장을 잃게 되고 오십 리를 추격하여 승리를 취하려는 군사들은 그 군사 반만이 목적지에 당도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제나라 군사들은 멀리서 와서 위나라 영토에 들어섰는데 마땅히 우리의 군세가 약하다고 적을 속여 유인한 후에 적을 파해야 합니다.」

「어떻게 적군을 유인합니까?」

「오늘은 군사들이 취사할 때 10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고 다음날부터는 계속해서 아궁이의 숫자를 줄여나가면 적군은 우리의 아궁이 숫자가 날이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고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위나라 군사들은 필시 우리 군사들이 싸움에 겁을 먹고 절반 이상이 도망갔다고 생각하게 되면 군공을 탐한 위나라 군사들이 쉬지 않고 달려 우리의 뒤를 추격해 오면서 필시 우리를 깔보게 되어 교만해 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뒤를 쉬지 않고 추격해 온 위나라 군사들은 지치게 되어 결국 우리의 계책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전기가 손빈의 계책을 따랐다.

한편 방연이 거느린 군사들이 서남쪽을 바라보고 행군하다가 이윽고 한나라의 도성인 신정성에 당도할 즈음에 제나라 군사들이 철수시작하자, 그가 바야흐로 공을 세우려고 하는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그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이윽고 방연의 군사들이 제군이 진영을 세우고 주둔했던 곳에 당도했으나 그때는 제나라 군사들은 이미 모두 물러간 뒤였다. 제나라 군사들이 주둔했던 진영지를 살펴본 방연은 그 땅이 매우 넓어 사람을 시켜 진영지의 아궁이 숫자를 세어보게 했는데 물경 10만 개에 이르렀다. 방연이 놀라 말했다.

「제나라의 병사들의 숫자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가볍게 대하면 낭패를 당하겠구나!」

방연이 제나라 군사들의 뒤를 추격하다가 다음날이 되어 또다시 제군이 전날 묵었던 진영지에 당도했다. 방연이 다시 사람을 시켜 아궁이 숫자를 세어보게 했다. 아궁이의 숫자는 5만으로 줄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아궁이의 숫자가 3만이었다. 방연이 자기의 손으로 이마를 치며 말했다.

「참으로 위왕의 홍복이로다!」

태자신이 옆에 있다가 물었다.

「군사께서는 아직 적군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찌하여 희색이 만면하십니까?」

「저는 원래 제나라 사람들은 겁이 많은 종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회군하여 위나라 경계에 들어온 지 불과 3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도망친 사졸들은 이미 절반이 넘었습니다. 어찌 그들이 과를 들고 우리에게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제나라 사람들은 남을 속이기를 잘하니 군사께서는 조심하십시오.」

「전기를 위시한 제나라 장수들은 이번에는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과 같습니다. 방연이 비록 보잘 것 없는 재주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기필코 전기 등을 사로잡아 옛날 계릉에서의 원한을 설욕하겠습니다.」

3. 馬陵道死(마릉도사)

- 마릉의 길목에서 만전(萬箭) 하에 죽은 방연 -

방연이 즉시 군령을 발하여 위나라 군사들 중 정예병 2만 명을 선발하여 두 대로 나누어 태자신과 각각 일 대씩을 인솔하고 행군의 속도를 2배로 하여 제나라 군사들을 추격하고 나머지 보군은 모두 후대에 남겨 방총으로 하여금 지휘하여 서서히 자기의 뒤를 따르도록 했다. 손빈은 매 시각마다 사람을 시켜 방연의 소식을 수소문하게 하였다. 이윽고 사람이 돌아와 방연의 소식을 전했다.

「위나라 군사들은 이미 사록산(沙鹿山)을 통과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려 우리 뒤를 따라 오고 있습니다.」

손빈이 손가락을 구부리며 방연의 행군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더니 그날 저녁 무렵에는 필시 마릉(馬陵)②에 당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릉이라는 곳은 두 산 사이에 나 있는 길을 말하는데 계곡이 깊고 길이 험하여 군사들을 매복시키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길의 양쪽에는 수목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는데 그 중에 제일 큰 나무 한 그루를 남겨 놓고 나머지 나무들은 모두 베어서 넘어뜨려 그 나무로 앞으로 나가는 길을 막아버리게 했다. 그리고 그 큰 나무는 동쪽 편으로 나무껍질을 벗겨 하얀 부분이 나오게 하고는 까만 숯으로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게 되리라!’라는 뜻의 6자의 글을 커다랗게 써놓았다.

龐涓死處樹下(방연사처수하)

다시 그 글자 위에 ‘ 군사 손빈이 알린다.’ 라는 뜻의 횡서로 네 자를 더 썼다.

軍師孫示(군사손시)

이어서 부장 원달(袁達), 독고진(獨孤陳)에게 영을 내려 각기 궁노수 5천 명을 선발하여 마릉 길의 양쪽에 매복시키고 당부의 말을 했다.

「나무 밑에서 불빛이 일어나면 일제히 노궁을 발사하라!」

다시 전영에게 명하여 군사 일만 명을 거느리고 마릉의 협곡에서 3리 떨어진 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위나라 군사들이 지나가면 그들의 퇴로를 막으라고 했다. 손빈이 각각의 장수들에게 맡은 바 임무를 나누어주기를 끝내자 자기와 전기는 본부병을 이끌고 마릉의 협곡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면서 전투가 개시되면 호응할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한 달음에 달려 제나라 군사들의 뒤를 추격해 그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방연은 오로지 앞으로 빨리 달려 제나라 군사들을 따라 잡는 일에만 정신을 쏟았다. 이윽고 방연의 추격군이 마릉의 계곡에 당도했을 때는 마침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계절은 10월 하순이라 해가 넘어가자 주위는 칠흑 같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더욱이 그때는 달도 뜨지 않았다. 앞서 달려가던 전대에서 전령이 와서 보고하였다.

「제군이 퇴각하면서 나무를 베어 앞쪽의 행군로를 막아놨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진군하기가 어렵습니다.」

방연이 화를 내며 군사들을 꾸짖었다.

「이는 우리가 자기들의 뒤를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제군이 나무를 베어 길을 막아 우리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다. 어찌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하는가?」

방연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나무들을 치우고 길을 열려고 하다가 머리를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커다란 나무에 껍질이 벗겨져 하얗게 된 부분이 보였다. 그것은 희미하게나마 글자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날씨가 너무 어두워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방연이 주위의 군사들에게 명하여 불을 밝혀 비춰보도록 했다. 여러 군사들이 일제히 부싯돌을 꺼내 지핀 불로 횃불에 붙여 나무의 하얀 부분을 비추자 그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무에 적힌 글자를 읽고 난 방연은 크게 놀라 소리쳤다.

「내가 앉은뱅이의 술수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방연이 황급하게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뒤로 물러서서 후퇴하라!」

방연의 호령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길 양쪽에 매복하고 있던 원달과 독고진이 거느린 제나라 군사들이 위나라 진영에서 일어나는 화광을 보고 만 개의 쇠뇌를 일제히 발사하여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듯이 화살을 날렸다. 위나라 군사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몸에 화살을 수 없이 맞아 중상을 입은 방연은 결코 제나라 군사들의 포위망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깨닫고 한탄했다.

「내가 앉은뱅이를 죽이지 않아 그 애송이의 이름이 천하에 떨치도록 만들었으니 참으로 한스럽구나!」

방연이 말을 마치자 즉시 허리의 칼을 빼들어 그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아들 방영도 역시 날아오는 화살에 수없이 몸에 맞고 숨을 거두었다. 대부분의 위나라 군사들은 제나라 군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마릉의 원혼이 되고 말았다. 사관이 시를 지어 노래했다.

옛날 거짓 편지를 만든 방연은 마치 귀신과 같이 간교하더니

오늘밤 매복시킨 쇠뇌로 방연을 죽인 계책은 천신과 같도다!

서로 교우을 맺을 때는 필시 충과 신으로 해야지

의리를 저버려 몸을 망친 방연을 본받지 말지어다.

昔日僞書奸似鬼(석일위서간사귀)

今宵伏弩妙如神(금소복노묘여신)

相交須是懷忠信(상교수시회충신)

莫學龐涓自隕身(막학방연자운신)

옛날 방연이 귀곡에서 하산 할 때 귀곡선생은 다음과 같이 당부한 적이 있었다.

「네가 남을 속이는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너도 남에게 속임을 당하게 되리라!」

이것은 방연이 거짓 편지로 손빈을 속여 월형을 받게 하자 오늘날 그도 역시 손빈의 감조지계(減竈之計) 계략에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었음을 예언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귀곡 선생이 방연에게 ‘말(馬)를 만나면 쇠락하게 되리라!’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방연은 마릉(馬陵)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방연이 위나라에 출사하여 죽을 때까지 모두 12년간 위나라의 대장으로 있었는데 그것은 방연이 점괘를 봐달라고 꺾어간 마두령의 꽃봉오리 숫자가 12송이가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귀곡선생이 친 점은 하나도 틀림이 없이 적중하니 참으로 신묘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때 방연의 뒤를 따라오고 있던 태자신은 앞선 방연의 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행군을 멈추고 황망히 진을 치기는 했으나 전영이 거느린 제나라 군사들의 습격에는 별다른 방비를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전영이 거느린 일단의 제군이 태자신이 거느린 위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위나라 군사들은 간담이 떨어져 아무도 감히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각기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윽고 단신이 되어 제나라 군사들에게 대항 할 수가 없게 된 태자신은 결국은 전영에게 사로잡혀 포승줄에 묶여 수레에 감금되었다. 전기와 손빈은 대군을 통솔하고 본영에서 나와 선발대와 호응하여 위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마침내 마릉 계곡은 위나라 군사들의 시체로 가득 메워지게 되었고 위나라의 군기와 치중은 모두 제나라의 차지가 되었다. 전영은 태자신을, 원달과 독고진은 방연 부자의 시신을 대장 전기에게 바쳐 공을 세웠다. 손빈이 자기 손으로 직접 방연의 목을 베어 자기 수레 앞에다 걸었다. 제나라 군사들은 대승을 거두고 개선가를 부르며 본국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그날 밤 욕을 당할까 두려워한 태자신은 함거 안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손빈이 듣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제나라의 군사들이 사록산(沙鹿山)을 지날 때 마침 방연의 뒤를 뒤따라오던 방총의 위나라 보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손빈이 사람을 시켜 방연의 수급을 장대에 메달아 위나라 군사들에게 보이게 하자 위나라 보군은 싸움도 하기 전에 스스로 무너졌다. 방총이 병거에서 내려 손빈에게 항복하고 목숨을 빌었으나 전기가 옆에서 용서하지 않고 죽이려고 했다. 손빈이 전기를 만류하며 말했다.

「악한 일을 한 자는 방연이 한 사람만의 문제입니다만 아무 죄도 없는 아들까지 이미 죽었습니다. 하물며 그 조카 된 사람까지 죽일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손빈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태자신과 목이 잘린 방연의 시체 두 구를 방총에게 내어 주고 그에게 돌아가 위왕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라고 했다.

「하루 빨리 제나라에 입조하여 조공을 바치라고 하라! 그렇게 행하지 않다가,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에는 결코 위나라는 종묘사직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하라!」

방총이 그저 「예, 예」 하는 소리만 연달아 하면서 물러갔다.

이때가 주현왕(周顯王) 28년 즉 기원전 341년에 일어난 일로써 계릉의 싸움이 있은 지 12년 째 되는 해였다.

전기와 손빈 등이 개선하여 회군하자 제선왕이 크게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어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선왕은 친히 전기, 전영, 손빈 등에게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한편 옛날에 위나라에서 뇌물을 받고서 전기를 모함하려고 했었던 상국 추기는 그때까지 그 일로 인하여 마음속에 부끄러운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전기와 손빈이 싸움에서 이기고 개선하자 그는 즉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사람을 시켜 재상의 인장을 제왕에게 반납했다. 제선왕이 추기의 인장을 받아들이고 이어서 전기는 상국에, 전영은 장군으로 새로 임명했다. 손빈은 예전의 군사의 직에 머물게 하고 큰 고을을 더하여 봉했다. 제왕이 하사한 고을을 고사한 손빈은 그의 조부인 손무가 쓴 병법서 13편을 수기하여 제선왕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신은 월형을 받은 폐인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선왕의 쓰임을 받아 오늘에 이르러 위로는 주상의 은혜를 보답하고 아래로는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저로써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배운 바는 모두 이 책에 있사오니 제가 이곳에 머물더라도 더 이상 쓰일 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컨대 도성과 멀리 떨어지고 사람의 왕래가 드문 조그만 산이라도 한 개 내려 주신다면 그곳에 은퇴하여 노년을 보낼까 합니다.」

제선왕이 극구 만류했으나 손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어 결국은 석려(石閭)③ 땅에 있는 산에 손빈을 봉했다. 손빈이 관직에서 물러 나와 석려의 땅에 가서 몇 년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귀곡선생의 도를 따라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이고 무성왕(武成王)④을 모시던 사당에 손자를 찬양하는 《손자찬(孫子贊)》이라는 글이 있다.

병법에 밝은 손자가 오히려 도적의 미움을 받아

월형을 받게 되어 원한을 품게 되었다.

수레에 앉아서 능히 계책을 세워

한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를 공격하여

원한을 설욕하고 그 이름을 드높였도다!

공을 세웠지만 상을 마다하고

종적을 감추어 그 이름을 땅에 묻은 행위는

그의 조부인 손무의 행적과 비슷하니

어찌 가통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었겠는가?

飜爲盜憎(번위도증)

刖足銜寃(월족함원)

坐籌運能(좌주운능)

救韓攻魏(구한공위)

雪恥揚靈(설치양령)

攻成辭賞(공성사상)

遁迹藏名(둔적장명)

揆之祖武(규지조무)

何愧典型(하괴전형)

4. 직하학사(稷下學士)

- 직하의 학사들을 모아 백가쟁명을 일으키다. -

한편 제선왕은 방연의 수급을 임치성의 정문 위에 걸어놓고 제나라의 국위를 천하에 떨친 후에 사자를 각 제후국들에게 보내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승전했음을 통고했다.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제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했다. 한과 조 두 나라의 군주들은 제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구해 준 노고에 감격하여 친히 제나라에 내조하여 마릉도에서의 승전을 축하했다. 제선왕은 한과 조 두 나라 군주들과 힘을 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위혜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역시 사자를 보내와 수교를 맺고 자기가 친히 제나라에 내조하겠다는 청을 했다. 제선왕이 삼진의 군주들에게 박망성(博望城)⑤에서 회맹하자고 참석하기를 통고하자 누구도 감히 제선왕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세 나라의 군주들이 동시에 박망성에 당도하여 조현을 올리니 제선왕의 영광은 극에 달했다. 선왕이 이어서 제나라의 국세가 강함을 믿고서 주색에 빠져 임치성 안에 설궁(雪宮)을 짓고 그 안에서 매일 주연을 벌리고 악사들을 불러 즐겼다. 또한 도성에서 40여 리 떨어진 곳에 원유(苑囿)⑥를 만들게 하여 시간만 있으면 그곳에 나가 사냥을 하였다.

다시 문학사나 유세객을 위해 임치성 서문의 이름인 직문(稷門) 밖에 강연당을 짓고 사람들을 모으니 달려온 사람들이 수천 명에 달했다⑦. 그 안에 추연(鄒衍)⑧, 전병(田騈)⑨, 접여(接輿)⑩, 환연(環淵)⑪등 76인은 모두 상대부(上大夫)의 작을 내리고 매일 국사에 대해 논의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논의만 할 수 있었지 정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제선왕이 총신 왕환(王驩)등에 정사를 모두 맡겨 버리고는 사냥과 주색에만 몰입하자, 전기가 여러 번에 걸쳐 간했다. 그러나 선왕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울화병 끝에 죽고 말았다.

5. 醜女鐘離春(추녀종리춘)

- 추녀 종리춘이 은어술로 제나라 왕비가 되다. -

그러던 어느 날 제선왕이 설궁(雪宮)에 잔치를 벌이고 여자 악사들을 불러 풍악을 즐기고 있던 중 궁문 밖에 어떤 여인이 찾아와 제선왕의 접견을 청했다. 그 여인의 생김새는 얼굴은 넓고, 눈은 옴폭 들어갔으며, 코는 높게 튀어 나오고, 목은 두터웠다. 또한 등은 굽어 낙타등과 같았고, 긴 손가락에 커다란 발을 갖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무성하게 자란 가을 풀과 같았고, 피부는 마치 칠을 바른 것 같이 꺼칠했다. 몸에는 다 헤어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여인이 궁문 앞에 당도하여 소리 높여 제왕의 접견을 청하면서 말했다.

「원컨대 왕을 한번 뵙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궁문을 지키던 무사들이 그 여인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

「추부(醜婦)가 어찌하여 감히 왕을 뵙고자 하는가?」

추녀가 무사를 향해 말했다.

「저는 곧 이 나라의 무염(無鹽)⑫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사람입니다. 성은 복성인 종리(鍾離)이고 이름은 춘(春)입니다. 지금 나이가 이미 40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출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들으니 대왕께서 궁을 떠나서 놀러 나와 잔치를 벌이고 있다고 해서 이렇게 특별히 찾아왔습니다. 대왕의 얼굴을 한번 뵙고 그의 후궁으로나 들어가 마당이나마 쓸면서 같이 살아 볼까해서 이렇게 알현을 청하는 바입니다. 」

종리춘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손으로 입을 막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이 여자는 천하에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로구나!」

궁문을 지키던 무사가 궁 안에서 놀고 있던 제선왕에게 종리춘의 일을 고했다. 제선왕이 그녀를 궁 안으로 불러 들이게 했다. 선왕을 따라와 시종을 하고 있던 군신들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던 종리춘의 용모가 못 생기고 몸에 걸친 의복은 남루하여 그들 역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제선왕이 종리춘에게 물었다.

「내가 살고 있는 궁중에는 비빈이나 시녀들은 이미 모두 자리가 찼을 뿐 아니라, 내가 그대의 용모를 보니 그대의 마을에서도 짝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대는 오히려 그렇게 남루한 옷을 걸쳐 입고 만승지국의 왕인 나를 찾아와 그 짝을 구하고 있으니 그대는 남이 못하는 특이한 재주라도 갖고 있는가?」

「첩은 그다지 자랑할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구태여 말한다면 은어술(隱語術)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나를 위해 은어술을 한번 펼쳐보라. 과인이 한번 맞춰보겠다. 만약에 너의 은어술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내 당장에 너의 목을 자르리라!」

종리춘이 눈을 치켜뜨고 이빨을 들어내어 웃더니 다시 손을 들어 네 번을 허공을 향해 휘젓고 무릎을 부딪치고 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위태로운 지고! 위태로운지고!」

선왕은 종리춘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어 옆에 있던 군신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선왕이 종리춘을 향해 말했다.

「종리춘은 내 앞으로 가까이 와서 과인을 위해 네가 한 은어를 설명하여 그 뜻을 밝혀 보기 바란다.」

종리춘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왕께서 첩을 죽이시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다면 감히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던 죄를 묻지 않겠다.」

「첩이 두 눈을 치켜 뜬 이유는 변경에서 병화가 일어나 그 위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보았기 때문이고, 이를 들어 내놓고 웃은 까닭은 충간을 받아들이지 않은 왕의 어리석은 행동을 비웃었기 때문이며, 손을 들어 허공을 네 번 젓은 행동은 왕을 위해서 망령된 신하들을 물리치기 위함이고 , 무릎을 맞대어 부딪쳤음은 왕을 위해 고대에서 매일 벌리는 연회를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선왕이 듣고 대노하며 말했다.

「과인이 어찌하여 잘못을 네 가지나 저질렀단 말이냐? 시골의 무지렁이 아녀자가 어찌 감히 요사스런 말을 늘어놓는가?」

선왕이 좌우의 무사들에게 명하여 종리춘을 끌고가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종리춘이 말했다.

「대왕이 저지른 네 가지 잘못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게 해주시면 제가 형을 받더라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첩이 듣기에 상앙을 등용하여 나라의 국세가 날로 강성하게 된 진나라가 머지않아 우리 제나라와 패권을 다투기 위해 함곡관(函谷關)을 통해 군사를 출병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필시 제나라에 병화가 닥칠 터인데 대왕의 곁에는 믿을 만한 장수가 한 사람도 없고 변경의 군사들은 날이 갈수록 정신 상태가 해이해지니 이로써 제가 대왕을 위해 눈을 치켜뜨고 봉화를 봤다는 말이옵니다. 또한 첩이 듣기에 ‘다투어 간언을 올리는 신하를 갖고 있는 군주의 나라는 망하지 않고, 간언을 올리는 자식을 갖고 있는 가장의 집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왕께서는 안에서는 여색을 탐하시고 밖에서는 국정에 손을 놓고 계시며 충간을 드리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있음으로 첩이 이를 드러내 웃어 보여 대왕께서 충간을 들이는 신하들을 용납하라고 청한 것입니다. 또한 왕환(王驩)은 대왕께 아첨하여 총애를 얻어 상대부에 오른 사람이라 어진 사람들을 숨기고 그 지위를 도적질하였고, 추연(騶衍) 등의 신하들은 우회하여 완곡하게 헛 담론만 할 뿐 실제적인 일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들이옵니다. 대왕께서 이런 자들만을 믿고 임용하시니 첩은 이로써 사직이 잘못될 까 걱정하여 손을 들어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허공을 휘저었습니다. 또한 왕께서는 설궁과 원유를 만들어 매일 주연이 아니면 사냥에 탐닉하셨으며 고대와 누각을 짓고 연못을 파는데 백성들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피폐시키고 재화를 엉뚱한 곳에 허비하여 국고를 바닥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왕을 위해 무릎을 마주치며 부딪친 것입니다. 대왕께서 4가지의 실정을 하시니 나라는 누란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오로지 목전의 안락만을 탐하고 후일의 환란을 돌아보지 않으시어 첩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을 올리니 다행히 저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우려 주신다면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선왕이 종리춘의 말을 듣자 탄식해 마지않으며 말했다.

「종리춘의 말이 없었다면 과인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지 못했음이라!」

제선왕이 즉시 주연을 파하게 하고 자기에 수레에 종리춘을 태워서 궁전으로 돌아가 정비로 세웠다. 종리춘이 사양하며 말했다.

「대왕께서 첩이 드린 말을 용납하시지 않으시면서, 하물며 어찌 첩의 몸을 쓰시려 하십니까?」

그래서 선왕은 어진 사람들과 인재들을 세상에서 널리 구하고 총신과 망신들을 멀리 내쳤다. 이어서 직하에 몰려 살던 유세를 목적으로 하던 헛된 도배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전영을 상국으로 삼았으며 다시 추나라 사람인 맹가(孟軻)를 모셔와 상빈으로 삼아 정사에 임하니 제나라는 이윽고 크게 다스려 졌다. 또한 종리춘의 본가를 무염의 땅에 봉하고 종리춘을 무염군(無鹽君)이라고 호칭했다. 이것은 나중의 일이다. 사관이 종리춘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육궁의 여인들은 모두 꽃처럼 아름다웠는데

못생긴 무염이 찾아와 감히 스스로 뽐내며

나라가 처한 위험을 하나하나 분명히 지적하니

조당에 가득한 문무백관들은 입도 뻥긋 못했다네.

六宮粉黛足如花(육궁분대족여화)

醜女無鹽取自夸(추녀무염취자과)

指点安危言鑿鑿(지점안위언착착)

滿朝文武不開牙(만조문무불개아)

6. 詐俘故友(사부고우)

- 사술을 이용하여 옛 친구를 포로로 잡은 상앙 -

한편 진나라 상국 위앙은 위나라의 장수 방연이 제나라와 마릉에서 싸워 패배하고 그 자신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효공에게 계책을 올렸다.

「진나라와 위나라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 나라입니다. 위나라는 우리 진나라에 있어서 마치 사람의 뱃속에 들어 있는 질병과 같은 존재입니다. 위나라가 우리 진나라를 병탄하지 않으면 우리 진나라가 위나라를 합쳐야만 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세력입니다. 위나라가 오늘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크게 지자 제후들도 위나라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때를 이용하여 위나라에 쳐들어간다면 그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틀림없이 그들의 도성을 동쪽으로 옮겨야할 것입니다.⑬ 연후에 하수와 효산(殽山)이라는 천혜의 험고함에 의지하여 동쪽으로 진격하여 제후들을 제압한다면 제왕의 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효공은 위앙의 말에 동의하고 그를 대장으로 공자 소관(少官)을 부장으로 삼아 5만의 군사를 주어 위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진나라 군사들이 함양을 출발하여 동쪽을 바라보고 행군을 시작하자 위나라의 첩자들이 그 사실을 서하에 전했다. 위나라의 서하 수장인 주창(朱倉)이 사태의 위급함을 문서로 만들어 위왕에게 하루에 세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 위급함을 고했다. 위혜왕이 군신을 모두 불러 모이게 하고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 낼 계책을 물었다. 공자앙(公子卬)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소신은 옛날 진나라 승상 위앙과 서로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신이 이미 그를 대왕께 천거했지만 대왕께서 쓰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가 진나라에 들어가 상국이 되어 결국은 우리 위나라가 병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신이 군사를 이끌고 앞서 나가 그와 강화를 맺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그가 강화를 거절한다면 성벽과 해자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면서 한과 조 두 나라에 구원군을 청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위나라의 조정에 모인 여러 신하들이 모두 공자앙의 계책이 훌륭하다고 칭송했다. 위혜왕이 즉시 공자앙을 대장으로 삼아 5만의 군사를 주면서 하서의 땅을 구원하라고 명했다. 공자앙은 하서로 가서 오성(吳城)⑭에 주둔했다. - 오성은 오기가 서하의 태수로 있을 때 진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서하를 지키기 위해서 견고하게 지어진 성이다.- 공자앙은 편지를 써서 진나라 진영으로 보내 위앙의 문후를 묻고 동시에 옛날의 친분에 호소하여 강화를 맺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공자앙은 옛날 맺은 우정에 호소하면 상앙이 호의를 베풀어 군사들을 물리쳐 회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와 군사들이 달려와 공자앙에게 보고했다.

「지금 진나라의 상국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전해왔습니다. 지금 성문 밖에서 분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자앙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성 위에서 줄을 매달은 바구니를 내려 보내 편지를 지참한 사자를 올라오게 했다. 공자앙은 위앙이 보낸 편지의 겉봉을 뜯고 읽었다.

「이 앙이 위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공자께서는 저를 허물없이 대해주시며 맺은 교분으로 서로 즐거워하기를 골육과 진배없이 했습니다. 오늘 각기 다른 주인을 섬겨 그 나라의 장수가 되어 만났습니다만 어찌 군사로써 서로 싸워 어육이 되겠습니까? 저의 소견으로는 공자와 서로 약속하여 병거를 물리치고 갑주를 벗은 후에 의관만을 입고 옥천산(玉泉山)에서 한번 만나 술이나 한잔하면서 싸움을 면하고자 합니다. 이로써 두 나라의 군사들이 서로 싸워 참혹하게 참살되는 병화를 피할 수 있게 만든다면, 천추의 후세들은 우리 두 사람의 우정을 칭송하여 관중과 포숙의 반열에 세울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저의 생각에 동의하신다면 만날 날의 말미를 내가 보낸 사람에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공자앙이 위앙의 편지를 읽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는 내가 바라던 바로다!」

이어서 공자앙은 사자를 후하게 대접하라 이르고 자기는 위앙의 편지에 답신을 썼다.

「상국께서 옛날 교우 하던 정을 잊지 않으시고 제환공의 고사를 들어 병거를 물리치고 의상지회(衣裳之會)로 대신하여 진․위(秦魏) 두 나라의 백성들을 평안하게 만들어 관중과 포숙의 우의를 밝히시려는 뜻은 이 앙도 원하던 바였습니다. 3일 안에 말씀하신 곳에서 상국을 뵙기를 바랍니다. 어찌 제가 감히 상국의 명을 거절하겠습니까?」

위앙이 공자앙의 답서를 받아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나의 계책이 드디어 이루어지게 되었구나!」

다시 사자를 공자앙이 머물고 있던 오성으로 보내 두 사람이 만날 날짜를 통고하면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승상께서는 이미 전방에 포진하고 있던 우리 진나라 군사들에게 명하여 진채를 거두어 먼저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자께서 회견을 끝내고 돌아오실 때는 진나라의 모든 군사들이 철수한 뒤가 될 것입니다.」

위앙이 보낸 사자가 마른 연근과 사향을 공자앙에게 바치면서 계속 말했다.

「이 두 가지 물건은 우리 진나라의 특산물인데 밭에서 자란 연근은 사람 몸에 좋고 사향은 사기를 쫓아 줍니다. 저희 상국께서 옛정을 생각하시고 다시 그 우정이 영원히 변치 말자는 뜻에서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공자앙은 자기를 잊지 않고 옛친구로써 대해주는 위앙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위앙의 저의를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된 공자앙은 답서를 써서 사자에게 주어 전하게 했다.

위앙이 거짓으로 꾸며 군령을 전하여 전방에 포진하고 있던 군사들로 하여금 모두 철수하게 하고 그 군사들은 공자 소관이 이끌고 먼저 본국을 향해 행군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뒤로는 비밀리에 명을 내려 행군 도중에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사냥을 한다는 소문을 내면서 호기산(狐岐山)⑮과 백작산(白雀山)⑯으로 들어가 그 계곡에 널리 퍼져 매복시켰다. 이윽고 약속한 기일이 되면 오시에서 미시 사이에 일제히 옥천산 밑에 집결하고 있다가 산 위에서 울리는 포성 소리를 신호로 옥천산의 회견장에 참석한 위나라 사람들을 모조리 붙잡아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통 같이 지키도록 했다.

드디어 회견하기로 한 날이 되자 새벽에 일찍 일어난 위앙은 오성으로 사람을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위상국께서는 3백 명도 채 안 되는 수행원과 함께 옥천산에 먼저 가서 공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

자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던 공자앙을 위해 유거(輶車)⑰에는 술과 음식을 싣고, 일반 수레에는 악공 몇 명을 태운 후에 옥천산에 마련된 회견장을 향해 출발했다. 수행원도 300명만을 데리고 간 위앙은 회견장에 먼저 당도하여 위나라의 공자앙 일행을 기다렸다. 이윽고 공자앙이 수행원을 이끌고 옥천산 입구에 당도하자 산상의 위앙이 보고 밑으로 내려와 영접했다. 공자앙이 보니 위앙을 호종한 수행원의 숫자가 매우 적었을 뿐만 아니라 몸에는 아무런 병장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수인사를 나누고 이어서 옛날에 자기들이 나눴던 교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다시 오늘 두 사람이 만나 화의를 맺게 된 일에 대해서 화제가 미치게 되었다. 공자앙의 수행원으로 따라온 위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기뻐해 마지않았다. 양측의 사람들이 나서서 술좌석을 준비하자 공자앙이 주빈의 자리에 앉아서 술잔에 술을 따라 위앙에게 권했다. 두 사람이 술잔을 세 번에 걸쳐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음악도 술잔을 새로 권할 때마다 같이 연주하게 하였다. 이윽고 군리가 주연석으로 와서 위앙에게 군사의 일을 보고하자 그는 즉시 수하에게 명하여 위나라의 기구와 음식을 치우고 자기가 별도로 가지고온 진나라의 음식을 내오라고 했다. 위앙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사람은 원래 진나라의 유명한 장사였는데 한 사람은 이름을 오획(烏獲)이라 했다. 그는 천균(千鈞)⑱의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괴력의 장사였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임비(任鄙)라 불렀는데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던 천하의 맹장이였다. 위앙이 술잔을 들어 공자앙에게 권하면서 좌우를 쳐다보며 신호를 보내자 산 위에서 갑자기 일성포향이 울리고, 다시 산 밑에서 폭죽소리를 내어 호응하여 옥천산의 계곡과 능선을 진동시켰다. 공자앙이 크게 놀라 위앙을 향해 물었다.

「이 포성은 어디서 나는 소리입니까? 상국께서 설마 저를 속이고 있지는 않겠지요?」

위앙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잠시 공자를 한 번 속였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공자앙은 마음이 황망해져 기회를 봐서 그 자리에서 달아나려고 했으나, 삽시간에 오획에게 사로잡혀 밧줄로 꽁꽁 묶여버리고 말았다. 또 다른 장사 임비는 휘하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공자앙과 함께 연회석상에 참석한 수행원들을 모조리 붙들어 포박했다. 포성소리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공자 소관도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자앙의 호위병들을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포로로 잡아 포승줄에 묶었다. 위앙이 좌우에게 명하여 공자앙을 함거에 태워 먼저 진나라로 호송하여 진효공에게 승첩을 보고하도록 했다. 한편 이윽고 한바탕 소란이 진정괴고 상황이 진정되자 진나라의 장수들은 사로잡은 위나라의 포로들의 포승줄을 풀어주며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이어서 원래의 수레와 병장기들을 되돌려 주고는 말했다.

「너희들은 오성으로 돌아가 주장이 회견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단지 성문이 열리게만 하라! 성문을 열게만 한다면 별도로 후한 상을 내리겠으나, 만약에 우리의 명을 거역한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목을 베리라!」

공자앙이 데리고 온 수행원들은 하나같이 소인배들뿐이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모두 진나라 장수의 말대로 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어서 오획이 공자앙으로 분장하여 수레의 가운데 자리에 타고 임비는 공자앙을 호송하러 따라온 진나라의 사신으로 꾸며 별도의 수레 한 대에 타고 뒤따랐다. 오성 위에서는 성쪽으로 다가오는 일행이 공자앙을 수행하러 나갔던 사람들임을 보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즉시 성문를 열어 주었다. 두 사람의 장사가 동시에 수레에서 튀어나와 성문을 주먹과 발로 차니 성문은 순식간에 부셔져 버렸다. 오성을 지키던 위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다시 닫을 수가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온 위나라 군사들은 두 장사의 철퇴 같은 주먹질에 모두 땅에 쓰러졌다. 그 사이에 위앙은 친히 진나라의 대군을 인솔하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번개같이 성안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혼란에 빠진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어지러이 도망치기에 바빴다. 위앙은 군사들을 휘몰아 성을 지키려고 하던 위나라 군사들 일진을 물리치고 이윽고 오성을 점령했다. 서하의 수장인 주창은, 그들의 대장인 공자앙은 진나라의 포로가 되고 오성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혼자 힘만으로는 서하를 지키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성을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달아나 숨어 버렸다.

위앙이 승승장구하여 곧바로 위나라 도성인 안읍의 성밖에 당도했다. 위혜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대부 용고(龍賈)를 시켜 진나라 진영을 찾아가 화의를 청하도록 했다. 위앙이 용고를 보고 말했다.

「위왕이 나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에서 벼슬을 구하게 되었소. 진왕의 은혜를 받아 상국의 작위와 만종(萬鍾)의 식록과 함께 병권을 나에게 주셨소. 만약에 내가 위나라를 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왕의 막중한 은혜를 저버리게 되는 일이오.」

「소장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옛날에 자기가 살았던 숲을 그리워하고, 좋은 신하는 옛날의 주인에 대한 정을 가슴에 품고 산다’⑲고 들었습니다. 위왕이 비록 상국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부모의 나라 왕일진대 어찌 그렇게 무정하시단 말입니까?」

위앙이 용고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심사숙고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만약에 내가 이곳에서 회군하려면 하서의 땅 전부를 떼어 진나라에 바치지 않고는 불가한 일이오.」

용고가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돌아가 위혜왕에게 고했다. 혜왕이 용고의 말을 따라 하서의 지도를 내주며 진나라 진영에 바쳐 화평을 구하라고 했다. 위앙이 위나라에서 바친 지도에 따라 하서의 땅을 접수하고 군사들에게 개선가를 부르게 하며 귀환하였다. 포로로 호송되어 왔던 공자앙은 진나라에 투항했다. 위혜왕은 안읍이 진나라와 너무 가까이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위나라의 도성을 동쪽의 대량(大梁)으로 옮겼다. 이로써 위나라는 양나라로도 불리게 되었다.

7. 忠言逆耳 車裂之禍(충언역이 거열지화)

- 충언을 듣지 않아 거열의 화를 당한 상앙 -

진효공은 위앙의 공로를 표창하여 열후에 봉하고 옛날에 초나라로부터 취한 상(商)⑳과 오(於)㉑ 등의 15개 성을 그의 식읍으로 주면서 상군(商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후세에 이르러 위앙을 상앙으로 부르게 된 연유는 이 일로 인한 것이다. 상앙이 진효공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봉읍인 상군(商郡)의 치소로 돌아가 그의 가신들과 문객들에게 말했다.

「나는 위(衛)나라의 서손 출신에 불과했지만 머리에 들어 있는 계책 하나로 진나라에 들어와 법치를 이루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소. 오늘 다시 위나라의 하서 땅 700리를 빼앗아 진나라의 영토를 동쪽으로 넓힌 공로로 15개의 성에 봉해졌으니 대장부가 이 정도로 뜻을 이루었으니 가히 그 극에 달했다고 말 할 수 있겠소.」

상앙의 가신과 문객들이 일제히 상앙을 칭송하였다. 그런데 안에서 한 사람의 문객이 큰 소리로 외치며 상앙의 앞으로 나왔다.

「‘천 사람의 옳다는 말은 한 사람의 선비의 직언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그대들은 상군의 문하에서 먹고살면서 어찌 아첨하는 말만하여 주인을 함정에 빠뜨리고 있는가?」

사람들이 보니 그는 곧 상앙이 상빈으로 모시고 있던 조량(趙良)이라는 사람이었다. 상앙이 물었다.

「선생은 여러 사람들보고 아첨하는 말만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진나라의 치세를 이룬 나와 오고대부(五羖大夫) 백리해와 비교해서 누가 더 현능하다고 생각하는지 한번 말씀해 보시오.」

「오고대부는 목공 때에 진나라 상국을 지내신 분으로 세 번에 걸쳐 당진의 군주를 세웠고 20여 개의 나라를 진나라에 병합하여 그 군주를 서융의 패자로 만든 분이십니다. 그가 수레를 타고 다닐 때는 비록 찌는 듯이 더운 날씨임에도 결코 덮개를 덮고 다니지 않았으며 일을 할 때는 비록 피곤함에도 결코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자 백성들은 마치 돌아가신 부모를 대하듯이 슬피 울었습니다. 지금 대감께서 진나라의 상국으로 계신지 8년째인데 법령이 비록 지켜진다 할지라도 그 형벌이 너무 처참하여 백성들은 단지 그 위엄만을 볼뿐 덕을 보지 못하고, 이만을 추구할 뿐 의(義)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태자는 대감께서 그의 사부인 공자건에게 의형(劓刑)을 행함으로써 욕을 보여 그 원한이 골수에 맺히고 민간의 부형이나 그 자제들은 대감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온지 이미 오래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진군(秦君)께서 유명을 달리한다면 대감의 처지는 아침이슬처럼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상(商)과 오(於)의 땅에서 나는 재물과 그 작위를 탐하면서 오히려 스스로 대장부임을 자만하고 있습니다.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대감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 지나친 봉록과 작위를 공실에 반환하고 향리로 은퇴하여 밭을 갈며 남은여생을 보내시려고 한다면 아직도 기회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군이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5일 후에 진효공이 병이 들어 죽었다. 진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태자 사(駟)를 받들어 진군의 자리에 옹립했다. 이가 진혜문공(秦惠文公)이다. 상앙은 자기가 선대의 구신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여 궁궐의 출입을 오만하게 했다. 옛날에 태자의 사부로 있었을 때 상앙에게 의형을 당해 원한을 품고 있던 공자건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공손고(公孫賈)와 같이 혜문공을 찾아가 말했다.

「신이 듣기에 ‘대신들 중 그 세력이 지나치게 큰 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군주의 곁에 지나치게 큰 세력을 갖고 있는 자는 군주의 목숨을 노린다.’고 했습니다. 상앙은 법률로 진나라를 다스려 치세에 이르도록 했으나 아낙네나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모두 하나같이 상군의 법만을 말할 뿐이지 아무도 진나라의 법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 상앙은 상오(商於)의 15개 성에 봉해져 그 지위는 지극히 높고 권력은 매우 무겁게 되었으니 후일에 필시 반역을 도모할 것입니다.」

「내가 그 도적놈에게 맺힌 한을 오래도록 품어왔소. 그러나 그는 선왕께서 중용하던 신하이고 아직 그의 죄도 들어 나지 않아 지금으로써는 죄를 내릴 수 없소. 잠시 두고 보기로 합시다.」

혜문공은 즉시 사람을 보내 상앙에게서 상국의 인장을 거두어오라고 명하고 그 자신에게는 식읍인 상오로 들어가 살라고 했다. 상앙이 조정에 들어가 혜문공에게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수레를 준비하여 도성을 나서는데 수레를 호위하는 의장과 대오가 마치 제후의 행차와 같았다. 더욱이 진나라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상앙을 전송하러 나가 텅텅비게 되었다. 공자건과 공손고가 혜문공을 찾아와 다시 고했다.

「상군은 전혀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마치 자기가 제후나 되는 듯이 참람한 자세로 상오로 돌아가고 있으니 이는 그가 상오에 당도하게 되면 필시 모반을 일으키려는 뜻입니다.」

그러자 감룡(甘龍)과 두지(杜摯)가 앞으로 나와 상앙이 모반하려고 한다고 고변했다. 혜문공이 대노하여 즉시 공손고에게 명령을 내려 무사 3천 명을 데리고 상앙의 뒤를 쫓아가서 그의 머리를 베어 효수하고 돌아와 복명하라고 했다. 공손고가 혜문공의 명령을 받고 조당에서 물러 나와 군사를 이끌고 상앙의 뒤를 쫓았다. 당시 진나라 백성들은 상앙이 물러난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집에서 나와 길가와 골목길을 가득 메우고 상군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어서 공손고가 군사를 이끌고 상앙의 뒤를 쫓아가 잡으려고 한다는 살실을 알고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뒤따른 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상앙의 거마와 수레가 성문을 나가 백여 리를 미처 가지 못했을 때 갑자기 뒤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 상앙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도록 보낸 사람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상국을 잡으러 보낸 군사들입니다.」

크게 놀란 상앙은 새로 등극한 진군이 자기의 죄를 물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결국 용서받을 수 없어 목숨을 잃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급히 의관을 벗어 던지고 수레에서 내려 종복으로 분장하고 도망쳤다. 이윽고 위나라로 넘어가는 관문에 당도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려고 하던 황혼 무렵이었다. 상앙이 하루 밤을 투숙하려고 여관에 들렀다. 여관의 주인이 상앙의 신분을 증명하는 첩(帖)을 요구했으나 상앙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여관의 주인이 말했다.

「상군의 법은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투숙시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법을 어기는 자는 신분증 없이 투숙하려는 자와 함께 참수형에 처하게 되어있는데 내가 어떻게 손님을 재워 줄 수 있겠습니까?」

상앙이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 법을 만들어 시행하게 했는데 이제 내가 그 법에 걸려 몸을 망치게 되었구나!」

상군이 할 수 없이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계속 가서 관문이 혼란한 틈을 타서 함곡관을 넘어 위나라로 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 변경을 지키는 관리로부터 상앙의 위나라 망명을 신청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위혜왕은 공자앙을 속이고 유인하여 포로로 잡아 하서의 땅을 빼앗아 간 상앙의 비열한 행위에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상앙을 잡아 함거에 실어 진나라에 바치려고 하였다. 낌새를 눈치챈 상앙은 할 수 없이 다시 자기의 식읍으로 돌아가 그곳의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상오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도중에 혜문공이 보낸 공손고에 사로잡혀 포승줄에 묶여서 함양성으로 압송되었다. 혜문공이 상앙의 죄를 열거하며 성중의 저자거리로 끌고 나가 오우분시(五牛分尸)의 형에 처하도록 명했다. 이윽고 함양성의 저자거리에서 거열형에 처해져 참혹하게 살해된 상앙의 시신에 시중의 백성들이 서로 다투어 달려들어 뜯어먹자 상앙의 시체는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혜문공의 명에 의하여 상앙의 가족과 그 종족들을 모조리 멸족시켰다. 가련하게도 상앙은 변법을 시행하여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음에도 오늘날 오히려 오우분시형에 처해 지고 그 가족과 종족들은 멸족을 당하니 어찌 그 업보를 삽시간에 받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를 일컬어 과각지보(過刻之報)라 할 수 있었다. 과각지보란 생전에 지나치게 각박하게 살아 그 업보를 받았다는 뜻이다.

이때가 주현왕 31년으로써 기원전 338년의 일이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상군의 일을 탄식했다.

상오에 봉해지고 해가 바뀌기도 전에

오우분시를 당했으니 참으로 가련하구나!

평소에 참혹하고 각박하게 굴면 흉한 업보를 당하니

죽어서나마 《성형(省刑)》공부를 열심히 하게나!

商於封邑未經年(상오봉읍미경년)

五路分尸亦可憐(오로분시역가련)

慘刻從來兇報至(참각종래흉보지)

勸君熟讀省刑篇(권군숙독성형편)

상앙이 죽자 백성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것처럼 행동했다. 육국의 제후들도 상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사자를 보내와 서로 간에 모두 기뻐하였다. 혜문공은 상앙에 의해 작위 봉록을 빼앗긴 감룡과 두지에게는 옛날의 작록을 복직시켜 주고 공손연(公孫衍)을 상국에 명했다. 공손연이 혜문공에게 권하여 서쪽의 파(巴)와 촉(蜀)을 공격하여 병합한 후에 왕호를 칭하여 천하를 호령하라고 했다. 또한 열국들에게 위나라가 하서의 땅을 진나라에 공물로 바쳤다는 사실을 통지하여 만일 진나라의 명령을 거역하는 나라가 있다면 즉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한다고 위협했다.

왕호를 칭한 혜문공은 사자를 보내 육국의 제후들은 땅을 떼어 공물로 진나라에 바치라고 위협했다. 제후들은 주저하며 결정하지 못했다.

그때 초나라의 위왕(威王) 웅상(熊商)은 소양(昭陽)을 임용하여 월나라를 쳐서 크게 이기고 월왕 무강(無疆)을 포로로 잡아서 죽여 월나라의 모든 땅을 초나라에 병합했다. 월나라가지 병탄한 초나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초나라는 그 영토가 더욱 넓어지고 병사들은 강해져서 가히 진나라와 맞설 수 있었다. 진나라의 사자가 초나라에 당도했으나 초왕에 의해 질타 당하고 자기나라로 쫓겨 갔다. 얼마 후에 낙양 사람 소진(蘇秦)이 육국을 겸병하겠다는 계책을 가지고 진나라를 찾아와 혜문왕에게 유세했다.

《제90회로 계속》

주석

①외황(外黃)/ 지금의 하남성 동단의 민권현(民權縣) 서북. 전국 때 위나라 성읍이다.

②마릉(馬陵)/ 전국 때인 기원전 343년 제나라의 손빈(孫臏)이 방연(龐涓)이 이끌던 위(魏)나라의 대군을 물리친 곳을 말하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하남성 범현(范縣) 2) 산동성 담성(郯城) 3) 하남성 복현(濮縣) 4) 하북성 대명(大名) 5) 산동성 신현(莘縣) 등의 설이 있으나 범현과 담성이 유력하다.

③석려(石閭)/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남쪽에 있었던 고을 이름.

④무성왕(武成王)/ 제나라의 시조 태공 여상의 봉호로 당 개원 19년 서경을 포함한 각 주에 태공묘를 세우고 봉호를 무성왕으로 개봉하고 그 묘를 무성왕묘로 했다.

⑤박망성(博望城)/ 지금의 산동성 료성시(聊城市) 경내 북

⑥원유(苑囿)/ 나무를 심은 후에 동물을 풀어 방목하기 위해 담장을 친 동산. 주로 고대의 군주들이 사냥을 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초목을 심어 놓은 동산을 원(苑), 동물을 방목하여 기르는 동산을 유(囿)라 한다.

⑦직하학사를 말함. 제나라의 위왕(威王: 재위 기원전 378-343년)과 선왕(宣王 : 재위 기원전 342- 324년)이 임치성 서문인 직문(稷門) 밖에 학당을 세우고 천하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문을 강론하도록 하였다. 제나라 왕은 직하의 학자들을 모두 대부에 준하는 예우와 록을 주었다. 이곳 출신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맹자(孟子), 순우곤(淳于髡), 추연(鄒衍), 윤문(尹文), 환연(環淵), 전병(田騈), 신도(愼到), 순경(荀卿), 추석(騶奭) 등이 있다. 직하학사 전의 여러 사상들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독자적인 경향을 띠었으나 직하라는 곳으로 한데 모이게 되어 고대 중국의 사상들이 절충적이고 종합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⑧추연(鄒衍 혹은 騶衍, ?-전340)/ 전국 때 직하학사(稷下學士) 중의 한 사람. 음양가의 대표적인 학자로써 추자(鄒子)라 한다. 제나라 출신으로 위혜왕(魏惠王)이 어진 선비들을 세상에서 널리 구할 때 위(魏)나라로 가자 위혜왕이 도성 밖 교외에까지 나가 맞이하고 갈석궁(碣石宮)이라는 집을 지어 그곳에 살게 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후에 제선왕이 추연을 제나라로 초빙하여 직하(稷下)에 머물게 하고 상대부의 봉록을 내리고 신선(神仙)의 일에 대해 연구하도록 시켰다. 연소왕(燕昭王)이 즉위하자 그는 또다시 제나라를 떠나 연나라로 들어가 소왕(昭王)의 신임을 받았다. 만년에 제나라를 위해 조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이 그를 접대하면서 감히 그와 마주 대하며 앉지 못했다. 그의 학설은 오행상생(五行相生)을 근거로 하여 저술한 <오덕종시(五德終始)> 56편이 있었으나 모두 일실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⑨전병(田騈)/전국 때 제나라 학자. 진병(陳騈), 진병자(陳騈子) 등으로 불렀다. 순우곤(淳于髡) 등과 함께 직하학사의 한 사람이다. 황노사상가(黃老思想家)이며 생전에 출사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재물을 많이 모았다. 저서에 전자(田子) 25편이 있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⑩접여(接輿)

❶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초나라의 은사(隱士). 성은 육(陸)이고 이름은 통(通)이다. 접여(接輿)는 그의 자(字)이다. 일부러 미친척하여 세상을 피해 다녔으며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어 먹는 것을 해결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楚狂接輿)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공자(孔子)가 그의 나이 62세 때인 초소왕(楚昭王)이 재위하던 기원전 488년에 초나라에 들렸을 때 접여는 공자가 타고 지나가던 수레 옆에서 공자를 비웃으며 노래했다.

<鳳兮 鳳兮(봉혜, 봉혜)봉황새야! 봉황새야!/何德之衰(하덕지쇠)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해 졌던 말인가?/往者不可諫兮(왕자불가간혜)지난날의 잘못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來者猶可追也(래자유가추야)앞날의 잘못이야 피할 수 있으리!/已而已而(이이,이이)그만두어라!/今之從政者殆而(금지종정자태이)지금은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위태로울 진데!>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했으나 그가 급해 몸을 피해 달아났음으로 이야기를 나룰 수 없었다.(출전-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❷접여(接輿)라는 사람은 초나라 소왕(昭王) ( 재윈 전515-489년 )때의 사람이고 직하에 학사들을 초치한 제위왕(齊威王 : 재위 전356-320년 )과 제선왕(齊宣王 : 재위 기원전 319- 301년)때 활약하던 학자들이 활약하던 시기와는 근 100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접여를 제선왕(齊宣王)때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연의(演義)의 원작자인 풍몽룡(馮夢龍)의 착오다.

⑪환연(環淵)/ 전국 때 초나라 출신의 황노사상가(黃老思想家). 직하에서 황노사상을 강론하고 다시 노자(老子)의 저작들을 정리하여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완성하였다.

⑫무염(無鹽)/지금의 산동성 동평현(東平縣) 경내에 있었던 전국 때 제나라의 성읍이다.

⑬위나라가 도성을 하곡부에 위치한 安邑에서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인 대량으로 천도한 해는 양혜왕 9년인 기원전 361년으로 당시 진나라는 효공이 막 즉위하여 상앙이 변법을 시행하기 전이었고, 또한 제위(齊魏)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계릉(桂陵)의 싸움은 기원전 353년이고 마릉(馬陵)의 싸움은 기원전 341년으로 모두 위나라 수도 대량(大梁) 주변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기원전 340년 위앙이 공격하면 위나라가 도성을 안읍에서 대량으로 옮길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은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되지 않고 더욱이 앞서의 계릉이나 마릉 전투 당시 정세와도 맞지 않는다.

⑭오성(吳城)/ 위문후 때 서하 태수였던 오기가 진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서하를 방어하기 위해 축성한 성으로 지금의 산서성 평륙현(平陸縣) 북쪽에 있었다.

⑮호기산(狐岐山)/ 지금의 산서성 효의시(孝義市) 서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일명 설힐산(薛頡山)이라고도 한다.

⑯16)백작산(白雀山)/ 지금의 산서성 효의시(孝義市) 서쪽에 있는 산이다.

⑰17)유거(輶車)/ 사냥을 할 때 타는 가벼운 수레

⑱균(鈞)/ 일균은 삼십 근을 말한다. 즉 천균은 3만 근으로 춘추 때 한 근은 356그램이니 천균이라 함은 10톤의 무게를 의미한다.

⑲良鳥戀舊林, 良臣懷故主

⑳상(商)/ 진령(秦嶺)의 남쪽 관문 무관(武關)으로 나오기 전에 있는 단풍시(丹楓市) 일대를 말한다.

㉑오(於)/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 약 50키로 지점의 서협향(西峽鄕) 일대를 말한다.

[평설]

“ 마릉의 길목에서 만전(万箭) 하에서 죽은 방연(龐涓)” 편은 제군(斉軍)의 군사 손빈의 또 다른 절묘한 전략의 결과이다.

제(斉)와 위(魏)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마릉(馬陵)의 싸움은 계릉의 싸움이 벌어진 지 정확히 12만에 발생했다.

삼진(三晋)의 연맹이 붕괴된 이후 조나라는 위나라의 패권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기원전 375년 한나라가 정나라를 멸하고 신정에 그 도성으로 삼자, 조나라는 사자를 보내 축하를 하며, 한(韓)과 조(趙)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위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같이 나누자고 제안했다. 기원전 369년 위무후가 죽자 공중완(公中緩)과 위혜왕이 그 후계를 놓고 다툴 때, 한조 두 나라는 공중완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한 적도 있었다. 그때 한위는 위군을 대파하고 안읍을 포위한 상태에서 전후 위나라를 처리하는 문제를 협의 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조나라는 위혜왕을 죽여 공중완을 대신하도록 하고 위나라로부터 땅을 할양받자고 했으나, 한나라는 위나라를 동서 두 나라로 분할하여 공중완과 위혜왕을 각각 왕으로 세워 위나라의 국세를 약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두 나라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한나라가 먼저 포위를 풀고 철군하자 조나라도 군사를 물리쳤다. 그 기회를 틈타 출병한 위혜왕이 공중완을 잡아서 죽이고 철군하는 한과 조 두 나라 군사의 뒤를 추격하여 대파하고 위나라의 사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44년 위혜왕은 봉택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거행했으나 한나라만은 참석을 하지 않았다. 이에 위와 한조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위혜왕은 한나라에 경고를 주기 위해 기원전 342년 방연에게 명하여 한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한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제왕이 신료들에게 한나라의 구원 요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물었다. 손빈은 구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추기의 의견과 하루라도 빨리 구원해야 한다는 전기의 의견에 대해 모두 반대했다. 한나라를 구원하지 않고 위나라에 의해 망하는 사태를 방관한다면 위나라의 힘을 강대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고, 반대로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신속한 군사행동을 취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나라가 당한 병화를 제나라가 대신 뒤집어쓰는 일과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당연히 한나라에게는 반드시 구원병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나라의 구원군을 믿고 있는 힘을 다하여 위나라에 항거하게 만들면, 한나라의 완강한 저항을 받은 위나라도 필시 한나라 공격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위군이 한군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피로에 지쳤을 때를 기다려 군사를 일으킨다면 피로한 위군을 공격하여 한나라를 보존시키는 일이 되어 적은 힘을 써서 큰 공을 이루어 일거에 두 가지 목적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자치통감의 기술에 따르면 큰 이익과 함께 이름을 높인 일이라 했다. 손빈의 전략은 실로 독창적이며 절묘했다.

손빈의 전략에 의해 한위(韓魏) 두 나라는 1년 동안 다섯 번을 싸워 위나라가 모두 승리했다. 위나라에게 연전연패 당해 위기에 처한 한나라가 기원전 341년 다시 제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다. 제왕은 그때서야 비로소 전기와 손빈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손빈의 의견에 따라 제군은 한나라로 진격하는 대신 위나라의 도성 대량으로 직진했다. 제군이 대량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위군 대장 방연은 한군과의 싸움을 중지하고 위나라로 회군해야만 했다. 쌍방은 전격적으로 교전에 들어갔으나 위군의 자만심을 이용한 손빈의 감조지계(減竃之計)에 의해 적을 궁지로 유인한 끝에 마릉의 길목에서 매복했다가 방연을 죽이고 위나라 태자 공자 신(申)을 사로잡아 위군 주력을 섬멸했다.

마릉의 싸움은 세계 전쟁사에 있어서 적을 유인하여 함정에 몰아넣은 후에 매복전으로 적군을 섬멸하여 빛나는 승리를 엮어낸 전례로써 전략가 손빈의 천재적인 재능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전쟁이다. 손빈이 창조한 군사전략은 후세의 군사가들에게 적지 않은 지혜를 주었다. 《고본죽서기년집교(古本竹書紀年輯校)》에 따르면 마릉의 싸움 다음 해에 위나라는 제(斉), 진(秦), 조(趙) 삼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기원전 334년, 위혜왕은 어쩔 수 없이 제(斉) 및 초(楚)와 합종하여 군사 활동을 멈출 수 있었다. 이에 따른 조치로써 위혜왕은 비굴하게 몸을 굽혀 서주(徐州)로 들어가 제위왕에게 조현을 드리고 제위왕을 왕으로 높여 제나라의 패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서쪽의 진나라가 변경을 공격하자 땅을 떼어 주며 전국 초기 패권국이었던 위나라는 쇠락하고 진과 제 두 나라가 새로 강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전국시대의 잔혹하고 격렬한 영토확장 전쟁은 진제의 동서 양강 체제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마릉과 계릉의 싸움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전쟁 모두가 위나라의 국도를 공격함으로 해서 위나라의 공격을 받은 상대국을 구원했다. 그러나 두 전쟁은 각각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계릉의 싸움은 손빈이 대량성을 구원하려고 달려오던 위군을 중도에 매복하여 섬멸한데 비해, 마릉의 싸움은 한나라 도성 신정성은 비교적 위도(魏都) 대량성과 근거리에 있어 제군은 대량성을 구원하기 위해 회군하는 위군의 행군로를 끊고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갖을 수 없었다. 더욱이 위군은 이미 10만 대군을 집결시켜 제군을 맞이할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그와 같은 정세하에서 손빈은 감조지계(減竃之計)를 사용하여 싸움을 겁내고 있던 제군은 과반 이상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감히 반격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위장했다. 과연 교만한 방연은 경무장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제군의 뒤를 급하게 추격함으로 해서 양쪽 군사력에 심한 격차를 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다시 마릉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먼 길을 달려와 피로에 지친 위군을 기습하여 전멸시켰다. 정세가 같지 않은 적군에 대해서는 역시 같지 않은 방법으로 타격해야 한다는 손빈의 유물주의적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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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4-05-11
[일반] 제90회. 六國兼相(육국재상) 被激往秦(피격왕진)

제90회 六國兼相 被激往秦(육국겸상 피격왕진) 합종책을 유세하여 육국의 재상을 겸한 소진과 소진의 격심술로 진나라로 들어가는 장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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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89회. 馬陵道死(마릉도사) 商鞅車裂(상앙거열)

제89회 馬陵道死 商鞅車裂(마릉도사 상앙거열) 마릉의 길목에서 만전(萬箭) 하에 죽은 방연과 함양성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에 처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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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88회. 佯狂脫禍(양광탈화) 圍魏救趙(위위구조)

제88회 佯狂脫禍 圍魏救趙(양광탈화 위위구조) 거짓으로 미친 척 하여 화를 면하는 손빈과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나라를 포위하다. 1. 陷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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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87회. 商鞅變法(상앙변법) 孫龐結義(손방결의)

제87회 商鞅變法 孫龐結義(상앙변법 손방결의) 진효공에게 등용되어 변법을 시행한 상앙과 결의형제를 맺은 손빈(孫臏)과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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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86회. 殺妻求將(살처구장) 鼓琴取相(고금취상)

제86회 殺妻求將 鼓琴取相(살처구장 고금취상) 처를 죽여 장수가 된 오기(吳起)와 거문고를 빗대 치국의 도를 설파하여 상국이 된 추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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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85회. 食子肉羹(식자육갱) 河伯娶婦(하백취부)

제 85회食子肉羹 河伯娶婦(식자육갱 하백취부) 자기자식을 끓여 만든 인육탕을 들이킨 악양과 장수(漳水)의 하백이 부인을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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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84회. 진양수관(晉陽水灌) 刺客豫讓(자객예양)

제84회 晉陽水灌刺客豫讓(진양수관 자객예양) 조씨들의 성읍 진양은 물에 잠기고 예양은 조양자의 옷을 칼로 찔러 지백의 위해 원수를 갚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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