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보이’ 황장엽 안녕히



2007년 만추 이맘때에 나는 황장엽 일행을 북한산 진관사 밑 어느 마을 식당에서 회식과 함께 대화를 가진 적이 있다. 동학교도인 L씨가 주선한 자리였다. 같은 민족주의자이니 한 번 만나 대화 해 보라는 간청이 여러 번 있었지만 만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수차 제의를 거절해 오던 터였다. 입장이 분명한 사람들 끼리는 만나 보았자 별무 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차 간청이 들어 와 혼자 독대는 안 되고 반드시 말 한 내용을 증빙으로 남기기 위해 되도록 여러 사람이 같이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국정원 직원 7-8명, 그리고 탈북자들 10여 명, 남한 추종자 6명 정도 대 식구가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미국 UCLA 도서관에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구입해 읽다 잠시 귀국하던 참이었다. 회고록에 관해 궁금한 것이 많아서 만남에 응한 것이 주요 동기였다. 다음은 황과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적은 것이다.



<세기와 더불어>의 역사성과 문학성에 관하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회고록에 관하여 아시는 것이 있는지요.” 황의 답변 “그까짓 것 문학들이 쓰려하자 나중에 역사학자들이 반대 해 같이 썼는데 내가 책임 감독을 했지” 이에 대한 나의 답변.



“요즘 역사학도들의 필수 과목은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수업인데요. 포스트모던 역사 연구의 한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슨 소리냐?” 나의 반론 “생각해 보십시오. 김일성 항일유격대가 산 속에서 며칠을 굶으면서 행군을 할 때에 그 춥고 배고픈 감정을 어떻게 역사학자들이 묘사해 낼 수 있습니까? 역사학자들은 언제 무슨 사건이 있었다는 것만 묘사할 뿐이 아닙니까. 역사연구가들이 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학적 상상력으로도 그 정황과 감정을 다 그려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문학성이 가미되는 이유이고 이것이 역사 연구의 한 방법론입니다”



황은 뒤통수를 한 방 맞은 듯이 어깨를 추스르며 말을 잇는다. “조그마한 소부대 끌고 동만 일대 돌아다닌 것에 불과한데 뭐가 역사에 남을 일이라고” 주제가 바뀌었다. 의례 나올 법한 말이다. 여기서 황의 입에서 남한 보수들의 지론인 ‘김일성 가짜론’이 나오지 않았다. 이 말 만으로도 보수들이 발끈 화낼 일이다. 황의 말에서 김일성이 항일 유격활동한 그 자체는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유도 아닌 질문에서 이 정도의 말을 황의 입에서 직접 나오게 한 것만으로도 수확?이다.



“황선생님, 남에 오셔셔 잡수신 연세에 걸맞게 민족의 통일에 도움이 되는 언행을 해 주시기를 바랐는데 너무 치우치시지 않습니까. 유격대가 어떻게 대부대를 끌고 다닐 수 있습니까.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할 수 없는 만주 바닥에 대부대를 데리고 다니다 어디에 재우고 무엇을 먹입니까. 그러나 김일성 부대가 수시로 대부대로도 소부대로도 선회한 줄로 압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한 지도자들 가운데는 관동군 장교가 아니면 간도 토벌대 앞잡이 노릇한 인물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박정희, 정일권, 김석원등등. 대부대냐 소부대가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방향을 어떻게 잡고 있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까. 김일성은 단 한 번도 일제와 타협도 양보도 하지 않고 16년간 항일 투쟁을 하지 않았습니까?” 황의 대답 “좀 고생하기는 했지”



거듭 말해 이 날 대화에서 황의 입에서 김일성 가짜라는 발언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김일성의 활동을 축소시켜 말하려다 나에게 덜미?가 잡힌 것이다. 황은 당황한 빛이 역역하였다. 이 정도 말한 것도 옆에 국정원 직원들의 감시의 눈을 피하려고 한 것 같아서 더 이상 말을 계속한다는 것은 삼가기로 했다.



황장엽은 ‘모던 보이’



이상 황장엽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그가 완전한 ‘모던 보이’ 라는 인상을 받았다. 즉, 객관적 역사 기술을 믿는 18-19 세기 랑케 식의 실증주의 역사 기술의 한계를 넘지 못한 사상가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 시대(탈현대)의 역사 서술 방법은 모던의 그것과는 다르다. 포스트 모던 시대 역사 서술 방법은 객관적인 역사 기술을 위해서 주관적 감정과 감성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와는 반대로 비객관적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 탈현대 시대의 역사관이다. 실증주의 사관의 한계가 노정된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할 때에 적용한 실증주의 사관은 이와 같은 역설이 그대로 드러났다. 광개토대왕비문(호태왕 비문)을 조작할 때에 “신묘년에 바다를 건넜다”를 두고 일본학자들, 중국학자들, 남한 학자들, 북한학자들의 해석이 다 다르다. 자기들의 현재적 입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제 입맛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비문을 조작을 해서라도 자기들의 침략 사관을 합리화 하려 했다.



일본과 중국은 이미 역사 서술에 주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다. 동북공정이 그 예이다. 그런데 남한 학자들은 아직도 역사의 객관성을 그대로 믿고 있다. 동북공정, 이런 방법으로 대처해서는 대처한다는 것이 오히려 책잡히고 만다. 고구려 재단, 그 다음에 동북아 재단등에 기 백억의 혈세를 투자하고 있지만 삼성과 현대 전자,자동차 제품 중국에 팔아먹어야 한다는 상업적 주관적 입장 때문에 중국에 다 양보하는 연구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 날 만난 황장엽은 역사의 객관적 서술을 신봉하는 얼뜬 모든 보이 같은 인상을 나에게 남기고 갔다. 나는 그날 역사 서술의 문학성을 힘주어 강조 했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만나기를 주변에서 강청했지만 나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가 모던 보이 탈을 그 나이에 벗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일성 사령은 이미 1930년 대 항일 유격활동을 통해 공산주의 민족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탈현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주체’ 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민생단 사건을 통해 그는 뼈저린 역사 서술의 교훈을 터득한 것이다.



모던 보이의 주체사상도 모던적



그가 전개한 주체사상이라는 것도 구구절절 19세기 유의 논리가 전부였다. 그래서 읽을 흥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2004년 문익환 목사 방북 15주년 기념행사를 연변에서 개최했을 당시 북조선의 김책 대학교 철학부 교수 장경률 교수와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나의 책 ‘원효의 판리량론’을 한 권 선물로 했다. 밤새 읽고 와서 다음날 나에게 불교의 인명론에 관한 책이 아니냐고 했다. 나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원효가 721년에 썼다고 하는 판비량론은 불교 논리학인 인명론 因明論에 관한 비판서이다.



인도의 진나와 중국의 현장의 불교 논리학 인명론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비판하는 글이다. 한국 불교학계에서는 아직 손도 안대고 있는 무거운 글이다. 그런데 장교수의 동료 노교수가 인명론을 연구하다 죽었는데 죽는 순간 침상에서 까지 이 인명론을 읽었다고 한다. 누워 책을 들 기력이 없자 제자들이 책을 받쳐 들고 선생이 읽게 했다고 한다. 감동적인 것은 북의 학자들은 유물론만 연구하는 줄 알았는데 남한에서도 손 안대고 있는 관념론적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유경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에 장교수에게 황장엽이 왜 넘어 왔느냐고 물었다. 누구 보다 정확하게 그가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였다. 대답은 이렇다. 황장엽이 주체사상이라고 쓴 원고를 한 보따리 가지고 왔는데 심사를 한 결과 이것은 주체사상이 아니다 라는 결론이 내려져 되돌려 보냈더니 바로 넘어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모던 보이 황장엽 안녕, 포스트 모던 드림



이것은 물론 학자들 간에 나눈 사담이다. 그러나 장교수는 저명한 북의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의 말에 많은 신빙성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교수는 황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체사상이라고 글들을 쓰지만 북조선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그것과는 다른 점이 많다고 했다. 내가 이해한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비판을 물론 하였다. 그러나 나도 반론을 제기 하여 헤어질 때에는 많은 공감대를 서로 갖게 되었다.



그러니깐 남에서 황을 두고 ‘주체사상 대가’ 운운 하는 것은 아예 접는 것이 좋다. 그가 말하는 ‘주체사상’이란 것은 한 갓 모던 보이의 넋두리에 불과할 뿐이다.



만추가 되니 2년 전 북한산 기슭에서 만났던 황과의 대화를 진작 공개하려 했으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쉽다. 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그에게 반론할 기회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남아 있다. 지금부터 산자들은 그의 사상을 검증할 순간 앞에 서 있다.





김상일(전한신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