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122 
· 어제 :  360 
· 최대 :  2,389 
· 전체 :  1,491,657 
 
  2004-05-12 11:52:098936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70- 2
양승국
 태사공자서2.hwp  (304.0K)   download : 457
 청년사마천의 중국여행도 복사.jpg  (996.9K)   download : 117
일반

太史公自序-2


499.維昔黃帝(유석황제),

옛날 황제 헌원씨(軒轅氏)는


▶황제(黃帝)

중국이 원시사회를 벗어나려고 하던 시기의 부족국가의 추장으로 성은 희(姬)이고 씨는 헌원(軒轅) 혹은 유웅(有熊)이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다스리던 부족은 원래 중국의 서북 고원에 거주했던 소전씨(少典氏) 출신으로 염제(炎帝)와 같은 종족이다. 후에 동쪽으로 나아가 탁록(涿鹿)에 살고 있던 구여족(九黎族)의 추장 치우(蚩尤)를 공격하여 죽이고 다시 판천(阪泉)에서 염제(炎帝)와 싸워 이겼다. 그는 염제가 이끌던 종족을 규합하여 그들의 부족장이 되었다. 후에 그 종족이 발전하여 중화족(中華族)의 전신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시조라 받들어 졌다. 수많은 발명과 제도를 고안해 행한 것이 전설상으로 내려온다. 창힐(倉頡)을 시켜 문자(文字)를 만들게 하였고, 누조(嫘祖)에게는 양잠술(養蠶術)을, 공(共)에게는 북 만드는 법을, 화적(貨狄)에게는 배 만드는 법을, 희화(羲和)에게는 해를 보고 상의(常儀)에게는 달을 보고 유구(臾區)에게는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법을 알아내게 하였다. 또한 예수(隸首)에게는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내게 했으며, 용성(容成)에게는 달력을 만들게 하고 영(伶)에게는 도덕에 대한 규범을, 영장(榮將)에게는 음율(音律)을 만들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제를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500.法天則地(법천즉지),

하늘과 땅의 법칙을 본 받았고


501.四聖遵序(사성준서),

사성은 각기 그 순서에 따라 .


▶사성(四聖)/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말한다.


502.各成法度(각성법도);

황제가 만든 법도를 이루었다.


503.唐堯遜位(당요손위),

당요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504.虞舜不台(우순불태);

우순은 기뻐하지 않았다.


505.厥美帝功(궐미제공),

이에 제왕들의 공을 찬미하여


506.萬世載之(만세재지),

만세에 전하도록 실어


507.作<五帝本紀>第一(작<오제본기>제일)

제일편인 <오제본기(五帝本紀)>를 지었다.



508.維禹之功(유우지공),

우임금의 가장 큰 공적은


509.九州攸同(구주유동),

구주에 고루 혜택을 주어


▶구주(九州)

하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이 중국 전역을 아홉 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아홉 주의 이름은 기(冀), 예(豫), 청(靑), 서(徐), 양(揚), 형(荊), 연(?), 양(梁), 옹(雍)이다.


1. 옹주(雍州)/. <하본기(夏本紀)>󰡒흑수서하유옹주(黑水西河惟雍州)󰡓의 하(河)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을 가르는 황하(黃河)를 이야기한다. 즉 옹주(雍州)는 흑수(黑水)의 서쪽을 가리킨다.


2. 예주(豫州)/󰡒형하유예주(荊河惟豫州)󰡓 예주의 남쪽 경계는 형산(荊山 : 지금의 호북성 남쪽의 장서현(?西縣))에 이르고 북쪽 경계는 황하와 접하고 있다. 한무제가 지방 장관들을 감찰하기 위해 설치한 13자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3. 서주(徐州)/󰡒해대급회유( 海垈及淮惟)󰡓의 해(海)는 지금의 황해(黃海)를 말하고 대(垈)는 태산을, 회(淮)는 회수(澮水)를 말한다. 즉 서주의 경계는 북으로는 태산과 청주에 이르고 남으로는 회수와 양주 이북에 닿는다. 한무제가 설치한 13자사부 중의 하나다.


4. 양주(揚州)/󰡒회해유양주(淮海維揚州)󰡓의 회(淮)는 지금의 회수(淮水)를 해(海)는 지금의 동해(東海)를 말한다. 한무제 때 설치한 13자사부 중의 하나이며 치소(治所)는 역양(歷陽 : 지금의 안휘성 화현(和縣))에 두었다.


5. 청주(靑州)/󰡒해대유청주(海垈維靑州)󰡓의 해(海)는 발해를 말하고 대(垈)는 즉 태산(泰山)을 말한다. 구주(九州) 중 가장 동쪽에 있었던 주. 오행설에 의하면 동쪽은 청(靑)을 뜻했기 때문에 청주라 한 것이다. 관할 구역은 동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하북(河北) 오교(吳橋) 이동, 마협하(馬頰河) 이남, 산동성 북부와 동부지구에 이르렀다.


6. 기주(冀州)/󰡒기주기재호구,치량급기(冀州:冀載壺口,治梁及岐)󰡓 하북성 동남, 산동 서북부, 하남과 산서 경계 중 하수 이북, 산서와 섬서 경계 중 하수 동쪽의 땅을 관할했다.


7. 형주(荊州)/󰡒형급형양유형주(荊及衡陽維荊州)󰡓의 형(衡)은 형산(衡山)으로 지금의 호북성 남장현(南?縣)을 말한다. 대체로 호북성 중부, 남부, 호남성 북부, 중부, 사천성(四川省)과 귀주성(貴州省)의 일부를 관할했다.


8. 연주(兗州)/ 연주(沇州)라고도 한다. <하본기(夏本紀)> 󰡒 濟, 河維沇州 󰡓 연주(沇州)는 연수(沇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제(濟)는 즉 제수(濟水), 하(河)는 즉 하수(河水)를 말하며 산동성 서북부, 하남 동북과 하북 동남부를 관할했다.


9. 양주(梁州)/󰡒화양흑수유양주(華陽黑水惟梁州)󰡓의 흑수에 대한 설은 분명하지 않다. 란창강(瀾滄江), 노강(怒江), 금사강(金沙江), 장액하(張掖河), 대통하(大通河) 등 설이 다양하다.


그림6. 하우가 정한 9주의 위치 비정도



510.光唐虞際(광당우제),

당우(唐虞) 시대를 빛내어


511.德流苗裔(덕유묘예);

그 덕이 후세들에게 이르게 한 것이다.


512.夏桀淫驕(하걸음교),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이 음탕하고 교만하여


513.乃放鳴條(내방명조).

이어서 명조(鳴條)로 추방되었다.


▶명조(鳴條)/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 북 봉구현(封丘縣) 서.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이 은나라의 탕(湯)임금과 싸워 패하고 도망간 곳이다.(桀奔於鳴條)


514.作<夏本紀>第二(작<하본기>제이)

이에 하본기(夏本紀) 제이를 지었다.



515.維契作商(유설작상),

설(薛)은 상을 세웠고


▶설(薛)/제곡(帝嚳)의 아들로 상족(商族)의 시조이다. 우(禹)임금이 황하를 치수할 때 옆에서 도와 공을 도와 순임금에 의해 사도(司徒)로 임명되어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인 상(商)에 봉해졌다. 하(夏)나라를 멸하고 상(商)나라를 세운 탕임금은 설의 후손이다.


516.爰及成湯(원급성탕);

이어서 성탕에 이르러 하왕조를 대신하였다.


517.太甲居桐(태갑거동),

태갑(太甲)은 동(桐)으로 쫓겨나 살던 끝에


▶태갑(太甲)/ 성탕(成湯)의 장자인 태정(太丁)의 큰아들이다. 즉위 3년만에 탕이 세운 법을 지키지 않고 덕을 어지럽히며 전횡하자 이윤(伊尹)에 의해 동궁(桐宮)으로 추방되었다. 동궁에 3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개과천선하자 이윤이 다시 그를 데려와 정권을 넘겨주었다. 왕위에 복귀 후 태갑은 성탕의 유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자 제후들이 모두 귀의하였으며 백성들의 생활은 편안해 졌다. 이윤이 이를 찬미하여 <태갑훈(太甲訓)> 3편을 지었다.


▶동(桐)/ 동궁을 말하며 여러 설이 있다.

사기집해(史記集解) : 탕임금이 묻힌 곳으로 제음(濟陰)의 박현(亳縣)으로 지 금의 산동성 조현(曹縣) 동쪽을 말한다고 했으며

사기정의(史記正義) : 하남성 언사시(偃師市) 서쪽 등 이외에 몇 가지 설이 더 있다.


518.德盛阿衡(덕성아형);

깨달아 아형(阿衡)의 도움으로 세상에 덕을 펼칠 수 있었다.


▶아형(阿衡)/ 상(商) 왕조를 세운 성탕(成湯)의 창업공신인 이윤(伊尹)의 이름이다. 원래 탕임금의 비(妃)인 유신씨(有辛氏)가 시집올 때 데려온 노예였으나 탕임금이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정사를 맡겼다. 이윤은 탕임금을 도와 하(夏)나라를 멸하고 상(商)나라를 세우는데 큰공을 세웠다. 탕임금이 죽자 그의 이자(二子)인 외병(外丙)과 삼자(三子)인 중임(中任)을 차례로 섬기다가, 중임이 죽자 탕임금이 장자인 태정(太丁)의 아들 태갑(太甲)을 왕위에 앉혀 그에게 정치의 근본과 법도를 가르쳤다. 태갑이 즉위하여 3년이 되자 탕이 세운 법을 문란하게 하였다. 이에 이윤은 태갑을 동궁(桐宮)에 유폐시키고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올라 상나라를 통치했다. 태갑은 동궁에서 3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지난날의 과오를 깨닫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윤이 태갑을 다시 불러 들여 상나라 임금의 자리를 돌려주었다. 제위(帝位)에 다시 오른 태갑은 정치를 쇄신하고 덕정을 베풀어 치세를 이루었다. 이윤(伊尹)은 태갑이 죽고 그의 아들 옥정(沃丁) 치세 때 죽었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이윤은 7년만에 돌아와 스스로 왕위에 복귀한 태갑에게 살해당했다고 했다.


519.武丁得說(무정득열),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등용하여 치세를 이루어


▶무정(武丁)/상왕조의 제 23대 왕으로 기원전 1325년부터 1266년까지 59년간 재위에 있었다. 일설에는 기원전 1329년 제위에 올랐다고 했다. 묘호(廟號)는 고종(高宗)이다. 소을(小乙)의 아들이고 조경(祖庚)의 아버지다. 전설에 의하면 무정이 어렸을 때 그의 부왕인 소을이 그를 민가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면서 노역들과 함께 살게 하고, 다시 그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국경 밖의 이민족을 정벌하게 했다고 했다. 소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무정은 상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인을 찾다가 부암(傅岩)이란 곳에서 노역을 하던 노예 출신의 부열을 얻어 재상으로 삼았다. 부열의 도움으로 정치를 쇄신하고 덕을 베풀었으며 서북쪽의 귀방(鬼方)과 강방(羌方)을 정벌하였으며 남쪽의 형만(荊蠻)을 공격하여 상나라의 국세를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상나라는 부열의 도움으로 무정 치세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부열(傅說)/다음은 <은본기(殷本紀)>에 나오는 무정(武丁)과 부열에 관한 기사이다.

< 소을제(小乙帝)>가 죽자 그 아들 무정(武丁)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무정은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인을 널리 구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冢宰)가 결정하도록 하고서 나라의 기풍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정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그의 이름이 열(說)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 무정은 성밖으로 나가 자다가 꿈속에서 성인을 봤다. 무정이 관리들에게 자기가 꿈속에서 본 성인을 찾으라고 명했으나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 다시 성밖에서 찾아보라고 명하여 드디어 부험(傅險)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도로공사장에서 노역을 하던 열(說)을 찾아냈다. 무정이 열을 불러 대화를 해보니 과연 그는 성인이었다. 열을 그 자리에서 상나라의 제상을 삼고 부험(傅險)에서 찾았다고 해서 부(傅)성을 하사하여 부열이라 부르게 했다.>

< 帝小乙崩, 子帝武丁立. 帝武丁卽位, 思復興殷, 而未得其佐. 三年不言, 政事決定于 宰, 以觀國風. 武丁野夢得聖人, 名曰說. 以夢所見視群臣百吏, 皆非也. 于是乃使百工營求之野, 得說于傅險中. 是時說爲胥靡, 築于傅險. 見于武丁, 武丁曰是也. 得而與之語, 果聖人, 擧以爲相, 殷國大治. 故遂以傅險姓之, 號曰傅說.>


520.乃稱高宗(내칭고종);

무정은 은나라를 부흥시킨 공으로 후세들로부터 고종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521.帝辛湛 (제신담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 신(辛)은 주색에 빠졌기 때문에


522.諸侯不亨(제후불형).

천하의 제후들이 와서 받들지 않았다.


523.作<殷本紀>第三(작<은본기>제삼)

이에 <은본기> 제삼을 이었다.



524.維棄作稷(유기작직),

기(棄)가 자라 순임금 때 후직(后稷)이 되어


▶후직(后稷)/ 순임금 때 농사를 담당했던 관리들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벼슬 이름이었으나 후에 기의 이름이 되었다..


525.德盛西伯(덕성서백);

덕을 베풀자, 그 후손이 번성하여 서백(西伯)이 되었다.


526.武王牧野(무왕목야),

서백의 아들 무왕은 목야(牧野)에서 승전하여


▶목야(牧野)/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 부근에 있었던 땅 이름으로 이곳에서 제후들을 규합한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과 결전을 벌려 승리하였다. 주왕은 녹대(鹿臺)에 몸을 던져 불에 타 죽고 천하는 주나라의 것이 되었다.


527.實撫天下(실무천하);

천하를 위무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528.幽厲昏亂(유려혼란),

유왕(幽王)과 려왕(厲王)이 아둔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결과


▶유왕(幽王)/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褒姒)라는 미인에게 탐닉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고 폭정을 행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북방의 이민족인 강융(羌戎)이 침입하여 호경(鎬京)을 점령하고 유왕은 살해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나라는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으로 옮긴 것이다.


▶려왕(厲王)/서주의 10대 왕으로, 즉위연도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841년에 죽었다. 려왕이 위나라에서 무당을 데려와 공포정치를 행하자 국인(國人)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려왕은 체(彘) 땅으로 도망가서 살고 주나라는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섭정을 행했다. 주공과 소공 두 사람은 려왕이 체 땅에서 14년만에 죽자 그의 아들 정(靜)을 왕위에 앉히고 주나라의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이 14년간의 기간을 공화(共和)라 하고 려왕이 체 땅으로 도망간 해인 기원전 841년을 공화 원년이라 한다. 중국의 역사기록은 대략적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 해를 기점으로 분명해 지며 사마천 사기(史記)의 제후연표도 이 해부터 시작한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국인 역사학자 진순신(陳舜臣)은 이 해를 중국역사 원년으 삼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529.旣喪酆鎬(기상풍호);

풍호(酆鎬)를 잃었다


▶풍호(酆鎬)/ 동주가 하남성의 낙읍으로 옮겨가기 전까지의 서주(西周)의 도읍이었던 호경(鎬京)을 말한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長安) 서남의 풍수(豊水) 강안에 있었기 때문에 풍호(酆鎬) 鎬)라 한 것이다. 이 구절은 서주 망하자 풍호를 버리고 낙읍으로 동천한 것을 말한다.


530.陵遲之赧 (능지지난),

주나라는 차츰 쇠약해지더니 난왕(赧王) 때 이르러


▶난왕(赧王)/ 동주의 마지막 왕으로 기원전 315년에서 즉위하여 기원전 256년에 죽었다. 난왕이 죽자 주나라는 진(秦)나라에 병합되었는데 사마천은 이 해를 주나라가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531.洛邑不祀(락읍불사).

락읍에서 사직이 끊기게 되었다.


532.作<周本紀>第四(작<주본기>제사)

이에 <주본기> 제사를 지었다.



533.維秦之先(유진지선),

진나라의 선조는


534.伯 佐禹(백예좌우);

백예인데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을 보좌했다.


535.穆公思義(목공은의),

진목공(秦穆公)은 의(義)를 생각하여


▶진목공(秦穆公)/재위 기원전 660-621년. 춘추오패 중 하나이다. 재위시 진나라의 제도와 풍속을 개혁시켜 중원의 강국으로 만들었으나 죽을 때 진나라의 주요 관리들 170명을 순장시켰다. 그 후유증으로 진나라는 국세가 쇠미해져 전국시대 중반기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패권 다툼에 끼어 들 수 없었다. 진나라가 중권세력으로 대두된 것은 진목공(秦穆公)으로부터 약 300년 후인 효공(孝公 : 재위 기원전 362-338년)이 법가인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하여 국세가 회복되고 나서부터이다.


536.悼豪之旅(도호지려);

효산(崤山)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애도하였으나


▶호(豪)는 즉 효산(崤山)을 말한다. 지금의 하남성 북서의 황하 연안의 삼문협시(三門峽市)와 민지(澠池) 사이에 있다. 기원전 627년 정나라를 공격하려고 출동했던 섬진(陝秦)의 군사들이 별다른 전공을 이루지 못하고 회군하다가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던 당진(唐晉) 군사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전멸 당했다. 진목공은 이 패전을 만회하기 세 번의 공격 끝에 3년만에 당진을 굴복시키고 효산(崤山)으로 나아가 섬진군의 잔해(殘骸)를 수습하고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537.以人爲殉(이인위순),

그러나 목공이 죽으면서 사람으로 순장을 지내게 하니


538.詩歌<黃鳥>(시가<황조>),

그 두려움을 <황조(黃鳥)>라는 시가로 노래했고


▶황조(黃鳥)/ <시경(詩經)> <국풍(國風)> 중 <진풍(秦風)>에 나오는 시가의 제목으로 진나라의 국세를 괄목하게 신장시켜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이 된 진목공이 죽을 때 그의 측근에 있던 신하들 170명이 순장되었다. 일시에 진나라 대부분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던 관리들이 순장을 당하자 진나라의 국세는 갑자기 쇠약해지고, 그 후로는 진(秦)나라는 중원의 세력 다툼에서 뒤 처지게 되었다. 그 순장된 170여 명의 인사들 중 차씨 삼 형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진나라의 삼량(三良)이라고 호칭되던 어진 사람들이었다. 진나라 백성들이 차씨 삼 형제를 순장시킨 진목공을 원망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여 부른 노래가 <황조가(黃鳥歌)>이다. 그러나 남송의 문장가인 소동파는 진목공을 변호하기 위해 차씨 삼 형제가 순장된 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뜻에 의해 진목공과 함께 죽은 것이지 강제적으로 당한 것이 아니라는 글을 썼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견해이다.


539.昭襄業帝(소양업제).

후에 소양왕 때에 이르러서야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소양왕(昭襄王)/ 기원전 307년 - 251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범수(范睢)와 백기를 등용하여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는 사천성을 점령하여 당시 진나라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초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어서 사천성의 인력과 자원을 이용하여 수로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인 지금의 호북성 강릉인 영성(郢城)을 점령하여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하고 진나라 땅으로 삼았다. 초나라는 영성에서 쫓겨나 지금의 하남성 진성현(陳城縣)으로 쫓겨갔다. 그리고 장군 백기(白起)를 시켜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40만의 조나라 대군을 몰살 시켜 전국시대 나머지 여섯 나라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막강한 진나라의 국력을 바탕으로 소양왕은 제나라의 민왕(湣王)에게 제의하여 자기는 서제(西帝), 민왕은 동제(東帝)로 각각 호칭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얼마 후에 제민왕이 동제라는 칭호를 버리자 소양왕도 더 이상 제(帝)란 칭호를 사용하지 못했다. 소양왕(昭襄王)이 제업을 이루었던 말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540.作<秦本紀>第五(작<진본기>제오)

이에 <진본기> 제오를 지었다.



541.始皇卽位(시황즉위),

진시황이 즉위하자


542.竝兼六國(병겸육국);

나머지 육국을 차례로 병합하고


543.銷鋒鑄 (소봉주거),

무기를 녹여 쇠북을 만들어


544.維偃干革(유언간혁),

군사들을 쉬게 하고 전쟁을 막고


545.尊號稱帝(존호칭제),

호칭을 높여 제(帝)라 칭하며


546.矜武任力(긍무임력);

무력을 과시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547.二世受運(이세수운),

이세에 이르자 그 운이 다하여


548.子 降虜(자영항로).

자영(子嬰)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자영(子嬰)/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기원전 206년에 죽었다. 진시황의 장남 부소(扶蘇)의 아들, 진시황의 또 다른 아들, 혹은 진시황 동생의 아들이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고(趙高)가 이세(二世)를 살해하고 자영을 세웠으나 자영은 제호(帝號)를 버리고 조고를 죽였다. 조고의 삼족도 같이 멸했다. 재위 46일 만에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항복하여 항우(項羽)에게 보내졌다. 후에 항우에 의해 살해 당했다.


549.作<秦始皇本紀>第六(작<진시황본기>제육)

이에 <진시황본기> 제육을 지었다.



550.秦失其道(진실기도),

진나라가 그 도를 상실하자


551.豪傑幷擾(호걸병요);

천하의 호걸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더니


552.項梁業之(항량업지),

항량이 제일 먼저 공업을 세우고


553.子羽接之(자우접지);

항우가 그 뒤를 계승하였다.


554.殺慶救趙(살경구조),

이어서 항우는 조나라를 구한 다음 경자관군(慶子冠軍)을 죽이자


▶경자장군(慶子將軍)/ 당시 초나라가 거록에 갇힌 조군을 구원하기 출동시킨 군사들의 대장 송의(宋義)의 별호다.

▶송의(宋義)/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7년에 죽었다. 진나라 말에 반진의 기치를 들고 일어 난 농민군의 장군. 초나라가 진나라에 망하기 전 초나라의 영윤을 지냈었기 때문에 당시 반진 세력의 지도자 격이었던 항량(項梁)을 따랐다. 항량이 진나라를 정벌하는데 같이 종군하다가,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긴 항량이 교만한 기색을 보이자 송의가 간하기를 " 싸움에 이겼다고 장수들은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고 군사들은 게으르게 된다면 그 군사들은 다음 번 싸움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했으나 항량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어서 항량은 후에 벌어진 장한(章邯)이 이끌던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그 자신은 싸움 중에 죽었다. 초회왕이 송의가 군사를 잘 부리는 것을 알고 그를 상장군에 명하고 항우(項羽)를 차장으로, 여러 장수들은 그의 휘하에 두도록 하였다. 회왕은 송의를 경자장군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조나라를 구하라는 초회왕의 명을 받고 출동했으나 진나라 군사들과의 싸움을 회피하고 진군을 멈추자 이에 불복한 항우가 초회왕의 거짓 명으로 군중에서 송의를 살해했다. 초군의 지휘권을 탈취한 항우는 북진하여 장한의 진나라 군사들을 거록에서 대파하고 반진군의 영수가 되었다.


555.諸侯立之(제후립지);

제후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556.誅嬰背懷(주영배회),

이어서 항우는 진나라의 왕 자영(子嬰)을 죽이고 회왕을 배신하니


557.天下非之(천하비지).

천하 사람들은 그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558.作<項羽本紀>第七(작<항우본기>제칠)

이에 항우본기 제칠을 지었다.



559.子羽暴虐(자우포학),

항우는 포학하였으나


560.漢行功德(한생공덕);

한왕 유방은 공을 세우고 덕을 베풀었으며


561.憤發蜀漢(분발촉한),

촉과 한 땅에서 분발하여


▶촉(蜀)/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지방을 말함.

▶한(漢)/ 지금의 한중시(漢中市) 일대를 말함.


562.還定三秦(환정삼진);

관중으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삼진(三秦)/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옹(雍), 색(塞), 적(翟) 등으로 삼분하여 다스렸다. 함양 이서의 섬서성과 감숙성 동부는 장한(章邯)에게 맡겨 옹왕(雍王)에, 함양 이동지역은 사마흔(司馬欣)에 맡겨 색왕(塞王)에, 섬서성 북쪽은 동예(董翳)에 맡겨 적왕(翟王)에 봉했다. 후에 한신의 전격작전에 의해 모두 한왕의 소유가 되었다. 한초쟁패시 항우와의 결전에서 유방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했다.


563.誅籍業帝(주적업제),

항우를 죽이고 제업을 이루자


564.天下惟寧(천하유녕),

천하는 비로소 안정되었고


565.改制易俗(개제이속).

엄혹한 진나라의 법제를 고치고 백성들의 풍속을 바꾸었다.


566.作<高祖本紀>第八(작<고조본기>제팔).

이에 고조본기(高祖本紀) 제8을 지었다.


567.惠之早 (혜지조운),

고조의 뒤를 이은 혜제가 일찍 죽은 뒤


▶ 혜제(惠帝) 유영(劉盈)/ 한고조 유방의 아들로서 그의 나이 23세 때 죽었다. 기원전 195 - 188년으로 7년간 재위에 있었다.


568.諸呂不台(제려부태),

여씨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569.崇强祿, 産,(궁강록, 산)

여록(呂祿)과 여산(呂産)을 높여 강력한 권세를 주자


▶여록(呂祿)/ 여후의 둘째 오빠 건성후(建成侯) 여석지(呂釋之) 아들로서 여후에게는 생질(甥姪)이 된다. 여태후(呂太后) 섭정 원년(기원전 187년) 호릉후(胡陵侯)메 봉해지고 무신후(武信侯)라 불리웠다. 섭정 8년 기원전 180년에 여태후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상장군에 임명되어 도성의 북군(北軍)을 관장하였다. 이윽고 여태후가 죽자 여산(呂産)과 함께 란을 일으켜 여씨 왕조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주발(周勃), 진평(陳平) 등에게 살해되고 그가 이끌던 여씨 일족들은 멸족되었다.


▶여산(呂産)/ 여태후의 큰오빠 여주(呂周)의 차자. 혜제 원년 기원전 194년 교후(交侯)에 봉해졌다. 여태후 6년 기원전 182년 여왕(呂王)에 봉해졌다. 여태후에 의해 도성의 남군을 관장하는 장군에 임명되고 다시 여태후가 죽자 여록과 함께 란을 일으켰으나 주발과 진평에 의해 살해되었다.


570.諸侯謨之(제후모지);

제후들이 도모하려고 하였다.


571.殺隱幽友(살은유우),

여태후가 조나라의 은왕(隱王) 여의(如意)와 유왕(趙幽王) 우(友)를 죽이자


▶은(隱)/ 조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를 말하며 유여의는 고조의 총비 척비(戚妃) 소생으로 고조가 죽자 여태후가 불러 독약을 먹여 죽이고 척비는 눈알을 뽑고, 팔다리를 자른 다음 우리에 가두어 돼지처럼 키우다 죽였다.

▶유우(幽友)/ 고조 유방의 아들로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조왕(趙王)에 다시 봉해졌다. 혜제가 죽고 여태후의 전힁에 반대하자 살해되었다.


572.大臣洞疑(대신통의),

모든 대신들이 여씨들을 의심하게 되어


573.遂及宗禍(수급종화).

결국은 그 종족들이 멸족의 화를 입게 되었다.


574.作<呂太后本紀>第九(작<여태후본기>제구)

이에 여태후본기를 제 9를 지었다.


575.漢旣初興(한기초흥),

한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576.繼嗣不明(계사불명),

제위를 잇는 순서가 확실하지 않아


577.迎王踐祚(영왕천조),

대왕(代王)을 모셔 와 제위(帝位)에 앉히자


▶대왕(代王)/ 고조의 4남 유항(劉恒)이며 문제(文帝)이다. 재위에 오르자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고 산업을 장려하였으며, 검소한 생활을 몸소 행하여 뒤를 이은 경제(景帝)와 함께 치세를 이루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이 때를 가리켜 문경(文景)의 치(治)라 부른다.


578.天下歸心(천하귀심);

비로소 천하의 인심이 안정이 되었다.


579. 除肉刑(견제육형),

신체를 훼손하는 육형을 없애고,


580.開通關梁(개통관량),

통행의 요로에 설치한 관(關)과 나루터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


581.廣恩博施(광은박시),

그 은혜를 널리 베풀자


582.厥稱太宗(궐칭태종),

그를 일컫어 태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583.作<孝文本紀>第十(작<효문본기>제십)

이에 <효문본기(孝文本紀)> 제 10을 지었다.


584.諸侯驕恣(제후교자),

제후들이 교만 방자해진 결과


585.吳首爲亂(오수위란),

오왕이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켰다.


586.京師行誅(경사행주),

황제가 군사를 보내어 반란자들을 주살하니


587.七國伏辜(칠국복고),

칠국이 그 죄에 굴복하였다.


588.天下翕然(천하흡연),

천하는 화평하게 되었고


589.大安殷富(대안은부).

백성들의 생활은 크게 안정이 되어 풍요롭게 되었다.


590.作<孝景本紀>第十一(작<효경본기>제십일)

이에 <효경본기(孝景本紀)> 제 11을 지었다.


591.漢興五世(한흥오세),

한나라가 흥기한 지 오세에 이르러


592.隆載建元(융재건원),

건원(建元) 연간에 융성해 졌다.


▶건원(建元)/ 한무제가 시작한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된 연호이다. 한무제 원년 기원전 140년부터 무제 5년 기원전 136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593.外攘夷狄(외양이적),

나라 밖으로는 이적을 물리치고


594.內脩法度(내수법도),

나라 안으로는 법규를 정비하였고


595.封禪,改正朔, 易服色(봉선, 개정삭, 이복색).

봉선을 행했으며, 역법을 고치고 , 복색을 바꾸었다.


596.作<今上本紀>第十二(작<금상본기>제십이

이에 금상본기(今上本紀) 제 12를 지었다.



597.維三代尙矣(유삼대상의),

하상주(夏商周) 삼대는 너무 먼 옛날의 일이라


598.年紀不可考(연기불가고),

구체적인 연대기를 고찰할 수 없어


599. 盖取之譜牒舊聞(개취지보첩구문),

대체적으로 보첩이나 전언에


600.本于玆(본우자),

근거하여


601.于是略推(우시략추),

대략적인 추측으로


602. 作<三代世表>第一(작<삼대세표> 제일).

삼대세표(三代世表) 제일을 지었다.



603. 幽 之后(유려지후),

주나라의 려왕(厲王)과 유왕(幽王) 이후에


604. 周室衰微(주실쇠미),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지자


605. 諸侯專政(제후전정),

제후들이 그 정치를 스스로 행하였으나


606. <春秋>有所不紀(<춘추>유소불기);

춘추에도 그 기록이 빠진 것이 있다.


607.而譜牒經略(이보첩경략),

그러나 보첩에 기록된 경의 간단한 기록들을 보면


606. 五覇更盛衰(오패갱성쇠),

오패가 번갈아 가며 흥하고 망했다.


607. 慾睹周世相先后之意(욕도주세상선후지의),

그래서 주나라 시대에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한 눈으로 살펴보기 위해


608. 作<十二諸侯年表>第二(작<십이제후연표>)

<십이제후연표> 제2를 지었다.



609. 春秋之后(춘추지후),

춘추시대 이후로


610. 陪臣秉改(배신병개),

권신들이 정권을 잡고


611. 强國相王(강국상왕);

강국이 되어 서로 왕호를 칭했다.


612. 以至于秦(이지우진),

이윽고 진나라에 이르러


613. 卒幷諸夏(졸병제하),

중원의 제후국들을 모조리 병합하고


614. 滅封地(멸봉지),

그들의 봉지를 없앤 다음


615. 擅其號(천기호).

제호(帝號)를 제멋대로 칭했다.


616. 作<六國年表>第三(작<육국연표>)

이에 <육국연표> 제삼을 지었다.



617. 秦旣暴虐(진기포학),

진나라가 이미 폭정을 행하매


618. 楚人發難(초인발난),

초나라 사람이 일어나 난을 일으켰다.


619. 項氏遂亂(항씨수란),

항우가 그 뒤를 이으니


620. 漢乃扶義征伐(한내부양정벌);

한나라는 의를 내세워 정벌군을 일으켰다.


621. 八年之間(팔년지간),

그 팔 년 동안


622. 天下三嬗 (천하삼선),

천하는 주인이 세 번 바뀌었으며


▲ 삼선(三嬗)/ 세 번 바뀌었다는 말은 처음으로 진나라에 반기를 든 진승(陳勝)과 그 뒤를 이는 항우(項羽), 뒤이어 항우를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격파하고 한왕조를 세운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것을 말한다.


623. 事繁變衆(사번변중),

사건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고 변화가 많았다.


624. 故詳著<秦楚之際月表>第四(고상저 <진초지제월표>제4)

이에 상세하게 진초쟁패월표 제4를 지었다.


625. 漢興以來(한흥이래),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626. 至于太初百年(지우태초백년)

태초(太初)에 이르기까지 백년이 지나는 동안


▲태초(太初)/한무제 때 사용한 10개의 연호 중 7번째의 것으로 기원전 103년부터 101년 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627. 諸侯廢立分削(제후폐립분삭),

제후들은 그 지위를 잃어버리거나 다시 세워지고, 그 봉지는 나뉘거나 깎였으나


628. 譜記不明(보기불명),

그 보첩(報牒)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629. 有司靡踵(유사미종),

사관이 그 행적을 쫓지 못하고


630. 强弱之原雲以世(강약지원운이세)

강약의 원리를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약지원운(强弱之原雲)/ 제후국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먼저 망하고 약하면 약할수록 요행히 살아 남은 현상을 말한다.


631. 作<漢興以來諸侯年表>第五(작<한흥이래제후연표>제오)

이에 <한흥이래제후연표> 제오를 지었다.


632. 維高祖元功(유고조원공),

고조(高祖)가 천하를 얻었을 때,


633. 輔臣股肱(보신고굉),

그를 보좌한 창업공신들은


644. 剖符而爵(부부이작),

모두가 신임을 받아 봉록과 작위를 얻어


645. 澤流苗裔(택류묘예),

그 은혜와 혜택이 후세에 전해졌으나


646. 忘其昭穆(망기소목),

그 중에는, 가깝고 먼 친분관계를 망각한 결과


▶소목(昭穆)/ 고대의 종법(宗法) 제도로서 종묘(宗廟)와 묘지(墓地)에 모시는 신위(神位)의 순서로서, 그 시조(始祖)는 가운데에 두고 소(昭)라 칭했으며, 그 후손들 중 2, 4, 6세 등의 후손들은 시조의 좌측에, 3, 5, 7세 등의 후손들은 우측에 두고 목(穆)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소목(昭穆)이라는 말은 종족들 간의 가깝고 먼 관계를 말한다.


647. 惑殺身隕國(혹살신운국).

그 중에 어떤 제후들은 생명을 잃기도 하고 혹은 나라를 잃기도 했다.


648. 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작<고조공후자연표>제육)

이에 <고조공신후자연표> 제육을 지었다.



649. 北討强胡(북토강호),

북쪽으로는 강성한 흉노를 토벌하고


650. 南誅勁越(남주경월),

남쪽으로는 억센 월인들을 죽였으며


651. 征伐夷蠻(정벌이만),

다시 동이와 남만의 오랑캐를 정벌했다.


652. 武功爰列(무공원열)

그때 세운 무공의 순서에 따라 열후에 세워졌다.


653. 作<建元以來侯者年表>第八(작<건원이래후자연표>제팔)

이에 <건원이래제후연표> 제팔을 지었다.



654. 諸侯旣强(제후기강),

제후들이 이미 강성해지자


655. 七國爲從(칠국위종),

칠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칠국(七國)/ 오초(吳楚) 칠국의 란을 말함. 전한의 6대 황제인 경제(景帝 : 재위 기원전 157 - 141년으로 한무제는 그의 아들이다.) 때인 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주도한 반란. 칠국이란 오왕 외에 초왕(楚王) 유무(劉戊),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熊渠), 치천왕(淄川王) 유현(劉賢),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 조왕(趙王) 유수(劉遂) 등을 말한다. 경제가 즉위하자 법가인 조착(鼂錯)을 기용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줄이려고 하자 칠왕이 령에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周亞夫), 란포(欒布), 두영(竇嬰) 등의 장군을 보내어 진압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는 조착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칠국의 제후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 마저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오초(吳楚) 연합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지금의 안휘성 영성(永城) 북서 쪽의 극벽(棘壁)이란 곳에서 양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그러나 오초 반란군도 양나라의 도성인 수양성(睢陽城)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다. 오초 연합군이 양나라의 수양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를 태위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주아부는 토벌군을 이끌고 지금의 산동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있던 전략상의 요충지인 창읍(昌邑)으로 들어가 오초 연합군이 본국과의 연락로를 끊었다. 반란군이 창읍으로 달려와 토벌군을 공격했지만 주아부는 대응하지 않고 지구전을 벌렸다. 오초 반란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있었음으로 시간이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 반란군은 곤경에 빠뜨리고자 함이었다. 주아부의 생각대로 이윽고 반란군은 식량이 떨어져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하고 배고픔을 참지 못한 장병들이 잇달아 달아났다. 주아부가 창읍의 성에서 나와 반란군의 본군을 공격했다. 오왕은 친위대만을 데리고 달아났고 초왕 유무(劉戊)는 자살하고 말았다. 한편 교서, 교동, 치천, 제남의 왕들은 연합하여 오초에 호응하려고 했으나 제남왕이 중도에 마음을 바꿔 반란군에서 이탈하자 세 왕의 연합군이 그 도성인 임치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남왕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싸움은 교착상태로 빠졌다. 그 사이 오초 연합군이 주아부의 토벌군에 패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 왕들은 임치성에 대한 포위망을 풀고 철수했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토벌군이 추격하자 세 왕은 모두 자살했다. 한편 조왕 유수는 한단성(邯鄲城)에서 농성하며 저항했지만 한나라 장군 역기(酈寄)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 역시 자살하고 말았다. 창읍에서 달아나 장강을 도하하여 오나라 본국으로 들어간 오왕은 그의 요청에 응하여 출동한 동월군(東越軍)의 마중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는 동월왕은 반란군에게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한나라 조정과 내통하고 있던 상태였다. 동월군은 오왕을 잡아서 죽이고 그 목을 한나라 조정으로 보냈다. 이윽고 오초칠국의 란은 조왕이 한단성에서 농성하다 자살한 시점을 그 끝으로 본다면 10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림. 8 오초칠국의 란 형세도.


656. 子弟衆多(자제다중),

그러나 제후들의 자제가 많아지자


657. 無爵封邑(무작봉읍),

그들에게 나누어 줄 작위에 봉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658. 推恩行義(추은행의),

이에 은혜를 베풀어 의를 행하도록 하여


▶추은(推恩)/ 한무제 14년 원삭 2년 즉 기원전 127년에 무제는 주보언(主父偃)의 건의에 따라 추은령(推恩令)을 내려 제후들의 작위를 계승한 적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자제들에게도 그 봉토를 나누어주어 황제의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며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659. 其勢銷弱(기세소약),

그 세력을 약화시켰고


660. 德歸京師(덕귀경사).

그 덕은 모두 황실로 향하게 했다.


661. 作<王子侯者年表>第九(작<왕자후자연표>제구)

이에 <왕자후자연표>제구를 지었다.



662. 國有賢相良將(국유현상양장),

나라에 어진 재상과 훌륭한 장수가 있음은


663. 民之師表也(민지사표야).

백성들의 본보기다.


664. 維見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유견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장군과 재상 그리고 명신 연표를 보고


665. 賢者記其治(현자기기치),

어진 사람에 대해서는 그 치적을 기록하고


666. 不賢者彰其事(불현자창기사).

어질지 못할 자에게는 그가 저지른 잘못을 기록하여 널리 알렸다.


667. 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第十(작<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제십)

이에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제십을 지었다.



668. 維三代之禮(유삼대지례),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예(禮)는


669. 所損益各殊務(소손익각수무),

덜하고 더한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각기 그 일의 사정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670. 然要以近性情(연요이근성정),

그러나 그 요지는 사람의 성정에 가까이 하고


671. 通王道(통왕도),

왕도에 통하고자 한 것이다.


672. 故禮因人質爲之節文(고예인인질위지절문),

그럼으로 예(禮)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화려함을 절제하고


673. 略協古今之變(약협고금지변).

대략 고금의 변을 참작하게 한다.


674. 作<禮書>第一.(작<예서>제일)

이에 <예서> 제일을 짓는다.



675. 樂者(악자),

음악이란 것은


676. 所以移風易俗也(소이이풍역속야).

풍속을 옮기고 바꾸는 것이다.


677. 自<雅><頌>聲興(자<아><송>성흥),

<아(雅)>와 <송(頌)>의 소리가 일어나면서부터


678. 則已好鄭衛之音(즉이호정위지음)

사람들은 이미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어,


679. 鄭衛之音所從來久矣(정위지음소종래구의).

정위(鄭衛) 두 나라의 음악은 그 유래가 깊게 되었다.


680. 人情之所感(인정지소감),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이 정으로서 감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681. 遠俗則懷(원속즉회).

풍속이 전혀 다른 먼 지방의 사람까지도 회유할 수 있다.


▶遠俗則懷(원속즉회) " 惡子所以感和人情. 人情旣感卽遠方殊俗莫不懷柔向化也" 懷, 人心歸向.-史記集解,

被人情所感發, 那遠方異俗之人就會歸附-文白對照


682. 比<樂書>以述來古(비<악서>이술래고),

악서를 참고하여 상고 이래의 음악에 대해 기술하였다.


683. 作<樂書>第二(작<악서> 제이)

이에 <악서> 제이를 지었다.



684. 非兵不强(비병불강),

군사가 없으면 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없고


685. 非德不昌(비덕불창),

나라 안에 덕이 없으면 번창하게 할 수 없다.


686. 黃帝, 湯, 武以興(황제, 탕, 무이흥),

황제와 탕임금, 주무왕은 나라를 일으켜 흥성하게 만들었으나


687. 桀, 紂, 二世以崩(걸, 주, 이세이붕)

하나라의 걸왕(桀王), 상나라의 주왕(紂王), 그리고 진나라의 이세(二世)는 나라를 망친 임금이 되었다.


688. 可不愼歟(가불신서).

이에 이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689. <司馬法>所從來尙矣(<사마법>소종래상의),

<사마병법>은 전해 온지 이미 오래 되었고


▶사마법(司馬法)/ 전국시대 때 제나라 위왕(威王: 재위 기원전 359- 319년)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여 과거 장군들이 써 놓았던 병서를 정리하게 했는데 그 중 제나라 경공(景公 : 재위 기원전 547- 490년) 때의 명장 사마양저(司馬穰苴)의 병법이 포함되어 있어 사마양저병법이라고 칭하고 줄여서 사마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690 太公, 孫, 吳, 王子能紹而明之(태공, 손, 오, 왕자능소이명지),

태공(太公) 여상(呂尙), 손자(孫子), 오기(吳起), 왕자성보(王子成父) 등은 능히 그 원리를 이어 받아 병사의 일을 밝힐 수 있어


▶여상(呂尙)/ 병법서인 육도(六韜)를 지었다. 육도는 태공이 주문왕과 주무왕에게 경세제민(經世濟民)과 부국강병(富國强兵) 책에 대해 논한 것이다. 모두 3권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 문무도(文武韜) 17편은 치국(治國)에 관하여, 제2권 용호도(龍虎韜) 25편은 기변(奇變)과 용맹과단(勇猛果斷), 제3권 표견도(豹犬韜) 18편은 기계(奇計)와 돌진(突進)에 관해 서술했다.


손자(孫子)/ 손자는 오자서와 함께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한 손무(孫武)와, 후에 제위왕(齊威王) 밑에서 방연(龐涓)이 이끄는 위나라의 군사를 계릉(桂陵)과 마릉(馬陵)에서 대파한 제나라의 손빈(孫臏) 두 사람을 말한다. 두 사람은 각각 별도의 병법서를 저술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자(吳子)/ 오기(吳起)를 말한다. 전국시대 때 전략가로 원래 위(衛)나라 사람이다. 처음에는 노나라에서 장군을 했고 이어서 위(魏)나라로 옮겨 여러 번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위문후(魏文侯)에 의해 서하(西河) 태수로 임명되었다. 위문후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위무후(魏武侯)가 즉위하자 초나라로 망명했다. 초도왕(楚悼王 : 재위 기원전 402-381년) 밑에서 영윤(令尹)에 임명되어 초나라의 법률을 개선하고 제도를 혁신시켜 초나라의 국력을 일신시켰다. 도왕이 죽자 오기의 개혁 정치에 불만을 품은 공족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왕자성보(王子成甫)/ 춘추 때 제나라 양공(襄公 : 재위 기원전 698-686년) 때 정경(正卿)으로, 유명한 군사전략가. 왕자성보(王子成父), 혹은 왕자성보(王子城父)라고도 한다. 제환공이 재위에 오르자 그를 제나라의 대장으로 삼았다. 그는 군법을 밝혔으며 신상필벌을 행하여 일단 정벌군을 일으키면 싸움에서 이겨 환공을 짧은 시간에 패자의 자리에 끌어 올렸다. 이에 사마천은 그를 태공, 손자, 오기와 같은 반열에 세웠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왕손(王孫)>의 작으로 병법 16편이 실려 있는데 이것을 왕자성보의 병법서로 보고 있다.


691. 切近世(절근세),

근자의 정세를 살피는데 적합하고


692. 極人變(극인변),

인사의 변화에 대해 통하게 했다.


693. 作<律書>第三(작<율서>제삼)

이에 <율서> 제삼을 지었다.



694. 律居陰而治陽(율거음이치양),

율은 음(陰)에 근거로 하여 양(陽)을 다스리며


695. 曆居陽而治陰(역거양이치음),

력은 양을 근거로하여 음을 다스린다.


696. 律曆更相治(율력갱상치),

그래서 율과 역은 번갈아 가며 서로를 다스림으로


697. 間不容翲忽(간불용표홀).

간발의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다.


698. 五家之文怫異(오가지문불이),

옛날 다섯 왕조에서 만든 역법은 서로 같지 않아 옳다고 여겨지지 않으나


▶오가지문(五家之文)/ 황제력(黃帝曆), 전욱력(顓頊曆), 하력(夏曆), 은력(殷曆), 주력(周曆)을 말한다.


699. 維太初之元論(유태조이원론).

단지 태초 원년만이 바른 것이라고 논하는 바다.


700. 作<曆書>第四(작<역서>제사)

이에 <역서> 제사를 짓는다.



701. 星氣之書(성기지서),

별의 운행과 기상의 변화에 대한 서적은


702. 多雜 祥(다잡기상),

길흉화복에 대한 이야기를 잡다하게 늘어놓고 있지만


703. 不經(불경);

황당하고 근거가 없어 상도가 아니다.


704. 推其文(추기문),

그 문장을 미루어 연구하여


705. 考其應(고기응),

그것의 효험을 고찰해 봤으나


706. 不殊(불수).

결코 특이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707. 比集論其行事(비집논기행사).

황제께서 전문가들을 불러 그 일에 대한 것들을 토론하여 규명하도록 명하여


708. 驗于軌度以次(험우궤도이차),

그 순서에 따라 운행되는 법도를 파악하였다.


709. 作<天官書>第五.(작<천관서>제오)

이에 <천관서>제오를 지었다.



710. 受命而王(수명이왕),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711. 封禪之符罕用(봉선지부한용),

봉선을 행하는데 소홀히 했다.


712. 用則萬靈罔不禋祀(용즉만령망불인사).

만일 봉선을 한 번 행한다면 세상의 모든 신들이 따로 제사를 받지 않아도 됨으로


713. 追本諸神名山大川禮(추본제신명산대천례).

이에 명산대천의 여러 신들에 대한 제례에 대해 그 근본을 추구하여


714. 作<封禪書>第六(작<봉선서>제육)

<봉선서> 제육을 지었다.



715. 維禹浚川(유우준천),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이 하수(河水)를 뚫어


716. 九州攸寧(구주유녕);

구주가 평안하게 되었고


717. 爰及宣防(원급선방),

선방궁(宣房宮)을 건설할 때는


▶선방궁(宣房宮)/원광(元光) 3년 기원전 132년 황하가 호자(瓠子)에서 범람하였다. 그후 20여 년 후에 한무제(漢武帝)가 명하여 호자의 둑을 다시 만들고 그 자리에 궁을 짓고 선방궁이라 이름지었다.

▶호자(瓠子)/ 호자는 지금의 하남성 거야현에 있던 대야택(大野澤)에서 황하의 남안 도시인 복양시(濮陽市)를 거쳐 황화로 흘렀던 하천을 말한다.


718. 決瀆通溝(결독통구).

도랑을 뚫어 강물을 통하게 만들었다.


719. 作<河渠書>第七(작<하거서>제칠)

이에 <하거서> 제칠을 짓는다.



720. 維幣之行(유폐지행),

화폐를 유통시키는 것은 단지


721. 以通農商(이통농상);

농사와 상업을 통하게 함이다.


722. 其極則玩巧(기극즉완교),

그러나 그 극단에 치우치게 되면 농단과 재주를 부리며


723. 竝兼玆殖(병겸자식),

남의 재산을 합쳐 증식시키기 위해


724. 爭于機利(쟁우기리),

서로 그 이익을 다투게 되어


725. 去本趨末(거본추말).

상업이 농업을 압도하게 되어 본말이 전도되게 된다.


726. 作<平準書>以觀事變, 第八(작<평준서>이관사변, 제팔)

이에 그 일의 변화를 보기 위해 <평준서> 제팔을 짓는다.



727. 太伯避歷(태백피력),

태백이 계력을 피해


▶태백(太伯)/ 주족(周族)의 족장.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태백(太伯), 우중(虞仲), 계력(季歷)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고공단보가 계력의 아들인 창(昌)이 주족을 일으킬 재목임을 알고 그의 자리를 계력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이에 태백과 우중은 계력이 주족의 족장 자리를 물려받게 하기 위해 남만으로 달아나 만족의 습속을 하고 살다가 그곳의 군주가 되었다. 한편 주나라는 계력의 뒤를 이은 창(昌)이 주족의 족장이 되어 은나라로부터 서백(西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인 무왕 때에 이르러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창의 시호가 주문왕(周文王)이다.


728. 江蠻是適(강만시적);

강수를 넘어 남만으로 달아났다.


729. 文武攸興(문무유흥),

이어 주나라는 주문왕과 주무왕의 치세에 힘입어 흥기하여


730. 古公王迹(고공왕적).

고공단보가 꿈꾸었던 왕업을 세웠다.


731. 闔廬弑僚(합려시료),

한편 태백의 후예들이 세운 남만의 오나라에서는 합려가 왕료(王僚)를 시해하여 그 군주를 차지하고


732. 賓服荊楚(빈복형초);

초나라를 복종시켰으며


733. 夫差克齊(부차극제),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겨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734. 子胥<低-人+鳥>夷(자서치이);

오자서를 죽여 말가죽 부대에 싸서 강물에 던졌다.


735. 信<喜+丕>親越(신비친월),

부차는 백비(伯嚭)의 간사스러운 말을 믿고 월나라와 친해진 결과


736. 吳國旣滅(오국기멸).

오나라는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737. 嘉伯之讓(가백지양),

태백이 주족의 족장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한 미덕을 기리어


738. 作<吳世家>第一(작<오세가>제일).

<오세가> 제일을 지었다.



739. 申呂肖矣(신려초의),

신(申)과 여(呂)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신(申)/ 강성(姜姓)의 일족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백이(伯夷)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고도 한다. 원래 신나라의 근거지는 섬서성 북쪽이었으나 주선왕 때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의 땅에 봉해졌다. 춘추 초기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신의 땅은 초나라가 북진하는데 전략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여(呂)/ 역시 강성(姜姓)의 일족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사악(四嶽)의 후손이 세운 나라라고도 한다.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쪽에 있었다. 여나라도 역시 춘추 초기 초나라에 의해 병탄 당했다.


740. 尙父側微(상보측미),

상보(尙父)는 보잘것없는 신세가 되었다가


741. 卒歸西伯(졸귀서백),

결국은 서백에게 귀의하여


742. 文武是師(문무시사);

주문왕과 주무왕의 스승이 되었다.


743. 功冠群公(공관군공),

그가 세운 공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으뜸이었고


744. 繆權于幽(무권우유);

권모술수에 제법 능했다.


745. 番番黃髮(번번황발),

그는 자기의 머리가 황백색으로 변한 90 노구에


746. 爰饗營口(원향영구).

제나라 땅인 영구(營口)를 봉지로 받았다.


747. 不背柯盟(불배가맹),

그의 후손 중 가(柯) 땅의 맹약을 배반하지 않았던


748. 桓公以昌(환공이창),

제환공은 그로 인하여 크게 일어나


749. 九合諸侯(구합제후),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회합시킬 수 있었고


750. 覇公顯彰(패공현창).

패자가 되어 그 업적이 만고에 빛나게 되었다.


751. 田闞爭寵(전감쟁총),

후에 전상(田常)과 감지(闞止)가 제나라 군주의 총애를 다투다가


752. 姜姓解亡(강성해망).

이윽고 강성의 제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753. 嘉父之謀(가부지모),

상보(尙父)의 훌륭한 권모를 칭송하여


754. 作<齊太公世家>第二(작<제태공세가>제이)

<제태공세가>제이를 짓는다.



755. 依之違之(의지위지),

주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어떤 자들은 복종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따르지 않았다.


756. 周公綏之(주공수지);

주공단이 이것을 안정시키고


757. 憤發文德(분발문덕),

문덕을 베푸는데 한층 분발하자


758. 天下和之(천하화지);

천하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759. 輔翼成王(보익성왕),

주공단이 어린 성왕을 보좌했음으로


760. 諸侯宗周(제후종주),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로 삼았다.


761. 隱桓之際(은환지제),

그러나 주공단의 자손들인 노은공(魯隱公)과 노환공(魯桓公) 시대 때는

▶노은공(魯隱公)/ 기원전 722년에 즉위하여 712년에 죽은 노나라의 군주다. 노혜공의 서자로 혜공이 죽자 태자 允이 어려 서자이지만

▶노환공(魯桓公)/


762. 是獨何哉(시독하재)?

어찌하여 유독 편안하지 못했던가?


763. 三桓爭强(삼환쟁강),

삼환이 서로 세력을 다투었기 때문에


▶삼환(三桓)/ 춘추시대 때 노나라의 국정을 전담했던 세 귀족 가문을 말하며 세 가문의 시조는 모두 노환공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삼환이라 부른 것이다. 노환공은 문강을 따라 제나라를 방문했다가 제양공에게 살해당했다. 노환공이 두 사람의 간통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제양공(齊襄公)이 사람을 시켜 수레 안에서 살해 한 것이다. 노환공의 뒤는 적자인 노장공(魯庄公) 동(同)이 이었다. 노장공의 서장자인 공자경보(公子慶父)와 그 동생 숙아(叔牙) 그리고 장공의 동복 동생 계우(季友)의 후손들을 삼환이라 한 것이다. 삼환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桓公 x宮女

①孟孫氏/식읍은 성읍(郕邑)이다.

公子慶父 ⇒公孫敖 ⇒公孫穀/公孫難 ⇒仲孫蔑


②叔孫氏/식읍은 후읍(郈邑)이다.

公子牙(叔牙) ⇒ 公孫玆⇒叔仲彭生 ⇒叔孫得臣 ⇒叔孫僑如


桓公x文姜 ▶庄公(公子同)⇒ 東門遂(장공의 서자/仲遂)⇒

/仲孫氏


③季孫氏/식읍은 비읍(費邑)과 문양(汶陽)이다.

公子友(季友)⇒ 季无佚⇒ 季孫行夫(季文子)


764. 魯乃不昌(노내불창).

노나라는 결국은 크게 번창하지 못한 것이다.


765. 嘉旦<金>(가단<금등>)

주공단이 행한 금등(金)의 아름다운 행위를 칭송하여


▶금등(金)/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1년만에 병이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주공단은 주무왕 대신에 자기의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선조들에게 기도를 들였다. 그리고 태사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하고 축문을 써서 읽게 하였다. 점의 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 점괘를 금괘 안에 보관하고 금으로 밀봉하였다. 금등이란 금을 녹여 그 물로 봉함한 궤를 말했으나 후에 그 안에 든 축문의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 그 축문은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수록되어 있다.


766. 作<周公世家>第三(작<주공세가>제삼)

<주공세가>제삼을 짓는다.



767. 武王克紂(무왕극주),

주무왕이 주왕을 토벌하였으나


768. 天下未協而崩(천하미협이붕).

천하의 인심을 미처 얻기도 전에 죽었다.


769. 成王旣幼(성왕기유),

무왕의 아들이 뒤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770. 管蔡疑之(관채의지),

관숙과 채숙이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던 주공을 의심하였고


771. 淮夷叛之(회이반지),

다시 회수(淮水) 강안에 살던 이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772. 于是召公率德(우시소공솔덕),

그래서 소공은 덕으로써 그들을 이끔으로써


773. 安集王室以寧東土(안집왕실이영동토).

천하의 인심을 왕실에 쏠리게 하여 안정시키고 동쪽의 땅을 평안하게 하였다.


774. 燕(易)(噲)之禪(연이쾌지선),

소공의 후손인 연왕 쾌는 선양의 도를 흉내내다가


775. 乃成禍亂(내성화란).

이윽고는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776. 嘉<甘棠>之詩(가<감당>지시)

<감당(甘棠)>의 시에서 노래한 소공의 아름다운 행위를 칭송하여


777. 作<燕世家>第四(작<연세시가>제사)

<연세가>제사를 지었다.


778. 管蔡相武庚(관채상무경),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무경(武庚)의 상(相)이 되어


779. 將寧舊商(장영구상);

장차 옛 상나라의 땅의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780. 及旦攝政(급단섭정),

그러나 주공단이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의 자리에 앉자


781. 二叔不饗(이숙불향);

두 사람은 마음에 의심을 품었다.


782. 殺鮮放度(살선방탁),

이에 주공단은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한 다음


783. 周公爲盟(주공위맹);

어린 성왕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다할 것임을 맹세했다.


784. 大任十子(태임십자),

대임은 슬하에 아들을 열이나 두어


▶대임(大任)/ 태임(太任) 혹은 태사(太姒)라고도 한다. 주문왕의 정비이며 주무왕의 모친이다. 10명의 아들은 그 순서에 따라 백읍(伯邑) 고(考), 무왕(武王) 발(發), 관숙(管叔) 선(鮮), 주공(周公) 단(旦), 채숙(蔡叔) 도(度), 조숙(曹叔) 진탁(振鐸), 성숙(成叔) 무(武), 곽숙(霍叔) 처(處), 강숙(康叔) 봉(封), 염계(冉季) 재(載) 등이다.


785. 周以宗强(주이종강).

주나라는 종실로써 강성하게 되었다.


786. 嘉仲悔過(가중회과).

이어서 채훅의 아들 채중이 그 부친의 잘못을 뉘우쳐 선행을 했음으로


787. 作<管蔡世家>第五(작<관채세가>제오)

<관채세가>제오를 지었다.



788. 王后不絶(왕후부절),

옛날 성왕(聖王)들의 후손들이 끊어지게 하지 않았으니


789. 禹舜是說(우순시설);

이는 우임금과 순임금이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


790. 維德休命(유덕휴명),

그들이 베푼 덕은 아름답고 청명하여


791. 苗裔蒙烈(묘예몽열).

그 후세들이 은혜를 입었고


792. 百世亨祀(백세형사),

백세가 되도록 제사밥을 얻어먹다가


793. 爰周陳杞(원주진기),

주나라에 시대에 이르러 분봉되어 진나라와 기(杞)나라라는 제후국이 되었으나


794. 楚實滅之(초실멸지).

후에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795. 齊田旣起(제전기기),

그러나 진씨들은 다시 제나라로 들어가 전씨로 성을 바꾸어 제나라를 차지하였으니


796. 舜何人哉(순하인재)?

도대체 순임금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기에 그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그렇게 번창했단 말인가?


797. 作<陳杞世家>第六(작<진기세가>제육)

이에 <진기세가>제육을 지었다.



798. 收殷余民(수은여민),

주무왕은 은나라의 유민들을 수습하여


799. 叔封始邑(숙봉시읍),

강숙(康叔) 봉(封)을 봉하고


800. 申以商亂(신이상란),

상나라 말에 어지럽게 된 것을 일러주며


801. <酒><材>是告(<주><제>시고),

<주고(酒誥)>와 <재재(梓材)>를 글로 써서 경계로 삼게 했다.


▶주고(酒誥)와 재재(梓材)/ 주공이 그 아우인 강숙(康叔) 봉(封)을 은나라의 구토에 봉하면서 은나라가 말기에 나라가 부패하여 망하게 된 것을 말하고 그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훈계한 내용을 담은 글로써 상기 두 편 외에 <강고(康誥)> 한 편이 더 있다. 모두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실려 있다.


802. 及朔之生(급삭지생),

이어서 위나라가 혜공(惠公) 삭(朔)의 대에 이르게 되자


▶혜공(惠公) 삭(朔) / 재위 기원전 699년-697, 686-669년. 위선공(衛宣公)의 아들로서 이복형인 세자인 급자와 동복형인 공자수(公子壽)를 살해하고 위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 일로 해서 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은 제나라로 망명했다가 14년 만에 제양공의 도움으로 다시 위후의 자리를 찾았다.


803. 衛頃不寧(위경불녕);

국세가 기우러져 평안한 때가 없게 되었다.


804. 南子惡蒯聵(남자오괴외),

이어서 위영공(衛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는 그의 아들 괴외(蒯聵)를 싫어하여


805. 子父易名(자부이명).

아들과 부친의 명분을 전도시켰다.


806. 周德卑微(주덕비미),

주나라의 덕이 쇠미해지고


807. 戰國旣强(전국기강),

전국의 일곱 나라가 갈수록 강성해지자


808. 衛以小弱(위이소약),

위나라는 소국으로 전락하여 국세가 미약하게 되었으나


809. 角獨后亡(각독후망).

육국이 진나라에 병합된 뒤에도 계속 살아 남아 각왕(角王) 때 최후로 망했다.


810. 嘉彼<康誥>(가피<강고>),

저 <강고(康誥)>의 덕을 칭송하여


811. 作<衛世家>第七(작<위세가>제칠)

<위세가> 제칠을 지었다.



812. 嗟箕子乎(차기자호)!

오호라, 기자여!


813. 嗟箕子乎(차기자호)!

오호라, 기자여!


814. 正言不用(정언불용),

올바른 말을 했으나 받아들여지기는커녕


815. 乃反爲奴(내반위노).

오히려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구나!


816. 武庚旣死(무경기사),

주나라는 무경이 반하자 죽이고


817. 周封微子(주봉미자).

미자계(微子啓)를 다시 봉했다.


818. 襄公傷于泓(양공상우홍),

이어서 그 후예인 양공(襄公)은 초나라와 홍수(泓水)의 싸움에서 의(義) 지키려다가 패하고 부상을 입었는데


819. 君子孰稱(군자수칭).

군자라면 그 누구가 도를 말할 수 있겠는가?


820. 景公謙德(경공겸덕),

후에 송경공은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나


821. 熒惑退行(형혹퇴행).

형혹성이 위치를 바꾸어 송나라로부터 벗어났다.


822. 剔成暴虐(척성포학),

이어서 척성이 포학무도 했음으로


▶척성(剔成)/ 전국 중기 때 송강왕으로 송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823. 宋乃滅亡(송내멸망).

송나라는 이로 인하여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824. 嘉微子問太師(가미자문태사),

미자계(微子啓)가 송나라에 책봉되자 기자(箕子)를 태사로 삼아 자문을 구하여 정치를 행한 것을 칭송하여


825. 作<宋世家>第八(작<송세가>제팔).

<송세가>제팔을 지었다.


826. 武王旣崩(무왕기붕),

주무왕이 죽고


827. 叔虞邑唐(숙우읍당).

그 아들인 성왕이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를 당(唐)에 봉했다.


828. 君子譏名(군자기명),

그러나 문후 때에 이르자 이름의 순서가 바뀌어


829. 卒滅武公(졸멸무공).

결국은 분봉된 동생의 나라 출신인 무공이 본국을 멸하고 말았다.


830. 驪姬之愛(려희지애),

후에 진헌공은 여희(驪姬)에 빠져


831. 亂者五世(란자오세);

다섯 군주의 치세 동안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832. 重耳不得意(중이부득의),

중이는 오랫동안 뜻을 얻지 못하다가


833. 乃能成覇(내능성패).

19년 동안의 유랑생활 끝에 결국은 패업을 이루게 되었다.


834. 六卿專權(육경전권),

진나라가 강성하게 되자 육경이 권력을 독점하여


835. 晉國以 (진국이모).

진나라는 끝내는 그 힘을 다하게 되었다.


836. 嘉文公錫珪鬯(가문공석규울),

진문공이 주천자로부터 옥으로 만든 규(珪)와 울창주(鬱鬯酒)를 하사 받은 것을 칭송하여


▶규(珪)/ 옥이나 나무로 만든 자루가 달리고 둥그런 모양의 술잔으로 제사를 지낼 때 울창주(鬱鬯酒)를 담았다. 제기(祭器)의 일종이다.

▶창(鬯)/ 울창주(鬱鬯酒)를 말하며 제주(祭酒)로 사용하기 위해 울금향(鬱金香)을 넣어서 빚은 술을 말함. 울금향이란 백합과의 다년초인 튜율립에서 채취한 향이다. 봄철에 황색, 백색 등의 꽃이 피며 향기가 있다. 주로 천자가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주(祭酒)를 빚는 데에 사용한다.

▶상기 기사는 주양왕(周襄王) 20년 기원전 632년 진문공(晉文公)이 이끄는 진군(晉軍)과 초성왕의 장수인 성득신(成得臣)이 이끌던 초군(楚軍)이 성복(城濮)에서 크게 싸운 결과 진군이 이겨 그때 잡은 포로와 전리품을 주천자에게 받쳤다. 주천자는 진문공의 공로를 포상하여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기와 술인 하사했다. 규(珪)는 옥으로 만든 술잔이고 울창주는 울금향으로 빚은 술이다.


837. 作<晉世家>第九(작<진세가>제구).

<진세가>제구를 지었다.



838. 重黎業之(중려업지),

중려(重黎)는 화정(火正)이 되어 제곡(帝嚳)을 위해 공을 세웠으나 공공(共工)의 란을 진압하지 못하자 살해당하고


▶중려(重黎)/고양씨는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고양씨가 칭( )을 낳고 칭은 권장(卷章)을 낳았다. 중려(重黎)는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를 위해 화정(火正)의 벼슬에 앉아 큰공을 세웠다. 그로 인하여 천하가 밝게 빛나게 되었다. 제곡이 명하여 중려를 세상을 밝게 빛냈다는 뜻의 축융(祝融)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공공씨(共工氏)가 란을 일으키자 제곡(帝嚳)이 중려에게 명하여 공공의 무리들을 잡아죽이게 하였으나 모두 소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곡이 경인(庚寅) 일에 중려를 죽이고 그 후임에 중려의 동생 오회(吳回)를 세워 화정의 벼슬을 주었다. 오회가 축융이 되었다. (초세가)

▶ 창의(昌意)/ 황제(黃帝)의 둘째 아들로 황제(黃帝)의 비(妃) 누조(嫘祖)의 소생이다. 누조는 서릉씨(西陵氏)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양육(養 )을 가르쳤기 때문에 선육(先 )이라고도 하고 또 여행 다니기를 즐겨 하다가 길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도로신(道路神)이라고도 한다.


839. 吳回接之(오회접지), 오회(吳回)가 그 뒤를 이어 화정이 되었다.


840. 殷之季世(은지계세),

은나라 말기에 이르자 오희의 손자인 계련이 그 대를 이어 초나라의 시조가 되어


▶오회가 육종을 낳고 육종이 여섯 아들을 부인의 옆구리를 갈라 낳게 하였다. 장남을 곤오(昆吾)라 하고 이남을 삼호(參胡), 삼남은 팽조(彭祖), 사남은 회인(會人), 오남은 조성(曹姓)이고 여섯 번째는 계련(季連)인 미성(羋姓)이었는데 이가 초나라의 선조이다.


841. 粥子牒之(죽자첩지).

이때부터 죽웅의 후손들에 대한 역사가 쓰여지게 되었다.


842. 周用熊繹(주용웅역),

주나라 죽웅의 후손인 웅역(熊繹)을 초자(楚子)에 봉하고


843. 熊渠是繼(웅거시계).

그 뒤를 웅거(熊渠)가 이었다.


844. 庄王之賢(장왕지현),

어진 마음의 초장왕은


845. 乃復國陳(내복국진);

멸한 진나라를 다시 세워주고


846. 旣赦鄭伯(기사정백),

초나라에 항거한 정나라를 용서했다.


847. 班師華元(반사화원).

송나라의 우사(右師) 화원의 말을 믿고 군사를 물리쳤으며


848. 懷王客死(회왕객사),

후에 전국 때의 초회왕은 진나라에 유인되어 결국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객사했으나


849. 蘭咎屈原(란구굴원);

자란과 근상은 그 잘못을 모두 굴원에게 돌렸다.


850. 好諛信讒(호유신참),

초회왕은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고 어진 신하를 참소하는 말을 믿었기 때문에


851. 楚幷于秦(초병우진).

초나라는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망하게 된 것이다.


852. 嘉庄王之義(가장왕지의),

초장왕의 의로운 뜻을 기리어


853. 作<楚世家>第十(작<초세가>제십)

<초세가>제십을 지었다.



854. 少康之子(소강지자),

소강의 아들 여(餘)는


▶소강(少康)/ 하나라 6대 왕으로 상(相) 임금의 아들이다. 한착(寒浞)이 상(相) 임금을 살해하자 임신하고 있던 상(相)의 왕비 민(緡)이 유잉씨(有仍氏)에게 달아나 그곳에서 소강을 낳았다. 유잉씨의 목정(牧正)이 되었다가 후에 유우씨(有虞氏)에게로 달아나 포정(庖正)이 되어 사방 10리 되는 일 성(成)의 전답과, 5백 명에 해당하는 일 려(旅)의 백성을 얻었다. 후에 동성의 부락들가 힘을 합하여 한착(寒浞)을 멸하고 하왕조를 중흥시켰다. 22년 동안 재위에 있었으며 역사상 ‘소강중흥(少康中興)’이라 칭한다.


855. 實賓南海(실빈남해),

남해(南海)의 바닷가로 가서


856. 文身斷髮(문신단발),

몸에는 문신을 하고 머리를 자르고


857. 黿鱓與處(원선여처),

자라와 물고기들과 함께 살며


858. 旣守封禺(기수봉우),

우산(禺山)에 봉해져 그곳을 지키다가


▶禺山/ 지금의 절강성 덕청현(德淸縣) 경내 봉산(封山)의 동남에 있었던 산 이름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 “ 방풍씨(防風氏)는 왕망씨(汪罔氏)의 군장들로 봉산(封山)과 우산(禺山)을 지키며 그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성은 리씨(釐氏)라 했다. 우(虞), 하(夏), 상(商) 나라 때는 왕망(汪罔)이라 했고 주나라 때는 장적(長翟)이라 했으며 지금은 대인족(大人族)이라고 부르고 있다. ”


859. 奉禹之祀(봉우지사).

우임금의 제사를 모셨다.


860. 句踐困彼(구천곤피),

그 후손인 구천은 부차에게 곤욕을 치렀으나


861. 乃用種,蠡 (내용종,려).

이내 문종(文宗)과 범려(范蠡)를 얻어 신임하였다.


862. 嘉句踐夷蠻能脩其德(가구천이만능수기덕),

구천이 만이(蠻夷)들 속에 있으면서 능히 그 덕을 쌓아


863. 滅强吳以尊周室(멸강오이존주실),

강대한 오나라를 멸하고 주왕실을 받든 것을 기리어


864. 作<越王句踐世家>第十一(작<월왕구천세가>제십일)

<월왕구천세가> 제십일을 지었다.



865. 桓公之東(환공지동),

정환공(鄭桓公) 우(友)가 동쪽의 땅으로 그 봉지를 옮긴 것은


866. 太史是庸(태사시용).

주왕실의 태사 백(伯)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다음은 <정세가> 편에 실린 태사(太史) 백(伯)의 말이다.

" 낙수(洛水)의 동쪽이며 하수의 남안(南岸)에 해당하는 땅만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대에는 괵국(虢國)과 회국(鄶國)이 있는데 그 군주들이 탐욕스럽고 이(利) 만을 밝히는 자들이라 백성들이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사도(司徒)의 직에 계시고 백성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계시니 그곳 주변의 땅을 성심껏 청하신다면 괵국과 회국의 군주들은 공께서 주왕실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의 봉지를 떼어 줄 것입니다. 공께서 그곳에 자리잡으신다면 괵국과 회국의 백성들은 모두 공의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주나라가 쇠하게 되면 제(齊), 당진(唐晉), 섬진(陝秦), 초(楚) 등의 나라가 흥성하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는 강성(姜姓)이며 백이(伯夷)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백이는 옛날 요(堯)임금을 도와 나라의 법도와 예절을 제정했습니다. 섬진(陝秦)은 영성(嬴姓)이며 백예(伯翳)의 후손들입니다. 백예는 순(舜)임금을 도와 많은 부락을 회유하고 귀순시켜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초(楚)나라의 조상들도 역시 천하를 위해 큰공을 세웠습니다.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뒤를 이었습니다. 성왕이 당(唐) 땅을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에게 주어 제후로 봉했습니다. 당 땅은 산천의 지세가 험(險)하여 이 곳에서 덕 있는 후손이 태어나 주나라가 쇠퇴하게 되면 같이 병존(竝存)하게 되어 당진(唐晉)은 틀림없이 흥성(興盛)하게 될 것입니다. "


▶괵(虢)/ 주문왕(周文王)의 동생들인 숙(叔)과 중(仲)이 각각 동괵(東虢)과 서괵(西虢)에 봉해졌다. 서괵이 후에 동천(東遷)하는 주평왕(周平王)을 따라 같이 동쪽으로 옮겨 북괵이 되고 원래 서괵의 자리에는 잔존세력이 나라를 세워 소괵(小虢)이라 했다.

동괵(東虢)/ 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의 동북에 있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숙(叔)이 봉해졌다. 후에 주평왕(周平王) 4년 기원전 767년 정무공(鄭武公)에게 멸망당하고 정나라 영토로 편입되어 경성(京城)이라고 했다.


서괵(西虢)/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보계시(寶鷄市) 부근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중(仲)이 봉해졌다. 주평왕(周平王)이 낙읍으로 동천할 때 지금의 하남성 섬현(陝縣) 이가요(李家窯)인 상양성(上陽城)으로 나라를 옮겼다.


북괵(北虢)/ 서괵이 상양성으로 옮긴 나라를 북괵이라 부르다가 주혜왕(周惠王) 22년 기원전 665년 당진(唐晉)의 헌공(獻公) 때 순식(荀息)의 가도멸괵(假道滅虢) 작전에 의해 멸망당하고 당진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소괵(小虢)/ 주나라가 천도할 때 따라가고 남은 서괵의 잔존세력이 세운 나라를 서괵이다. 주장왕(周庄王) 10년 기원전 687년 섬진(陝秦)의 무공(武公)에 의해 멸망당했다.


▶회국(鄶國)/ 회(檜)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신밀시(新密市) 동남에 있던 제후국으로써 정무공(鄭武公)에 의해 멸망하고 그 땅은 정나라에 병합되었다.


867. 及侵周禾(급침주화),

이어서 정장공(鄭庄公)은 군사를 내어 주나라 경계를 침략하여 벼이삭을 베어오자


868. 王人是議(왕인시의).

주왕실의 백성들과 신하들의 의론이 분분하며 정나라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869. 祭仲要盟(제중요맹),

제중(祭仲)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하여 맹세를 함으로써


▶정나라 상경(上卿) 제족(祭足)이 장공의 뒤를 이어 소공(昭公)이 새로 선 것을 알리기 위해 송나라에 특사로 갔다. 그러나 송장공(宋庄公)은 오히려 제족을 붙잡아 소공을 몰아내고 당시 송나라로 망명해 있던 자돌을 대신 세우라고 위협하였다. 제족은 송나라의 위협에 굴하여 맹세를 하였다. 제족은 아무도 몰래 자돌을 귀국시켜 소공을 몰아내고 정백의 자리에 앉혔다.이가 정려공(鄭厲公)이다. 소공은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이 구절은 제족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870. 鄭久不昌(정구불창).

정나라는 강국으로서 오래가지 못했다.


871. 子産之人(자산지인),

이어서 자산(子産)이 나타나 정나라의 정치를 일신하자


872. 紹世稱賢(소세칭현).

후세 사람들은 잊지 않고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873. 三晋侵伐(삼진침벌),

삼진이 번갈아 가며 정나라를 쳐들어오니


874. 鄭納于韓(정납우한).

정나라를 망하여 결국은 한나라 땅이 되었다.


875. 嘉厲公納惠王(가려공납혜왕),

정려공(鄭厲公)이 왕자 퇴(頹)의 란으로 나라에서 쫓겨난 것을 도와 복국시킨 공로를 칭송하여


876. 作<鄭世家>第十二(작<정세가>제십이)

<정세가>제십이를 지었다.



877. 維驥耳(유기록이),

주목왕(周穆王)에게 명마 기(驥)와 녹이(耳)를 선사하고


878. 乃章造父(내장조보).

그것으로 이름을 얻은 조보(造父)는 조씨(趙氏)들의 시조가 되었다.


879. 趙夙事獻(조숙사헌),

조숙(趙夙)이 진헌공(晉獻公)을 모셨고


880. 衰續厥緖(쇠속궐서).

그의 후손 조쇠가 계속해서 조숙의 유업을 이었다.


881. 佐文尊王(좌문존왕),

조쇠는 진문공을 보좌하여 패자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주왕실을 높여


882. 卒爲晉輔(졸위진보).

이윽고 진나라를 크게 일으킨 공신이 되었다.


883. 襄子困辱(양자곤욕),

조양자(趙襄子)가 진양에서 지백을 포함한 삼가의 공격으로 위험에 빠졌으나


884. 乃禽智伯(내금지백).

이내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지백을 사로잡아 조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885. 主父生縛(주보생박),

주보(主父) 무령왕(武靈王)은 사구궁(沙丘宮)에서 그의 신하들에게 포위되어


886. 餓死探爵(아사탐작).

참새를 잡아 허기를 채우다가 굶어 죽었다.


887. 王遷 淫(왕천벽음),

조왕 천(遷)은 편협하고 음락을 즐겨


888. 良將是斥(양장시척).

훌륭한 장수들을 멀리한 결과 조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889. 嘉鞅討周亂(가앙토주란).

조앙(趙鞅)이 주왕실의 란을 토벌한 것을 칭송하여


▶조앙(趙鞅)/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75년에 죽은 춘추말 당진국의 정경(正卿)으로 시호는 조간자(趙簡子)이다. 당진국 공실의 세력이 쇠퇴하자 순인(荀寅)과 범길석(范吉射)이 조씨들을 공격하자 그는 진양(晉陽)으로 달아났다. 후에 정경의 자리에 복귀하여 다시 조씨의 가병을 동원하여 범씨와 순씨들을 공격하자 두 종족은 조가(朝歌)와 한단(邯鄲)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이에 지(智), 한(韓), 위(魏) 등의 3가와 힘을 합쳐 조가와 한단을 압박하자 범씨와 순씨들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후에 범선자(范宣子="匃)가" 제정한 형서(刑書)를 철정(鐵鼎)에 새겨 조씨들이 다스리던 지역의 정치와 경제를 개혁함으로 해서 조가들의 세력을 증대시켰다. 그의 아들 조양자 때 한위조(韓魏趙) 삼가는 지가(智家)를 멸하고 당진국을 삼분했다.


890. 作<趙世家>第十三(작<조세가>제십삼)

<조세가>제십삼을 지었다.



891. 畢萬爵魏(필만작위),

진헌공(晉獻公)을 모신 필만(畢萬)은 그 세운 공으로 위(魏) 땅에 봉해졌다.


892. 卜人知之(복인지지).

점술가는 필만의 후손들이 번창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893. 及絳戮干(급강육간);

이어서 그의 후손인 위강(魏絳)은 진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을 치죄하고


894. 戎翟和之(융작화지).

다시 융적의 무리들을 회유하여 당진의 신민으로 삼았다.


895. 文侯慕義(문후모의),

위문후(魏文侯)는 의로운 선비들을 좋아하여


896. 子夏師之(자하사지).

자하를 스승으로 모셨다.


897. 惠王自矜(혜왕자긍),

그러나 문후의 뒤를 이은 혜왕은 스스로 교만하다가


898. 齊秦功之(제진공지),

제와 진 두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아 국세가 크게 꺾였다.


899. 旣疑信陵(기의신릉),

안리왕(安釐王)이 신릉군을 의심하자


900. 諸侯罷之(제후파지).

제후들이 위나라를 멀리했다.


901. 卒亡大梁(졸망대량),

결국은 진나라가 대량성을 파하고 위나라를 멸했다.


902. 王假 之(왕가시지).

위왕 가(假)는 진나라의 포로가 되어 일개 노역으로 전락했다.


903. 嘉武佐晉文申覇道(가무좌진문신패도),

위무자(魏武子) 주(犨)가 진문공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한 공을 기리어


904. 作<魏世家>第十四(작<위세가>제십사)

<위세가>제십사를 지었다.



905. 韓厥陰德(한궐음덕).

한궐(韓厥)이 음덕을 쌓아


906. 趙武攸興(조무유흥);

조무로 하여금 망한 조씨 집안을 다시 일으키게 도왔다.


907. 紹絶立廢(소절립폐),

끊어진 후손들을 잇게 하고 없어진 제사를 다시 지내게 만들었으니


908. 晉人宗之(진인종지).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받들었다.


909. 昭侯顯列(소후현열),

한소후가 열후들 가운데에서 뛰어난 것은


910. 申子庸之(신자용지).

신불해(申不害)를 임용한 것이다.


911. 疑非不信(의비불신),

한왕 안(安)은 한비를 의심하여 믿지 않았음으로


912. 秦人襲之(진인습지).

결국은 진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913. 嘉厥輔晉匡周天子之賦(가궐보진광부천자지부),

한궐이 진나라 군주를 보좌하여 패업을 계속 잇게 하고 다시 주천자의 존엄함을 높였다. 이에 그 공을 칭송하여


914. 作<韓世家>第十五(작<한세가>제십오)

<한세가>제십오를 지었다.



915. 完子避難(완자피난),

진나라의 공자 진완(陳完)은 난을 피해


916. 適齊爲援(적제위원),

제나라에 와서 도움을 받으며 살다가


917. 陰施五世(음시오세),

그 후손들 중 5세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자


918. 齊人歌之(제인가지).

제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덕을 노래 불렀다.


919. 成子得政(성자득정),

전성자가 그의 군주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전성자(田成子)/전상(田常)을 말하며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諡號)이다. 감지(闞止)와 정권을 다투다가 기원전 481년 제간공(齊簡公)을 죽이고 평공(平公)을 대신 세웠다. 이어서 스스로 상국(相國)의 자리에 올라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하였다. 전성자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강씨들의 정권을 대신했다.


920. 田和爲侯(전화위후).

전성자의 오대 손인 전화(田和) 때에 이르러 강씨를 대신하여 제후(齊侯)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나


921. 王建動心(왕건동심),

제나라의 마지막 왕 왕건(王建)이 진나라의 공작에 마음이 움직여


922. 內遷于共(내천우공).

이윽고 나라가 망하자, 그는 진왕(秦王)에 의해 공(共) 땅으로 옮겨져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923. 嘉威(가위),

제위왕(齊威王)과


924. 宣能撥濁世而獨宗周(선능발탁세이독종주),

제선왕(齊宣王)이 능히 혼탁한 세상을 밝혀 내고 오로지 주나라를 받든 것을 칭송하여


925. 作<田敬仲完世家>第十六(작<전궁중완세가>제십육)

<전경중완세가>제십육을 지었다.



926. 周室旣衰(주실기쇠),

주왕실이 쇠약해 지자


927. 諸侯恣行(제후자행).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고 방자해 졌다.


928. 仲尼悼禮廢樂崩(중니도례폐락붕),

공자가 예(禮)가 없어지고 악(鄂)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하여


929. 追脩經術(추수경술),

세상을 구하는 방도를 구하여


930. 以達王道(이달왕도),

그것으로써 왕도에 이르게 하여


931. 匡亂世反之于正(광란세반지우정),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길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932. 見其文辭(견기문사),

공자의 저서와 글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933. 爲天下制儀法(위천하제의법),

천하를 위해서 의례와 법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으며


934. 垂<六藝>之統紀于后世(수<육예>지통기우후세).

육예의 기강을 후세에 영원히 남겼다.


935. 作<孔子世家>第十七(작<공자세가>제십칠)

이에 <공자세가>제십칠을 지었다.



936. 桀,紂失其道而湯武作(걸, 주실기도이탕무작)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실덕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은나라의 탕임금과 주무왕은 덕을 쌓아 나라를 일으킨 것이다.


937. 周失其道而<春秋>作(주실기도이<춘추>작.

이어서 주나라가 그 도를 잃자 공자는 <춘추>를 지은 것이다.


938. 秦失其政(진실기정),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으나 그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939. 而陳涉發迹(이진섭발적),

진섭이 일어났다.


940. 諸侯作難(제후작난),

천하의 제후들이 진섭의 뒤를 쫓아 난을 일으키니


941. 風起雲蒸(풍기운증),

그 기세가 마치 바람과 구름과 같아서


942. 卒亡秦族(졸망진족).

진나라는 창졸간에 망하게 되었다.


943. 天下之端(천하지단),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망하게 된 발단은


944. 自涉發難(자섭발난).

진섭이 일으킨 반란에 기인한 것이니


945. 作<陳涉世家>第十八(작<진섭세가>제십팔)

이에 <진섭세가>제십팔을 지었다.



946. 成皐之台(성고지대),

하남의 성고(成皐)에 세운 대(臺)는


947. 薄氏始基(박씨시기).

한문제(漢文帝)의 모친인 박씨(薄氏)가 그 터를 파기 시작했고


948. 詘意適代(굴의적대),

두황후(竇皇后)는 뜻을 꺾고 대(代) 땅으로 들어갔다가


949. 厥崇諸竇(궐숭제두).

대왕(代王)이었던 유항(劉恒)이 제위(帝位)를 잇게 되자 그녀의 일족들은 모두가 존귀하게 되었다.


950. 栗姬偩貴(율회부귀),

율희는 그 사이에 틈을 타서 존귀하게 되었으나 교만해 졌으며


951. 王氏乃遂(왕씨내수).

왕씨들이 그 뒤를 이어 세력을 얻었다.


952. 陳后太驕(진후태교),

진황후는 너무 교만했기 때문에


953. 卒尊子夫(졸존자부).

결국은 한무제에 의해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위자부(衛子夫)가 황후가 되어 존귀하게 되었다.


954. 嘉夫德若斯(가부덕약사),

위자부의 아름다운 덕행을 칭송하여


955. 作<外戚世家>第十九(작<외척세가>제십구)

<외척세가>제십구를 지었다.



956. 漢起譎謀(한기휼모),

한고조가 속임수를 써서


957. 禽信于陳(금신우진);

한신을 진(陳) 땅에서 사로잡았다.


958. 越荊剽輕(월형표경),

한고조는 월(越)이나 초(楚) 나라 사람들은 사납고 민첩하여


959. 乃封弟交爲楚王(내봉제교위초왕),

그의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으로 봉해 두 나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했다.


960. 爰都彭城(원도팽성),

유교는 이어서 팽성에 도읍을 정하고


961. 以强淮泗(이강회사),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의 고을들을 힘으로 다스려


962. 爲漢宗蕃(위한종번).

한나라를 위한 번국의 종주국이 되었다.


963. 戊溺于邪(무익우사),

초왕 유무(劉戊)는 사간(邪奸)의 죄를 범했다가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란에 가담하고, 이어서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무(劉戊)/ 초왕(楚王)으로 시봉된 유교(劉交)의 손자로 상중에 궁녀를 봉하여 그 죄로 봉지의 일부인 동해군(東海郡)을 빼앗겼다. 이에 불만을 품고 오왕(吳王) 유비(劉濞)와 함께 오초칠국의 란을 주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자살했다. 오초칠국의 란의 상세한 전개과정은 655항 참고


▶사간(邪奸)/ 국상 중에 궁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 국상 중에는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금했다.


964. 禮復紹之(예복소지).

그 뒤를 유례(劉禮)가 초왕에 봉해져 초원왕(楚元王)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


▶유례(劉禮)/ 초원왕 유교(劉交)의 아들이다.


965. 嘉游輔祖(가유보조),

초원왕 유교(劉交)가 고조를 보필한 것을 칭송하여


▶유(游)/ 유교(劉交)의 자(字)다.


966. 作<楚元王世家>第二十(작<초원왕세가>제이십)

이에 <초원왕세가>제이십을 지었다.



967. 維祖師旅(유조사려),

한고조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968. 劉賈是興(유가시흥);

유고(劉賈)가 함께 참가하여 그 공으로 제후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유고(劉賈)/ 한고조 유방(劉邦)의 사촌형이다. 한고조 밑에서 장군의 신분으로 종군했다가 기원전 201년 형왕(荊王)에 봉해졌다. 후에 반란을 일으킨 영포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969. 爲布所襲(위포소습),

후에 영포(英布)에 의해 습격 당해


970. 喪其荊,吳(상기형,오).

자신은 목숨을 잃고 봉지인 형(荊)과 오(吳)의 땅을 잃게 되었다.


▶형(荊)/ 원래 초나라는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에 있었다. 기원전 278년 진나라 소양왕(昭襄王) 때 백기(白起)의 침입에 의해 도성을 뺏기고 지금의 하나성 진현(陳縣)으로 나라를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으로 옮겼다.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에 있었던 옛날의 초나라 땅을 형(荊)이라 하고 초나라가 새로 옮겨 간 수현(壽縣) 일대를 초(楚)라고 명명한 것이다. 항우(項羽)는 팽성(彭城) 즉 지금의 안휘성 서주시(徐州市)에 도읍을 새우고 초나라라고 명명했다.


971. 營陵激呂(영릉격려),

영릉후(英陵侯) 유택(劉澤)은 여태후를 감격시켜


▶유택(劉澤)/ 한고조 유방의 사촌 형제이다. 유방 밑에서 낭중의 벼슬을 살다가 여태후에 의해 영릉후에 봉해졌다.


972. 乃王琅邪(내왕낭야);

이윽고 낭야왕에 봉해졌다.


973. 祝午信齊(축오신제),

그는 축오(祝午)의 말을 듣고 제나라를 믿은 나머지


974. 往而不歸(왕이불귀),

그곳으로 들어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975. 遂西入關(수서입관),

후에 계교를 써서 서쪽의 관중으로 들어가


976. 遭立孝文(조립효문),

효문제를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 올릴 때


977. 獲復王燕(획복왕연).

연왕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978. 天下未集(천하미집),

천하의 인심이 아직 모아지지 않았을 때


979. 賈, 澤以族(가, 택이족),

유고(劉賈)와 유택(劉澤)은 황제(皇帝)의 일족으로


980. 爲漢藩輔(위한번보).

번국의 왕이 되어 황실을 도왔다.


981. 作<荊燕世家>二十一(작<형연세가>이십일)

이에 <형연세가>제이십일을 지었다.



982. 天下已平(천하이평),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인심이 안정이 되었으나


983. 親屬旣寡(친속기과);

황실의 종족들의 수효가 많지 않았다.


984. 悼惠先壯(도혜선장),

고조의 아들 중 도혜왕(悼惠王)이 가장 먼저 성인이 되어


▶도혜왕(悼惠王)/ 한고조 유방의 서장자(庶長子) 유비(劉肥)로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985. 實鎭東土(실진동토).

동쪽의 제나라에 봉해져 그곳을 굳게 지켰다.


986. 哀王擅興(애왕천흥),

애왕(哀王)은 경솔히 군사를 일으킨 것은


▶애왕(哀王)/ 유비(劉肥)의 아들 유양(劉襄)을 말한다.


987. 發怒諸呂(발노제려),

당시의 실권자들인 여씨(呂氏)들의 전횡에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었으나


988. 駟鈞暴漏(사균폭루),

사균(駟鈞)이 포학하고 잔인했음으로


▶사균(駟鈞)/


989. 京師弗許(경사불허).

조정의 대신들은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990. 厲之內淫(려지내음),

려왕(厲王)이 그의 누이와 간음하자


991. 禍成主父(화성주보).

주보언에게 들켜 화를 입었다.


▶주보(主父)/ 주보언(主父偃)을 말한다. 제나라 임치(臨淄) 사람으로 한무제 때 중대부의 벼슬을 지내다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그 봉지를 여러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추은령(推恩令)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했다. 후에 자기의 딸을 제려왕(제厲王)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려왕이 자기의 누이와 간통한 사실을 밝혀 내고 그 사실을 한무제에게 고하여 려왕으로 하여금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주보에게 화를 입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992. 嘉肥股肱(가비고굉),

유비가 한고조의 고굉지신이 되어 잘 보좌했음을 기리어


993. 作<齊悼惠王世家>第二十二(작<제도혜왕세가>제이십이)

<제도혜황세가>제이십이를 지었다.



994. 楚人圍我滎陽(초인위아형양),

한고조가 형양(滎陽)에서 초왕 항우에 의해 포위 당하여


995. 相守三年(상수삼년);

항복하지 않고 3년을 버틴 것은


996. 蕭何塡撫山西(소하전무산서),

소하가 산서의 땅을 위무하여


997. 推計踵兵(추계종병),

호구를 관리하여 군사를 보충하고,


998. 給糧食不絶(급량식부절),

병사들을 위한 군량미를 끊어지지 않게 공급한 때문이었다.


999. 使百姓愛漢(사백성애한),

또한 백성들로 하여금 한나라 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1000. 不樂爲楚(불락위초).

초나라를 위해 즐겨 일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1001. 作< 蕭相國世家>第二十三(작<소상국세가>제이십삼)

이에 <소상국세가>제이십삼을 지었다.



1002. 與信定魏(여신정위),

조참(曹參)은 한신(韓信)과 함께 출동하여 위나라를 평정하였고


1003. 破趙撥齊(파조팔제),

조나라 군사를 파하고 제나라를 함락시킴으로써


1004. 遂弱楚人(수약초인).

드디어는 초나라 세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1005. 續何相國(속하상국),

소하가 죽은 다음에 상국의 자리를 이어 받아


1006. 不變不革(불변북혁),

그가 세워 놓은 제도는 아무 것도 개변하거나 혁파하지 않고


1007. 黎庶攸寧(여서유녕).

그대로 시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했다.


1008. 嘉參不伐功矜能(가삼불벌공긍능),

조참이 자기의 공로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은 것을 칭송하여


1009. 作<曹相國世家>第二十四(작<조상국세가>제이십사)

<조상국세가>제이십사를 지었다.



1010. 運籌 幄之中(운주유악지중),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우고 실행하여


1011. 制勝于無形(제승우무형),

눈에 보이지 않은 적을 제압하여 승리를 쟁취한 것은


1012. 子房計謀其事(자방계모기사),

모두가 장자방의 계책에 의한 것이며


1013. 無知名(무지명),

그는 명성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1014. 武勇功(무용공),

무용을 발휘하여 공을 세운 일도 없었으나


1015. 圖難于易(도난우이),

어려운 일을 쉬운 일로 해결하고


1016. 爲大于細(위대우세).

사소한 일을 행하여 큰일을 이루었다.


1017. 作<留侯世家>第二十五(작<유후세가>제이십오)

이에 <유후세가>제이십오를 세웠다.



1018. 六奇旣用(육기기용),

여섯 가지 기묘한 계책을 고조에게 바쳐


1019. 諸侯賓從于漢(제후빈종우한);

천하의 제후들이 한나라를 따르도록 만들었고


1020. 呂氏之事(여씨지사),

여씨들이 전횡하자 그들을 토벌한 것은


1021. 平爲本謀(평위본모),

원래 진평(陳平)의 계책에 의한 것이다.


1022. 終安宗廟(종안종묘),

한나라 종묘와


1023. 定社稷(정사직).

사직을 안정시킨 것도 진평의 공적이라


1024. 作<陳丞相世家>第二十六(작<진승상세가>제이십육).

이에 <진승상세가>제이십육을 지었다.



1025. 諸呂爲從(제려위종),

여씨들이 서로 결탁하여


1026. 謀弱京師(모약경사),

황실의 세력을 깎아 내리려 획책했으나


1027. 而勃反經合于權(이발반경합우권);

주발은 정도에 벗어난 권모술수를 써서 여씨들을 주멸했다.


1028. 吳楚之兵(오초지병),

오초가 힘을 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1029. 亞父駐于昌邑(아부주우창읍),

주발의 아들인 주아부가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창읍(昌邑)에 주둔하여


▶주아부(周亞夫)/ 주발(周勃)의 아들이다. 한문제 때 세류(細柳 : 지금의 섬서성 함안 서남)에 주둔하여 흉노의 침략을 막아냈다. 한경제 때 오초(吳楚)를 포함한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토벌군 대장이 되어 창읍에 주둔하여 반란군의 후방을 끊고 제와 조 두 나라와의 연락을 두절시켰다. 전후에서 보급망이 끊어진 오초(吳楚)의 군사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초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왕은 본국으로 귀환했다가 한나라 조정의 회유책에 넘어간 동맹국의 왕 동월왕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오초칠국의 란을 진압한 공로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으나 후에 무고를 받아 감옥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


1030. 以厄齊趙(이액제조),

제와 조 두 나라의 군사들과 오초의 군사들의 연락을 끊었다.


1031. 而出委以梁(이출위이양).

이어서 양나라의 위급함을 스스로 해결하게 하여 결국은 오초칠국의 란을 평정했음으로


1032. 作<絳侯世家>第二十七(작<강후세가>제이십칠)

<강후세가>제이십칠을 지었다.



1033. 七國叛逆(칠국반역),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1034. 藩屛京師(번병경사),

한왕조의 변경을 지키던 제후국들 중


1035. 唯梁爲扞(유량위한);

오직 양나라만이 대항하였다.


1036. 偩愛矜功(부애긍공),

그러나 모후의 총애를 너무 믿었고 또한 자기의 공을 너무 자랑한 나머지


1037. 幾獲于禍(기획우화).

화를 입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1038. 嘉其能距吳楚(가기능거오초),

양효왕(梁孝王)이 오초의 군사들을 능히 막아내어 황실을 안정시킨 공로를 칭송하여


1039. 作<梁孝王世家>第二十八(작<양효왕세가>제이십팔)

<양호왕세가>제이십팔을 짓는다.



1040. 五宗旣王(오종기왕),

오종이 모두 제후왕이 되자


▶오종(五宗)/ 한경제(漢景帝)는 그 슬하에 모두 14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 한 사람이 한무제(漢武帝)이고 나머지 13명이 모두 제후왕(諸侯王)에게 봉해졌다. 13명은 모두 다섯 여인들 소생이었다. 이에 5명의 여인들을 모두 모친으로 여겨 같은 종친으로 지낸다고 해서 오종이라고 한 것이다.


1041. 親屬洽和(친속흡화),

황실의 친속들은 서로 친하여 화합을 이루었고


1042. 諸侯大小爲藩(제후대소위번),

이어 모두 크고 작은 나라의 제후왕들로 봉해져


1043. 爰得其宜(원득기의),

황실의 변방을 지키는 번국(藩國)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1044. 僭擬之事稍衰貶矣(참의지사소쇄폄의).

이에 자기의 직분을 벗어나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제후들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1045. 作<五宗世家>第二十九(작<오종세가>제이십구).

이에 <오종세가>제이십구를 지었다.



1046. 三子之王(삼자지왕)

무제의 세 아들은 모두 제후왕으로 봉해졌는데


1047. 文辭可觀(문사가관)

그때 지은 책문의 글은 가히 명문이었다.


1048. 作<三王世家>第三十(작<삼왕세가>제삼십)

이에<삼왕세가>제삼십을 지었다.


▶삼왕세가(三王世家)/ 사마천의 삼왕세가의 원본은 소실되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의 삼왕세가는 저소손(褚少孫)이 지어 보충하였다.







목록
8666
[일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5-3. 오기(吳起)

오기(吳起) 1. 殺妻求將(살처구장) - 부인을 죽여 장군이 되다. - 오기(吳起)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병사의 일을 즐겨했다. 옛날에 공자
양승국 04-05-12
[일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5-2. 손빈(孫臏)

손빈(孫臏) 열전5-2. 1. 陷入刖刑(함입월형) - 함정에 떨어져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다. - 손무(孫武)가 죽고 백여 년 후에
양승국 04-05-12
[일반]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4

사마양저(司馬穰苴) 열전4.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전완(田完)①의 후예다. 제경공(齊景公)② 때에 진(晉)나라가 아(阿)③와 견(甄)④
양승국 04-05-12
[일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3-2

한비(韓非) 열전3-2 1. 세난(說難) - 유세의 어려움- 한비는 한(韓)나라의 공자 출신이다. 형명학(形名學)과 법술(法術)을 좋아하였으나 결국
양승국 04-05-12
[일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3-1

노자․장자․신자(老子莊子申子) 1. 노자(老子) 노자는 초나라 고현(苦縣)①의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양승국 04-05-12
[일반] 관안열전(管晏列傳)2-2

안영(晏嬰) 열전2-2. 안영(晏嬰)의 자는 평중(平仲)으로 래(萊)①의 이유(夷維)② 사람이다. 제나라의 영공(靈公)③, 장공(莊公)④,
양승국 04-05-12
[일반] 관안열전(管晏列傳)2-1

관중(管仲) 열전2-1 관중(管仲) 이오(夷吾)는 영상(潁上)①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관중과 같이 다녔던 포숙아(鮑叔牙)는 그가 슬기로운
양승국 04-05-12
[일반] 백이열전(伯夷列傳) 1

伯夷列傳(백이열전) 열전1 무릇 학자들이 공부하는 서책은 비록 광범위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믿을 수 있는 기록은 단지 『육경(六經)』①일
양승국 04-05-12
[일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70-3

태사공자서-3 1049. 末世爭利(말세쟁리), 세상이 말세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익을 다투게 되나 1050. 維彼奔義(유피분의)
176.0K 양승국 04-05-12
[일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70- 2

太史公自序-2 499.維昔黃帝(유석황제), 옛날 황제 헌원씨(軒轅氏)는 ▶황제(黃帝) 중국이 원시사회를 벗어나려고 하던 시기의 부족국
304.0K 양승국 04-05-12
[일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70-I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1 태사공자서는53만 자의 한자로 저술된 사기(史記)의 총130편 중 마지막 편으로 서문에 해당하며 사마천(司馬遷) 자신의
288.0K 양승국 04-05-12
[처음][이전][1][2][3][4][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