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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2:06:039904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7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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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7 仲尼弟子(중니제자)

-공자의 제자들-

공자가 말했다.

「나에게 배워 육예에 통한 자는 77명이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재사들로써 덕행에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이, 정치에는 冉有(염유), 季路(계로)가, 언어(言語 : 변론)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이,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있다. 전손사(顓孫師)는 잘난 체하고, 증삼(曾參)은 둔하며, 고시(高柴)는 우직하고, 중유(仲由)1)는 거칠다. 안회(顔回)는 자주 끼니가 떨어져 배를 곯고, 단목사(端沐賜)2)는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돈벌이에만 힘을 기울이는데 그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하다.」

공자가 존경한 인물은 주나라의 노자(老子)와 위나라의 거백옥(蘧伯玉) 제(齊)나라의 안평중(晏平仲),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 정(鄭)나라의 자산(子産), 노(魯)나라의 맹공작(孟公綽), 또 장문중(臧文仲), 유하혜(柳下惠), 동제(銅鞮)의 백화(伯華), 개산(介山)의 자연(子然) 등을 자주 칭송했으나 이들은 모두 공자보다 앞선 사람들로써 그들과는 세상을 함께하지 않았다.

안회는 노나라 사람이다. 자는 자연(子淵)이고 공자보다 30세 어리다. 안연(顔淵)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자신의 욕심을 이겨 예로 돌아가면 온 천하는 그가 인(仁)하다고 할 것이다.」

또 공자가 안연에 대해 말했다.

「참으로 어질도다, 안희여! 밥 한 그릇에 국 한 사발로 식사를 하며 누추한 뒷골목에 산다. 다른 사람이라면 근심을 참지 못하는데 안회는 오히려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들을 바꾸지 않았다. 또한 안희는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으나 물러간 뒤에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그가 배운 바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안회는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등용되면 배운 바를 즉시 행하고 내쳐지면 그것들을 가슴 속에 묻어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와 안회만이 할 수 있을 뿐이라!」

안회는 나이 29세에 머리털이 이미 하얗게 변했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가 통곡하며 말했다.

「내가 안회를 제자로 거둔 뒤부터는 내가 다른 제자들과 더욱 친하게 되었다. 노애공(魯哀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 누가 가장 학문을 좋아합니까? 」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노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명이 짧아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

민손(閔損)은 자가 자건(子騫)으로 공자보다 15살 연하다. 공자가 말했다.

「효자로다! 민자건(閔子騫)이여! 부모형제들이 민자건을 효자라고 말함에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반박하지 않는구나!」

대부의 직을 받지 않아 군주의 더러운 녹봉을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는 말했다.

「만일 다시 나를 부르러 오는 일이 있다면 나는 기필코 도성을 떠나 문수(汶水)로 은퇴하여 살리라!」

염경(冉耕)은 자가 백우(伯牛)다. 공자가 그는 덕행(德行)이 있다고 했다. 악질(惡疾)에 걸린 백우를 문병한 공자가 창문을 통해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참으로 하늘의 명이로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이런 나쁜 병에 걸렸다니, 천명이로다!」

염옹(冉雍)은 자가 중궁(仲弓)이다. 중궁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내 집을 나가 사람들을 대할 때는 마치 큰손님을 대하듯이 해야 하고 백성들에게 일을 시킬 때는 마치 나라의 큰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이 엄숙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나라에 벼슬살이를 할 때는 원한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하고 집안에 있을 때는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공자는 중궁의 덕행을 칭송하면서 말했다.

「염옹은 남면하여 군주의 자리를 앉을 자격이 있다.」

또한 천민 출신의 중궁의 부친을 생각한 공자가 말했다.

「비록 얼룩소 새끼라 할지라도 털색이 붉고 뿔이 잘났으면 비록 제사로 쓰지 않으려고 해도 산천의 신령들이 그것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제사용으로 쓸 수 없겠는가?」

염구(冉求) 자는 자유(子有)이고 공자보다 29세 어리다. 노나라 대부 계손씨(季孫氏)의 가재(家宰)로 있던 염구에 대해 계강자(季康子)3)가 공자에게 물었다.

「염구는 어진 사람입니까? 」

공자가 대답했다.

「천 호의 고을과 백승(百乘)의 제후국이라면 염구는 가히 훌륭히 다스릴 수 있겠지만 그가 어진지는 제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계강자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자로(子路)는 어집니까? 」

공자가 대답했다.

「염구와 같습니다.」

염구가 공자에게 물었다.

「의로운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대로 행하라.」

자로가 물었다.

「의로운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부형이 계신데 어떻게 상의도 없이 들은 대로 행할 수 있겠느냐?」

자화(子華)가 듣고 괴이하게 생각해서 물었다.

「감히 묻습니다. 묻는 말은 똑 같은데 대답은 서로 다릅니다. 어째서 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염구는 성격이 뒤로 물러서려고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 것이고 자로는 용기가 다른 사람의 몇 배나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물러서라고 한 것이다. 」

중유(仲由)는 자가 자로(子路)로 노나라 변읍(卞邑) 사랍이다. 공자 보다 9살 연하다. 자로는 성격이 거칠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의지가 강했다. 수탉의 꼬리로 관을 만들어 쓰고 수퇘지의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에 차고 공자를 찾아와 업신여기며 폭행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공자는 항상 예로서 자로를 대하며 차츰 바른 길로 이끌었다. 자로는 얼마 후에 공자의 제자들 천거를 받아 유가의 복장을 입고 선생을 모시는 데 바치는 예물을 들고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자로가 정치에 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자기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만 백성들도 비로소 부지런히 노력하게 되는 법이다.」

자로가 더 가르쳐 줄 것을 청하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솔선수범하는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야 한다.」

자로가 다시 물었다.

「군자도 용맹함을 추구해야 합니까? 」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의를 가장 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하기만 하고 의를 모른다면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소인이 용맹하나 의를 모른다면 남의 것을 훔치게 된다. 」

자로가 공자의 가르침을 한 번 듣게 되어 아직 실천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공자가 말했다.

「한 마디의 말로 옥사를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 자로의 용기는 나보다 낫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자로와 같은 사람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한다. 또 헤진 두터운 두루마기를 입었음에도 여우나 담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은 사람과 같이 어울려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자로가 유일한 사람이다. 자로의 학문은 마치 대청마루에 오르기는 했으나 아직 방안으로까지는 들어오지 못한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

계강자가 물었다.

「중유는 어집니까? 」

「자로는 천승의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겠으나 그가 어진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로는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할 때 기꺼이 호종하다가 장저(長沮), 걸익(桀溺)4), 하조장인(荷蓧丈人)5) 등의 은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자로를 자기들의 가재(家宰)로 기용한 계손씨가 공자에게 물었다.

「자로는 대신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자로는 보통의 여러 신하들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자로가 위(衛)나라의 포(蒲)땅의 대부로 임명되어 부임하러 갈 때 공자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들리자 공자가 말했다.

「포읍(蒲邑)은 장사가 많아 다스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일러두니 명심해라.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낮추면 용사들의 마음을 잡아둘 수 있을 것이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너그러우면 백성들이 백성들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공손한 태도로 정의에 입각하여 관내의 인심을 안정시키면 능히 상사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위영공(衛靈公)7)이 총애했던 여인이 있었는데 부르기를 남자(南子)라고 했다. 영공의 태자 괴외(蕢聵)가 남자에게 죄를 범하고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이윽고 영공이 죽자 그 부인이 공자 영(郢)8)을 세우려고 했다. 공자영이 듣지 않고 말했다.

「외국의 도망친 태자의 아들 첩(輒)이 국내에 있으니 마땅히 그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위나라 사람들은 공자첩을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위출공(衛出公)이다.

위출공이 군주의 자리에 오른 지 12년이 지났으나 그의 부친 괴외는 여전히 나라 밖에서 거주하며 위나라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때 자로는 위나라의 대부 공리(孔悝)의 읍재(邑宰)로 있었다. 송나라에 머물고 있던 괴외가 공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몰래 공리의 집으로 잠입했다. 괴외는 마침내 무리들과 함께 출공을 기습했다. 출공은 노나라로 달아나고 괴외가 군위에 새로 올랐다. 이가 위장공(衛莊公)이다. 공리가 란을 일으켰을 때 도성 밖에 머물고 있던 자로가 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때 마침 성문을 빠져나오던 자고(子羔)9)를 만났다. 자고가 자로를 보고 말했다.

「위군은 이미 도망쳐버렸고 성문은 이미 닫혔습니다. 사형께서는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공연히 화를 입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로가 말했다.

「남의 녹을 받아먹는 자로써 주인 되는 사람의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

자고는 결국 떠나버렸으나 그때 마침 당도한 사자를 들이기 위해 성문이 열리자 자로가 그 뒤를 따라 입성하여 괴외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때 대(臺)에 올라 같이 있던 괴외와 공리를 향해 자로가 소리쳐 말했다.

「군주께서는 무슨 이유로 공리를 쓰려고 하십니까? 청컨대 공리를 밑으로 보내 제가 죽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나 괴외가 자로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자로는 대의 밑에 불을 놓아 태우려고 했다. 겁이 난 괴외는 급히 석걸(石乞)과 호염(壺黶)을 대 밑으로 보내 자로를 공격하도록 했다. 두 사람이 자로를 창으로 찌르자 자로의 관끈이 끊어졌다. 자로가 말했다.

「군자는 죽어도 관을 벗지 않는다고 했다.」

자로가 관끈을 이은 관을 다시 쓰고 죽었다. 이때 노나라에 돌아가 머물던 공자가 위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했다.

「오호라, 슬프구나! 자로가 죽게 되겠구나! 」

그리고 며칠 후에 과연 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공자가 말했다.

「내가 자로를 제자로 얻은 뒤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난 하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

이때 자공은 노나라를 위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다.

재여(宰予)의 자는 자아(子我)이고 말주변이 좋고 변설에 재주가 있었다. 공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그가 물었다.

「3년상을 지내기는 기간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군자가 3년상으로 인하여 예를 닦지 않으면 예는 필시 훼손되고, 3년 동안 음악을 듣지 않게 되면 음악은 무너질 것입니다. 저장한 구곡(舊穀)은 1년에 걸쳐 모두 먹게 되면 신곡(新穀)이 다시 익게 됩니다. 나무를 문질러 불씨를 얻는 방법도 계절에 따라 그 수종을 바꿉니다.10) 부모상도 1년이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공자가 되물었다.

「그렇게 하면 네 마음이 편하겠는가? 」

재여가 대답했다.

「편할 것 같습니다. 」

「네가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라. 군자가 상중에 있을 때는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마음이 즐겁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다.」

재여가 물러가자 공자가 말했다.

「재여는 어질지가 못하구나! 자식이 태어나면 3년이 지난 뒤라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온 천하에 통하는 대의인 것이다. 」

어느 날 공부 중에 졸고 있는 재여의 모습을 보고 공자가 말했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는 말은 재여를 두고 하는 말이로다!」11)

재여가 또 오제(五帝)의 덕에 묻자 공자가 말했다.

「너는 그것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후에 재여는 제나라로 돌아가 임치(臨淄)12)의 대부가 되었는데 전상(田常)13)과 함께 란을 일으켰다가 멸족 당했다.14) 공자는 재여가 자기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다.

단목사(端沐賜)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자를 자공(子貢)이라 했다. 공자보다는 31살 연하다. 자공은 유창한 말솜씨에 남의 말을 교묘하게 응대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항상 그의 변설을 논박하여 억눌렀다. 어느 날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너는 안회와 비교해서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 」

자공이 대답했다.

「이 사(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압니다만 이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만을 알 뿐입니다. 」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이 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그릇과 같은 사람이니라!」

「어떤 그릇을 말하는 것입니까?」

「호련(瑚璉)15)이다.」

진자금(陳子禽)이 자공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

자공이 대답했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의 도는 아직 땅에 떨어져 없어지지 않았으니 사람들 중 현능한 사람들은 큰 것을 알고, 현능하지 못한 사람들은 작은 것들을 안다. 어느 것이든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닌 것이 없으니 선생님께서는 누구에게인들 배우지 않으셨겠나? 그러니 선생님께서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

진자금이 다시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계시는 나라에서는 반드시 정치에 관여하셨는데 그것은 생님님께서 구하셨기 때문입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선량한 마음에, 근검, 공손하고 사양하는 마음의 다섯 가지 덕목을 가지셨기 때문에 계시는 곳마다 사람이 찾아와 의견을 구한 것이다. 또한 선생님의 뜻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 다른 사람들이 구하려는 것과는 다르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부유하나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나 아첨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가난 속에서 도를 즐기고 부자이면서 예를 좋아함 보다는 못하다.」

제나라 대부 전상(田常)이 자기 나라에서 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고(高), 국(國), 포(鮑), 안(晏) 등의 4대 종족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래서 전상은 4대 종족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노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위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가 듣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무릇 노나라는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부모의 나라다. 장차 부모의 나라가 제나라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해있다. 너희들 중 누가 노나라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느냐?」

자로가 앞으로 나아가 자원했으나 공자가 말렸다. 자장(子張)과 자석(子石)이 나가겠다고 청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자공이 청하자 공자가 비로소 허락했다. 그 즉시 길을 떠나 제나라에 당도한 자공은 전상을 만나 유세했다.

「노나라를 정벌하려는 군의 생각은 잘못된 일입니다. 무릇 노나라는 정벌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그 성벽은 얇고 낮으며 또한 해자(垓字)는 좁고 깊지 않습니다. 그 임금은 어리석고 어질지 못하며, 대신들은 위선적이며 무능합니다. 또한 그 사대부나 백성들은 군사가 되어 싸우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와 같은 노나라와 어떻게 전쟁을 하겠습니까? 군께서는 차라리 오(吳)나라를 정벌하십시오. 무릇 오나라는 그 성벽은 높고 두터우며, 성지(城池)는 넓고 깊습니다. 갑옷은 견고하고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병사들은 정예하고 음식을 배불리 먹습니다. 견고한 무기와 정예한 병사들은 모두 그 성중에 있으며 현명한 대부들로 하여금 그 성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야말로 정벌하기 쉽습니다. 」

전상이 듣고 정색하고 화를 내며 말했다.

「선생이 어렵다고 말한 바는 세상 사람들은 쉽다고 하며, 선생이 쉽다고 하는 바는 세상 사람들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이치를 이 사람에게 가르치려고 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이 듣기에 우환이 내부에 있는 자는 강한 나라를 치고 우환이 밖에 있는 자는 약한 나라를 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군의 우환은 지금 안에 있습니다. 제가 들으니 군께서는 세 번이나 봉호를 수여 받았으나 세 번 다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나라 내부에 반대하는 대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군께서 노나라를 정벌하여 제나라의 영토를 늘리게 되면 싸움에서 이긴 군주는 교만하게 될 것입니다. 노나라를 격파하여 세운 업적은 대신들만의 이름을 높여 줄 것이며 군의 공적은 그것에 묻히게 되어 군주와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소원해집니다. 그래서 위로는 군주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군에 대해 함부로 대하도록 만들어 결국 군께서 추구하는 큰일을 이루어 내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무릇 군주가 교만하게 되면 방자하게 되고 신하가 교만해지면 권력을 서로 다투게 됩니다. 그것은 곧 위로는 군과 군주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아래로는 대신들과 서로 권력을 놓고 싸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제나라에 입지를 마련하는 군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기 때문에 제가 차라리 오나라를 정벌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나라를 쳐서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게 된다면 백성들은 밖에서 싸우다가 죽고 대신들은 안에서 힘을 잃습니다. 그것은 곧 군의 입장에서 위로는 강한 정적들이 없어지고 아래로는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게 됩니다. 결국 군주는 고립되어 오로지 군만이 제나라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사들이 벌써 노나라를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진군로를 바꾸어 오나라로 쳐들어가면 대신들이 나를 의심할 것이니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자공이 말했다.

「군께서 군사를 잘 안무하여 공격하지 말라고 명하시면 제가 오왕에게 사절로 가서 오나라가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군께서는 오나라 군사를 맞이하여 싸우시면 됩니다.」

전상이 허락하고 자공을 사자로 삼아 남쪽으로 보내 오왕을 접견하다록 했다. 자공이 오왕을 보고 말했다.

「신이 듣건대 백성을 다스리는 왕되는 사람은 다른 나라의 사직을 끊는 일이 없고 패자(覇者)는 강적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천균(千鈞)16)의 무거운 것도 겨우 1수(銖)17)나 1량(兩)18)의 무게가 더해짐으로 해서 저울눈이 움직이기도 합니다. 지금 만승의 대국 제나라는 천승의 소국 노나라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오나라와 세력을 겨루려고 합니다. 이점 왕을 위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나라가 노나라를 구원하는 일은 명분을 천하에 드러내는 행위일뿐 아니라 또한 제나라를 정벌하는 일은 실제적인 면에서도 크게 이익이 됩니다. 더불어 사수(泗水) 강변의 제후들을 위무하여 포악한 제나라를 무찌르고 북쪽의 강력한 진(晉)나라를 굴복시킨다면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없습니다. 망해 가는 노나라를 보전시켰다는 명분을 얻고 실상은 강대한 제나라를 꺾어 누르는 만큼 지혜 있는 사람이면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왕이 듣고 대답했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월나라와 싸워 월왕을 회계산으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소. 그 뒤로 월왕은 스스로 몸을 괴롭혀 군사를 양성하여 우리 오나라에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선생은 내가 월나라를 치고 난 다음에 선생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겠소.」

자공이 말했다.

「월나라의 강고함이란 약소국인 노나라보다 못합니다. 오나라의 강성함은 제나라의 것보다 못합니다. 왕께서 제나라를 그대로 둔 채 월나라를 공격하게 된다면 제나라는 그 틈에 노나라를 완전히 평정하고 말 것입니다. 이에 대왕께서 망하는 나라를 붙들어 보존케 하여 사직을 잇도록 하는 명분을 얻는 대신에 무릇 강성한 제나라를 두려워하여 작은 월나라를 치는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용기있는 사람은 일이 어렵다고 피하지 않으며, 어진 사람은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지 않습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이 내려주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왕자는 휘하의 제후들의 사직을 끊어지지 않게 함으로 해서 그 의를 세웁니다. 오늘 월나라를 살려둠으로써 제후들에게 왕자의 인을 보여주고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친다면 그 위엄은 진(晉)나라를 덮게 되고 제후들은 틀림없이 서로 무리를 지어 오나라에 들어와 조현을 올리게 되어 오나라는 이로써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왕께서서 월나라를 꺼려하신다면 신이 청컨대 동쪽으로 나아가 월왕를 만나 군사를 내어 오나라가 제나라를 치는 일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월나라의 국내는 텅텅비게 되는 실리를 얻게 되고 명분상으로는 제후들을 이끌고 제나라를 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

오왕이 크게 기뻐하여 자공을 사자로 삼아 월나라로 보냈다. 자공을 위해 길을 깨끗이 청소하도록 명한 월왕이 친히 도성의 교외까지 나가 자공을 마중하고 몸소 어가를 몰아 역사로 인도한 후에 물었다.

「오랑캐의 나라에 대부께서는 어찌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이 번에 제가 오왕에게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치자하고 유세했습니다. 오왕이 그러고 싶지만 월나라를 두려워하여 ‘내가 월나라를 쳐서 없애버릴 때까지 기다리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월나라는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무릇 남에게 원수를 갚을 뜻이 없으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는 일은 저열한 행위이고 , 남에게 복수할 뜻을 갖고 있으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일을 알게 만드는 일은 위태로운 행위입니다. 일이 실행하기도 전에 계획이 먼저 새나가는 것은 위험합니다.19) 이 세 가지의 경우는 일을 행하는 데 삼가야 할 가장 큰 근심거리입니다.

월왕 구천(句踐)이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두 번 올린 후에 말했다.

「이 구천은 일찍이 자신의 힘도 헤아리지 못하고 이내 오나라와 싸워 회계산으로 들어가 농성하면서 치욕을 받았습니다. 지금 그때의 통분함이 뼛속 깊이 박혀있습니다. 그때부터 밤이나 낮이나 입술이타고 혀가 마르도록 원수만을 갚기에 온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단지 오왕과 함께 죽는 일입니다.」

이어서 오왕은 자공에게 자기가 오왕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자공이 대답했다.

「오왕이란 위인은 용맹하고 포학합니다. 그래서 오나라의 신하들은 매우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나라는 이미 피폐해졌고 군사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백성들은 윗사람들을 원망하고 대신들은 안에서 변란의 기회를 노립니다. 오자서(伍子胥)는 충심으로 간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태재 백비(伯嚭)는 나라의 일을 총괄하고 있으면서 단지 군주의 잘못된 것들을 그대로 따르며 자기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여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오늘 만일 왕께서 성의를 다하여 군사를 내어 오왕의 뜻을 받들고, 귀중한 보물을 보내어 오왕의 환심을 사서 왕께서 몸을 낮추고 오왕을 높여 겸손한 언사로 정중히 예를 갖추면 오왕은 마음 놓고 제나라를 칠 것입니다. 오왕이 만약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대왕으로써는 다행한 일이 될 것이며, 만일 이길 경우에는 오왕은 틀림없이 승전의 여세를 몰아 그 군사를 몰고 진(晉)나라로 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북쪽으로 발길을 옮겨 진나라 군주를 만나 월나라와 함께 오나라를 치도록 설득하여 오나라를 반드시 약하게 만들겠습니다. 결국 오나라의 정예한 군사들은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모두 꺾이고 또한 견고한 갑옷으로 무장한 군사들은 진나라 군사들로부터 궁지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왕께서 계속된 싸움으로 지친 오나라 군사들을 누르신다면 오나라는 이로써 반드시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월왕이 크게 기뻐하며 자공의 말을 따르기로 허락하고 자공에게 황금 백 일(鎰)과 명검 한 자루, 창 두 자루를 하사하려고 했다. 자공이 받지 않고 즉시 오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오왕을 접견한 자공이 말했다.

「신은 삼가 대왕의 말을 월왕에게 전했습니다. 월왕이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불행히도 어릴 때 부왕을 잃은 저는 스스로의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켜 결국은 욕된 몸으로 회계산에 들어가 농성했습니다. 이에 나라는 폐허가 되어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왕의 사함을 받아 다시 제기를 들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있게 되었으니 제가 죽어도 결코 감히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음모를 꾸며 대왕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5일 후에 월왕의 명을 받든 문종(文種)이 오나라에 들어와 오왕을 뵙고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올린 후에 월왕의 말을 전했다.

「동해에 살면서 대왕의 부림을 받는 신하 구천이 비천한 관리 문종에게 대왕의 좌우 대신들에게 예를 갖추고 감히 대왕의 문안을 여쭈게 합니다. 오늘 삼가 대왕께서 장차 의로운 군사를 크게 일으켜 강한 나라를 주멸하고 약소한 나라를 구원하며, 포악한 제나라를 억눌러 주왕실을 안정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월나라의 국내의 모든 사졸 3천 명을 동원하여 이 구천이 직접 견고한 갑옷으로 무장시킨 후에 예리한 무기를 들고 앞장서서 시석을 무릅쓰고자 종군을 청합니다. 이에 월나라의 천한 신하 문종을 시켜 우리 월나라의 선왕들이 비장해 온 무기들을 바치게 합니다. 갑옷 20벌, 도끼와 굴로(屈盧)의 창20) 및 보광지검(步光之劍)21)을 군리들에게 바쳐 출진을 축하하고자 합니다. 」

오왕이 크게 기뻐하며 자공에게 물었다.

「월왕이 몸소 과인을 따라 제나라 정벌전에 종군하고자 하는데 허락해도 좋겠습니까? 」

자공이 대답했다. 「불가합니다. 그것은 남의 나라 군사들을 모조리 이끌어 그 나라 안을 텅 비게 만들고 또한 그 군주까지 종군하게 만든다면 옳은 일이 아닙니다. 군주께서는 월나라에서 바치는 폐물들을 거두시고 그 군사들에게는 종군을 허락하시되 그 군주 되는 사람의 종군은 사양하시기 바랍니다.」

오왕이 자공의 말을 허락하고 이어서 월왕의 종군 요청은 사양했다. 마침내 오왕은 오나라 전국의 모든 군사들을 동원하여 제나라 정벌전에 나섰다. 그것을 본 자공이 오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들어가 그 군주에게 유세했다.

「신이 듣건대 ‘생각이 미리 정해지지 않으면 급한 일에 대처할 수 없고 군사가 먼저 정비되지 않으면 적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제나라와 오나라 사이에 장차 전쟁을 일어날 것입니다. 그 싸움에서 오나라가 이기지 못할 경우 월나라는 그 틈을 타서 반드시 오나라를 어지럽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오나라가 이긴다면 여세를 몰아 그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진나라에 쳐들어 올 것입니다.」

진나라 군주가 크게 두려워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병사들을 점검하고 휴식을 취하며 기다렸다가 상황을 보아가며 대처하십시오.」

진왕이 자로의 말대로 하겠다고 허락했다. 임무를 끝낸 자공은 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갔다. 이윽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로 쳐들어간 오왕은 제나라 군사들을 애릉(艾陵)22)에서 대파하고 일곱 장군과 그 군사들을 포로로 했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군사들을 휘몰아 진나라로 향했다. 오나라 군사들은 진나라 군사들과 황지(黃池)에서 조우하여 그 강함을 겨루었으나, 장기간의 원정에 지친 오군은 진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월왕이 곧바로 삼강(三江)을 건너 오나라를 기습하여 오성 밖 7리 되는 곳에 진영을 세웠다. 오왕이 듣고 진나라를 버리고 돌아와 오호(五湖) 일대에서 세 번이나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 결국 성문마저 지켜내지 못했다. 월왕은 마침내 오나라 왕궁을 포위한 끝에 오왕 부차를 죽이고 그 재상 백비를 처형했다. 오나라를 멸한 지 3년 만에 월왕은 동쪽의 제후들을 향하여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자공이 한 번 출행함으로 해서 노나라는 보존되었고 제나라에는 내란이 일어났으며 오나라는 싸움에서 지고 멸망했으며 진나라는 강성하게 되고 월나라는 패자가 되었음이다. 즉 자공이 한 번 사자로 나서자 제후국들 사이에 세력 균형이 깨지고 다섯 나라에 각기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자공은 평소에 매점매석으로 가격이 쌀 때 샀다가 비쌀 때를 기다려 때가 되면 이익을 남겨 재산을 모았다. 또 남의 장점을 즐겨 찬양했으나 단점은 덮어주지 못했다. 일찍이 노(魯)와 위(衛) 두 나라에서 재상을 지내며 집에는 수천금의 재산을 쌓아두기도 했는데 결국 제나라에서 죽었다.

언언(言偃)은 오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유(子游)라 하고 공자보다 45세 연하다.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자유는 노나라의 무성(武城)23)의 재(宰)가 되었다. 어느 날 공자가 무성을 지나가다 마을의 여기저기서 현악기를 뜯으며 부르는 노래소리를 들었다. 공자가 기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닭을 잡는데 어찌 소를 잡는 칼을 쓰고 있는가?」

자유가 대답했다.

「옛날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를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마음이 착해져서 부리기가 쉽다.’라고 하셨습니다.」

공자가 듣고 말했다.

「제자들아! 지금 언이 한 말은 옳다. 내가 한 말은 단지 농담이었을 뿐이다.」

공자는 자유가 문학에 능통하고 박학하다고 인정했다.

복상(卜商)은 자가 자하(子夏)이고 공자보다 44살 어리다. 자하가 공자에게 물었다.

「巧笑倩兮(교소천혜), 美目盼兮(미목반혜)24), 素以爲絢兮(소이위현혜)25)라는 싯귀는 무슨 뜻입니까? 」

공자가 대답했다.

「그림으로 말한다면 ‘먼저 색칠한 다음, 흰 분가루로 다듬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자하가 되물었다.

「예 그렇다면 예는 뒤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이제야 너와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러자 자공이 물었다.

「전손사(顓孫師)와 복상(卜商) 두 사람 중 누가 더 현능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師)는 지나치고 상(商)은 미치지 못한다.」

「사(師)와 상(商) 중누가 더 현능하다는 것입니까? 」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 보다 못하다. 즉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공자가 자하에게 일렀다.

「너는 군자의 품덕을 지닌 유생이 되어야지 소인배 같은 유생이 되지 말아라!」

공자가 죽은 후 자하는 서하(西河)26)로 들어가 제자를 길렀는데 위문후(魏文侯)27)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뒤 아들을 잃게 된 자하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눈이 멀고 말았다.

전손사(顓孫師)는 진(陳)나라 사람으로 자를 자장(子張)이라 했고 공자 보다 48살이 어렸다. 자장이 벼슬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들어라. 그 중에서 의심나는 말은 빼고 나머지 확신이 있는 말은 신중하게 생각하여 말한다면 실수를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많이 보아라. 그 중 위태롭게 생각되는 일은 빼고 그 나머지 확실한 일을 신중한 자세로 행한다면 후회되는 일이 적게 된다. 말에 실수가 적고 후회되는 행동이 없게 되면 벼슬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얻을 수 있음이다.」

후에 자장이 공자를 수행하여 진(陳)과 채(蔡) 두 나라 사이에서 궁지에 빠졌을 때 도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대답했다.

「말은 충신(忠信)하며, 행동은 독경(篤敬)스럽다면 비록 남만(南蠻)이나 북적(北狄)에 살고 있더라도 도를 행할 수 있고, 말은 충신(忠信)되지 않고, 행동은 독경스럽지 않다면 비록 사는 곳이 자기 고향일지라도 도는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서 있을 때는 이 충신독경(忠信篤敬)이라는 네 글자는 항상 네 눈앞에서 어른거려야 하고, 네가 수레를 탔을 때는 충신독경(忠信篤敬)이라는 글자는 수레의 횡목에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는 것처럼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 몸가짐을 가져야만 비로소 도를 행할 수 있음이다.」

자장은 이 말을 잊어버리지 않을 생각으로 그의 허리띠에다 적어 몸에 간직하고 다녔다.

자장이 또 공자에게 물었다.

「선비는 어떻게 해야만 통달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무엇을 말함이냐, 네가 말하는 통달했다는 의미가?」

자장이 말했다.

「제후의 나라에서나, 경대부의 봉지에서 명성을 얻는 일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그것은 명성이지 통달함이 아니다. 무릇 통달함이란 질박하고 곧으며 의를 행하기를 좋아하면서, 남의 말을 헤아리고 안색을 살펴 항상 심려깊게 남을 공경하면 제후국에 있거나 경대부의 봉지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통달하게 되는 법이다. 무릇 명성을 얻음은 아름다운 여인을 구하듯이 인(仁)을 구하여만 그 행동에 어긋남이 없게 되고, 비록 그곳에 머물지라도 의심을 받지 않고 제후국에 있거나 경대부의 봉지에 있어도 그 명성은 필히 얻을 수 있다.」

증삼(曾參)은 노나라 남무성(南武城)28) 사람으로 자는 자여(子輿)이고 공자보다 46세 어리다. 증삼이 효의 도리에 능통한 사실을 알게 된 공자는 그를 가르쳐 효경(孝經)을 짓게 했다. 증삼은 노나라에서 죽었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은 무성(武城) 출신으로 자는 자우(子羽)고 공자보다 39세 연하다. 자우는 용모가 너무 추했다.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온 자우를 보고 공자는 그를 재주가 모자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자우는 물러나왔음에도 계속 수행을 멈추지 않았고 길을 갈 때는 결코 지름길을 취하지 않았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사로이 경대부들을 만나지 않았다. 후에 그가 남쪽으로 내려가 강수(江水) 근방에 살 때는 그를 따르는 제자가 3백 명에 이르렀다. 그가 제자들에게, 취하고 주는 것과, 물러나고 나아가는 법을 가르쳐 그의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공자가 그의 이름을 전해 듣고 말했다.

「내가 말을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취했다가 재여(宰予)로 인해 실수 했고 용모로써 사람을 취했다가 자우로 인해 실수했다. 」

복불제(宓不齊)는 자가 자천(子賤)이고 공자보다 49세 연하다. 공자가 말했다.

「자천은 군자다. 그러나 노나라에 만일 군자가 없었다면 자천과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와 같은 군자의 도리를 알 수 있었겠는가? 」

자천이 선보(單父)29)의 재(宰)로 있다가 돌아와 공자에게 복명하며 말했다.

「이 나라에는 저보다 현능한 사람이 다섯 사람이나 더 있어서 저에게 치리(治理)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공자가 듣고 말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불제가 다스리는 곳이 너무 좁구나. 만일 그가 다스리는 곳이 컸다면 참으로 이상적인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을!」

원헌(原憲)의 자는 자사(子思)30)다. 자사가 공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수치(羞恥)라고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녹을 먹을 수 있으나,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녹을 먹는 다면 이것이 바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

자사가 다시 물었다.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것, 스스로 공을 자랑하는 것, 남을 원망하는 것, 탐욕스러운 것 등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를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렇게 하기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자가 죽은 뒤에 자사는 세상을 피하여 풀이 우거진 늪지대에 숨어 살았다. 자공(子貢)이 위나라 재상으로 있으면서 사두마차를 타고 기마 호위병과 함께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빈궁한 동네에 들어가 자사를 찾아가 인사했다. 자사는 헤어진 의관이지만 단정하게 차려입고 자공을 맞이했다. 남루한 옷차림의 자사를 본 자공이 부끄럽게 여기며 말했다.

「사제(師弟)는은 어찌 이리 병들어 있는가?」

자사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 하고, 도를 배우고도 행할 수 없는 것을 병들었다 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비록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 」

자공이 몹시 무안해하며 즐겁지 않은 마음을 갖고 그 마을을 떠났다. 후에 자공은 종신토록 그때의 실언을 부끄럽게 여기며 살았다.

공야장(公治長)은 제나라 사람으로 자를 자장(子長)이라 했다. 공자가 말했다.

「자장은 사위로 삼을 만하다. 일찍이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었다. 」

공자는 공야장을 자기의 사위로 삼았다.

남궁괄(南宮括)은 자를 자용(子容)이라 했다. 자용이 공자에게 물었다.

「예(羿)31)는 활을 잘 쏘고 하나라의 오(奡)32)는 육지에서도 배를 저을 수 있었던 장사들이었지만 다 같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라의 우임금과 주나라의 후직(后稷)은 몸소 밭을 갈며 고생을 했음에도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슨 까닭이었습니까?」

공자가 대답해주지 않다가 그가 나가자 비로소 입을 열어 말했다.

「자용은 덕을 받들 줄 아는 군자구나! 나라에 도가 행해지면 그는 임용될 것이고, 나라에 비록 도가 없더라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자용은 시경의 ‘흰구슬의 흠은 갈아 없앨 수 있지만 말의 흠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33)라는 구절을 반복해서 읽어 말조심을 마음에 새기자 공자는 자기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공석애(公皙哀)는 자가 계차(季次)다. 공자가 말했다.

「천하 사람들이 도를 행해지 않음에도 많은 대부분의 선비들은 대부들의 가신이 되고 도성에서 벼슬을 살고 있는데 오직 계차만은 지조를 지키며 벼슬하지 않고 있다.」

증점(曾蒧)은 자가 석(皙)이다. 어느 날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증점에게 공자가 말했다.

「네가 품고 있는 뜻을 말해 보아라!」

증점이 말했다.

「봄이 되면 새로 만든 옷을 입고, 관례(冠禮)를 치른 젊은이 5-6명과 함께 시동 6-7인을 데리고 기수(沂水)로 나아가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34)의 대(臺) 밑에서 바람을 쐰 다음 시를 노래하며 돌아오고 싶습니다.」

공자가 감탄하며 말했다.

「나도 너와 같이 하고 싶구나!」

안무요(顔無繇)의 자는 로(路)다. 로는 안희의 부친으로 부자가 각각 다른 시기에 공자에게 배웠다. 안희가 죽자 로는 가난하여 공자에게 수레를 청하여 그것을 팔아 안회의 장래를 치르려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재주가 있건 없건 누구나 자식은 자식인 것이다. 내 아들 리(鯉)가 죽었을 때 관은 있었으나 곽(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타고 다니는 수레를 팔아 곽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말석이나마 대부의 신분으로써 마차 없이 걸어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구(商瞿)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목(子木)이고 공자보다 29살 아래다. 공자는 주역(周易)을 상구에게 전하자 상구는 그것을 초나라 사람 비자(臂子) 한홍(馯弘)에게 전했다. 한홍은 다시 강동(江東)의 자용(子庸) 교자(矯疵)에게 전하고 교자는 연(燕)나라 사람 자가(子家) 주수(周豎)에게, 주수는 순우(淳于)35) 사람 자승(子乘) 광우(光羽)에게, 광우는 제나라 사람 자장(子莊) 전하(田何)에게, 전하는 동무(東武) 사람 자중(子中) 왕동(王同)에게, 왕동은 치천(淄川) 사람 양하(楊何)에게, 양하는 원삭(元朔)36) 연간에 주역에 능통하다고 해서 한나라 조정에서 중대부가 되었다.

고시(高柴)는 자가 자고(子羔)다. 자고는 키가 5척이 넘지 못했다.37) 나이는 공자보다 30살 어리다. 공자가 가르치다가 그를 우직하다고 여겼다. 자로가 자고를 비읍(費邑)의 재(宰)로 천거하자 공자가 보고 말했다.

「우직하여 학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를 천거하다니 남의 자식을 망치려고 하는구나! 」

자로가 공자에게 말했다.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는데 하필이면 독서를 한 다음에야 학문을 하라고 하십니까? 」

공자가 말했다.

「학문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는 일은 사람의 자식을 해치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말만 잘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칠조개(漆彫開)의 자는 자개(子開)다. 공자가 출사하라고 하자 자개가 말했다.

「저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여 벼슬할 만한 자신이 없습니다.」

공자가 듣고 기뻐했다.

공백료(公伯繚)는 자가 자주(子周)다. 자주가 계손(季孫) 씨에게 자로를 참소하자 자복(子服) 경백(景伯)이 공자에게 고했다.

「선생님께서는 진실로 마음이 미혹됨이 있습니다. 자주 정도는 제 힘으로 죽여 저자거리에 던져버릴 수 있습니다. 」

공자가 말했다.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고, 도가 장차 없어지는 것도 천명이다. 공백료 따위가 천명을 어찌하겠는가?」

사마경(司馬耕)은 자가 자우(子牛)다. 자우는 말이 많고 성질이 급했다. 어느 날 공자에게 인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인자는 말을 할 때 말을 잘 못하는 사람처럼 어렵게 해야만 한다.」

자우가 다시 물었다.

「말을 잘 못하는 것처럼 어렵게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인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인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우니 말인들 어찌 어렵지 않겠느냐?」

자우가 다시 공자에게 군자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걱정도 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이 군자다.」

자우가 다시 물었다.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으로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을 돌이켜보아 잘못된 점이 없으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번수(樊須)는 자가 자지(子遲)고 공자보다 36살 어리다. 언젠가 번수가 자기는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늙은 농부보다 농사짓는 법이 서툴다.」

그러자 번수가 다시 채소를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채소를 가꾸며 살아온 사람보다 서툴다.」

이윽고 번수가 물러가자 공자가 말했다.

「 번수는 참으로 소인이로구나!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겠으며,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은 어찌 감히 복종하지 않겠으며, 윗사람이 신의를 중히 여기면 백성들이 어찌 감히 진정으로 대하지 않겠는가? 윗사람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사방의 백성들은 그 자식들을 강보에 쌓아 등에 업고 찾아올 것인데 어찌 몸소 농사지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

번수가 다시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인이라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번지가 지(智)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유약(有若)은 공자보다 43살 어리다. 유약이 말했다.

「예를 행하는 데는 화(和)를 제일로 친다. 그래서 옛날 선왕들의 도는 화가 있었음으로 아람다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큰일이건 작은일이건 화(和)만 가지고는 잘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화가 소중하다는 것만 알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信)이 의(義)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 약속을 실행할 수 있으며 공경(恭敬)함이 예(禮)에 부합하면 치욕을 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면서도 친근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믿을만 하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죽자 그를 사모했던 제자들은 유약의 얼굴이 공자와 흡사하다는 이유로 서로 상의하여 그를 스승으로 추대하고 마치 공자를 모시듯이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유약에게 물었다.

「옛날 돌아가신 선생님께서 외출하실 때 제자들에게 우산을 준비시키면 그 날은 과연 비가 오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비가 올 줄을 미리 아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경(詩經)에 <달이 필(畢)에 걸리면 큰비가 내린다(月離于畢,俾滂沱矣)>38)라고 하지 않았느냐?’※미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에 달이 필에 머물렀습니다만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상구(商瞿)는 나이 많도록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의 어머니가 새로 장가를 들이려 했습니다. 공자께서 그런 상구를 제나라로 심부름을 보내려고 하자 상구의 모가 와서 사정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 ‘ 정하실 것 없습니다. 상구는 마흔이 넘어서면 아들을 다섯이나 두게 될 것입니다.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 과연 그대로였습니다. 감히 우리가 묻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습니까?」

유약은 대답할 수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공자의 제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말했다.

「 자여 그 자리에서 내려와 주시오. 그곳은 그대가 앉아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니오.」

공서적(公西赤)은 자가 자화(子華)다. 공자보다 42세 어리다. 자화가 제나라로 심부름을 가게 되었을 때 염유(冉有)가 자화의 어머니를 위해 그가 없는 동안 먹을 양식을 청구했다. 공자가 말했다.

「한 부(釜)39)를 주어라 」

염구가 그것으로 부족하니 더 주면 좋겠다고 청했다. 그러자 공자가 염구에게 다시 일렀다.

「한 유(庾)40)를 주어라. 」

그러나 염유는 찧지 않은 곡식 5병(秉)41)을 주었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적(赤)이 제나라로 떠날 때에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가죽옷을 입었었다. 내가 듣기에 나는 듣기를 ‘ 군자는 남을 도와도 부자에게 더 보내주는 일은 없다.‘고 들었다. 」

무마시(巫馬施)는 자가 자기(子旗)로 공자보다 30세 연하다. 진사패(陳司敗)가 공자에게 물었다.

「노나라 소공(昭公)은 예를 압니까? 」

공자가 대답했다.

「노후(魯侯)는 예를 알고 있다. 」

사패가 물러나와 무마시에게 인사를 올린 후에 말했다.

「내가 듣기에 군자는 무리를 지어 편들면 안 된다고 했는데 공자와 같은 군자도 역시 어쩔 수 없이 편을 들고 있군요. 노후는 오왕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해서 맹자(孟子)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맹자의 성이 희(姬)로 노후와 같은 성임을 꺼리어 맹자라 바꾸어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런 노후가 예를 안다고 한다면 세상에 누가 례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마시가 사패의 말을 전하자 공자가 말했다.

「나 구(丘)는 참으로 다행이다. 만약 사람에게 잘못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반드시 그것을 알게 된다. 신하로써 임금의 나쁜 점을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음이 예이기 때문이다.」

양전(梁鱣)은 자가 숙어(叔魚)이고 공자보다 29세 연하다. 안행(顔幸)은 자가 자류(子柳)이고 공자보다 46살 연하다. 염유(冉孺)는 자가 자로(子魯)이고 공자보다 50세 연하다. 조휼(曹卹)은 자가 조순(子循)이고 공자보다 50살 연하다. 백건(伯虔)은 자가 자석(子析)이고 공자보다 50사 연하다. 공손룡은 자가 자석(子石)이고 공자보다 53세 연하다.

자석(子石)을 포함한 위의 35인은 나이와 성명이 분명하고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또 문답한 것도 글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밖의 42명은 나이도 분명하지 않고 글로 전해진 것도 볼 수 없다 이제 그 이름과 자만 기록한다

염계(冉季) 자산(子産), 조구자(公祖句玆) 자지(子之), 진조(秦祖)는 자남(子南), 칠조다(漆雕哆) 자렴(子斂), 안고(顔高) 자교(子驕), 칠조도보(漆雕徒父), 양사적(壤駟赤) 자도(子徒), 상택(商澤), 석작촉(石作蜀) 자명(子明), 임불제(任不齊) 선(選), 공량유(公良孺) 자정(子正), 후처(后處) 자리(子里), 진염(秦冉) 개(開), 공하수(公夏首) 승(乘), 해용잠(奚容箴) 자석(子皙), 공견정(公肩定) 자중(子中), 안조(顔祖) 양(襄), 교선(鄡單) 자가(子家), 구정강(句井疆), 한보흑(罕父黑) 자색(子索), 진상(秦商) 자비(子丕), 신당(申黨) 주(周), 안지복(顔之僕) 숙(叔), 영기(榮旂) 자기(子祈), 현성(縣成) 자기(子祺), 좌인영(左人郢) 행(行), 연급(燕伋) 사(思), 정국(鄭國) 자도(子徒), 진비(秦非) 자지(子之), 시지상(施之常) 자긍(子恆), 안쾌(顔噲) 자성(子聲), 보숙승(步叔乘) 자거(子車), 원항적(原亢籍), 락해(樂欬) 자성(子聲), 염결(廉絜) 용(庸), 숙중회(叔仲會) 자기(子期), 안하(顔何) 염(冉), 적흑(狄黑) 석(皙), 방손(邦巽) 자렴(子斂), 공충(孔忠), 공서여여(公西輿如) 자상(子上), 공서침(公西葴) 자상(子上) 등이다.

태사공이 말한다.

세상의 학자들 대부분은 공자의 제자 중 70여 명을 일컫는데, 칭송하기를 혹자는 실제보다 과장되게 말하고, 혹자는 비방하기를 사실보다 더 헐뜯는다. 어느 쪽이나 모두 참된 내용을 알지 못한 채 말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명부는 공씨(孔氏) 집안의 벽 속에서 나온 고문의 기록에 따른 것이므로 대체로 정확하다. 나는 제자들의 성과 이름과 말을 모두 <논어>에 있는 공자와 제자들과의 문답에서 추려서 함께 엮어 이 편을 만들었는데 의심나는 것은 싣지 않았다.」

<중니제자열전 끝>

주석

1)중유(仲由)/ 자로의 자다.

2)자공(子貢)의 이름이다.

3)계강자(季康子)/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68년에 죽은 춘추 때 노나라의 정경(正卿)이다. 희(姬) 성에 계손씨(季孫氏)에 이름은 비(肥)다. 노환공(魯桓公)으로부터 분가하여 노나라의 국정을 전단했던 삼환씨 중의 하나인 계손씨의 종주로 공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노나라의 정경을 지냈다. 노애공(魯哀公) 3년 기원전 492년 계환자(季桓子 ; 계손사 季孫斯)가 죽을 때 자기의 뒤를 태어난지 얼마 안 되는 서출에게 잇도록 유언했으나 계강자가 사람을 보내 그의 서출 동생을 죽이고 스스로 환자의 후계자가 되어 노나라의 정경의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잡았다. 일찍이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와 번지(樊遲)의 도움을 받아 제나라 군사를 물리친 바 있으며 후에 오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애릉(艾陵)의 전투에 오나라 편으로 참전하여 제나라 군사들을 크게 파하고 제나라의 상국 국서(國書)를 전사시켰다. 노애공 12년 기원전 483년 용전부(用田賦)라는 법령을 반포하여 노나라의 세제를 개혁했다. 노애공 27년 기원전 468년에 죽었다.

4)장저(長沮)와 걸익(桀溺)/ 공자가 섭(葉) 땅을 지나 채나라로 가다가 밭을 갈고 있던 은자 장저와 걸익을 만나 자로를 시켜 강을 건너는 나루터를 물어보게 했다. 두 사람은 자로에게 혼란한 세상을 바꾸고자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공자를 떠나 자기들과 같이 세상에 숨어 농사나 짓고 살자고 권유했다.

5)하조장인(荷蓧丈人)/ 조(蓧)는 제초를 위해 대나무로 만든 농구다. 장인(丈人)은 노인에 대한 존칭이다. 공자의 일행과 헤어지게 된 자로가 밭에서 일하던 농부 즉 하조장인에게 공자의 행방을 물었다. 하조장인은 공자와 그 일파는 일하지도 않으면서 공론만 일삼고 있다고 비난했다. (공자세가, 논어 미자(微子)) 장저와 걸익, 하조장인 등은 형식에만 얽메이고 백성들의 생산활동을 등한시한 공자의 유학을 비난했다.

6)포(蒲)/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경내의 춘추 때 위나라의 성읍이다.

7)위영공(衛靈公)/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93년에 죽은 춘추 때 위(衛)나라 군주다. 희(姬) 성에 이름은 원(元)이고 헌공(獻公)의 손자에 양공(襄公)의 아들로 주경왕(周景王) 11년 기원전 534년 군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 중 공자가 망명해 와서 그를 받들었다. 만년에 그의 부인 남자(南子)와 태자 괴외(蕢聵)가 서로 틈이 벌어져 이윽고 괴외가 남자의 살해를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송나라로 도망친 사건으로 위나라 공실에 내란이 발생했다. 재위 42년이다.

8)공자영(公子郢)/ 위영공의 서자로 자는 자남(子南)이다. 영공에 의해 대부에 봉해졌고 현능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영공의 태자 괴외가 영공의 부인 남자에게 참소를 받아 송나라로 도망치자 영공은 공자영을 그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는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윽고 영공이 죽자 남자가 다시 그를 군주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공자영은 태자 괴외의 아들 첩(輒)이 있다고 말하여 결국 영공의 뒤는 위출공(衛出公)이 이었다. 그는 완고하게 군주의 자리를 사양했음으로 절조가 있다고 이름이 났으며 당시 사람들은 공자영을 수절(守節)이라고 칭했다. 후에 괴외와 출공이 부자지간임에도 서로 군주자리를 놓고 일어난 내란에서 그는 몸을 피해를 해를 입지 않았다. 시호는 소자(昭子)다.

9)자고(子羔)/ 공자의 제자 고시(高柴)의 자다. 춘추시 위나라의 대부로 자로와 함께 위나라에서 벼슬 했다. 기원전 521년에 태어났으나 죽은 해는 알 수 없다. 공자보다 30세 연하이다. 신장은 5척에 체 못 미쳤으며 그 외모는 못났다. 공자는 그를 보고 사람을 겉모습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 실례라고 하면서 우직하다고 평했다.

10)원문은 찬목개수(鑽木改燧)로 계절에 따라 나무를 바꿔가며 불씨를 새로 바꾸는 중국 고대의 풍속이다. 조위(曹魏) 때 하안(何晏)이 편찬한 하안집해(何晏集解)에 후한 때의 학자 마융(馬融)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 <주서(周書) 월령(月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有更火之文:春取榆柳之火,夏取枣杏之火,季夏取桑柘之火,秋取柞楢之火,冬取槐檀之火。一年之中,钻火各异,故曰改火也。" 后仅于寒食后二日为之,并成为习俗’ ( 유(楡)는 느릅나무, 유(柳)는 버들나무, 조(棗)는 대추나무, 행(杏)은 은행나무, 상(桑)은 뽕나무, 자(柘)는 산뽕나무, 작(柞)은 자작나무, 유(楢)는 졸참나무, 괴(槐)는 홰나무, 단(檀)은 박달나무다.)

11) 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圬也(후목불가조야, 분토지장불가오야)

12)임치(臨淄)/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로 춘추전국 시대 전 기간 동안 제나라의 도성이었다. 재여가 치박시의 대부가 되었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는 뜻으로 제나라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비중있는 인물이었음을 의미한다.

13)전상(田常)/ 춘추 때 제나라의 대신으로 원래 이름은 항(恒)이었으나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을 휘(諱)하여 상(常)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 전걸(田乞)의 아들로 제간공(齊簡公) 밑에서 상국이 되어 감지(闞止)와 정권을 다투었다. 그 부친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줄 때 큰 되를 사용하고 받을 때는 작은 되를 사용하도록 하여 민심을 얻었다. 마침내 기원전 481년 군사를 일으켜 제간공(齊簡公)과 감지(監止)를 죽이고 간공의 동생 평공(平公) 오(驁)를 대신 세웠다. 자신은 상국(相國)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했다. 전상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강씨들의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전씨들의 나라를 세웠다.

14)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즉 전제세가(田齊世家) 간공(簡公) 조에 전상에게 대항해서 제나라의 정권을 다투다가 멸족되어 죽은 사람은 감지다. 감지의 자가 자아(子我)였기 때문에 재여의 일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15)호련(瑚璉)/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기장을 담아 바치는 중요한 제기로써 품격이 높은 사람을 지칭했다.

16)천균(千鈞)/ 춘추 때 일 균은 삼십 근이고 한 근은 356그램이다. 즉 일균은 약 10키로에 천균은 10톤에 해당하는 중량이다.

17)수(銖)/ 1량의 1/24로 지금의 단위로는 0.67gram 이다.

18) 량(兩)/ 춘추전국 시대의 1량은 16gram이다.

19)且夫無報人之志而令人疑之,拙也(차부무보인지지영인의지, 졸야);有報人之志,使人知之,殆也(유보인지지사인지지, 태야);事未發而先聞,危也(사미발이선문, 위야)。

20)굴로(屈盧)/ 창을 잘 만들었던 전설 상의 명장(名匠)으로 검에 있어서 간장(干將)과 같은 사람이다. 후에 좋은 창을 부르는 일반 명칭이 되었다.

21)보광지검(步光之剑)/ 월나라 산의 명검을 뜻한다.

22)애릉(艾陵)의 싸움/ 춘추전국시대에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의 특징은 상대방 적군을 살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 사로잡힌 상대국의 장수나 군사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정기간이 지나면 방면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귀족 계급들의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들에 대한 교환은 국가 간의 중요한 외교의 현안에 속했다. 그런 관행이 오왕 부차가 이끌던 오나라에 의해 깨진 것이다.

그리고 100여 년 후의 상앙의 변법을 받아들인 진나라에 의해 본격적인 살육전이 전개 되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싸움이 전국시대 말기 기원전 260년 진나라와 조나라에 사이에 벌어진 장평대전이다. 진나라는 항복한 조군 40만을 구덩이에 묻어 모두 살해했다. 보유하고 있던 병력의 대부분을 장평대전에서 잃음으로써 조나라는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다. 전국시대 중반기 이후 진나라가 벌린 통일 전쟁은 상대국 군사들에 대한 철저한 살육전이었다. 애릉의 싸움은 전국시대 진나라에 의해 주도된 섬멸전의 전초전에 해당한다. 주경왕 36년 기원전 484년 오(吳)와 노(魯) 연합군이 애릉(艾陵 : 산동성 래무(萊蕪) 동북)에서 제군(齊軍)을 크게 물리친 싸움이다.

오나라가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 그 전해에 노(魯), 주(邾), 담(郯) 등의 제후국 군대와 제나라를 공격했다. 이와 함께 수군으로 하여금 바다로 나가 제나라를 협공하도록 했으나 제나라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패했다. 다음 해, 제나라가 원수를 갚기 위해 노나라를 공격했으나 다시 노군에 의해 패퇴했다. 5월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왕 부차는 군사를 일으켜 북상하여 노나라 군사와 함께 제군을 공격하여 박(博 : 지금의 산동성 태안 동남)을 함락시키고 계속 진격하여 영(嬴 : 지금의 산동성 래무(萊蕪) 서북)에서 제나라의 주력군과 조우하여 회전에 들어갔다. 쌍방의 병력은 각기 10만에 대체로 비슷한 병력이었다. 이에 오군은 상군, 하군, 우군(右軍) 등 삼군으로 나누어 각기 대부 서문소(胥門巢), 왕자 고조(姑曹), 전여(展如) 등으로 대장으로 삼아 제군과 대치토록 했다. 오왕 부차는 친히 별도의 중군을 친히 지휘하여 오나라 삼군의 후방에 주둔하여 예비대 역할을 했다. 제나라 진영에서는 국서(國書)가 중군을 맡고 고무비(高無丕)가 상군을, 종루(宗樓)가 하군을 지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오나라의 우군이 제나라의 상군을 격파했으나 오나라의 상군은 제나라의 중군에 의해 패했다. 이때 오왕이 휘하의 중군을 전투에 투입하여 서문소의 상군을 구원하여 제군을 물리쳤다. 오군은 제나라의 10만에 달하는 군사를 거의 전멸시켰다. 제나라의 장군 공순휘는 싸움 중에 죽고, 하군 대장 종루는 어떻게 전사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국서(國書), 공손하(公孫夏), 여구명(閭丘明), 진서(陳書), 동곽서(東郭書) 등의 대부가 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제나라의 병거 800승은 오군에 의해 노획되었다. 애릉의 싸움은 춘추때 가장 큰 규모에 가장 철저하게 상대방 군대를 섬멸한 전투였으며 동시에 중국의 전쟁사 중 최초로 예비대를 운용하여 승리를 일궈낸 전투이기도 했다. 이 싸움 이후로 예비부대의 역할을 병가들이 중시하기 시작했다.

23)무성(武城)/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 경내의 남무성(南武城)으로 노나라 계손씨(季孫氏)의 봉읍이었다.

24)시경(詩經) 위풍(衛風) 석인(碩人) 중에 나오는 싯귀로 ‘ 미소 짓는 보조개는 너무 어여쁘고, 초롱초롱한 눈은 곱기도 해라!전문은 미주에 실었다.

25)素以爲絢兮(소이위현혜)/ ‘흰 것으로써 아름다움을 이루었네‘라는 뜻으로 일실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시의 일부다. ‘

26)서하(西河)/ 산서성과 섬서성을 가르는 황하의 중국의 서북의 황토고원에서 발원하여 위수(渭水)에 합류하는 락수(洛水)의 이동 지역에 설치한 전국 때 위(魏)나라 령이다. 전국시대 명군인 위문후(魏文侯)가 명장 오기(吳起)를 기용하여 진나라로부터 빼앗아 설치한 군현이다.

27)위문후(魏文侯)/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45년에 즉위하여 396년에 죽은 위나라 군주로 이름은 사(斯)다. 기원전 445년에 즉위해서 49년 간 재위했다.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등에게서 사사했으며 현인과 재사들을 초빙하여 기용했다. 그의 치세 기간 중 이룩한 업적은 다음과 같다.

1.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를 기용하여 황하 이서와 낙수 이동의 땅을 점령하고 하서군을 설치 진나라의 서진을 막았다.

2. 악양(樂陽)을 기용하여 조나라 영토 너머 있던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여 위나라령으로 했다.

3. 서문표(西門豹)를 업(鄴)의 태수로 임명하여 하백을 팔아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있던 무당과 관리들을 치죄하여 미신을 타파했다. 서문표가 백성들을 잘 다스려 그 땅에 대규모의 관개시설을 건설하자 농산물의 생산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여 업 땅에 치세가 오도록 했다.

4. 이극(李克)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구습을 타파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이극이 시행한 주요 정책으로써

1) 진지력지교(盡地力之敎)라는 제도를 시행하여 토지생산력을 제고시켰다. 진지력지교란 토지의 이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규정이다.

2) 법경(法經)을 제정하여 시행함으로 해서 백성들은 법의 보호를 받고 생업에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3) 평적법(平糴法)을 시행하여 물가의 안정을 꾀해 경제를 발전시켰다. 평적법이라는 풍년이 들 때 국가가 사들였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싼 값으로 공급하는 제도다.

4) 귀족들의 특권이 세습되는 것을 폐지하고 ‘ 식유로(食有勞), 록유공(祿有功), 상유현(賞有賢), 벌필당(罰必當)’ 정책을 단행했다. 즉 ‘ 일하는 자에게만 먹을 것을 주고, 공을 세운자에게만 봉급을 주며,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상을 내리고,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준다.’라는 뜻이다.

5) 무졸제(武卒制)를 시행하여 상비군(常備軍)을 창설하여 여러 번에 걸쳐 진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진나라 령의 서하를 점령하여 그 땅에 서하군(西河郡)과 상군(上郡)을 설치했다.

28)남무성(南武城)/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 경내의 무성(武城)으로 춘추 때 노나라의 성읍으로 계손씨의 봉지였다.

29)선보(單父)/ 지금의 산동성 선현(單縣)이다. 후에 한고조 유방의 장인 여공(呂公)이 이곳에서 태어나 죄를 짓고 유방의 고향 패현으로 몸을 피했다.

30)사서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저자인 자사(子思)와는 다른 사람으로 이름은 공급(孔伋)으로 공자의 아들 공리(孔悝)의 아들이며 공자에게는 손자가 된다. 공자가 죽었을 때는 그는 단지 4살에 불과했다. 기원전 515년에 태어난 본문의 자사는 공자보다 36세 연하고 자공보다 5살 젊다.

31)예(羿)/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사람 이름으로 후예(后羿)라고도 하며 유궁씨(有窮氏) 부락의 수령이었다. 영성(嬴姓)에 전욱(顓頊)의 후예라고 전해지며 활을 잘 쏘았다. 하나라의 계(啓)가 죽자 그 다섯 아들들이 서로 왕위를 놓고 다투자 백성들의 뜻이라고 하면서 하나라를 대신 다스리다가 이윽고 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계의 아들 태강(太康)과 중강(仲康)은 나라 밖으로 쫓겨나 유랑 중 죽었다. 그는 자기의 활 솜씨를 믿고 정사를 신하인 한착(寒浞)에게 맡겼다가 결국은 그에게 살해되었다.

32)오(奡="傲)/" 전설상의 하왕조 때 대역사로 육지에서도 능히 배를 저을 수 있었다고 했다. 후에 하나라를 부흥시킨 소강(少康)에게 살해되었다.

33)원문은 백규지점(白珪之玷)으로 시경 대아(大雅)․억(抑)에 나오는 싯귀로 白珪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의 4귀절을 뜻한다. 전문은 미주에 실었다.

34)무우(舞雩)/ 노나라 군주가 하늘에 기우제를 올리는 장소로 지금의 곡부시 남쪽에 있었다.

35)순우(淳于)/ 지금의 산동성 안구현(安丘縣)으로 춘추 때 제후국이었으나 후에 기(杞)나라가 병탄하고 도성으로 삼았다.

36)원삭(元朔)/ 한무제가 사용한 연호 중의 하나로 기원전 128-123년 사이의 기간이다. 한서 유림전(儒林傳)에는 원광(元光)으로 되어있다. 원광 역시 한무제의 연호로 기원전 134-129년이다.

37)한나라 때 한 척의 단위는 22.5cm 임으로 자고는 1미터 좌우의 난쟁이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다.

38)月離于畢 俾滂沱矣(월리우필, 비방타의) 시경 소아都人事(도인사) 점점지석( 漸漸之石에 나오는 싯귀다. 전문은 미주에 실었다.

39)부(釜)/ 용량을 재는 용기로 6말 4되에 해당했다.

40)유(庾)/ 16말의 용량이다.

41)병(秉)/ 1병은 16곡(斛)이고 1곡은 10말이다. 5병은 모두 50말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다.

미주

漸漸之石(참참지석)

소아(小雅) 어조지습(魚藻之什)

모시서(毛詩序)에 제후가 주유왕(周幽王)의 학정을 풍자한 시로써 융적(戎狄)이 반했으나 형서(荊舒)의 구원군이 오지 않음으로 장수에게 명해 동정(東征)을 행하게 했다. 군역에 동원된 군사들이 오랜 원정으로 인해 외지에서 병이 걸려 고통이 심하자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했다. 그러나 모시서의 관점은 다음 세 가지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이 시의 작자가 제후라는 설이고 둘째는 주유왕을 풍자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형서(荊舒)를 정벌하기 위해 오랫동안 종군했다는 것으로 형은 초(楚)고, 서(舒)는 초나라의 속국으로 몇 나라로 갈라져 있었다. 주유왕 때 초나라를 동정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주유왕을 풍자하고 초나라에 동정했다는 모서의 설을 취하지 않고 있으며 주희(朱熹)의 「 동쪽으로 출정나간 장수가 행군과 군역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이 노래를 지어 불었다.」라는 설이 유력하다.

漸漸之石 維其高矣(점점지석 유기고의)

우뚝 솟은 저 바위산, 높고 험하기도 한데

山川悠遠 維其勞矣(산천유원 유기노의)

머나먼 이역 산천에서. 겪는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네

武人東征 不皇朝矣(무인동정 불황조의)

동쪽으로 정벌나간 군사들은, 잠시 쉴 틈도 없구나!

부(賦)다. 漸漸(참참)은 높고 험한 모양이다. 무인(武人)은 장수(將帥)를 말하고 遑(황)은 겨를이니, 휴식도 취할 겨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원정을 나가는 장수(將帥)가 행군하는 길이 험준하여 그 고생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이 시를 지어 노래한 것이다.

漸漸之石 維其卒矣(점점지석 유기졸의)

우뚝 솟은 저 바위산, 높고 험하기도 하네

山川悠遠 曷其沒矣(산천유원 갈기몰의)

머나먼 이역 산천은, 언젠가 끝날 것인가?

武人東征 不皇出矣(무인동정 불황출의)

군사들의 원정길엔, 이 산천 벗어날 때가 없네!

부(賦)이다. 卒(졸)은 崔嵬(최외)인데 줄(崒)과 통하여 높고 험준한 산령(山巓)의 끝을 말한다. 曷(갈)은 어찌 하(何)요, 몰(沒)은 다함이니, 「 저 높고 험한 산령의 끝을 어느 날에 다다를 수 있을까?」라고 말한 것이다. 不遑出(불황출)은 단지 깊이 들어갈 줄만 알고 나올 겨를을 도모하지 못한 것을 이름이다.

有豕白蹢 烝涉波矣(유시백척 증섭파의)

발톱 흰 맷돼지가, 물살 헤치며 강 건너고

月離于畢 俾滂沱矣(월리우필 비방타의)

떠오르는 달 필성에 걸렸으니, 큰 비가 내리겠네

武人東征 不皇他矣(무인동정 불황타의)

원정 나간 군사들이여, 다른 일을 할 틈이 없네

부(賦)이다. 蹢(척)은 발굽이요, 烝(증)은 무리다. 離(리)는 달이 자는 곳이다. 28수의 하나인 畢(필)은 서방백호(西方白虎)에 속하고 구름과 비를 주관한 별자리다. 돼지가 물을 건너가며, 달이 필성(畢星)에 걸려있는 것은 장차 비가 올 징조로 여겼다.

장자(张子)가 말했다. 「돼지가 진흙을 지고 흙을 끌고 다님은 원래 그 본성이거늘, 지금 그 발이 모두 희고 무리를 지어 물을 건너가니, 수재가 많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오랜 군역에 시달리고 있는데 또한 설상가상으로 큰비를 만나서 심히 고통을 받게 되어 다른 일에 마음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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