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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도주공(陶朱公) 범려(范蠡)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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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외전 범려(范蠡)

범려외전(范蠡外傳)은 사마천의 사기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편과 화식열전(貨殖列傳)의 범려 부분을 발췌하여 운영자가 편집한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은 기원전 6세기 공자와 같은 시대를 함께 살다가 죽은 범려가 만든 말이지만 그 말이 인구에 회자(膾炙)되게 만든 것은 범려가 죽은 후 300년 후 쯤에 태어나 초한전쟁 때 활약한 한신(韓信)이라는 사람이다. 토사구팽이라는 행태를 일찍이 체득하여 구천으로부터 그 화를 피한 사람은 구천이고 설마하다가 토사구팽이라는 원리를 몸으로 실현한 사람이 바로 한신이다.

춘추말기 당시 월왕 구천이 중원 제후국을 호령했던 막강한 국력의 오나라를 멸하고 대신 패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범려의 보좌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범려는 성공한 월왕 구천 곁에 계속 머물다가는 토사구팽을 당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그 곁을 떠나 제나라로 들어가 해변가에 자리 잡고 그 큰 아들과 열심히 농사를 지어 수십만 금의 재산을 모았다. 이에 제나라 사람들은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초빙하여 제나라의 상경(上卿) 자리를 맡겼다. 초빙을 받아서 하는 벼슬살이이기는 하지만 본국 사람들의 질시가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다시 상경의 자리를 내놓고 그 동안 모아둔 재물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제나라를 떠나 송나라 영토였던 지금의 하남성 정도시(定陶市)로 이주하여 교역에 종사하여 또다시 거만금의 재물을 모았다.

범려는 살던 나라를 세 번이나 옮기고도 세 번 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범려가 도(陶) 땅에서 살다가 늙어 죽어 도주공(陶朱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말미의 千金之子不死于市(천금지자불사우시)라는 말은 ‘부잣집 자식은 길 거리에서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본주의 시대에 있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원리에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원전은 화식열전이다.

범려(范蠡)

범려(范蠡)는 춘추 시기에 월왕 구천(勾踐: 재위 BC 497-465)을 섬긴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며 정략가이다. 자는 소백(少伯), 춘추 말기에 초(楚)나라 완(宛: 지금의 하남성 남양현<南陽縣>)에서 태어났다. 월나라 대부로서 월나라가 오(吳)나라에게 패하였을 때 오나라에 3년간 인질로 잡혀있었다. 그후 석방되어 월나라로 돌아가서 월왕 구천을 도와 각고의 노력으로 부국강병을 시행하여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만년에는 제(齊)나라로 가서 농사를 짓다가 마지막에는 도(陶: 지금의 산동성 정도현<定陶縣>)에 은거하여 이름을 도주공(陶朱公)으로 바꾸고 장사를 하였다.

범려는 지략이 뛰어나고 처세에 능하였으며, 정치와 군사는 물론 상업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보기 드문 인재였다. 특히 그와 서시(西施)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다.

주나라 초기부터 지금의 절강(浙江) 지역에서 남북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오월(吳越) 두 나라는 춘추시대 후기에 이르러 세력을 크게 떨치기 시작하여 상호간에 전쟁이 잦았다. 이 두 나라 중에서 도읍을 고소(姑蘇: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蘇州市>)에 정한 오나라의 국력이 먼저 월나라를 앞섰고, 도읍을 회계(會稽: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紹興市>)에 정한 월나라는 오나라에 대항하지 못하고 해마다 오나라에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그러나 구천이 즉위하면서 국력이 점점 강성해진 월나라는 서서히 오나라의 위세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BC 494년에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절치부심하며 군대를 양성하여 월나라를 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매우 불안해 했다. 구천은 앉아서 오나라의 공격을 당하기보다는 오나라의 공격 준비가 끝나기 전에 오나라를 선제공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중신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렇게 초조해하는 구천의 마음을 알아차린 대부 범려는 무모한 공격을 하지 말고 자중하여 신중을 기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구천은 그의 말에 한마디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범려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풍부한 학식과 경륜을 쌓아 성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원망하면서 미련을 버리고 미치광이처럼 강호를 떠돌아 다녔다. 월나라의 대부 문종(文種)은 마침 명사(名士)를 찾아다니다가 완현(宛縣)에 이르러 범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치광이라 했지만 문종은 범려가 비범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그를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범려는 문종의 마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처음에는 일부러 그를 회피했지만, 재차 문종이 그를 찾아오자 의관을 갖추고 정성껏 맞았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 의기투합하여 천하의 대사와 부국강병책을 논하였다. 문종은 범려가 역시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구천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구천도 그러한 범려를 매우 중시하여 곧바로 그를 대부에 임명했다.

범려가 오나라에 대한 공격을 반대하고 나오자 구천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범려는 구천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오나라와 월나라의 형세에 대해서 더욱 자세하게 분석하였다.

「오왕 부차는 부왕 합려(閤閭)가 우리에게 피살되자 치욕과 원한 속에 3년간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전쟁을 준비해 왔기 때문에 병사들은 용맹하고 세력이 막강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무리하게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힘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가장 현명한 선택은 잠시 피하여 방어를 견고히 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천은 범려의 말을 듣지 않고 정예병 3만 명을 선발하여 오나라를 공격, 부초(夫椒: 태호<太湖>에 있는 산 이름)에서 오나라 군대와 마주쳤다. 그 결과 구천은 대패하여 단지 5000여명의 군사와 함께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절강성 중부)으로 퇴각하였으나 다시 오나라 군대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절망에 빠진 구천은 힘없이 범려를 바라보고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대책을 강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범려는 치욕을 감수해서라도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오나라 왕과 신하들에게 예를 갖추어 뇌물을 바쳐 시간을 벌어 천천히 기회를 보아야 한다고 권하였다. 구천은 어쩔 수 없이 문종을 파견하여 오나라에 화의를 청했다. 그러나 문종이 오나라 진영에 갔을 때 오나라의 상국(相國) 오자서(伍子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화의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를 보고받은 구천은 죽음을 각오하고 오나라와의 마지막 결전을 불사하고자 했지만, 범려와 문종은 그러한 구천을 계속 만류했다. 범려와 문종은 정세를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그들은 오나라 왕 부차에게 많은 미녀들을 바치고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噽)에게 무수한 금은보화를 바쳐 화의를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구천은 회계산 포위에서 풀려나 월나라 도읍으로 돌아간 후 범려에게 모든 국정을 맡기고 자신은 직접 오나라로 가서 부차를 섬기려고 했다. 그러나 범려는 국정을 문종에게 맡기고 자신도 함께 오나라에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구천은 범려의 말을 쫓아 부차와 백비에게 바칠 미녀 330명과 금은보화를 수레에 가득 싣고 범려와 함께 오나라로 떠났다.

BC 493년 구천과 범려는 부차를 만나 미녀와 보물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부차는 그들을 석실(石室)에 가두고 말을 기르는 노역을 시켰다. 그리고 부차가 수레를 타고 사냥을 떠날 때마다 구천은 채찍을 들고 부차의 마차를 호위하며 따라다녀야만 했다.

어느 날 부차가 구천과 범려를 불렀다. 부차는 구천을 모시고 있던 범려에게 말했다.,

「현명한 여인은 몰락한 집에 시집가지 않고, 뛰어난 선비는 멸망한 나라에 벼슬하지 않는다. 지금 구천은 나라를 잃고 노예가 되었는데 그대는 치욕스럽지도 않은가? 그대가 만약 개과천선하여 월나라를 버리고 오나라를 섬긴다면 과인은 그대의 죄를 사면하고 중임을 맡기겠노라.」

구천은 그 말을 듣고 범려가 변절할까 염려하면서 땅에 엎드려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범려는 완곡한 말로 부차에게 사양했다.

「망국의 임금은 정사를 말하지 않고 패전의 장수는 용맹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이 월나라에서 구천을 잘 보좌하지 못하여 대왕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 요행이 죽지 않고 오나라에서 말을 기르고 마당을 쓸고 있으니, 신은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만족합니다. 어찌 감히 부귀를 넘보겠습니까?」

부차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구천과 범려를 석실로 돌려보낸 후 사람을 시켜 그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말을 기르고 마당을 쓰는 일에만 열중할 뿐 어떠한 원망이나 불만도 나타내지 않았다. 부차는 그들이 진심으로 항복한 것에 만족하고 그들을 월나라로 돌려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은 부차가 병에 걸렸다. 범려는 그 병이 평범한 질병으로 조금 지나면 바로 낫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는 구천과 상의하여 부차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계책을 하나 준비하였다. 구천은 부차를 만나 그의 병세를 살폈다. 구천은 손가락으로 부차의 대변을 찍어 입에 넣고 맛을 본 다음 큰 소리로 축하의 말을 했다.

「대왕의 병은 금방 나을 수 있습니다.」

부차가 의아하게 여기고 그 이유를 물었다. 구천은 범려가 부탁한 그대로 말하였다.

「신은 일찍이 의술을 배운 적이 있는데, 환자의 대변만 맛보아도 그 병세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대왕의 대변은 맛이 마치 곡식의 맛처럼 시큼하면서도 씁니다. 이로써 대왕의 병세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차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구천과 범려를 석실에서 나와 근처의 민가에 살면서 말을 기르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차의 병이 다 나았다. 범려가 예상했던 대로 부차는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낼 결정을 하였다. 오자서가 극구 반대를 하였지만 부차는 듣지 않았다.

BC 490년 구천과 범려는 오나라에서 3년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나 월나라로 돌아갔다. 구천은 회계산에서 당한 치욕을 한시도 잊지 않고 복수를 향한 집념을 불태웠다. 구천은 도읍을 제기(諸暨)에서 회계(會稽)로 옮기기로 하고 범려에게 새로운 도읍의 건설을 명했다. 범려는 천문과 지형을 살핀 다음 신성을 축조하였다. 밖에 성벽과 성문을 만들면서 서북쪽에 특별히 성문을 하나 더 만들고 오나라에는 조공을 바칠 길을 닦는다고 소문을 내었다. 부차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지만, 실제로 그것은 오나라를 신속히 공격하기 위한 군사도로였다. 구천이 범려에게 월나라를 발전시킬 방법을 묻자 범려는 원대한 계획을 말했다.

「하늘의 운행과 사람의 일은 부단히 변화하기 때문에 방침과 정책을 세워 미리 대처해야 합니다. 만물은 땅에서 소생하고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만물과 하나가 되어 기르고 있기 때문에 금수와 농작물 등은 대지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만물이라도 땅은 차별 없이 그것들을 자라나게 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그러한 대지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생장에는 각기 정해진 때가 있는지라,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생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일에 대한 변화도 마찬가지여서 최후의 전환점이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처세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국면을 유리하게 전환시켜야 합니다.」

범려는 계속하여 내정 방면에서 월나라를 부흥시킬 정책들을 건의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보호하면서 생산력을 강화시켜 부국강병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구천에게 직접 들에 나가 백성들과 함께 농사를 짓도록 하고, 구천의 부인에게도 직접 베를 짜면서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나눌 것을 권하였다. 그결과 월나라는 점점 국민생활이 안정되고 국력도 부강해졌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범려는 약소국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고 강대국에게는 표면적으로만 유순한 입장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오나라에 대해서도 그들의 힘이 쇠약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멸망시킨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구천은 범려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인재를 등용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며 군대를 양성하는 일에 조금도 나태함을 보이지 않았다.

범려는 또 직접 민간에서 미녀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을 찾아내어 그녀들을 금은보화와 함께 오나라 왕에게 헌상하는 한편, 부차에게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주색에 빠지도록 유혹하였다. 그리고 초(楚)·제(齊)·진(晋)과 연합하여 오나라를 최대한 고립시켰다.

BC 485년 구천이 월나라로 돌아온 지 5년째 되던 해에 월나라는 국고가 충실해지고 전국토가 개간되어 백성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구천은 오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고 ‘회계의 치욕(會稽之治)’을 씻고자 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좀더 기다릴 것을 간청하였다.

일 년 후에 오나라 왕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월왕 구천은 그 전쟁에서 오나라의 국력이 크게 소되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직접 많은 예물을 가지고 오나라를 방문하였다. 오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온갖 허세를 부리면서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오직 오자서만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매우 근심스러워하면서 부차에게 제나라 공격을 포기하고 월나라를 칠 것을 건의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건의를 뿌리치고 마침내 제나라 공격을 감행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제나라 공격에서 승리를 거둔 부차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개선하였다. 그는 오자서를 보고 크게 나무랐지만 오자서는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3년 내에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크게 노한 부차는 오자서에게 보검을 내려 자결을 명하였다. 오자서가 죽은 후 부차는 태재 백비를 더욱 총애하여 오나라 조정은 더욱 부패해졌다.

마침내 17년간 와신상담을 통한 각고의 노력 끝에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하여 지난날의 원한과 치욕을 갚고 부차를 고소산(姑蘇山)에서 자결토록 했다.

BC473년 구천은 여세를 몰고 북상하여 산동의 서주(徐州)에서 제후를 회맹케 하여 장강(長江), 회하(淮河) 유역 일대까지 세력권을 확대하고 자칭 ‘패왕(覇王)’으로 일컫기에 이르렀으나, 그 공적은 명신 범려의 보좌에 힘입은 바가 컸다.

1. 可與患難 不與共樂(가여환난 불여공락)

- 환난은 같이 할 수 있으나 영화는 같이 누릴 수 없다. -

범려는 월왕 구천을 모시면서 만난을 참고 견디며 있는 힘을 다하여 20여 년 만에 결국은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여 회계산에서 당한 치욕을 갚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구천은 회하(淮河)를 건너 북쪽으로 군사들을 진격시켜 제(齊)와 당진(唐晉) 두 강국과 대치하며 천하의 제후들을 향해 호령을 발하며 주왕실을 받들고 패자를 칭했다. 범려는 그런 구천을 위해 상장군이 되었다. 이윽고 범려가 월나라로 돌아오자 그의 이름은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이에 범려는 그의 큰 이름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구천의 사람됨은 어려움은 같이 지낼 수는 있지만 영화는 같이 지내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편지를 써서 월나라에서의 벼슬살이를 그만두겠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그 군주가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신하된 자는 힘써 노력해야 하고, 그 군주가 욕됨을 입으면 그 신하는 죽음으로써 그 잘못을 속죄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대왕께서 회계산에서 갇혀 치욕을 당했음에도 신은 그 일로 해서 죽지 않았던 이유는 살아서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이미 그 치욕을 갚았으니, 청컨대 주군으로 하여금 회계산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여 지은 죄값을 받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천이 말했다.

「나는 장차 월나라를 나누어 당신과 함께 다스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의 뜻을 받들지 않는다면 죄를 내리겠소!」

범려가 다시 편지를 써서 자기의 뜻을 전했다.

「 주군께서는 뜻한 바대로 하십시오. 저는 저 대로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이어서 범려는 가볍고 간단한 귀중품을 싸가지고 가솔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해상으로 나가 다른 나라로 가서 다시는 월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구천이 사라진 범려의 공을 기리어 회계산 일대를 그의 봉읍으로 정했다.

2.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

-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져 먹힌다 -

월왕의 곁을 떠나 제나라로 망명하여 살던 범려가 대부 문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없게 되면 좋은 활은 창고에 묻히게 되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나운 사냥개는 삶겨져 죽게 됩니다. 월왕은 목이 길게 나오고 새처럼 입이 삐죽이 튀어 나왔으니 단지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으나 영화는 같이 나눌 수 없는 사람입니다.1) 어찌하여 아직도 그의 곁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편지를 읽은 문종이 병을 칭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문종이 아마도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참소했다. 월왕이 즉시 문종에게 칼을 주며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오나라를 멸하기 위한 7가지 계책을 알려주었소2). 과인은 그 중 3가지만 사용해서 오나라를 멸했소. 아직 그대는 4가지의 계책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는 지하에 계신 선왕을 뒤쫓아가 그 계책을 나에게 써보도록 하시오.」

문종이 즉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千金之子 不死于市(천금지자 불사우시)

- 천금의 부자집 자식은 저자거리에서 죽지 않는다. -

바다로 나가 제나라로 들어간 범려는 성은 치이(鴟夷)3) 이름은 자피(子皮)로 바꾸어 살았다. 그는 해변에 살면서 그의 아들과 함께 온 힘을 다하여 농사에 힘써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제나라에 들어와 산지 그래 오래되지 않아 그는 십만 전에 달하는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제나라 사람들이 범려가 어질고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데려가 재상으로 삼았다. 어느 날 범려가 탄식하며 말했다.

「집안을 일으켜 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다시 그 관직은 경상(卿相)의 높은 자리에 앉게 되니, 평민의 신분으로 세상에 나와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존귀한 이름과 지위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게 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마련이라!」

이렇게 생각한 범려는 재상의 인장을 제나라 군주에게 돌려주고 자기의 모든 재산을 꺼내어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준 다음, 휴대하기 편리한 재보는 몸에 휴대하고 아무도 모르게 살던 곳을 떠나 당시 송나라 땅인 도(陶) 땅으로 갔다. 그는 도 땅이 천하의 중심에 있어 사통팔달로 통하는 도로가 나 있어 교역과 매매업에 종사하면 재산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름을 바꾸어 도주공(陶朱公)이라 스스로 칭하고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물건을 사서 쌓아 놓았다가 시기를 기다려 되팔아 1할의 이윤을 남겼다. 그는 오래되지 않아 거만금을 모았고, 세상 사람들은 도주공을 찬양했다.

도주공(陶朱公), 즉 범려가 도(陶) 땅에서 살면서, 늦은 나이에 막내아들을 낳았다. 이 막내아들이 장성할 때 쯤 해서 둘째아들이 초나라에 여행 갔다가 시비 끝에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범려가 소식을 듣고 말했다.

「사람을 죽였다면,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 천금울 가진 부자집의 아들은 거리에서 죽지 않는다’라고 했다.」

범려는 이어서 막내아들에게 초나라에 가서 소식을 알아보라고 당부의 말을 이른 다음 천일(千鎰)4)의 황금을 준비하여 갈색의 용기 안에 넣어 소가 끄는 수레 한 대에 싣고 타고 가도록 했다. 이윽고 막내아들이 출발하려고 하자 장남이 나서서 자기가 가야만 한다고 청했다. 범려가 그 청을 들어주지 않자 장남이 말했다.

「장남은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것이 그 임무입니다. 지금 동생이 죄를 지어 그를 구하려 가는데 장남을 보내지 않고 막내를 보내니 그것은 아버님께서 제가 불초한 자식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장남이 말을 마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 범려의 부인이 그 장남을 위해 말했다.

「지금 막내를 보낸다 한들 둘째를 살려서 데려 올지는 모르는 일인데, 그 보다 먼저 장남이 죽게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범려는 할 수 없이 장남을 보내면서 자기 둘째아들에 대한 선처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초나라의 현인(賢人) 장(莊)선생에게 써서 봉한 다음 장남에게 주었다. 범려가 장남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너는 초나라에 당도하면 지금 가지고 가는 황금을 전부 장선생에게 전하라. 장선생이 이르는 대로 할 것이며, 심사숙고하여 절대로 그와 다투지 말라.」

드디어 장남이 동생을 구하기 위해 초나라로 길을 떠날 때 그는 별도로 범려 모르게 수백 금의 황금을 준비해 가져갔다.

이윽고 장남이 초나라에 당도해서 장선생의 집을 찾았다. 장선생의 집은 성곽 담벼락에 붙어 있었는데 명아주풀을 헤치고 간신히 그 집 문 앞에 당도하여 보니 그 가세가 매우 빈한했다. 장남은 범려가 일러준 대로 편지와 함께 황금 천일을 장선생에게 주었다. 황금을 받고 편지 읽기를 마친 장선생이 장남을 향해 말했다.

「가능하면 하루라도 빨리 이 나라를 떠나시오. 절대 이 나라에 머물지 마시오. 동생이 석방되더라도 절대로 그 연고를 알려고 하지 마시오.」

장남이 그 집에서 나와 떠나지 않고 장선생 몰래 초나라에 머물렀다. 그는 범려 몰래 가져간 황금을 초나라의 궁중에서 높은 관직을 살고 있던 귀인에게 바쳤다.

장생이라는 사람은 비록 누추한 집에서 빈한하게 살고 있었지만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이라고 초나라에 명성이 있어 초왕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도주공이 보낸 황금을 받은 것은 그가 재물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이 성사된 후에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어 그에 대한 신용을 보이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장선생은 그 부인에게 황금에 대해 당부의 말을 했다.

「이 황금의 주인은 도주공의 것이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미처 이 황금을 도주공에게 전해지 못하게 되거든 당신이 나를 대신해서 전해주기 바라오. 절대로 손대지 마시오.」

그러나 범려의 장남은 장선생이 그가 준 황금으로 자기 동생을 석방하는데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줄로 생각했다. 이윽고 잔선생이 시간을 내어 초왕을 찾아가 말했다.

「제가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해 보니 어떤 별 하나가 그 자리를 옮겼는데, 그것은 우리 초나라에 매우 불길한 징조입니다.」

초왕은 평소에 장선생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대책을 물었다. 장선생이 대답했다.

「오로지 덕을 베푸는 것만이 그 불길한 징조를 없앨 수 있습니다.」

초왕이 그 뜻을 받들겠다고 말했다.

「선생께서는 돌아가 쉬시기 바랍니다. 말씀하신 바를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초왕은 장선생을 보내고 나서 왕명을 내려 삼전(三錢)을 보관하는 창고5)들을 모두 봉하도록 했다. 범려의 장남에게서 뇌물을 받았던 귀인이 깜짝 놀라 그를 찾아가 조만 간에 대사면령이 반포 될 것이라고 알렸다. 대사면령이 내리게 될 줄은 어떻게 알았냐고 장남이 묻자 그 귀인이 대답했다.

「초나라 왕들은 옛날부터 사면령을 내릴 때는 언제나 삼전지부(三錢之府)의 문을 봉해 왔소. 어제 저녁에 왕이 삼전지부의 문을 봉하라는 명을 내렸었소.」

범려의 장남은 사면령이 내리면 그 동생도 마땅히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데 장선생에게 준 황금 천일은 너무나 큰 재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생을 석방하는데 아무런 힘도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장남은 곧바로 장선생의 집을 찾아갔다. 장선생이 놀라 물었다.

「그대는 아직 이 나라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가?」

범려의 장남이 대답했다.

「원래 이 나라를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동생의 일을 부탁하러 왔었습니다만, 지금 사면령이 내리게 되어 동생이 스스로 풀려나게 될 것 같아 하직 인사를 드리려고 이렇게 들렸습니다.」

장선생은 장남이 옛날 자기에게 준 황금을 찾기 위해 온 것이라 것을 알고 말했다.

「방안에 들어가면 그대가 준 황금이 있으니 가지고 가시게나.」

장남이 즉시 장선생의 방으로 들어가 황금을 취한 후에 떠나면서 스스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기뻐했다. 장선생은 어린아이에게 농락을 당했음을 수치로 여겨 즉시 궁궐로 들어가 초왕을 배알하고 말했다.

「신이 전에 말씀드리기를 어떤 별이 움직여 나라에 불길한 징조가 있어 이를 막기 위해서는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오늘 신이 집밖으로 나와 길을 걷는데 길가의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도(陶) 땅의 부자인 주공(朱公)의 아들이 사람을 죽여 우리 초나라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 집안사람이 많은 황금을 가지고 왕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바쳐, 지금 행하려고 하는 사면령도 대왕께서 덕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도주공의 아들을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초왕이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과인이 비록 부덕한 사람이 될지언정, 어찌 도주공의 아들 한 사람만을 위해 덕을 베풀 수 있단 말이오!」

초왕이 즉시 왕명을 발하여 도주공의 막내아들을 처형하라고 명하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사면령을 내렸다. 도주공의 장남은 결국은 그 동생의 시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장남이 집에 이르자 그 모친과 마을 사람들은 막내아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나 유독 범려 만은 오히려 웃음 지으며 그 장남에게 말했다.

「나는 원래 네가 동생을 살려서 데려오지 못할 줄 알았다. 네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돈을 쓸 줄을 모르고 아까워했기 때문이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고생을 같이 겪어 어렵게 살아왔다. 그래서 너는 재물을 버리는 일을 참지 못한다. 그러나 네 막내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이미 부자였고 좋은 말이 끄는 마차를 끌고 다니며 토끼나 잡으러 다녔으니 그가 돈이 어떻게 생기는지 어찌 알기나 하겠느냐? 따라서 네 동생은 쉽게 재물을 버리고 또한 아까워 할 줄 모른다. 옛날 내가 막내를 보내려고 했던 이유는 그가 능히 재물을 버릴 수 있어서였고 장남인 너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생이 살아오지 못한 것은 다 하늘이 뜻이니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떠난 다음 네 동생의 시신이 오기만을 밤낮으로 기다렸다.」

범려는 세 번이나 나라를 옮기고도 매 번마다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단지 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머무는 곳에서는 반드시 이름을 얻었다. 범려가 도(陶) 땅에서 죽으니 사람들은 그를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러 세상에 전했다.

1)蜚鳥盡 良弓藏 狡免死 走狗烹. 越王爲人長頸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2)문종이 구천에게 오나라를 멸하기 위해서 건의한 7가지 계책으로 첫째, 재물을 보내어 상대국의 임금과 신하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며(捐貨幣, 以悅其君臣)/둘째, 곡식의 가격을 올려 그들의 창고를 비우게 하고(.貴糴粟槁, 以虛其積聚)/ 셋째, 아름다운 미녀를 보내어 그들의 마음과 의지를 빼앗고(遣美女, 以惑其心志) /넷째, 솜씨 좋은 목공과 좋은 재목을 보내어 그들의 궁실을 크게 짓게 하여 그 나라의 재물들을 탕진하게 만들 것이며(遣之巧工良材, 使作宮室, 以罄其財/ 다섯째, 아첨을 잘하는 신하를 보내어 그들의 생각을 어지럽히고(遣之諛臣, 以亂其謀) /여섯째, 직간 하는 충신들을 구석으로 몰아 스스로 죽게 만들어 그 나라의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인재의 벽을 얇게 만들고(强其諫臣使自殺, 以弱其輔)/마지막 일곱 번째로는 그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군사를 동원하여 대외원정 하게 하여 그 나라의 재정을 피폐하게 만든다(.積財練兵, 以承其弊)

3)치이(鴟夷)/ 치이라는 말은 가죽으로 만든 자루를 말한다. 오왕 부차가 오자서를 죽여 그 시체를 치이(鴟夷)에 넣어 강물에 던졌다. 범려가 자기의 성을 치이로 지은 것은 자기와 비슷한 큰공을 지은 오자서가 그 군주에게 살해되어 가죽부대에 담겨 강물에 던져졌음에 반해 자기는 그 화를 피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4)천일(千鎰)/ 천일은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300에서 400키로에 해당한다.

5)삼전지부(三錢之府)/ 금은동으로 만든 화폐를 저장해 두던 창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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