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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2:04:307695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6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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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오자서(伍子胥)

열전5.

1073. 維建遇讒(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원급자서),

그 화가 오사(伍奢)의 몸에 미쳤다.

1075. 尙旣匡夫(상기광부),

오상(伍尙)은 그 부친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

1076. 伍員奔吳(오원분오),

그 동생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달아났다.

1077. 作<伍子胥列傳>第六(작<오자서열전>제육)

이에 <오자서열전>제육을 지었다.

오자서(伍子胥)는 초나라 출신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오원(伍員)의 부친은 오사(伍奢)이고 그 형은 오상(伍尙)이다. 그 선조에 오거(伍擧)1)라고 있었는데 초장왕(楚庄王)에게 직간(直諫)하여2) 공을 세워 대부의 벼슬을 받았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초나라에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초평왕(楚平王)3)은 태자에 그의 아들 건(建)을 세우고 오사를 태부(太傅)로 삼고 비무기(費无忌)4)를 소부(少傅)로 삼았다. 무기(无忌)가 태자 건(建)을 정성스럽게 모시지 않았다. 평왕이 비무기에게 태자의 부인을 진(秦)나라에서 청해오라고 시켰다. 비무기가 사자로 진나라에 가서 보니 진녀(秦女)는 절색이었다. 무기(无忌)가 먼저 달려와 평왕에게 고했다.

「진녀(秦女)는 천하절색이라 대왕께서 취하시고 태자를 위해서는 다른 여인을 구해 부인으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평왕이 결국은 진녀를 자기의 부인으로 삼고 매우 총애하였다. 진녀가 아들을 낳아 진(軫)이라고 이름 지었다. 태자를 위해서는 다른 여인을 구하여 그의 부인으로 삼게 했다.

진녀를 평왕에게 바친 무기는 평왕의 총애를 받아 태자 곁을 떠나 왕의 측근에서 모셨다. 그러나 그는 평왕이 언젠가는 죽고 태자 건(建)이 뒤를 이으면 자기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태자 건을 참소 하였다. 건(建)의 생모(生母) 채녀(蔡女)는 처음에는 평왕의 총애를 받았었다. 그러나 진녀를 얻어 진(軫)을 낳고부터는 채녀와 멀어지고 태자 건(建)과와도 점점 소원하게 되었다. 이윽고 태자 건을 성보(城父)로 보내어 변방을 지키도록 했다.

무기는 다시 밤낮으로 시간만 있으면 태자의 허물만을 들추면서 말했다.

「태자가 진녀의 일을 알게 되면 어찌 원망을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스스로 대비하셔야 합니다. 태자가 성보(城父)에 부임하고부터는 군사들을 조련하고 이웃나라의 제후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는 장차 란을 일으켜 이곳으로 진격하기 위해서입니다.」

평왕이 즉시 태부(太傅) 오사(伍奢)를 소환하여 태자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비무기가 태자를 모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오사가 평왕에게 말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유독 남을 헐뜯는 소인배의 참소하는 말만을 들으시고 골육인 자식까지 의심하여 멀리하려고 하십니까?」

비무기가 전해 듣고 평왕을 부추겼다.

「왕께서 오사를 지금 잡아 두지 않는다면 그들은 획책하고 있는 음모를 거행시킬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오사를 붙잡아 돌아가지 못하게 막으십시오.」

평왕이 비무기의 말대로 오사를 옥에 가두고 성보의 사마(司馬) 분양(奮陽)에게 태자를 잡아서 죽이라는 명을 전했다. 군사를 이끌고 출동한 분양은 그들의 부대가 태자가 있는 곳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몰래 사람을 보내 몸을 피해 도망치라고 고했다.

「태자께서는 급히 달아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태자는 분양의 통고를 받고 그 즉시 송나라로 달아났다.」

태자가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비무기가 평왕에게 말했다.

「지금 옥에 갇힌 오사에게는 아들 둘이 있습니다. 위인들이 모두 현능하여 죽이지 않는다면 장차 초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부친을 인질로 삼아 도성으로 불러와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두 사람을 살려둔다면 장차 초나라에 재난을 몰고 올 것입니다.」

평왕이 사람을 옥중의 오사에게 보내 명을 전하게 했다.

「그대가 두 아들을 이곳으로 불러 올 수 있다면 살겠지만, 불러 올 수 없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오사가 듣고 말했다.

「큰아들 상(常)은 마음이 어질어 내가 부르다면 틀림없이 오겠지만 작은아들 원(員)은 매우 고집이 세고 참을성이 많아〔강려인구(剛戾忍訽〕능히 큰일을 이룰 수 있는 인중호걸입니다. 원은 내가 부른다고 해도 도성에 들어오면 사로잡혀 같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평왕이 오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사람을 성보(城父)에 보내 두 사람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나의 부름에 응하면 너희들 부친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이며 응하지 않는다면 죽일 것이다.」

오상(伍常)이 초왕의 부름에 응하려고 하자 오원이 말했다.

「초왕이 우리 형제를 부르고 있는 이유는 부친을 살리려고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들 중 누구 한 사람이 초나라를 빠져나가 후에 초나라의 근심거리가 되는 경우를 두려워하여 부친을 인질로 삼아 우리 두 사람을 유인하여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초왕의 속임을 당해 부친이 계신 곳에 간다면 우리 세 부자는 모두 한꺼번에 죽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어찌 아버님께서 몸을 보전하는데 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간다면 모두 함께 죽게 되어 원수도 갚을 수 없게 될 것이니 차라리 도망가 외국의 힘을 빌려 부친의 원수를 갚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 세 부자가 모두 함께 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초왕의 부름에 응한다고 해서 아버님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님이 그 목숨을 위해 우리들을 부르고 있는데 가지 않았다가 후에 아버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게 된다면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너는 다른 나라로 달아나라! 너는 능히 아버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버님의 곁으로 가서 같이 죽겠다!」

오상이 즉시 밖으로 나가 스스로 결박을 받았다. 초왕이 보낸 사람이 오자서(伍子胥)마저 붙잡으려 했다. 오자서가 활에 화살을 재어 겨누자 사자는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오자서는 그 틈을 이용해 달아났다. 먼저 달아난 태자 건(建)이 송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그를 모셨다. 한편 감옥에 갇혀 있던 오사(伍奢)가 그 아들이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초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장차 그로 인하여 생긴 병란에 시달림을 받게 되겠구나!」

이윽고 오상이 초나라 서울에 당도하자 초왕은 두 사람을 함께 죽였다.

오자서가 송나라에 머물고 있던 중에 그 나라에서 화씨(華氏)들이 란5)을 일으켰다. 오자서와 태자건은 란을 피해 정나라로 달아났다. 정나라 사람들이 오자서 일행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태자건이 당진(唐晉)에 가서 군사를 빌려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당진의 경공(頃公)이 태자건에게 말했다.

「정나라는 태자를 매우 신임하고 있소. 태자가 안에서 내응하고 우리는 밖에서 공격하면 정나라를 필시 멸할 수 있소. 정나라를 멸한다면 태자를 그 곳에 봉하겠소.」

태자가 다시 정나라에 돌아와 거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사사로운 일로 그의 시종 중에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 죽이려고 하자, 그 음모를 알고 있었던 시종이 정나라 조정에 고변했다. 정정공(鄭定公)과 자산(子産)이 상의하여 계책을 세워 태자건을 불러 죽였다. 태자건에게는 승(勝)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오자서는 화가 자기의 몸에 미칠까 두려워하여 승(勝)을 데리고 오나라을 향해 도망쳤다. 두 사람이 소관(昭關)을 통과하려고 할 때 소관을 지키던 초나라 군사들이 오자서 일행을 잡기 위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오자서는 승과 헤어져 홀로 소관을 넘어 달아났으나 추격하던 초나라 군사들에게 거의 잡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초나라 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오자서는 강수(江水) 강변에 당도하자 강 가운데에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가 위기에 처한 오자서를 도와 강을 건네주었다. 오자서가 초군의 추격을 피하여 강수를 건널 수 있자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어부에 주면서 말했다.

「이 칼은 백금의 가치가 있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신 고마움의 표시로 드립니다.」

어부가 말했다.

「초나라 왕이 공포한 방문에는 오자서를 잡아다 바친 자에게는 곡식 오만석과 집규(執珪)6)의 작위를 준다 했습니다. 어찌 이까짓 백금밖에 나가지 않는 칼을 탐내겠소?」

어부는 오자서 주는 칼을 받지 않았다. 오자서는 어부와 헤어져 오나라로 미처 들어가기 전에 병이 들어 중도에 걸식을 하였다. 이윽고 오성(吳城)에 들어갔을 때는 오왕(吳王) 요(僚)가 오왕의 자리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공자 광(光)이 오나라의 병권을 담당하고 있었다. 오자서는 공자 광의 천거로 오왕을 접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초나라의 변읍(邊邑)인 종리(鍾離)7)와 오나라의 변읍(邊邑) 비량지(卑梁氏)여인들이 누에를 기르기 위해 뽕나무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기 시작하자 이윽고 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번갈아 가며 다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초평왕은 매우 노했다. 이윽고 두 나라는 거국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오나라가 공자광을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공자광이 초나라의 종리와 거소(居巢) 두 고을을 함락시키고 개선하여 돌아왔다. 오자서가 오왕 요에게 말했다.

「지금의 승세를 타고 군사를 계속 진격시키면 초나라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공자광을 다시 출정시키기 바랍니다.」

공자광이 듣고 오왕에게 말했다.

「오자서가 우리에게 초나라를 공격하라고 하는 이유는 초왕에게 죽임을 당한 그의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오자서는 공자광이 마음에 이심을 품고 오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하는 사실을 짐작했으나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전제(專諸)라는 사람을 천거한 다음 자기는 태자 건의 아들 승(勝)과 함께 물러나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리고 5년 후에 초평왕이 죽었다. 옛날 초평왕은 건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진녀(秦女)의 소생 진(軫)을 세웠었다. 이윽고 평왕이 죽자 진이 그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소왕(楚昭王)이다. 오왕 요(遼)가 초나라에 국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자기의 두 아들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초나라가 군사를 내어 오나라 군사들의 퇴로를 끊었음으로 두 공자가 이끄는 군사들은 귀환할 수 없게 되었다. 오나라의 모든 군대가 초나라를 공격하다가 돌아오지 못하여 국내가 비게 되자 공자광이 전제을 시켜 왕료(王遼)를 기습하여 살해했다. 공자광이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바로 합려이다. 합려가 오왕의 자리를 차지하여 그가 품고 있던 뜻을 이루게 되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오원을 불러 행인을 삼아 그와 함께 국사를 의논했다.

초나라가 간신 비무기의 참소를 받고 대신 극완(郤宛)과 백주리(伯州犂) 및 그 일족을 주살했다. 백주리의 손자 백비(伯嚭)가 도망쳐 오나라로 들어왔다. 오나라는 백비에게 대부의 직을 주었다. 왕료에 의해 초나라에 출정했다가 초군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해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두 공자와 그 군사들은 오왕 합려가 초왕의 자리에 오르자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초나라에 항복했다. 초나라는 두 공자를 서(舒) 땅에 봉했다. 합려가 오왕이 된지 3년이 되는 해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오자서와 백비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해서 서(舒) 땅을 함락시키고 전에 초나라에 항복했던 두 공자를 사로잡아 죽였다. 합려가 승세를 타고 초나라의 서울인 영도로 진격하려 했으나 장군 손무(孫武)가 반대하며 말했다.

「군사들이 싸움에 지쳐 아직 초나라의 영성을 공격할 시기가 아닙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기회를 기달려야 합니다.」

합려가 손무의 말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합려 4년 기원전 511년 오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육(六)과 잠(潛)을 점령했다.

합려 5년 기원전 510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월군을 패주시켰다.

합려 6년 기원전 509년 초소왕(楚昭王)이 공자 낭와(囊瓦)를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오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오나라는 오원(伍員)으로 하여금 막게 했다. 오원은 초군을 예장(豫章)에서 대파하고 거소(居巢)를 빼앗았다.

합려 9년 기원전 506년 합려가 오원과 손무에게 말했다.

「옛날 두 장군들께서는 군사들이 지쳐 있어 초나라의 서울을 공격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과연 어떻습니까?」

두 사람이 대답했다.

「초나라의 대장 낭와가 탐욕한 결과 채(蔡)와 당(唐) 두 나라로부터 원한을 샀습니다. 대왕께서 초나라를 꼭 얻고 싶으시다면, 먼저 채와 당 두 나라를 얻어야만 합니다.」

합려가 그 의견을 쫓아 대군을 징발하여 당과 채 두 나라 군사들과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다. 삼국의 군사들이 한수를 앞에 두고 진영을 세웠다. 합려의 동행 부개(夫槪)가 가병을 이끌고 종군을 청했으나 합려가 허락하지 않았다. 부개는 자기가 데려온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낭와가 이끌던 초군의 진지를 기습했다. 싸움에 진 낭와는 패전의 죄를 추궁당할까 두려워하여 정나라로 도망쳤다. 오군은 승세를 타고 한수를 도하해서 다섯 번의 싸움에서 모두 이기고 초나라의 서울 영성에 이르렀다. 그해 기묘(己卯) 일에 초소왕이 영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다음 날인 경진(庚辰) 일에 합려가 영성에 입성했다.

초소왕은 영성에서 달아나 운몽(雲夢)으로 들어갔다. 도적들이 소왕의 일행을 습격하자 그는 다시 운(鄖) 땅으로 몸을 피했다. 운공(鄖公)의 동생이 투회(鬪懷)가 초소왕을 보더니 말했다.

「초왕의 아버지 평왕이 아무 죄도 없는 나의 부친을 살해했다. 내가 어찌 그의 아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운공은 그의 동생이 초소왕을 살해할까 걱정하여 왕을 데리고 수(隨)나라로 들어갔다. 오나라 군사들이 그 뒤를 추격하여 수나라를 포위하고 말했다.

「한수(漢水) 주변에 있었던 수나라의 형제국이며 주나라 자손들의 제후국들은 모두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어찌 희씨들이 원수인 초왕을 보호하려고 하는가?」

수나라 사람들이 초왕을 죽이려고 하자 왕자기(王子綦)가 대신 나가 초왕을 대신하여 죽으려고 했다. 수나라 사람들이 초왕을 죽이고 오왕을 섬기는 일에 대해 점을 쳤으나 점괘가 불길하게 나왔다. 수나라 사람들이 오군의 청을 거절하고 초왕을 내주지 않았다.

옛날 신포서와 오원은 초나라에 같이 있을 때 친교가 있었다. 오원이 초나라에서 도망칠 때 도중에 우연히 신포서를 만나 말했다.

「나는 후에 다시 돌아와 반드시 초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말겠네!」

신포서가 오원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초나라를 보존시키겠네!」

이윽고 오군을 이끌고 영성에 입성한 오자서가 초소왕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도망친 다음이었다. 할 수 없이 초평왕의 묘에서 그 시신을 꺼내어 채찍으로 내리치기를 3백 대에 이르자 멈추었다. 그 소식을 들은 신포서가 영성에서 도망처 산중에 있다가 사람을 시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아들이 비록 그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고는 하나 그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는가? 나는 ‘사람이 많으면 일시적으로 하늘을 이길 수 있다고 하나 일단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물리칠 수가 있다’고 알고 있네! 지금 그대는 옛날 평왕의 신하로써 북면하여 받들었으면서 지금에 와서는 그 시신까지 욕보이니 어찌 이보다 더 천도에 어긋날 일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오자서가 신포서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나를 위하여 신포서에게 사죄하는 말을 전하라! ‘해는 저물고 갈길은 머니〔일모도원(日暮途遠)〕내가 어쩔 수 없이 일을 거꾸로 행하며 하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네!」

신포서는 산중에서 나와 섬진(陝秦)으로 가서 초나라의 위급을 고하며 구원군을 청했다. 섬진의 애공(哀公)이 신포서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신포서가 섬진의 궁정의 뜰에 엎드려 밤낮으로 통곡을 하여 칠일동안 그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진애공이 이를 가엾게 여기며 말했다.

「초나라가 비록 무도하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충신이 있으니 어찌 망하기야 하겠는가?」

진애공은 즉시 병거 5백승을 내주며 초나라를 구하고 오군을 물리치라고 명했다. 그해 5월에 섬진의 군사들이 직(稷) 땅에서 오군과 싸워 이겼다. 그때 오왕 합려는 초소왕을 사로잡기 위해 오랫동안 영성에 주둔하고 있던 틈을 타서 그 동생 부개가 몰래 도망쳐 오나라에 들어가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올랐다. 합려가 듣고 초나라를 버리고 오나라로 들어가 부개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부개가 합려와 싸워 패하자 초나라에 항복했다. 초소왕은 오나라에 내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즉시 영성으로 다시 들어갔다. 초왕은 부개를 당계(堂谿)에 봉했다. 부개는 그 성을 당계씨로 바꿨다. 초나라가 다시 오나라와 싸워 이겼다. 합려는 다시 오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2년 후인 기원전 504년에 합려는 다시 태자 부차(夫差)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부차는 초나라의 파(番) 땅을 취했다. 초나라를 오나라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올까봐 두려워하여 그 서울을 영(郢)에서 약(鄀)으로 옮겼다. 이때에 이르러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무의 계책에 힘입어 강력한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을 점령했고, 다시 북쪽의 제나라와 당진에 위세를 떨쳤으며, 남쪽의 월나라를 복종시켰다.

그리고 4년 즉 합려 15년 기원전 500년 공자가 노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인 합려 20년 기원전 496년 오나라가 월나라를 정벌했다. 오왕 구천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오군을 맞이하여 고소(姑蘇)에서 싸워 이겼다. 합려는 싸움 중에 손가락에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회군했다. 합려가 귀환했으나 싸움 중에 입은 손가락 부상이 도져 이내 죽게 되자 태자 부차를 불러 말했다.

「너는 결코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일을 결코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부차가 대답했다.

「제가 어찌 아버님의 원수를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날 저녁에 합려가 죽었다. 부차가 오왕의 자리에 오르자 백비를 태재(太宰)로 삼아 군사들의 활쏘기와 싸움 연습을 담당시켰다.

2년후 즉 기원전 494년 오왕 부차가 이끄는 오군이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추(夫湫)에게 월군을 대파했다. 월왕 구천은 남은 잔여 병력 5천 명을 이끌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농성했다. 월왕은 대부 문종(文種)을 시켜 많은 뇌물을 가져가 태재 백비에게 나라를 바치고 월왕 부부는 오왕의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화의를 청하도록 했다. 백비의 보고를 받은 오왕 부차가 월왕의 항복을 받아드리려고 했다. 오자서가 알고 간언을 올렸다.

「월왕이라는 위인은 능히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월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태재 백비의 말에 따라 월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후 5년 즉 기원전 489년 제나라의 경공(景公)이 죽고 대신들이 서로 권력을 다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 뒤를 이은 군주는 유약하다는 소식을 듣고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오자서가 간언하여 불가함을 말했다.

「구천은 지금 맛있는 음식은 한 가지 이상 먹지 않으며 백성들 중 초상이 난 집은 조문을 가고 병이 든 사람들에게는 문안을 다녀 백성들의 인심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월왕의 행위는 모두가 후에 소용이 있어서 입니다.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후에 필시 오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오나라에 있어서 월나라는 심복지환(心服之患)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급한 월나라를 제쳐놓고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시니 어찌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오왕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출정하여 제나라 군사를 애릉(艾陵)8)에서 크게 무찌르고, 오왕은 이후부터 더욱 오자서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4년 후, 즉 기원전485년 오왕이 다시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월왕 구천이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계책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나라를 돕는다 하고 다시 많은 뇌물을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백비는 그 전에도 이미 많은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월나라를 지극히 좋아하며 신임했다. 그는 매일 밤낮으로 오왕에게 월왕의 충성심을 이야기했다. 오왕은 백비의 말을 믿고 따랐다. 오자서가 오왕에게 말했다.

「무릇 월나라는 오나라의 심복지환인데 오늘 월왕의 허황된 말을 믿고 제나라를 넘보고 있습니다. 제나라를 공격하여 비록 그 땅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단지 자갈밭에 불과할 뿐입니다. <반경지고(盤庚之誥)>라는 옛날 글에 말하기를 ‘예의에 벗어나고 불공한 자들은 코를 베거나 죽여 살아서 자라지 못하도록 하여 이 나라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이로서 상나라가 600년 간 흥성할 수 있었습니다. 원컨대 제나라를 정벌하는 대신 월나라를 멸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

오왕 부차가 듣지 않고 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자서가 제나라로 출발할 때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여러 번 간했으나 왕은 내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장차 틀림없이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네가 오나라와 함께 죽는 일은 무익하다고 하겠다.」

오자서는 그의 아들을 제나라로 데려가 그 대부 포목(鮑牧)에게 맡겼다. 오자서는 아들은 제나라에 남겨 두고 혼자 돌아와 오왕에게 사신으로 간 일의 결과에 대해 고했다.

자서가 아들을 제나라에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비가 오왕에게 참소했다.

「자서라는 위인은 고집이 세고 포악합니다.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하며 시기심이 많습니다. 그의 말을 물리친 대왕을 원망하여 큰 화를 불러 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예전에 대왕께서 제나라를 정벌한다고 할 때 자서는 불가하다고 하며 극력 반대했으나 대왕께서는 결국은 큰공을 이루셨습니다. 자서는 그의 계책이 들어맞지 않은 것을 가슴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대왕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대왕께서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나 자서가 또다시 제 멋대로 고집을 부려 극력 반대하고 있는 것은 대왕의 일을 방해하고 비난하여 오직 오나라의 군사들이 싸움에 져 자기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대왕께서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오나라의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서는 자기의 간언이 용납되지 않는다고 물러가 병을 핑계로 종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왕께서는 이에 대한 방비를 하셔야만 합니다. 오자서의 행위를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일어날 화를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오자서의 행적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전번에 그가 제나라에 사자로 갈 때 그의 아들을 대동했습니다. 그는 그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 집에 맡겨 놓고 자기 혼자만 돌아왔습니다. 무릇 신하된 자가 나라 안에서 뜻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제후에게 의지하는 행위는 심히 잘못된 일입니다. 옛날 선왕 때부터 모신으로 오나라를 받들던 자가 지금은 자기의 의견이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매일 앙앙불락하며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오왕 부차가 말했다.

「태재의 말이 아니더라도, 과인은 벌써 그를 의심하고 있었소.」

오왕 부차가 즉시 사람을 오자서에게 촉루검(屬鏤劍) 보내면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그대는 이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 바란다.」

오자서가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아아, 슬프도다! 간신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거늘 왕은 나를 오히려 죽이는구나! 나는 그의 아버지를 패자로 만들었으며, 그가 세자가 되기 전에, 여러 공자들이 다투던 것을 내가 죽을 각오로 선왕에게 간했다. 그렇게 않았다면 어찌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그가 왕이 된 후에도 오나라를 나누어 나에게 주려고 한 것을 내가 감히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런데 지금은 간신의 말을 듣고 선왕을 모시던 공신을 죽이는 구나!」

오자서는 이어서 자기의 문객을 향해 말했다.

「그대는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오왕을 위한 관을 삼게 하시오. 그리고 나의 두 눈을 뽑아 오성의 동문 위에 걸어 놓으시오. 나는 죽어서라도 월나라가 쳐들어와 오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보리라!」

오자서는 즉시 촉루검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왕이 자사가 한 말을 듣고 노하여 자서의 시신을 빼앗아 가죽부대에 넣어 강물에 띄어 보냈다. 오나라 사람들이 이를 가엾게 여겨 그 강가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사람들은 그 사당이 있는 산의 이름을 서산(胥山)이라 불렀다.

오자서를 죽인 오왕이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제나라의 포씨들은 그 군주인 안유자(晏儒子)를 시해하고 양생(陽生)을 새로운 군주로 세웠다. 이가 제도공(齊悼公)이다. 오왕이 찬탈의 죄를 묻는다 하고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회군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오왕이 노(魯)와 위(衛)나라의 군주를 탁고(橐皐)의 땅으로 불러 회맹했다. 그 다음 해에 황지(黃池)의 땅으로 제후들을 대거 모이게 하여 주왕의 령을 전했다. 월왕 구천이 비어 있는 오성(吳城)을 습격하여 오나라의 군사들을 크게 파하고 태자를 죽였다. 오왕이 듣고 즉시 회군하여 많은 재물을 바쳐 월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그 후 9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부차를 죽였다. 그리고 그 군주에게 불충하고, 외부의 적인 자기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아 내통했다는 죄를 물어 백비를 주살했다.

오자서가 옛날 초나라로 도망쳐 올 때 같이 데리고 온 태자 건(建)의 아들 승(勝)도 오나라에 살고 있었다. 오왕 부차 재위시 초혜왕(楚惠王)이 승(勝)을 다시 초나라로 귀국시키려고 할 때 섭공(葉公)이 간했다.

「승은 용사들을 좋아하며 자객들을 몰래 모으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사로로운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

혜왕이 듣지 않고 승(勝)을 오나라에서 불러와 초나라의 변경인 언(鄢) 땅에 살게 하고 백공(白公)이라 불렀다. 백공이 초나라에 돌아오고 나서 3년 후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했다.

백공 승(勝)이 초나라에 돌아오자 옛날 정나라가 자기의 부친 태자 건을 살해한 것에 원한을 품고 아무도 몰래 자객을 양성하여 정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초나라에 돌아온 지 5년이 지나자 백공 승은 당시 영윤인 자서(子西)에게 정나라를 정벌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고 청했다. 자서가 허락했다. 백공 승이 군사를 미처 일으키기도 전에 당진이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정나라는 초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초나라는 자서로 하여금 정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자서는 정나라를 구한 후 동맹을 맺고 돌아왔다. 백공 승이 노하여 말했다.

「나의 원수는 정나라가 아니라 자서다.」

승이 스스로 칼을 갈고 있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어찌하여 몸소 칼을 갈고 계시는 것입니까?」

승이 대답했다.

「자서를 죽이기 위해서이다.」

자서가 전해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승은 마치 바위 위의 계란에 불과한 자인데 어찌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4년 뒤에, 백공 승과 그의 부하 석걸(石乞)이 영윤 자서와 사마 기(綦)를 초나라의 조정의 뜰에서 기습하여 죽였다. 석걸이 승에게 말했다.

「왕을 죽이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석걸이 왕을 죽이기 위해 고부(高府)로 달려갔다. 고부에는 승이 자서(子西)와 기(綦)를 죽인 후에 왕을 가두어 두고 있었다. 석걸의 종자 굴고(屈固)가 미리 알고 달려가 초소왕을 등에 업고 도망쳐 소부인의 궁궐로 들어가 숨었다. 백공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섭공은 초나라의 국인들을 규합하여 백공을 공격했다. 백공은 싸움에서 지고 산중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석걸은 섭공에게 사로잡혔다. 섭공은 석걸에게 백공의 시신이 어디에 묻었는지를 묻고 대답하지 않으면 가마솥의 끓는 물에 삶아 죽이겠다고 했다. 석걸이 듣고 말했다.

「일이 성공하게 되면 공경이 되고, 실패하게 되면 삶겨서 죽게 되는 일은 당연하다.」

결국은 석걸은 백공 승이 묻힌 곳을 말하지 않았다. 섭공은 석걸을 삶아 죽이고 혜황을 찾아내어 초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태사공이 말한다.

「사람에게 악랄한 짓을 하여 그로 인하여 맺힌 원한은 참으로 뿌리가 깊도다! 왕이라 한들 어찌 그 신하된 자에게 원한을 사면 안 되거늘 하물며 동렬의 사람들에게는 말해야 무었하겠는가? 옛날 오자서가 그 부친 오사(伍奢)의 부름에 응하여 같이 죽었더라면 그것은 한낱 땅강아지나 개미에 불과했을 것이다. 소의(小義)를 버리고 커다란 치욕을 갚아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졌다. 슬프도다! 오자서가 장강을 건널 때나 걸식을 하며 길을 갈 때나 어찌 잠시라도 초나라의 서울 영도를 잊었겠는가? 그는 만난을 참고 견뎌 결국은 공명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은 열혈 장부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그와 같은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겠는가?

백공 승이 만약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오르지만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과 계책도 역시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오자서 끝>

주석

1)원전은 ‘其先曰伍擧’이나 <좌전(左傳) 양공(襄公) 26년>조에는 初楚伍參與蔡大師子朝友 其子伍擧與聲子相善也伍擧娶於王子牟 王子牟爲申公而亡 楚人曰 伍擧實送之 伍擧奔鄭 將遂奔晉라는 기사에 의하면 오거는 오삼의 아들이라고 했다.

2) 원전에는 「, 以直諫事楚庄王, 有顯...」으로 되어 있는데 초장왕(楚庄王)에게 직간한 사람은 오거의 부 오삼(伍參)이며 오거는 강왕(康王)과 영왕(靈王)을 모신 사람이다. 국어(國語)의 초어(楚語)에 영왕이 장화대(章華臺)를 완성한 후에 아름답지 않냐고 묻자 오가가 다음과 같이 간한 내용이 있다. 「군주는 신복(信服)과 은총으로서 아름다움으로 삼으며 백성들을 안락하게 다스림으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했고, 덕음을 듣는 것을 총(聰)이라고 하고 멀리까지 왕화를 미치게 하는 것을 명(明)이라 했습니다. 토목공사를 일으켜 지은 높은 누대를 꾸미는 것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으며, 금석포죽(金石匏竹)의 세상의 온갖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것을 락으로 삼지 않습니다.또한 사치스럽고 음탕한 여인들을 대거 모아 그것을 즐기는 것을 명(明)이라 하지 않고 단지 맑은 것과 탁한 것을 살피는 것을 총이라 하는 것입니다. 」

3)초평왕(楚平王)/ 초평왕 앞대의 내력은 간략해서 다음과 같다.

초공왕(楚共王)은 오패(五覇) 중의 한 사람인 초장왕(楚庄王)의 아들이다. 공왕(共王)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장남은 웅초(熊招) 강왕(康王)이고 차남은 웅건(熊虔) 공자위(公子圍), 삼남은 공자간(公子干), 사남은 공자석(公子晳), 막내는 웅거(熊居) 공자기질(公子棄疾)이다. 강왕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웅원(熊員)이 뒤를 잇자 공자위가 웅원을 죽이고 스스로 초나라 왕위에 올랐다. 이가 영왕(靈王)이다. 영왕이 군사를 빈번히 동원하여 전쟁을 벌리고 토목공사를 일으켜 초나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영왕이 진(陳)과 채(蔡) 두 나라를 멸하여 초나라의 군현(郡縣)으로 삼고 채나라에는 자기의 막내 동생인 기질(棄疾)을 봉하고 채공(蔡公)이라 불렀다. 영왕이 동쪽의 서(徐)나라에 원정 나간 틈을 타 진(陳)과 채(蔡) 두 나라의 백성들과 군사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영왕은 영도로 회군하던 도중에 이끌던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치는 바람에 영도를 탈환하지 못하고 죽었다. 기질(棄疾)이 초평왕이다.

4) 비무기(費无忌)/ 춘추좌전(春秋左傳)에는 비무기(費無極)으로 되어있다. 인명사전 참조

5)화씨(華氏)들의 란(亂)/ 기원전 532년 송원공(宋元公) 10년에 일어난 송정변으로 원공이 당시 송나라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화씨들을 몰아내려고 하자 화해(華亥)와 화녕(華寧) 등이 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초나라로 망명했다.

6)집규(執珪)/ 춘추시대 때 초나라 작위(爵位) 등급의 하나. 지위는 봉국(封國)의 군주에 해당한 고위직이었다.

7)종리(鍾離)/지금의 안휘성 방부시(蚌埠市) 봉양현(鳳陽縣) 경내로서 회수(淮水)의 남안(南岸)에 있던 고을. 춘추 때 초나라 소속의 고을이다.

8) 애릉/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경내 남쪽에 있는 노산(魯山) 서쪽 산록으로 제나라의 남쪽 관문을 지키는 요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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